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마가복음 1:15 / 5) 복음을 / 강정규 목사

2021-07-02 · 마가복음 1:15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새번역 _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찼다 / 하나님의 나라가 / 가까이 왔다 / 회개하여라 / 복음을 / 믿어라. 우리는 6주간 이렇게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말씀은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복음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나눕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여라. 어쩌면 여기까지의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복음을 믿어라’가 아니겠습니까? 복음. 과연

복음은 무엇일까요? 복음을 한국에서 우리말로 풀어쓰면 ‘기쁜 소식’이라고 많이 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단어를 들으면 조금 기분이 나쁘죠. 언제나 이단들이 좋은 글자를 다 가져다 써서 우리가 사용하기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조금 다행인 것은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번역한 것이 그리 잘 번역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라는 개념이 지극히 개인주의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는데요. 예수님을 그냥 개인의 구세주로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여기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라는 뜻은 새 시대를 여신 분, 새롭고 영화로운 시대를 도래케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이죠. 메시아 예수는 개인적 구세주보다는 나라와 열방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분이지요. 복음이라는 단어도,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메시지로 ‘나를 기쁘게 해주는 무엇’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내게 얼마나 기쁨이 되는가? 항상 내 개인의 어떠함이 우선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려도 내가 얼마나 예배를 통해 감동을 받았나, 내가 얼마나 기쁘고 재미있었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안 기쁘면 그 예배가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지금은 좀 바뀐 부분도 있는데... 예전에는 설교 시간은 웃겨야 은혜롭고 설교를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어요. 뭐, 저도 조금 어릴 때는 수련회 때 설교를 듣게 되면 제일 웃기는 설교자 좋아했죠. 그런데 그 유명한 웃기던 설교자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사라졌어요.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나를 재밌게 해주는 시간이 아니지요. 설교는 성경이 뭐라고 가르치고 있는지를 청중이 제대로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청중을 재밌게 해주고 감동받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설교를 반드시 스스로 피드백하며 듣는데요. 오늘도

예배 후에 걸으면서 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들을 때는 제 설교를 보면서 당황스러웠어요. 왜 이렇게 진지하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지... 제가 사적으로는 그렇게 딱딱한 사람은 아닌데... 설교 할 때는 너무 진중한 거예요. “아, 좀 웃으면서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딱 하나만 신경 쓰면서 설교합니다. “이 설교 하나에 많은 사람들의 삶이 걸려있다.” 그렇게 여기니 쓸데없는 말로 채울 수가 없어요. 설교 한편 한편이

가진 힘이 크다는 것을 경험하면서부터 이 시간을 그냥 아무렇게나 보낼 수가 없어졌습니다. 여러분, 저 진지합니다. 아마 계속 진지할 것 같아요. 여러분이 이해해주세요. 복음은 개인적인 어떤 기쁨을 의미하기보다는 온 세상에 울려 퍼진 위대한 소식입니다. 조금 더 잘 번역해본다면 ‘선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선하고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것,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기대하는 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세상 나라를 사랑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이제 끝장이 나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좋지 않은 소식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십니까? 저는 낙관적인 성향의 사람이라 뭐 그리 큰 불만 갖지 않고 살아왔던 편입니다. 그런데 제가 점점 나이를 먹으며,

세상에서 경제활동을 해가며,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것은 이 세상은 망가져있고 자정능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뉴스를 잘 챙겨보는 사람입니다. 뉴스를 보면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경제활동을 해봐도 열심히 살아도, 이미 굳어진 구조와 틀이 너무 강하고, 사람들의 출발선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종종 나타나는 선한 사람들의 모습이 있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는 점점 더 망가지고 있습니다. 유엔의 통계를 보면,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음식은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충분합니다. 지금은 매년 충분한 음식이 있지만, 그 중의 1/3은 버려지고 있고, 동시에 누군가는 굶어 죽고 있습니다. 상위 0.1%가 갖고 있는 자산이 하위 90%의 자산보다 더 많습니다. 왕이 다스리던 고대 사회보다 지금 세상의 양극화는 더 심하고, 오히려 더 견고한 피라미드 사회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남한에는 음식 쓰레기가 넘쳐납니다. 반면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기근으로 죽어갑니다. 단순히

