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아굴의 기도 / 강정규 목사

2021-06-27 · 잠언 30:1-9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잠언에 대한 마지막 설교의 기회입니다. 5월부터 지금까지 전했던 7번의 설교가 이제 가물가물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마지막 설교를 앞두고 지난 설교들을 되짚어 봅시다. 첫 설교는 <지혜를 추구함>이라는 제목으로 나눴습니다. 잠언에 대해서 처음 배우는 시간이므로 2장을 중심으로 잠언을 소개했던 시간입니다. 잠언이 한자로 ‘바늘로 찌르는 말’이라는 것도 배우고, 잠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여호와 경외’라는 것도 살펴봤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행위를 통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삶을 대해야 함을 가르친다고 나눴습니다. ‘근심 환(患)’이라는 한자는 여러 가지 중심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마음에 중심 하나가 있으면 그것은 ‘충성 충(忠)’이 됩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나아가는 삶이 참된 지혜의 삶이라는 것을 나눴습니다. 두 번째 설교는 <두 여인이 나를 부른다>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잠언 1-9장에 해당하는 ‘지혜 담화’의 내용을 다뤘습니다. 우리의 삶을 인생길에

비유하며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들을 다뤘던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의 형태로 쓰이다 보니, 마치 젊은 남자가 어떤 여인을 만나야 할지에 비유해서 가르침이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를 부르는 세상의 소리와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함을 다뤘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하기 위해 썼던 영상이 ‘멍청한 양’에 대한 영상이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곳에서 다시 넘어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설교는 <설전>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잠언 모음 1집 중에서, 잠언 12장을 중심으로 ‘말’에 대한 중요성을 다뤘습니다. 말은 내 마음의 거울이며, 내 삶이 나아가는 이정표가 됩니다. 또한 말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잘 사용하면, 그것이 내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달라는 다윗의 고백을 기억하며 기도했습니다. 네 번째 설교는 <Helplessness :

하나님 앞에서의 무력함>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잠언 16장을 본문으로 다뤘는데요. 결국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주도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죠. 저는 늘 주도권의 문제를 ‘운전대’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실제로 우리는 무력해도 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반드시 무력해야 합니다. 타이타닉과 노아의 방주. 그 두 배가 가진 상징성을 비유하며 말씀을 마무리했습니다. 다섯

번째 설교는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라는 제목으로 잠언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인 ‘게으름’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본문으로는 잠언 18-19장에 나오는 것을 사용했는데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할 때부터 우리는 일을 사명으로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게으름에 대한 경계는 그것이 지나친 자기 사랑에 빠진 죄이며, 그 결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잘못된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사명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며,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가치 있게 올려드리는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여섯 번째 설교는 <진실한 변화>라는 제목으로 나눴습니다. 20-21장을 본문으로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한 진실한 변화를 꿈꿔야 함을 나눴습니다. 특별히 성령님 안에서 전인격적인 변화를 해나가는 것이 우리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메시지가 될 수 있음이 중요합니다. 눈과 귀의 변화, 마음의 변화, 행동의 변화까지. 말 그대로

전인격적인 변화를 통해 사우나 영성이 아니라, 참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일곱 번째 설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라는 제목으로 잠언 25장의 내용을 다뤘습니다. 우리 안에 중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잠언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그런 열매가 나타나야 함을 구약의 표현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JOY 정신.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 Third의 삶.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빛, 참된 소금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세상이 썩지 않도록 지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을 나눴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잠언의 여정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설교의 주제를 정할 때마다 가장 고심을 거듭했던 책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설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6-31장 가운데서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까. 그 안에도 워낙 다양한 주제들이 있어서 계속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귐의교회 잠언 시리즈의

첫 번째 여행을 마치면서 선택한 본문은 잠언 30장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굴’이라는 사람의 기도가 주제입니다. 정말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잠언 30장의 내용은 제게도 너무나 생소해서 이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모르면 여러분도 모를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굴’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이 내용이 너무 낯설었습니다. 부수적으로 아굴의 아들 이름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이 본문을 마지막 설교로 전하기로 했습니다. 한번 1절부터

