설교 · 주일

시이-고견 / 강정규 목사

2021-07-04 · 야고보서 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다리 놓는 사람들, 브릿지 임팩트. 우리가 알다시피 유명한 기독교 단체들의 이름입니다. ‘다리’라는 은유는 연결하는 것을 의미하죠. 저는 목회자로서 제가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사명을 2가지로 정의합니다. 가르치는 것과 사랑하는 것. 가르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사랑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사람들을 만나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이 제게 주신 사명을 가장 아름답게 완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설교의 시간은 저에게 있어서

가르치는 시간이자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사랑으로서 가르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특별히 성경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묵상하는 책이 바뀌고 첫 설교는 그 책에 대해서 소개하는 시간을 갖곤 합니다. 어쩌면 소개팅 같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5장밖에 안되어 주일 설교로 두 번이면 끝나기 때문에 오늘 소개에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수요일에 야고보서가 어떤 책인지 한 시간 동안 가르쳤으니 그것으로 야고보서에

대한 소개를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잠시 수요일의 내용 중 7가지를 퀴즈 형식으로 점검해보며 다시금 기억해보려고 합니다. 1. 야고보서의 중심 신학과 닮은 성경 2권이 있습니다. - 산상수훈(마태복음), 잠언 2.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는 누구인가? - 예수님의 친동생 3. 그는 성경 안에서 어떤 사역을 했는가? -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4. 야고보의 별명은 무엇인가? - 낙타 무릎 5. 야고보서를 받는 수신자의 상황은 무엇인가? - 박해로

흩어져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6.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어떠했는가? - 난민 생활, 대부분 소작농이나 일꾼. 7. 그들이 처한 상황은 어떠했는가? -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사회적 삶, 신앙에 대한 시험을 마주하는 상황. 아마도 이 퀴즈를 풀면서 야고보서가 대략적으로 누가 어떤 상황 가운데 놓인 사람들에게 쓴 편지인지는 감이 오실 것입니다. 제가 야고보서를 여러분과 나누며 기대하는 것은 마치 잠언이 주었던 것과 같은 현실성 있는 메시지, 그리고 너무나

우리의 척박한 상황과 닮아 있던 그 시대의 성도들에게,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 권면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도 우리 시대 안에 신앙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노래방을 잘 갔습니다. 노래하는 것도 좋아하고 친한 친구 집이 노래방이라서 그곳에서 잘 놀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이적과 김동률이라는 가수가 뭉쳐서 <카니발>이라는 프로젝트 팀을 만들고 곡을 발표했는데 ‘그땐 그랬지’라는 곡이었습니다. 제 노래방 애창곡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파트는 이적 파트였습니다. 앞부분 가사만 소개하면... 참 어렸었지 뭘 몰랐었지 설레는 젊은 하나로 그땐 그랬지 참 느렸었지 늘 지루했지 시간아 흘러라 흘러 그땐 그랬지 시린 겨울 맘 졸이던 합격자 발표 날에 부둥켜안고서 이제는 고생 끝 행복이다 내 세상이 왔다 그땐 그랬지 참 세상이란 만만치 않더군 사는 건 하루하루가 전쟁이더군 이 노래를 1997년 중학교 3학년 때 뭘 알고 불렀을까요? 아마도 그냥 멜로디가 좋아서 불렀던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 이 노래의 가사를 다시 보면, 이 안에 20대, 30대의 지난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릅니다. 아마도 저보다 더 연배가 있는 분들은 “야, 무슨 고작 마흔이면... 참 어리고 아직 뭘 모를 때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바라보며 후렴구를 부를지도 모릅니다. ‘참 세상이란 만만치 않더군, 사는 건 하루하루가 전쟁이더군.’ 카니발의 1997년 곡이 그 시대를 살아가던 기성세대에게 공감이 되었고, 다시금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공감이 되고, 205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삶은 전쟁 같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만만치 않음을 그 시대의 누군가는 고백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인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됩니다. 참 삶이 알 수 없는 것은, 스데반을 죽이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인 사울이라는 청년이 후에는 변화되어

가장 예수를 열심히 전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유대교는 주류 종교요, 유대교에서 이탈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완전한 박해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순교자가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그럼 신앙을 버려.” 맞습니다. 가장 쉬운 대안입니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신앙을 포기하고 조금은 더 편안해 보이는 삶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 그 나라를 알아버린 사람들.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러한 자들을 일컬어 이렇게 표현합니다. (약 1:18)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참된 신앙인의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세상 어둠 속에 있던 신자를 ‘말씀으로 낳은 것’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과거형으로 쓰고 있어요. 왜냐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성도들이니까요.