어디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기를 너무 많이 먹다 보니까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소, 돼지, 닭을 대량생산을 하다보니까 동물들도 미쳐버립니다. 이러한 동물들이 먹을 곡물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콩의 90%를 동물이 먹습니다. 전 세계 곡식의 1/3을 동물이 먹습니다. 이렇게 길러낸 동물은 부자 나라에 사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잡아먹습니다. 반면 어느 곳에서는 그 곡물도 못 먹어 죽어갑니다. 이게 제가

얼마 전에 나눴던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은 게을러도 물려받은 것으로 잘 살고, 어떤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아도 단지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빈민국가여서 힘들게 살아갑니다. 교회는 어떤가요.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전 세계에서 크기 기준으로 상위 50개 교회 중에 24개가 한국에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개척교회 생존율을 5% 미만으로 봐요. 어떤 자료에는 2%라고 나와요. 100개 교회가 세워지고 몇 년 지나면 다 사라지고 5개 정도 남을까 말까해요.

그런데 한국에 있는 세계 TOP50 안에 드는 그 교회 중 한 교회 헌금만 나눠줘도 100개 교회가 다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현실에서 됩니까? 목사인 제가 봐도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어요. 이 견고한 피라미드 구조, 이 세상의 악한 모습이 영원해보이면 사람들은 다 거기에 편승합니다. 그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흡수되어 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까 슈퍼 갑이 있고, 갑이 있고, 을이 있어요.

을은 갑에게는 잘 해요. 을끼리 서로 박터지게 싸웁니다. 서로 조금 더 나은 ‘을’ 되겠다고.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세상은 계속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그것 좇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이미 개입하신 적이 있죠. 노아 홍수. 악을 심판하셨던 적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리셋(reset)하는 심판은 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제가 ‘소생’과 ‘부활’의 차이를 설명한 적 있죠. 소생은 다시 죽을 몸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노아 때의 홍수심판은 ‘소생’ 같은 것이었어요. 그러나 이제 ‘부활’과 같은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입니다. 이 소식은 이 땅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깨어진 세상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깨어진 세상에서 희생자가 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입니다. 이 땅의 것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 이전의 모습으로 새창조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과 불균형을 이 세상 안에서 해결할 수 없지만, 이 세상을 시작하셨던 분께서 개입하셔서 새로운 세상을 여시고 보여주시고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이 ‘어떤 소식’인지에 대해서는 알았습니다. 그럼 이제 그 좋은 소식의 내용을 알아야죠. 핵심을 알아야죠. 성경은 바로 ‘예수님’이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복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책이 4권이 있죠.

네 편의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세상에 전하고 싶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각 책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눅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눅 1: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 단계를 밟아가는 것입니다. 마태는 족보를 통해 접근하고, 누가는 역사적 사실로서 접근하고, 요한은 삼위일체 창조주의 이야기로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는 마가복음 1장의 첫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는 돌직구입니다. 뭐 뱅뱅 돌리지 않습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다. 그 시작이 이러하다.” 마가는 군더더기 없이 글을 썼기에 마가복음이 가장 분량이 작다고 말씀드렸어요. 16장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신약에 76회 사용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그 단어가 등장하지 않아요. 마태복음에는 4번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는 8번 등장해요. 가장 분량이 적은데 복음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어요. 뭐 단어를 쓰지 않아도 모든 복음서의 내용 자체가 복음이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으니 사실

