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마가복음 1:15 / 4) 회개하여라 / 강정규 목사

2021-06-25 · 마가복음 1:15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새번역 _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찼다 / 하나님의 나라가 / 가까이 왔다 / 회개하여라 / 복음을 / 믿어라. 우리는 6주간 이렇게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말씀은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회개하여라”라는 주제를 다뤄보겠습니다. 아마도 ‘회개’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회개라는 단어 자체가 감정적으로 불편함이 있는 단어입니다. 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 속에서 잘못된 회개, 맹목적 회개에 길들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매일 죄에 대해 깨우치는 설교로 혼을 나야 시원함을 느끼는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울고 싶은데 그걸 지적해서 몰아붙이니 한번 울고 시원해하는 그런 것이 ‘회개’라고 착각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는 회개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오해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회개에는 감정적인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엉엉 울어야 회개를 한 것 같다는 오해, 그것은 아마도 교회의 집회나 수련회에서 경험한 회개에는 늘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일들이 동반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수련회에 들어갈 때 감정적 준비를 하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첫날은 약간 워밍업을 하고, 둘째 날에 감정적으로 확 쏟아놓아야겠다.” 그런데 여러분 운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에 ‘눈물’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지만, 눈물이 있다고 ‘진정한 회개’는

아닌 것이죠. 또 다른 오해 중에는 ‘회개’와 ‘후회’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후회가 무엇인가요? ‘아, 내가 왜 그랬을까?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잖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가책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에 후회라는 요소가 있을 수 있죠. 그러나 후회가 회개는 아닙니다. 후회가 회개로 들어가는 입구가 될 수는 있지만, 참된 회개는 아닙니다. 그리고 회개는 완전한 변화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한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하면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서 다른 종류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또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감정적 반응, 울음이나, 후회, 완전한 변화도 아닙니다. 회개의 핵심은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신이 걸어가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정의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왜 회개를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죄를 지었으니

회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죄를 짓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단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회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회개하는 이유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그 때가 도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는 방향을 바꿀 곳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와 인가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던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을 좇지 않고 하나님을 좇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그 나라에 우리처럼 미천한 자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새로운 삶으로 초청해 들이셨습니다. 이것이 회개가 가능한 이유입니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두 문장은 서술문입니다. 그 뒤에 강력한 두 개의 명령문이 나옵니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으라.” 이렇게 명령하고 있는 것은 회개의 급박성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임했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어서 회개하여라!” 하고 촉구하십니다. 새로운 시대가 되었는데 언제까지 머뭇거리고 있지 말고 이제는 결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핵심 구절에 나타난 2개의 명령어 중 하나로 쓰일 만큼 ‘회개’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마가복음에서 회개는 단 3회만 사용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의 개념대로라면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는 모습들이 나와야 하는데, 성경에는 그런 모습의 회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마가복음 전체가 ‘회개’를 말하고 있는 책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중요한 주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들이 믿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오해하며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모습들이 기록됩니다. 제자들의 실패, 이것이 마가복음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모습도 그러했지만, 이들의 삶이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향으로 표현해볼까요? 제자들의 삶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나아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들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하나씩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바꾸고 또 바꾸어나가는 과정이 마가복음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안에서만 보자면 그들이 온전하게 바뀐 모습이 다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독자들인 초대교회 교인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제자들이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는 헌신되고, 사랑 깊으며, 신령한 지도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마가복음을 통해 만나는 그들의 옛 모습은 형편없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변화되니까 세상이 감당 못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 제자들이 어떻게 회개하고 방향을

바꾸었는지, 마가복음 안에서 세 가지 중요한 본문을 통해 살펴봅시다. 회개는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것은 ‘거꾸로’라는 표현을 통해서 설명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도 매우 중요한 영역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그분을 따라가기 위해 힘써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1) 첫 번째 회개 : 관심사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에게 가장 먼저 일어났던 변화는 그들의 삶의 관심사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 이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을 합니다. 이들은 왜 따라나섰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복합적인 동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과 이 나라가 망가져가고 있는데 혹시 이 분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닐까? 이분이 세상을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 ‘뭔가를 지닌 사람인 것 같다. 잘 모르지만, 내 평생

그냥 이렇게 보잘것없이 늙어갈지 모르는데, 혹시 이 분을 따라다니면 어떻게든 의미 있는 살을 살 것 같다.’ 이런 생각, ‘이 사람을 따라다니면 앞으로 주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다양한 속셈들이 뒤섞인 채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이 이들의 마음을 모르셨을까요? 예수님은 이들의 시작이 때로는 불순한 동기라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데리고 시작하십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 우리도 정말 순수하게 ‘주님만 위하여’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도 다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하며 주님을 따르지만, 주님은 그저 우리와 그 삶을 시작하십니다. 당시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지역은 갈릴리입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이 수도권이고 서울이라면, 갈릴리는 전라도, 경상도 쯤 되었겠지요. 그곳에서 제자를 모으시고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이죠. 예수님의 사역에 기적이 동반되고 그분의 가르침이 남다르다보니 갈릴리 전역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집니다. 아마 예수님이 유명인이 되어갈수록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대단한 분이구나. 내가 이런 분의 직속 제자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갈릴리에서도 중심부였던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쯤 되는 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산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시면서 경상도 전역에서 알려진 것입니다. 제자들은 공히 마음속으로 다음 목적지는 이제 ‘서울이다’ 생각했어요. (막 1:35)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막 1:36)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막 1:37)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지금 이 이야기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 지금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뭐하고 계십니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모두가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 완전히 떴어요. 이제 서울로 진출합시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막 1: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지금 더 큰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인데, 예수님은 주변의 아직 가보지 않은 마을들에 복음을 전하러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가버나움보다 더 작은 마을들을 향해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버나움 다음에는 예루살렘으로 진출해야지, 왜 더 작은 마을로 가신다는 거야? 그건 완전히 거꾸로잖아.’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지만, 내 관심,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있지요. 모두 내 개인적 관심사, 내 어떤 상황, 바램과 소원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내 필요들을 채워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에게 이런 것을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알아가면서 점차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께는 나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의 관심사가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관심사에서 예수님의

