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크게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유신론과 무신론이라고 하죠. 여러분, 무엇이 더 과학적입니까? 사실 이 질문 자체가 틀렸습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은 과학이 아니라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유신론도 무신론도 말해주지 못합니다. 무신론자들을 만나면 그들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봐. 그럼 내가 교회에 갈게.” 여러분, 이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말씀하실 것입니까? 사실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신이 없다는 증거를 보여봐. 그럼 내가 교회를 안 갈게.” 신은 우리가 증명하고 증명하지 않고의 영역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유신론의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유신론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합니다. 다만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매우 독특한 부분은 이 세상의 존재하는 여러 신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우리가 신을 찾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을 찾는
여정을 홀로 완성할 수 없음을 아시고, 그 신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셨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신이 자신을 드러내어 나타낸 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글자’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셨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자신의 존재까지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 사람도
있고,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있습니다. 바로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진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진리 안에서 우리는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시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발견하고, 그분과의 사귐을 갖고, 그분 안에서 살아갑니다. 사도행전이라는 책이 있죠. 그 책은 예수님의 마지막 이야기로부터, 베드로를 포함한 열두 사도의 복음전파, 초대교회의
탄생, 바울의 이방선교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중반 이후는 사도바울의 선교 사역을 기록하고 있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도바울의 사역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그가 어디서나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며, 사도행전 28장에서 바울의 마지막 행적을 이렇게 끝냅니다. (행 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그런데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정작 바울이 쓴 신약성경은 13권이나 되지만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10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죠. 이미 그것은 그의 신학과 삶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선교했던 지역이 로마 제국에 속한 ‘이방
지역’이므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은 로마 정부로부터 그의 복음이 정치적 메시지로 오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자 할 때 이 표현으로 대신하곤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라는 것이죠. 제가 오늘도 이런 말씀으로 여러분을 일깨우며 권면하는 것은, 잠언은 구약의 말씀이며, 잠언에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로 인해, 구약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며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역사의식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왜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리스도를 주셔서 어떤 것을 해나가려는 것인지 구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말씀들입니다. 잠언
설교를 준비하며 참고서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잠언은 아마도 구약 성경에서 가장 실제적인 책인데, 그 이유는 잠언이 매일의 생활에서 부딪히는 삶의 여러 측면들을 위한 지혜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쉽게 암기할 수 있으며, 인간관계의 모든 면을 다루는, 시간을 초월한 진리들이다. 잠언 하나를 읽는 데는 겨우 수초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데에는 일생이 걸릴 수도 있다!” 저는 잠언의 말씀들이 여러분을 스쳐 지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중에
몇 가지라도 여러분이 붙들고, 그것을 적용하는 일에 일생을 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잠언 25장의 말씀을 볼 것인데, 이는 다시 솔로몬의 잠언 2집의 말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25장 1절은 이 말씀들이 히스기야 때에 수집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도 다양한 주제들이 나오지만,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주제는 우리 교회의 표어와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가 with God, with Neighbor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가장 큰 두 계명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구약(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의 가르침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그것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렇게 나와 하나님이 인격적 관계, 사귐을 갖게 된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과 같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참된 사귐을 누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생존방식입니다. 먼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고, 그리고 이제는 교회 밖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의 주제는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25장 8절부터 함께 살펴봅시다. (잠 25:8)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잠 25:9)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잠 25:10)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법정 다툼의 배경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무 경솔하게 소송으로 가지 말아라. 소송을 했다가 공개적인 재판에서 패배한 경우에 겪게 되는 치욕과 불명예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송이든 혹은 사적인 다툼이든 너무 눈에 보이는 것만을 증거로 성급하게 판단하여 이웃과 다투려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어떤 부분에 대해서 변론을 해야 하는 경우에, 그 일 외의 다른 일을 가져와서 누설하지 말라는 교훈이 주어집니다.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고, 그로 인해서 오히려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말씀이 주어지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안에는 피치 못할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교회라는 공동체로 묶어주셨는데, 이 공동체가 자라가면서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갈등은 정상입니다. 우리가 가족 공동체에서도 경험을 하잖아요. 갈등이 없는 것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어느 누구든 하나됨을 추구하면 갈등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언제나
