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오직 말씀

2026-04-12 · 야고보서 1장 19~25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 교회의 기묘함 지난 성찬예배를 통해서 우리 교회 교회론의 기초이자 신학의 방향이 함축되어 있는 ‘사명 선언문’의 내용을 다뤘습니다. 이것을 다루는 목적은 우리 공동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 그 길로 여러분을 초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사명 선언문의 두 번째 부분을 성경 본문에 근거해서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된다.” 저는 교회가 참 특이한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솔직히 표현하자면

참 ‘기묘한’ 곳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단지 교회에서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서로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심지어 ‘가족’이 되겠다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밖에서 만났으면 절대 친해지지 않았을 사람들, 대화의 접점조차 없었을 사람들도 지금 한 공간에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해 보겠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정말 원해서입니까?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의 본성은 이런 것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을 불편해합니다. 누군가를 오래 참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내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나와 전혀 결이 다른 사람을 품고 사랑하는 일은 우리 본성에 그리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길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고 원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편함, 우리의 본성을

추구하기보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길을 따르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가장 옳은 길임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주님이 가르치신 모습을 추구하며 조금씩 그렇게 나아간다면, 그런 교회는 이 세상에서 매우 독특한 모습을 가진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 구별됨이 교회의 본래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기억하시겠지만 ‘거룩하라’는 것은 ‘주님을 위해 구별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나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힘쓰는 공동체는 세상이 보기에 매우 독특했습니다.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행 11:25)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행 11:26)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스스로 붙인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궁금해한 것입니다. “저들은 어떤 사람들이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래.” 좋은 의미일수도 있고, “예수쟁이들”과 같은 조롱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안디옥에서 참된 교회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교회를 통해 세상에 만연한 기준, 우리에게도 익숙한 삶의 기준들을 흔드시고, 변화시키시며, 진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나가십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망가지고 깨어진 사람들을 부르셔서 시작하셨기에, 교회는 기본적으로 ‘리스크가 매우 높은’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잘하면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지만, 잘못하면 가장 상처 주기 쉬운 공동체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생각이 비슷하고, 취향이 비슷하고, 형편이 비슷하고, 무언가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야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억지로라도 하나가 되려고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쉽지 않습니다. 이익이 맞아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취향이 같아서 모이는 것도 아니고, 조건이 비슷해서 함께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빼면 공통점은 적고, 자기 포기는 훨씬 더 많이 요구됩니다. 내가 조금 더 참아야 하고, 내가 조금 더 이해해야 하고, 내가 조금 더 용납해야 하고, 내가 조금 더 사랑해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진짜 교회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마음도 없겠죠. 그러나 주님 마음을 알게 되고, 날 향한 주님의 사랑으로 채우심을 경험하다보면, 주님 때문에, 주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많은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에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람의 기준에 맞추려고 했습니다. 내가 불편하지 않은 교회, 내가 상처받지 않을 교회, 내가 손해 보지 않을 교회, 내가

굳이 변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 그런 교회를 원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결국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가는 교회’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가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기준대로 세워져가는 교회가 실제적으로, 이 깨어진 세상 속에 있는 자기중심성이 가득한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가능할까요? 무엇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낼 수 있을까요? 무엇이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고, 내 기준으로 살던 사람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가게 만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이것을 위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은혜가 ‘말씀’입니다. 오직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이 기준이기에, 말씀이 가르치는 것이라면 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이 기준이기에, 말씀에 맞지 않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나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약속입니다. 교회가 실패할 수 있는 수많은 리스크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가장 중요한 울타리이자 푯대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유일한 가능성입니다.

사람의 성품으로는 안 됩니다. 분위기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말씀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가 됩니다. 마치 산 정상에 올라오는 길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정상을 향해 가는 마음이 같다면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다양성도 있고, 생각도 다를 수 있지만, 말씀을 중심으로 할 때, 함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교회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이 기준이 명확해야 하고, 또한 이것이 실제 작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선 개개인의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결국 그렇게 살아가고자 힘쓰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진짜라는 것은 성도가 진짜 성도라는 것이고, 진짜 성도들이 모여야 진짜 교회가 됩니다. 2. 교회의 이중적 특징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의 교회가 시작되는 곳은 깨어진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깨어진 세상에 세워지는 가장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깨어지고 망가진 사람들이

변화되며 세워져 가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원형적 교회를 위한 씨앗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열두 명만 모여도 어떻습니까? 서로의 다름이 충돌합니다. 그들이 아주 이상한 사람들만 뽑아 놓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래 깨어진 사람들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이 깨어진 세상에 교회를 주신 하나님은 이곳으로 ‘누구나’ 부르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는 열린 공동체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각 지역에서 온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옵니다. 바울의 선교사역도 보면 회당이든, 시장이든, 집이든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합니다. 즉, 복음을 듣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은 ‘아무나’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서도 결단이 필요했지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찬예배를 드리지만, 초대교회는 성찬을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예배에는 올 수 있지만, 누구나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 결단의 기준은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기본적으로 ‘언약’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는 것, 복음을 나누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지만, 세례를 베푸는 것과 성찬에 참여하는 것,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고, 하나의