단어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합니다. 왜냐면, 이 단어를 쓰는 것은 목숨을 건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 번 설교 시간에 다뤘던 것인데 ‘복음’이라는 단어,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매우 사용이 제한되어 있는 단어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쓰인 비문이 후에 발견되었는데, 내용이 이러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신의 탄신일은 세상을 위한 복음의 시작이다.” 어떤 말씀과 굉장히 비슷해 보이지 않으세요? 아까 읽었던 마가복음 1:1입니다.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에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황제에게만 붙여지는 단어였습니다. 황제의 집안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황제로 즉위할 때,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할 때. 그것이 ‘좋은 소식’이라고 알리는 그 메시지가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그 외의 경우에 이 단어를 사용하면 황제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가장 먼저 성경을 쓰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복음이라고 쓴 것입니다.

이것만 읽어도 여러분은 지금 다 잡혀가는 시대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황제 따위가 ‘복음’이라는 이 시대의 이야기를 듣고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진짜 복음, 유일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목숨을 건 고백. 예수께서 복음이라는 그 고백. 이것이 마가복음이 갖고 있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럼 왜 예수께서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일까요? 3가지로 정리해봅시다. 1. 우리에게 예수가 복음인 첫 번째 이유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그렇게 살면 세상과 함께 망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졌습니까?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그 일이 가능해졌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죽으심에 대한 예고를 세 번이나 하시죠. 그런데 왜 죽으시는지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런데 마가복음 10:45에는 정확하게 기록됩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 여기서 대속물이라는 단어가 너무 중요해요. 이것은 좀 더 직역하면 ‘몸 값’입니다. 이것은 어떤 상황이냐면 유괴당한 아이가 풀려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몸값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지불하는 것.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살리시기 위하여 그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아주 멀리 있는 이야기로 느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여기 부모님들이 많이 계시잖아요.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심장병에 걸렸습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심장이식 밖에 없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심장은 주기 위해서는 기증자는 죽을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마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요? 저에게도 자녀가 있습니다. 만약 그 상황이 제게 닥친다면, 아마도 저는 심장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저는 아빠니까. 그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성경의 이야기로 잘 대입해서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셨던 일을 우리가 기억할 때, 하신 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장이식’이라는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심장이식도 해줄

수 있는가, 이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신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심어린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가 아니라 섬기려 함이다. 그 섬김이란 내 목숨을 너희 몸값으로 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집중하지 않고, 십자가를 말하고 보혈을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능력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셀 수 없습니다. 피흘림이 중요합니까? 피흘리는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내는 세척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와 보혈을 말할 때, 그 안에 담긴 메시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시는 참된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대속물이 되셨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2. 우리에게 예수가 복음인 두 번째 이유 :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게 하신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라오려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목숨을 잃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든지’는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전혀 이 말씀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실패를 다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고 했어요. 왜?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현실세계에서 달라진 제자들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전파하고, 사랑으로 목회를 하며, 때로는 정말로 순교까지도 감당하는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에요. 분명 마가복음 안의 그들의 모습은 지금과 너무 다른 것이죠. 오히려 그것이 너무 큰 위로이죠. 만약 제자들이 애초에 너무 완벽한 사람들이었다면, 나는 제자가 될 수는 없겠구나... 저들은 나와 너무 다르구나... 우리는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은 너무 우리와 같아요. 어쩌면 더 못해요.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그분은 공평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공평하신가요? 제가 보는 성경을 보면 그분의 공평은 우리 입장에서는 ‘편애’에 가깝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 연약한 자의 편이 되어주십니다. 부자와 권력자들에게서는 한발 멀리 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편애하셨어요. 그리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가셨어요. 세상의 발걸음과 다른 그분의 행보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다른 가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지 않도록 만드는 너무나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약한 자들이 시대와 사회의 악한 구조 가운데 힘겨워하지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사랑과 정의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다른 종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 저는 이것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보여주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살아갈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는 이런 표현을 쓰곤 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보면 시궁창에 있어도 멋있게 느껴진다. 궁궐이 아니라 초가집에 살아도 그곳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능력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려고 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과의 동행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을 전파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고자 하는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29절을 보면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라고 말하고, “나도