이미 우리가 경험한 그 시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 새로운 탄생에 대해서 말하지요. 그 또한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감격하며 고백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8a)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All this is from God)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는 ‘new creation’입니다. 이것은 새롭게 창조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바울이 ‘그리스도 안’(in Christ)이라는 표현을 쓰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말씀으로 낳은 존재들임을, 새로운 창조를 경험한 존재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정말 솔직하게, “나는 교회에 다니는데, 나는 새로운 존재가 되지 않았어요”라고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계속 그냥 흘러가지 마시고, 복음에 대해서부터 선명하게 다시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속해있다는 것으로 여러분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복음 안에서 새로워지고 새로운 정체성이 고백되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 공동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아직 고백하기 어려운 분들이 있다면, 꼭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다시 태어남’(거듭남 : Born again)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러한 고백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남이라는 것은 첫 번째 탄생이 있다는 것이죠. 즉, 우리가 육적인 탄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1983년산입니다. 그것이 우리 육체의 시작이라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영적 시작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것이 두 번째 탄생입니다. 성도가 되는 것,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 그러면서 우리는 이중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이 땅에 속한 한 사람이자, 하나님 나라에서 새창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이며 백성이 된 나.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컬어 자신의 소유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의 고백이죠.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소유는 그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이 표현은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보다도 더 강력한 표현이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선택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속한 자, 소유라는 것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인권이 너무 중요해진 이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의 소유라는 것, 종이라는 개념이 불편할

수 있어요. “나의 삶의 주인은 나지. 왜 하나님이야.” 이것은 금요일에 이야기했던 ‘대속’의 개념부터 설명을 해야 될 수도 있는데요. 성경에 좋은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의 율법에 나오는 내용이죠. 귀 뚫린 종의 이야기. 종인데, 주인의 탄압에 굴복해서 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속하여 살아가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좋은... 그의 보호와 그의 것을 공급받아 함께 살아가는 것이 너무 행복한 종이 있습니다. 7년이 되면 하나님은 안식년으로

종에게 자유를 주도록 했거든요. 그런데 이 종은 자유보다도 주인과 함께하는 삶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재판장 앞에 가서, 자발적으로 그것을 선언하고, 그 징표로 귀를 뚫습니다. 그러면 그는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됩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종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에게 자유가 없나요? 언제든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이 너무 좋은 것이죠. 그래서 그 자유로운 삶보다 내 평생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 저는 이것이 신앙의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할 때, 하나님도 우리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이것을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맺은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주님만을 예배하겠습니다.” 이 약속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우리에게 약속해줍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하겠다. 하나님의 나라를 네게 주겠다.” 우리가 설교 초반에 인생의 굴곡을 이야기했어요. 인생만으로도 굴곡이 있는데... 하나님 나라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이중 정체성만큼 복잡한 인생으로서 성도로서 마주하는 굴곡들이 더 있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성경을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마주하는 시험은 크게 2가지입니다. 세상이 교회와 신자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하고(베드로전서),

교회나 신자가 세상에 물들어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고린도전서). 야고보서는 이 두 요소를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세상의 거센 위협이 있고, 내적으로는 세상을 추구하고 싶은 갈등과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먼저 빨리 드리면, ‘시험은 이기고, 고난은 견디며’ 입니다. 시험은 이겨내는 것이고, 고난은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설교의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죠?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가 이기길 바라시며,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들을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고난도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언약의 내용은 동일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믿고 따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지켜주겠다. 서약합니다.

믿음의 동행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내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의 시험은 더 현실적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곳으로 정탐꾼을 보냅니다. 12명. 10명이 보고 온 것은 무엇입니까?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강력함. 세상이 주는 실제적 위협. 우리는 이길 수 없다는 생각.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와 같다.” 여호수아와 갈렙. 2명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바로 이 싸움이 신약시대를 넘어, 우리 시대까지도 있는 싸움입니다. 밖에서 위협하고 안에서 갈등합니다. 금요일에 마가복음을 보았죠. 로마시대에 황제숭배가 대세였습니다. “황제에게 복종하면 그가 지배하는 강력한 힘 안에 평안할거야.” 그것이 무엇입니까?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 로마가 팍스 로마나를 만들기 위해 시행했던 형벌이 십자가형이죠. 십자가형의 가장 잔인함은 ‘수치심’입니다. 발가벗겨서 높은 나무에 매달아서

며칠을 서서히 죽입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심을 주는 것이죠. “로마에 대항하면 저렇게 죽겠구나.” “세상의 대세를 따르지 않으면 위험한 것이 아닐까? 남들 다 이렇게 사는데 나만 다르게 살면 나만 바보 되는 거 아닌가?” 이 시대가 주는 위협이죠. 그 위협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 정체성을 지킬 것인지를 갈등합니다. 세상은 가는 길이 뻔합니다. 그 힘의 논리 앞에서 굴복하고, 세상과 한편이 되어 평안하고자 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로마의 황제에게 바쳐진