공동체원으로 대하는 것에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초기부터, 바울 서신이나 그 이후의 시대에도 동일한 교회의 본질적 성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시대에나 가장 중요한 기준, 그리고 공동체의 약속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주 되심(Lordship)’에 대한 고백과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이것은

혈연보다 교회를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단지 함께 모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아래 모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이 무엇의 결론이라고요?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놀랍고 아름다운 말씀들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결론이 무엇입니까? “좋은 말씀이다”, “은혜롭다”, “감동적이다”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닫고, 결국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교회라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단지 예배 시간에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준을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사명은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에 있습니다. 3. 말씀을 배우기 위해 중요한 것 오늘 본문의 저자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며, 훗날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가 교회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약 1: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약 1:20)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약 1:21)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강조하는 그 균형이 잘 담겨 있습니다. 우선 19절부터 21절은 말씀을 잘 듣는 것, 다시 말해 말씀을 잘 배우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을 배우는 것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방향을 잘 정해야 합니다. 말씀을 행하는 것이 그 길을 달려 나가는 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면,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결국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제가 예전에 부교역자 시절에 겪은 일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외부 설교를 가시는데 차가 몇 대로 나눠서 같이 갔어요. 제가 봉고차에 성도님들을 잔뜩 태우고 운전했습니다. 목적지를 주보에서 확인을 못 해서 출발할 때 물어봤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충남 예산초등학교를 찍고 오세요.” 열심히 운전해서 갔습니다. 예산초등학교 정문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는데, 아무도 안 오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 빼고 모두 ‘충남 외산초등학교’를 간 것이었습니다.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열심히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운전해도, 방향이 틀리면 결국 엉뚱한 곳에 도착합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뭔가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방향 없이 가면 결국 열심히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중요한 것은 말씀을 잘 배우는 것, 방향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노하기도 더디 하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말씀을 배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라는 것입니다. 잘 배우는 사람은 잘 들으려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들으려는 사람입니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21절에서는 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태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말씀을 배우는 사람의 영적 자세가 중요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잘 배울 수 없습니다. 이미 자기 안에 답이

가득한 사람도 잘 배울 수 없습니다. 배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온유함입니다. 제가 늘 말하지요. 온유함의 어원은 야생마가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야생마처럼 자기 뜻대로 판단하고 행하는 40세의 모세가, 80세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듣고 따르는 자로 길들여졌을 때, 그 모세를 온유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배워야 합니다. 내가 언제든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계속 바뀌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말씀이 내 안에 살아서

활동합니다. 제게 아주 기억에 남는 글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느끼는 시선의 변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우리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아신다. 청소년기: 아버지도 모르는 게 있다. 청년기: 아버지는 틀린 게 많다. 중년: 아버지가 옳았던 게 많다. 노년: 아버지께 한 번만 더 묻고 싶다. 어릴 때는 부모가 전부인 줄 압니다. 청년이 되면 부모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 보면, 부모의 말이 왜 그런지 비로소 이해됩니다. 신학교에는

아주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학교 1~2학년 때는 마음은 가득한데 아직 지식이 부족합니다. 그러다 3~4학년쯤 되면 신학 공부를 좀 하면서 말씀에 대한 이상한 자신감이 가득해집니다. 그러다가 신학대학원까지 가면 이제 마치 자기가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굴기도 합니다. 그때는 평생 그 분야를 연구한 교수님들도 무시하기도 하죠. 그러다가 공부가 더 깊어지고 비로소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면, 보게 되는 만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왜 더 깊은 공부를 하신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그 길을 위해 한평생을 씨름해 온 교수님들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이면 참 좋을 텐데, 부끄럽지만 저에게도 지나갔던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성도님들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말씀을 좀 듣고, 성경을 몇 번 읽고, 유튜브 설교 몇 개 보고 나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이 정도면 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설교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를 평가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은 좀 약하네… 7점 정도?” 그런데 문제는 점수를 매기는 동안, 정작 나는 한 점도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저격만 할 뿐, 내 변화는 미루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시기가 바로 그때입니다. 더 배우지 않게 되는 순간, 더 들으려 하지 않게 되는 순간, 말씀 앞에서 더 이상 낮아지지 않게 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 함께 약속합시다.