말씀을 들여다봅시다. (잠 30:1)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여기서 아굴의 잠언이라는 표현은 ‘신탁의 말씀’을 의미하는 ‘함맛사 네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혜자로부터 나온 말이 아니라, 신적 계시를 의미하는 것이죠. 우리는 지금껏 솔로몬이 전한 잠언을 주로 다뤘는데, 이 말씀은 아굴이 남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아굴이 누구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정보는 아굴의 아버지의 이름은 ‘야게’이고,

그에게는 제자 혹은 아들로 보이는 ‘이디엘과 우갈’에게 아굴이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왜 아들 이름에 확 끌렸는지 아실 것입니다. 저도 아들 딸이 있는데요. 이름을 지을 때 고심을 했습니다. 유하는 ‘동산 유, 물 하’를 써서 물댄동산이라는 성경의 표현을 따라 지었습니다. 문제는 건하였습니다. 저는 ‘강한용사’라는 의미를 짓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아들 이름을 ‘한용사’라고 지을 수는 없고, ‘강건하리라’라는 표현이 비슷해서 이름을 지어놓고 뜻을 붙였습니다.

‘세울 건, 복 하’를 써서 복을 세워가는 아브라함의 사명을 따라 지었습니다. 제가 아는 이씨 중에는 ‘이사야, 이삭’ 정도가 실제 이름으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디엘. 이제부터 이 이름도 성경에 있는 명확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아굴과 이디엘이 진짜 실존했던 사람의 이름인가? 그것이 잠언 30장에 대하여 모든 학자가 갖고 있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아구르’는 ‘나는 나그네’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굴’이 진짜 이름이

아닌 가상의 필명일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는 자신을 나그네와 같이 잠시 머무는 존재로서 인식하고 글을 남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로 나오는 ‘이디엘’ 또한 해석하기에 따라서 독특한 이름입니다. 1절에 ‘이디엘’이 두 번 반복하는 것도 어색하고, 여기에 '레이디엘'로 기록된 뜻은 ‘나는 피곤합니다’가 됩니다. 이디엘이 두 번 언급되었으니 내가 피곤하다 피곤하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갈’의 뜻은 ‘나는 이겨야 한다’라는 동사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2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다 말해주고 있습니다. (새번역, 잠 30:1) 이것은 야게의 아들 아굴이 말한 잠언이다. 이 사람이 이디엘에게 말하고, 또 이디엘과 우갈에게 말하였다. / 또는 "그가 말하였다. '하나님, 저는 피곤합니다. 하나님, 저는 피곤합니다. 제가 어떻게 다시 힘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히브리어 자음 본문을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번역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 즉, 서술어로 풀어서 해석하면 1절은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저는 피곤합니다. 저는 피곤합니다. 제가 어떻게 다시 힘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체로 메시지가 되는 것이죠. 우리의 고된 인생길, 어떻게 이길 수 있나? 오늘 우리가 아굴의 고백, 아굴의 기도를 통해서 주목해보고 싶은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그 비결을 이제 만나봅시다. (잠 30:2)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아굴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짐승처럼 총명하지 못하다.” 이것은 조금은 수사학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짐승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에도 종종 나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시편에는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시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할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굴의 이 고백에서 우리는 겸손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기 위해 했던 말은 무엇입니까? “너는 신 같은 존재야. 이것 먹으면 너도 신이 될 수 있어.”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 멀어진 근원입니다. 아굴의 신앙고백은 나는 부족하다는 인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3절을 보면 그가 어떤 부분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잠 30:3)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우리는 왜 아굴이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는지 알 수 있죠. 짐승은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훈련된 지혜로

행동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짐승’은 자기중심의 본능으로 행동하는 어리석고 미련한 존재를 나타냅니다. 여러분. 죄에는 뿌리, 줄기,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가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줄기는 죄악 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의 근원인 뿌리는 바로 ‘자기중심성’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근원입니다. 가끔 정말 의롭게 살아가는, 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행동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어떠한가 살펴본다면 어떨까요? 성경이 말하는 죄는 자기중심성이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면 영어로 죄가 ‘SIN’입니다. 이 글자의 가운데 ‘I’가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I-Centered, 내가 중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기준에서 벗어난 모습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청년들과 ‘다니엘 기도회’를 했습니다. 목요일 설교를 송태근 목사님이 해주셨습니다. 그때 송목사님께서 성경은 딱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1)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다. 2) 하나님은 그럼에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3)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우리가 죄인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 첫걸음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금요일에는 저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6주간의 시리즈 설교를 하는데, <청년아 때가 찼다>라는 책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금요일 주제가 네 번째로 ‘회개하여라’ 였습니다.