도시. 수많은 정복지들이 가이사랴에게 헌정됩니다. 그를 신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를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큐리오스. 그를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유앙겔리온. 그런데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황제에게 바쳐진 도시. 황제를 예배하는 그곳에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믿느냐?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그 고백을 기뻐하시며 바로 그러한 자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고백이기 때문이죠. 야고보서의 대상이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살고자 힘쓰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박해를 받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피난을 떠납니다. 신앙을 붙들고 새로운 곳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며 살아가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흩어진 곳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매일 같이 전쟁 같은 싸움. 치열한 삶의 싸움, 치열한

신앙의 싸움. 그들을 사랑하던 목회자. 야고보는 무엇이라 권면합니까? (약 1: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약 1:3)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약 1:4)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시험이 있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시험이 없는 것은 세상과 거슬러 나아가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험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없는 것이 오히려 내 삶이 정말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르게 걷고 있는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시험이 찾아오나 ‘이기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3절의 ‘믿음의 시련’은 고난이죠. 이 시련 앞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것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버티고 견디는 것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여러분, 축구 경기를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리 팀이 점수를 이기고 있어요. 그럼 뭐하면

되는지 아십니까? 공을 안 뺏기고 버티면 됩니다. 이미 이기고 있는 팀은 다른 것 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고 버티면 됩니다. 성경은 우리보고 세상에 대항하여 싸워서 이기라고 말하지 않아요. 이미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기었습니다. 우리는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인내하고 견디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에 대해서 싸우고 무엇에 대해서 이겨야 하는 것인 줄 아십니까? 패배한 세상이 주는 위협 앞에 겁먹고 그리로 흡수되어 가고 싶은 그 마음과 싸우고,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 유혹과 싸우고, 바로 나의 옛 사람에 대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는 싸울 필요가 없어요. 이미 내게 주어진 구원을,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면 이기는 것입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자기를 지켜’ 세상을 따라가지 않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이미 하나님 나라의 구원으로 초청받은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안에서 그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작년 8월 말. 그 시기를 기억하십니까? 저희가 작년 6월 28일에 여기서 첫 예배를 드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사귐의교회 세 번째 스텝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중고등부 수련회, 청년부 수련회까지 마무리 되던 8월 중순 코로나 사태가 다시금

심각해졌습니다. 그 8월 28일에 제가 블로그에 썼던 글이 있습니다. 첫 시작이 이렇습니다. "올 것이 왔다." 바로 저희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할 사업장이 코로나 2.5단계 행정 명령에 포함되어 집합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입니다. 영업중단이죠. 생계가 막막해진 순간이었습니다. 또 교회는 대면 예배가 중단되었습니다. 하필 그때 누가 저희 교회를 무고하게 신고해서 시청에서 직원이 거의 매주 점검을 나오던 때였습니다. 그 암울한 마음을 글로 풀어내면서 중간 부분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영업자가 되어보니..." 왜 성경이 돈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를 하는지 참으로 많이 느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인의 삶과 달리, 자영업자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므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같이 '이윤'과 '운영'을 고민해야 한다. 머리에 온통 '돈'에 대한 생각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주는 즐거움과, 이것이 가져다주는 상실감을 매일 같이 느끼게 됨을 보았다. 내가 생각한 기준선을 웃돌게 돈을 버는 시기가 어느 정도 지속되면 돈에 대해서

무감각해 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또 그 기준선 밑으로 돈을 벌게 되면, 치킨 한 마리 사먹는 것도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 되기도 했다. 교회를 가기 위한 평일의 모든 삶은 돈을 포기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교회를 가지 않는 선택은 곧 더 많은 돈을 버는 일이며, 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삶에 그 부분에 대한 포기가 있어야 하는 '돈'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는 삶이었다. 물론 나는 목사이고, 목회를 위해서 일을 했기에 내게 그 우선순위는

명확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가 어떤 마음으로 주중 예배에 나오고 헌금을 하는지를 크게 경험하는 순간들이었다. 성도의 헌금과 예배 참여가 달리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일하는 목회자의 삶을 살면서, 가끔씩 주님이 내게 주시는 위로처럼 느껴지는 따스함들이 있다. 예전에 함께 신학을 했지만 지금은 평신도로서 일하며 살아가는 친구가 남긴 글이 그랬다. "일반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목사님이 있어서, 참 좋다." 이러한 친구의 메시지를 통해서 "언제까지 저는 일하면서

목회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하곤 했던 나에게, 주님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낀다. 목사의 삶도 힘든 일이다. 내 아버지도 목사이셨고 나도 목사인데 왜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래도 목사의 삶은 참 위로가 많은 삶이라고 느끼고 있다. 함께 하는 성도들이 그래도 '목사님'이라고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대해주는가. 그러나 목사의 삶보다도 내가 성도의 삶을 더욱 소중하게 바라보는 것은... 성도의 삶은 어쩌면 밖에서도 계속 낮아진 마음으로 살다가... 교회에 와서도