우리 늘 겸손하게 배워갑시다. 계속 배울 수 있는 마음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한 번 배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배우고 평생 다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4. 말씀대로 사는 삶의 중요성 그런데 야고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배우는 것을 넘어 ‘사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약 1:22)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약 1:23)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약 1:24)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약 1:25)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더 많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말씀을 배우는 것 자체를 신앙의 완성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아주 날카롭게 말합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진짜 문제는 말씀을 안 듣는 것만이 아니라, 듣고도 살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는 것은 뭐라고 말합니까?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귐의교회’ 성도 여러분. 누가 나를 속이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더 무서운 것은 내가 나를 속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맞다고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살지 않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 약장수 비유 기억하시죠. 입으로는 “이 약에는 이런 효능이 있습니다. 이 약 먹으면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피로가 풀립니다”라고 아주 열정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는 절대 안 먹는 약장수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속이는 것이죠.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안 믿는 약을 남에게만 팔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다 맞는 말을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죠.” “용서해야죠.” “기도해야죠.” “사랑해야죠.” “겸손해야죠.” 말은 다 맞습니다. 신학적으로도 맞고, 성경적으로도 맞고, 듣기에도 좋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삶은 그 말씀을 피해 갑니다. 자기 기준은 그대로이고, 자기 고집은 그대로이고, 자기 자존심은 그대로인데, 말만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그 상태를 향해 매우 불편한 표현을 씁니다. “자신을 속이고 있다.” 사실 가장

무서운 신앙인은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아는 것은 많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입으로 하는 말마다 다 맞는 이야기이고, 다 신학적이고, 다 배움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씀 앞에 자기를 드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아는 것과 성경 앞에 무릎 꿇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말씀을 설명하는 것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우리는 회심하며 내 삶의 방향을 전환한 뒤에도, 우리는 ‘약함’과 ‘악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합리화와 타협 사이를 오가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순종하기 싫었던 것이고, “제가 원래 좀 약해서요”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죄를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냥 순종하기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지만, 우리의 불순종까지 정당화하시지는 않습니다. 오늘 말씀의 거울을 들고 나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찌르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고, 돌이키고자 일합니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봤는데, 머리가 산발입니다. 눈곱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아… 그렇구나” 하고 그냥 나가면 어떻습니까? 애초에 거울을 보는 이유는 정리하고 고치기 위함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정말 자주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저는

전혀 그 사람의 상황도 모르고 그 사람을 생각하며 전한 설교가 아닌데, 예배 후에 “목사님, 오늘 말씀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 같아요”라는 피드백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를 비추는 거울로 들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내 얼굴에 엄청난 뾰루지가 나고, 눈이 퉁퉁 부은 것, 이빨에 커다란 고춧가루가 낀 것을 보게 됩니다. 본 것도 중요하지만, 보고 나서의 행동이 더 중요합니다.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세수를 하고 나의 어수선함을 다시 고친 후,

우리에게 맡겨진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5.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 그렇다면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함께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말씀 앞에서 겸손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가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고, 나눔도 하다 보면, 어느새 “이건 내가 아는 내용인데요”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순간이 굉장히 위험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평가하는 사람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데 더 이상 그 말씀 앞에서 자기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는 말씀 앞에서 계속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아직도 배워야 합니다. 저는 아직도 틀릴 수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살아 있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둘째, 말씀을 삶으로 연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예배당 안에서만 머무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일 오전 11시까지만 유효한 것도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의 월요일을 바꾸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말투를 바꾸라고, 부부의 태도를 바꾸라고, 자녀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라고, 직장에서의 정직함을 바꾸라고, 돈 쓰는 방식과 시간 쓰는 방식을 바꾸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오늘 설교가 좋았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번 주에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입니다. “오늘 은혜를 받았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 들은 말씀 때문에 내가 무엇을 순종할 것인가?”입니다. 사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그 말씀 때문에 내

말 한마디를 바꾸고, 내 태도 하나를 바꾸고, 내 자존심 하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부터 진짜 변화가 시작됩니다. 셋째, 말씀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자 말씀 붙들면 금방 흐려집니다. 주일에는 결단합니다. 월요일에는 바빠집니다. 화요일에는 잊어버립니다. 수요일에는 합리화합니다. 목요일쯤 되면 “에이,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넘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시고, 공동체로 부르신 것입니다. 말씀을 함께 듣고, 함께 기억하고, 함께 붙들고, 함께 순종하도록 공동체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반드시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 그냥 “은혜 받았어요”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번 주에 어떻게 살아보려고 하세요?”라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서로가 말씀 앞에 서도록, 서로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서로를 사랑으로 도와주는 문화는 분명히 필요합니다. 이제 오늘의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특이한 공동체라는 내용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구별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말씀이 우리를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배우고 말씀대로 행하면 점점 더 우리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서 나올 수 없는 그런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오직 말씀이 우리를 그런 공동체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 무엇을 바꾸실 겁니까?” “이번

주에 무엇을 내려놓으실 겁니까?” “이번 주에 누구를 사랑해 보시겠습니까?” 주님은 예배 안에서 말씀을 통해, 우리의 묵상을 통해, 나눔을 통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노크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맴돌 것입니다. 잘 듣고 잘 따라가십시오. 그래야 우리 인생이 변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가 시작될 때, 그것이 우리의 변화와 성장이 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그 교회는 점점 더 선명한 현실이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저는

이미 여러분을 통해서 너무 많은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계속 함께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는 아름다운 기적이 이곳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됩시다.” 이 고백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 안에 살아있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