결국 구원으로 가는 것에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한데, 회개하기 위해서 그 안에서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자신이 회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여정에는 여러 굴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론 우리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영적 침체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벗어나려면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마음에서 우리의 성장은 시작됩니다. 기도는 신앙에 있어서 중요하죠.

그런데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가, 이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누구나 신앙을 막 시작하면 기도할 때 내가 원하는 것들을 구합니다.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내게 어떤 것을 달라고, 내 주변의 환경, 사람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깊어지면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바꾸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주변을 바꾸는 기도보다 더 강력한 기도는 나를 바꾸는 기도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기도의 내용이 바뀝니다. 하나님은 둘 다 하실 수 있죠. 내

주변의 것들을 바꾸실 수도 있고, 나를 바꾸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는 안 바뀌고 환경만 바뀌면, 그것은 곧 다시 넘어짐을 반복합니다. 삶이란 내가 원하지 않는 환경을 계속 마주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바뀌면,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면, 때로는 내 환경이 바뀌지 않더라도, 그 사람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변화의 시작은 무엇입니까? 내 존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굴은 참된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인간이 삶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붙잡아야 할 지혜란, ‘거룩한 자를 아는 지식’임을 그는 깨닫고 있습니다. 이것은 잠언의 주제 말씀인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목표를 정확하게 잡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은 3절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합니다. (잠 30: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4절은 인간의 무지와 한계를 강조하는 수사학적 질문이죠. ‘누구인가?’를 네 번 반복하고, ‘무엇인가?’를 두 번 반복합니다. 내용은 하늘과 땅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여 수직적 관계를 말하고, 땅의 모든 끝을 연결하여 수평적인 축을 만드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세상 안에 있는 것을 말하고 있지요. 이것은

진짜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죠. 바로 그 거룩하신 자,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4절의 말씀을 읽으며 떠오르는 성경의 말씀이 있습니까? 저는 성경을 연구할수록 발전하는 능력이 하나 있음을 경험하는데, 성경의 가르침들이 다 연결되어 더욱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4절을 읽으면서 저는 욥기가 떠오릅니다. 욥기는 신정론에 대한 질문입니다. 알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욥은 질문이 터져 나오죠. 하나님 정말 계십니까? 그때 욥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답이 뭔지 아세요? (욥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16)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욥 38:26)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욥 38:27)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욥 38:32)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욥 38: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정확하게 알면 ‘게임 끝’입니다. 제가 가끔 쓰는 표현처럼, ‘갤럭시를 똑바로 쓰려면 삼성에게 물어보고, 아이폰을 똑바로 쓰려면 애플에게 물어보듯이, 인생을 똑바로 살려면 인간 만든 사람을 찾고, 세상을 똑바로 살려면 세상 만든 사람을 찾아서 물어보면 되는 것’입니다. 아굴의

신앙고백이 그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계를 운행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스스로 반문하고, 자신의 생각을 그분께 집중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고민이 생기면 잠깐 외출을 하세요. 자연을 바라보며 말입니다. 지금도 세상의 질서를 붙들고 계시고 참새도 먹이시는 그분을 기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세상만 내려봐도... “내가 뭘 그렇게 아득바득 살았을까?” 막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죠. 자연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배웁니다. (잠 30: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잠 30:6)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제가 지난주에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존재론적 간격은 너무나 크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아굴이 고백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다’는 것입니다. 순전함이란 불순물이 없고 결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의지하면 말씀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준다고 해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교회는 매일성경을 통해 묵상하기를 훈련하고 있습니다. 혼자 하면 어렵기 때문에 수요일에는 함께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도 갖고, 주일에는 한 주간 묵상한 말씀을 갖고 전합니다. 우리는 다른 것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말씀과 동행하며 살아내기 위해 힘쓴 것이 우리교회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에도 가끔 놀라는 것이 있어요. 저는 기독교 학문의 여러 분야 가운데서 워낙 성경신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성경. 제가 이미 대학교에서 4년, 대학원에서 3년, 그리고 다시 성경신학 전공으로 2년을 더 공부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성경학회에서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저는 성경을 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2007년부터 지금까지 15년 동안 간사로, 전도사로, 목사로 거의 매주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도 나름 성경 잘 안다고 생각하고 인정받는 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우리 교회가 2019년부터 ‘매일성경’으로 3년째 설교를 하면서 깜짝 놀라는 것은 “나 성경 진짜 편식했구나” 였습니다. 10년이 넘게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의 본문을 다 조사해보면, 성경 66권 중에서 3번 이상 설교하지 않았던 책이 절반이 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정말 몰랐어요. 저는 정말 골고루 전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어제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제가 잠언을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몇번인지, 2007년부터 제 설교 원고를 다 찾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 설교한 지 아세요? 8번입니다. 제가 이번에 잠언 처음 설교했더라고요. 저도 놀랐습니다. 오늘 아굴의 고백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다고 말합니다.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고 저는 그것을 믿어요. 그런데 혹시 우리 너무 많이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맨날 먹는 것, 맨날 보는 것. 아니 그러기라도 하면 좋지요. 주일에만 와서 제가 떠먹여 주는 것 외에는 단식투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저는