...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지금 바울의 이야기는 성령의 힘으로 한다는 것입니까? 자기 힘으로 한다는 것입니까? 성령이 역사하시면 나는 가만히 졸졸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아는 사람의 힘입니다. 성령을 아는 사람은 성령께서 내 속에서 일하실 때, 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 합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 안 되는 부분들이 있어요. 내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나를 붙들고,

나를 업고 가시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애초에 “나를 그냥 죽여서 끌고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이런 사람은 성령과의 동행을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에 부족하고, 우리는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성령을 의지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려고 하면, 내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나는 그것을 따라 나아가며 그분이 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20대에

제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후에, 제 비전은 ‘순교’였습니다. 참 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주님께 무엇이든 드리고 싶은데,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제 생명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나는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으로 선교를 하러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것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찾아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는 각자에게 맡긴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일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아니지요. 사도들처럼 모두가 순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결단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성령을 따라가면,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는 일입니다. 제가 지금 기도하는 것은 ‘제가 무엇이든 순종하고 끝까지 따라가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살아내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아가면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변화시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힘이 바닥나는 순간이 올 때에도 주님 따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 때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나를 붙잡고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예수님 의지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비결입니다. 3. 우리에게 예수가 복음인 세 번째 이유 :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신다. 여러분,

상속이란 부모의 유산을 자녀가 물려받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상속자로 삼아주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들은 그저 세상에서 예수 믿어서 어떤 덕을 볼 수 있을까 관심 갖고 싸우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땅의 권세를 더 원했습니다. 여러분, 사실 교인들 중에도 재림, 부활, 죽음 이후의 하나님 나라. 소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내 초점은 내 현재적 삶을 그분으로 인해 어떻게 좋게 살아갈까 생각하는 것이죠. 제자들 모습이나 우리들 모습이나 같습니다. 그런데요. 그 제자들이 나중에는 이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삶으로 바뀝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소망이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때로는 어려움을 겪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평안하고 다 잘 될 때에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지 않거든요.

굳이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아파하며 우리는 기억합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부당하고 불의함 가운데 힘겨워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 소망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거짓된 속삭임을 줍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너를 버리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탄은 우리가 세상에 빠져 살 때는 우리를 내버려 둡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좌절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를 막아서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늘 우리가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이 땅은 지나가는 곳이며 우리가 영원히 구할 것은 따로 있음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발걸음이 세상을 향해 있으면 사탄은 여러분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입니다. 잘 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어 여러분이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고자 하면 거짓된 속삭임으로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연단하시고, 때로는 막아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의

진리 가운데서 이 땅의 시간들을 이해하시고, 이미 임하였고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그 나라를 상속하는 특권이 우리에게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된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깨어짐을 의연하게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복음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복음을

믿어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다뤘던 예수가 복음인 이유는 계속 연결되는 것이죠. 우리가 그분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속하여 주셔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시작이죠. 그리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게 하십니다. 구원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복음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때,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상속하여 주십니다. 미래적 구원을 약속하셨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기억하기 원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우리에게 왜 행하셨는가? 그는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셔서 우리를 자녀로 대하시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죽게된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대가를 지불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렇게

자녀가 된 우리의 삶이, 다시 하나님 나라를 잃어가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통해 행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바쁘게 살아가다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돌아보고 묵상해보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그분이 계십니다. 복음. 마가복음의 저자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발언이었음에도 당당히 외쳤던 소식. 황제에게 잘 보이는 것이 세상에서 약간의 유익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진리를 알았기에 전할 수밖에 없고 선포할 수밖에 없는 가장 좋은 소식.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그 복음을 함께 나눴습니다. 우리가 복음 앞에 진리로 바로 서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길을 성령 안에 끝까지 걸어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