갈등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갈등을 풀어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갈등이 생겼다고, 무조건 법적으로 소송으로 가자는 것은 갈등을 회피하는 일입니다. 서로 노력하지 않고 갈등을 법에 의지하여 해결하면, 해결은 쉽게 되겠지만 관계는 깨어집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의 문제를 갖고 송사를 피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말 법 외에는 답이 없으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그러나 그 전에 우리가 해야 할 노력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법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또 어떤 사건에 대해서 갈등을 풀어갈 때, 그 일 외에도 이런저런 일들을 가져와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이죠. 오늘 잠언의 교훈은 이러한 실제적인 것들입니다. 가장 성경적이지 않은 사람의 태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개인주의입니다. 성경의 반 이상이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며, 그 삶을 향해 나아가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도 갈등이 있었어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도 갈등이 있었어요. 사도바울의 사역 안에도 갈등이 있었어요. 갈등이 있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함께 관계를 맺는 것은 갈등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우리가 그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영화의 대사를 다시 인용해봅니다. 에반 올마이티의 대사였죠. “누군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줄까요? 아니면 인내심을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누군가 가족과 좀 더 가까워지길 기도했다면 뿅 하고 묘한 감정을 느껴지게 할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저는 여러 삶의 문제들로 힘들어하는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정말 어떤 상황들은 답을 찾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지금 마주한 그 일에도
주님의 길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주님이 나를 이끌어가시는 길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순종하며 잘 따라가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길이 있다. 저는 그것이 우리가 갖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잠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 25:12)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입니다. 이것은 조각품을 입체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처럼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갖췄다는 의미입니다. 귀한 금과 은으로 표현된 은유이죠. 말의 중요성, 그리고 12절에 나온 ‘청종하는 귀’의 중요성은 우리가 잠언을 함께 나누면서 여러 번 다뤘던 주제입니다. 귀가 있으므로 생물학적으로 들을 수 있지만, 들을 마음이 없으면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가득 차고 자기 확신이 가득 찬 사람은 잘 듣지 못합니다. 듣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설교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들을 수 있었던 방법입니다. (잠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잠 25:14)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13절에서는 충성된 특사에 대한 묘사를 합니다. 심부름 보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충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14절은 신실하지 못한 허풍쟁이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주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또는 주지 않을 선물을 줄 것처럼 떠벌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행일치이죠. 여러분은 언행일치 부분에 대해서 어떻습니까? 아마 여러분 주변에 언행일치가 안 되는 사람을 보면서 기뻐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허세가 심하고 말만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가끔 제가
그런 사람이 될까 봐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이에요. 언행일치를 해나가는 것이 너무 중요한데 그만큼 버거운 자리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부러 제가 생각하는 것들, 다짐들을 말하거나 글로 적는 경우가 있는데... 스스로 그 말에 더 책임을 지고 싶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아마 말한 만큼, 또 설교 시간에 나누는 만큼 제 삶이 못 따라가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저와 같은 설교자나 사역자에게 너무 중요한
교훈이죠. 두려워해야 할 본문입니다. 실제로 저는 제가 설교를 전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 성도님들이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기도 합니다. 그래도 제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완전성보다는 진정성이 있는 삶입니다. 아직 못 따라가는 부분이 있더라도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조금씩 삶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잠 25:15)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이 말씀은 새번역에서는 ‘분노를 오래 참으면
지배자도 설득되고, 부드러운 혀는 뼈도 녹일 수 있다’라고 번역을 합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끈기 있는 설득이 무관심을 깨뜨리고, 부드러운 말은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린다’고 해석을 합니다. 여러분, ‘오래 참음’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있기를 바라는 성품의 열매입니다. 온유함과 자비 또한 그렇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로서 가르칠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함께 세워져 갈 때도 반드시 필요한 성품이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엡 4:2)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저는 어쩌면 오늘 이 설교 안에서 이것을 내 삶에 적용해야 할 부분으로 발견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방법은 강함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상대를 존귀하게 대하고, 오래 참으며 사랑으로 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향하여 행하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어쩌면 오늘도 우리 모습을 보며 오래 참으며,
온유함으로 기다리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사랑받은 자들이, 주님께 은혜를 받음을 깨닫는 자들이... 이제 그 마음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행하는 것. 저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라 확신합니다. (잠 25:16)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잠 25: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그다음의 말씀도 성령의 9가지 열매 가운데 한 가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바로