저의 자리에서 여러분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사랑이 말씀으로 여러분의 영을 살찌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아직 설교가 잘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럴 때면, 여러분 ‘콩나물’을 떠올리십시오. 콩나물 키워보셨습니까?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이 싹 빠져나갑니다. 스치고 지나가듯 빠져나가요. 안 빠져나가면 썩어요. 그런데 콩나물이 그 물을 통해 자라납니다. 제가 목회를 해가며 느끼는 가장 큰 보람입니다.

자라는 기쁨. 만약 우리교회가 계속 매일성경으로 주일설교를 하면, 우리가 6년이 되면 성경 66권을 모두 설교하게 됩니다. 우리 한번 이 순전한 말씀들을 모두 경험해봅시다.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일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묵상하고 암송하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지켜줍니다. 6절은 말하죠. “말씀에 더하지 말라.” 일단 이 교훈은 저와 같은 설교자가 가슴에 새겨야죠. 여러분, 이단도 성경을 사용해요. 여러분, 잘 분별하셔야 해요. 성경

사용한다고 다 진리 아닙니다. 성경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가르침을 선명하게 전하기 위해 힘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여기에 있어야 해요. 여러분, 기독교는 진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보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말씀대로 살면 말씀이 우리를 보호합니다. (잠 30: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7-9절은 아굴의 기도입니다. 저는 이번에 이 기도를 보면서 너무 은혜를 받았어요. 여러분, 20년 전에 출간되어 2000년대에 한국에 엄청나게 유행했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원컨대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기도 또한 필요한 순간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 기도가 잘못된 동기로 사용하면

너무 기복신앙적인 기도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 기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죠. 내가 하는 일마다 잘 되게(즉, 지경을 넓히고, 땅도 넓히고, 확장되고, 성공하고), 근심은 없게 해달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저는 단언컨대 아굴의 기도가 더 성숙한 기도라고 믿습니다. 아굴의 신앙고백이 끝나고 나오는 그의 기도는 2가지 내용입니다. 첫째, ‘헛된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잠 30:8a)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거짓에 대한 교훈은 잠언을 가르치는 내내 지속해서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거짓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 말씀의 순전함과는 전혀 다른 것이죠. 또한 거짓말은 언제나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였던 사탄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저는 거짓말에 대한 교훈을 마주할 때마다 이 말씀을 떠올리곤 합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사탄은 진리가 그 속에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거짓은 거짓을 낳습니다. 거짓말은 사탄의 성품입니다. 오죽하면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짓말과의 이별은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을 가르칠 때마다 저는 ‘기생 라합 사건’에 대한 것도 함께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하얀 거짓말’에 해당하는 사건이죠. 우리가 때로는 정말 선한 의도로 때로는 누군가를 세우기 위해, 살리기 위한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내 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멀리하게 하소서. 이것이 주님 닮은 성품으로 살아가서, 세상은 거짓으로라도 잘 되면 그것이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이것이

아굴의 첫 번째 기도입니다. 저는 두 번째 기도가 더 의미 있게 다가왔는데요. (잠 30:8b)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잠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여러분, 우리는 ‘가난하게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자주 합니다. 그런데 아굴의 기도는 ‘부하게도 마옵소서’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초점은 이 땅에서 부를 누리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늘 가까이 있는 삶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현대 사회에서 ‘재물’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떤 인식을 심어주고 있냐면, ‘유사 전능성’입니다. “재물이 너를 전능하게 할 수 있어.” 하나님이 너를 전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너를 전능하게 해줄 거야.’ 이것이 세상이 날마다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거짓된 이야기 성경에서 뭐가 떠오르지 않아요? 선악과 사건이죠. “이거