또 돕고 섬기며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는 그런 삶. 기꺼이 그 삶을 살아가는 성도란 깊은 영성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임을 묵상하며 고백하게 된다. 개척교회의 목사와 자영업자의 삶을 함께 살아가는 나는... "교회가 어렵다"라는 이야기를 가능하면 하지 않는다. 성도들의 삶은 그보다 수배는 더 힘들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개척교회에서 교회가 어렵다고 하면, 그것은 얼마 되지 않는 성도들에게 더욱 부담을 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 같은 시기에, 교회가 아무리

어려워도 각 성도들의 삶의 어려움에 비하겠는가. 교회는 사명으로 세워졌고 흩으시면 흩어짐을 당하면 되지만, 성도에게 그것은 삶이 아닌가. 코로나 시기에서 우리보다 더 작은교회들은 분명히 그 힘듦이 훨씬 클 것이다. 작을수록 더 힘들 것이다. 그런 교회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교회는 힘들다고 하기보다,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교회가 되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다. <중략> 교회들이 불평과 불만의 아우성을 멈추고, 어떻게 이러한 더욱 어려운 현실을 마주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존재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고,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에 못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며, 교회 밖에 늘 존재하고 있다. 교회가 이 시대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성도들이 지금까지 배워왔던 신앙인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묻고 있는 느낌이다. (신 15:11) 당신들은 반드시 손을 뻗어, 당신들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을 도와주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이 글을 쓰던 작년에는 저는 사례비를 받지 않고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며 목회하던 때였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힘든데, 영업중단까지 되니 막막했죠. 교회도 새롭게 이전해서 지출할 부분이 크게 늘어났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모이지를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 이 글을 쓰며, 우리는 비대면 예배를 하는 동안 더 작은교회를 위한 헌금을 작정했습니다. 담임목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교회 운영에 대한 책임을 맡는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 비대면 예배의 연속. 헌금이 줄어들 것처럼 보였습니다. 담임목사로서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제 대책은 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배수의 진을 친 것입니다. 헌금이 실제로 비대면 예배로 조금은 줄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함께 힘을 합해 우리도 생존하고, 다른 누군가의 생존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저 글로부터

10개월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잘 살아 있습니다. 중간에 아예 모이지 못하는 일도 있었지만 흩어져 예배하면서도 함께 이겨냈습니다. 코로나가 정말 많은 교회를 절망으로 몰아넣을 것 같은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위기가 강력하면 주님의 보호도 강력합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 함께 개척한 교회들은 다 살아 있습니다. 위기 앞에 다 넘어질 것 같이 보이지만,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지키셨습니다. 전반기 결산보고에서도 나눴지만 저희가 올해 매달 70만원씩을

선교구제비로 사용했습니다. 크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희교회의 고정 지출을 빼고 생각하면, 사역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의 30% 정도가 됩니다. 선교비로 사용하지 않고 조금 더 보태면 파트사역자를 모실 수 있는 금액이지요. 그런데 저는 우리가 조금 더 힘을 모아 사역의 역할을 감당하고, 저희가 할 수 있는 만큼 외부로 선교할 수 있음이 참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손을 움켜쥐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내 힘으로 살겠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야고보서를 묵상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난이 없는 시대가 있었을까? 고난을 피하여 살아가던 신앙인이 있었을까? 어쩌면 고난을 겪어가며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우리가 진짜로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의 진짜 신앙적 태도가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코로나의 위협이 끝나가나 싶었는데, 최근 모습을 통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있다고 해도, 혹은 코로나가 온전히 지나갔다고 해도 우리 삶에 위기가 없겠습니까? 위기의 모양과 성격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하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 내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면 고난은 지나가고, 내 신앙은 성장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며 야고보서 안의 2구절을 마지막으로 소개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이기시라고. (약 5:7)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약 5:8)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우리는 끝을 알잖아요. 끝을 알기에 어쩌면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은 언젠가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선한 싸움에 대해서 ‘귀하다’ 말씀하실 것을 믿으며...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8a)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마귀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는 복종하고 사탄은 대적해야 합니다. 시험은 이겨내는 것입니다. 고난은 견뎌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그 이기고 견딜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 :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그분 뜻대로 일하시게 해드리십시오. 마귀에게는 큰소리로 ‘안돼!’ 하고 외치고, 마귀가 날뛰지 않는지 주시하십시오. 하나님께는

조용히 ‘예!’하고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즉시 여러분 곁에 계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외부의 고난과, 내 마음의 요동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싸움 하지 않겠다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 자유도 내게 있지만... 내 발걸음과 마음이 향하는 곳은 주께로 더 가까이. 그 때 주님 또한 여러분에게 더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우리 함께 그곳으로 나아갑시다.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부터 옥정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