‘절제’입니다. 꿀처럼 즐겁고 달콤한 것이라도 과식하면 토한다는 것은 절제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은 굉장히 재미있는 교훈인데요. 너의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배려’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과유불급이라는 교훈이 있죠.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추구함에도 ‘적당함’에 대한 고민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영역에 대해서는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교훈은 우리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 마음에서 탈피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죄의 본성은 자기중심적 삶(Self-centered)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적 삶(God-centered life)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대학교 선교단체 가운데 ‘죠이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왜 Joy인지 아십니까?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 Third. 예수님을 첫째로, 이웃을 둘째로, 나 자신을 마지막에 두는 삶입니다. 우리 안에 joy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삶이 주께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모습일 것입니다. (잠 25:18)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잠 25:19) 환난 날에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 (잠 25:20)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 18절은 거짓 증언을 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거짓 증인은 잠언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십계명에도 금지하고 있을 만큼, 거짓은 그리스도인들이 멀리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은 내 삶을 어두움으로 덮는 것입니다. 19절도 진실함에 대해서 다룹니다. 진실하게 행동하지 않는 자를 의지하는 것은 큰 실망과 배신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 표현이 매우 현실적인데, “곤경에 처했을 때 배신자를 믿는 것은 치주염이 있는 상태로
이를 악무는 것과 같다.” 20절은 무엇입니까? 상대방에 대한 사랑, 배려, 관심이 없는 행동들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함께 웃고 함께 울어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라는 위치에 있다 보니 상갓집을 자주 가는 편입니다. 저는 갈 때마다 확신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수많은 영적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참 힘이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외롭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갖고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제가 요즘에 <강철부대>라는 프로그램을 재밌게 봤는데, 거기에 해군 특수부대 2곳이 나옵니다. 하나는 UDT이고, 하나는 SSU입니다. UDT는 ‘해군특수전전단’입니다. 즉 공격을 위해 편성된 부대입니다. UDT의 훈련과정은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걸러내어 낙오하면 퇴출시키는 방식입니다. “동기니, 친구니 이런 것에 휘둘리지 말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해라” 이렇게 교육을 한다고 해요. 절대 낙오하지 않는 강인한 자들이 살아남도록 하는 훈련방식입니다. 반면
SSU는 ‘해난구조대’입니다. 여기는 구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특수부대입니다. 여기는 항상 공동체로 움직입니다. 보통 2인 1조로 항상 임무를 하기 때문에, 교육받을 때에도 “내 옆 사람은 내 생명줄이자 목숨”이라고 배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훈련은 빡세게 해도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으쌰으쌰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요. 그래서 UDT는 훈련받다가 중간에 퇴교하겠다고 하면, 거의 뒤도 안 돌아보고 칼 같이 자른다고 해요. 의지박약이 필요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SSU는 좀 부족해도 키워주고 끌어주고 품어주는 그런 느낌으로 해간다고 해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이 땅에서 SSU처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느꼈어요. SSU 훈련이 진짜 힘들다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겨내는 힘이 무엇입니까? 함께 하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면 힘이 되고 믿음직스럽고 위로가 되는 그러한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굉장히 매력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때문에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매력 있고 정말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잠 25: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잠 25:22)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끝으로 이 말씀은 선택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형의
권고입니다. 원수의 일차적 의미는 ‘미워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혹시 마음에 적극적 표현으로는 미워하는 자, 혹은 소극적으로는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을 때, 여러분이 선한 반응을 하기 원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면 핀 숯을 머리에 놓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이것은 2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이집트의 속죄의식을 반영한다는 견해이고, 둘째로는 원수가 내 행동으로 말미암아 깊은 후회와 회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그의 낯을 뜨겁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우리의 본성과 충돌합니다. 왜냐면 원수라고 표현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내게 충분히 선한 모습이 나오지 못할 걸림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향해, 우리도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최선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랑하는 여러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면,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 지혜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가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아보겠다고, 그로 말미암아 죄악 된 이 세상에서 특이하게 살아가는 존재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런 생존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들 아니겠습니까. 설교 초반에 무신론자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가? 우리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삼 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 가족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삶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소망하십시오. 오늘도 이 말씀으로 내 삶이 나아갈 방향, 변화되어야 할 모습을 발견했다면, 그곳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구하십시오. 성령의 충만함.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 성령께서 오셔서 나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고, 내 안에서 그분의 능력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오늘 살펴보았던 ‘겸손, 듣는 마음, 충성, 오래 참음, 온유, 자비,
배려 그리고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이 땅에 생존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입니다. 여러분, 빛은 양이 중요하지 않아요. 아주 작은 불빛이라도 진짜 빛나면 그곳을 밝힙니다. 여러분, 바닷물 1kg에 소금은 35g이 들어있다고 해요. 3.5%입니다. 그 3.5%의 소금이 바다를 썩지 않게 만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보다 중요한 것은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그렇게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 하나님의 비전을 담은 진짜 크리스천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간절히 말씀대로 살기를 구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의 마음에 오실 것입니다. 말씀하실 것입니다. 경험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 그분을 따라갑시다.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