하나 잡숴봐. 이거 먹으면 하나님처럼 돼.” 아굴이 가난에도, 부유함에도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는, 지나친 가난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봐... 너무 가난하면 때론 우리가 흔들리잖아요. 주일성수보다 일터로 가게 되고, 당장 생계의 위협이 오면 신앙이 흔들릴까 봐 그는 기도합니다. 부유함에 처하였다가, 제 배가 불러서 주님 부인하며 ‘주가 누구냐’ 할까 봐... “그는 부유하지도 말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여러분, 야베스의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였다면, 저는 이제 여러분의 기도가 아굴의 기도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에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갈 양식이 없다면, 그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부족함을 아뢰고 구하는 것은 정당하고 옳은 모습입니다. 구하십시오. 하늘 아버지께 구하십시오. 그러나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구하십시오. 그것이 옳습니다. 저도 어느 순간 기도가 변하더라고요. “주님 의지할 정도의 고난과 벗하여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고난이 있으면 괴롭죠. 그러나 고난이 너무 없으면 제가 주님께 더 머물지를 않더라고요. 주님,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고난으로 저를 양육해주십시오. 고난이 없어서 주님 의지하지 않으면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물질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하길 원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 나라를 위한 훈련이자, 주님이 사용하시는 너무나 중요한 사랑의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스스로 비천함에도, 풍부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이 13절이 말하는 모든 것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14절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이 나의 고난에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즉, 바울은 지금은 풍족함이 아니라, 비천함에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은 하나님께 채워달라고 구할 수 있어요. 주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요. 바울의 그 부족함을 돌아보고 채워준 것이 빌립보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죠. 저는 제가 부족한 상황에서 허덕일 때, 누군가를 통한 채워주심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리고 제가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을 때는 주님이 제게 자꾸 말씀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해야 할 것은 주님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지요. ‘플로잉’이라고 하죠.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내가 물질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내게 흘러올 것을 믿고 주님을 의지해야 하고, 내게 나눌 수 있는 작은 힘이라도 있다면 나를 통해 주님이 누구를 채우고자 하시는지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결국 사람의 순종함 가운데 나타납니다. 저는 사실 20대까지는 불만이 조금 있었어요. “왜 나는 잘 채움을 못 받지?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지?” 제가 평안함이 있는 가정 안에서

자라고 있으니, 그때는 광야의 삶이 아니니 그랬다는 것을 지금은 알아요. 그러다가 저는 사귐의교회를 개척하고 정말 놀랐습니다. 광야로 나아가니 하나님의 돌보심이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 안에서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예상하지도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교회를 도우시고 위로하셨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다른 교회의 어려움, 개척, 그런 소식에 반응하지 못하였는데... 우리 교회의 소식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크게 사랑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개척교회가 자립할 확률을 5%라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사귐의교회는 올해 그 5%에 해당하는 자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생존하게 하셨는지 날마다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그것이 우리가 생존의 기쁨과 부흥의 열매에 도취되어

스스로 넘어지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잠언에 대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 아굴의 신앙고백과 기도는 잠언 전체의 내용을 마무리하기에 너무 알맞은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붙잡을 지혜. 그것은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직면하십시오. 거기로부터 신앙은 시작됩니다. 나의 변화에 집중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삶, 하나님이 태초부터 우리에게 원하셨던 그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배웁니다. 우리가 그 기준대로 살고자 내 삶을 붙들고 나아가는 그 영적 싸움, 마음의 싸움은 생각보다 더 치열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끝까지 싸워주십시오. 내 본성대로, 내 감정대로,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가지 말고, 말씀이 내 삶에 이뤄지기 위하여 투쟁하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짓을 멀리하고 진리와 가까워지기 위한 결단을 하십시오. 내 지갑의 소유권이 주님께 드려질 수 있는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저는 믿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삶으로 받아내어, 삶 가운데 이 말씀이 흘러가도록 하는 여러분을 통하여 세상에 주님의 나라는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