관심사로 바뀌어 가는가?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관심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처음 제자들의 모습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그것은 시작입니다. 예수님과 다른 관심사를 갖고 예수님을 좇아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관심사에 관심이 있으세요? 그분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그분은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내가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회복시키고 초청하여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분의 관심사입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지금 예배하는 여러분보다, 지금 예배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에게 더욱 있어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한 비유를 들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이 그 잃어버린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 옆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이 무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바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게 관심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슬플 수 있겠죠. 그러나 내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주님과 한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 관심사는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우리의 주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회개는 그런 나에 대한

관심에서 예수님의 관심으로 눈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내 눈이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자들을 함께 바라보게 되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교회도 역시 힘 있고 강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교회 안에서 소외된 자, 교회 내부의 연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우리 안에 강력한 회개가 필요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첫 번째 회개입니다. 2) 두 번째 회개 : 관계 보통 일하면서 뭐가 제일 힘드냐고

물으면 ‘사람 상대하는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 밖의 일터에서든 교회 안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인간관계를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모두 2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본능적 욕구가 있어요. 첫째는 인정받고 싶습니다. 둘째는 내가 통제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어디에 가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본성입니다. 누구나 통제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내게 자유가 있기를 원하고, 내가 주도적으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요청하는 내용이 있지요. (막 10:35)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막 10:3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 명예롭고 힘이

있는 자리. 예수님께 인정도 받고, 다른 제자들 위에 있는 그 자리. 그거 주신다면 우리가 당신이 마시는 그 잔도 함께 마시겠습니다. 이런 요구를 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가 권세를 부린다. 그렇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제자들이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너희,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너희,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너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요소는 ‘업사이드 다운 킹덤’(Upside down kingdom)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거꾸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아시겠지만 무직분 교회를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 내의 직분이 본의 아니게 계단식 상향구조로 이해되는 경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가장 교회 안에서 낮은 지위처럼 인식되고, 장로님이 된다는 것은 ‘승진’과 같이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장로님이 되시는 분들 중 몇몇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직분에 대하여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헌신된 리더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더 섬기고 더 예수님을 닮아 자신을 희생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을 세워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바라보는 우리 신앙의 성숙입니다. 제가 모델링하고 있는 교회들이 몇 곳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교회는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을 ‘찾는 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하면 ‘손님’과 같은 개념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이들은 교회에 헌신하지 않고, 헌금도 안 해도 됩니다. 이들이 진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가족’이 된다고 부릅니다. 가족이 되려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찾는 이로 있을 때보다 약간의 자유가 제한됩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리더’들이 세워집니다. 리더는 더 많은 시간을 쏟아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더 많은 희생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이 리더들 중에서 더 많은 헌신을 보여야 할 사람, 바로 그가

목사입니다. 모든 것을 이 공동체를 위해서 드려야 할 사람. 그리고 이 공동체가 닮아야 할 그 가장 마지막 위치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 생명까지 내어주어 섬기신 예수님 말입니다. 세상은 피라미드입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더 적은 소수가 더 많은 것을 누립니다. 교회는 그 세상의 구조를 역행하는 거꾸로 된 역피라미드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처음으로 배워가는 사람들이 가장 대접을 받고, 헌신의 강도만큼 숫자는 줄어들지만

더 깊은 섬김을 각오하는 구조 말입니다. 어떤 모임에서는 어린 그리스도인들의 초점은 ‘누가 나를 섬겨줄까, 누가 나를 챙겨줄까’, 아무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으면 외로워합니다. 옆에 외로워하고 혼자 있는 사람에게 내가 찾아가서 손을 내밀고 챙겨주면 안 외로울 텐데, 이제나 저제나 누가 나를 찾아줄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이 어린 영적 아이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여전히 그러고 있다면 그는 한 뼘도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피라미드 구조를 역행합니다. 열두제자는 예수님 밑에서 호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목숨을 내어가며 섬겼던 분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내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헌신과 섬김이 더 깊어져야 정상입니다. 더 몸이 힘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 가장 일찍 오고 가장 늦게 나가며 가장 많은 시간 뭔가를 하고 있습니까? 축하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을 축하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리더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짐이란 자기 몸을 깎아서 내어주는 사람이고, 잠을 덜 자며 섬기는 사람이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돌보기 위해 물질도 쓰는 사람입니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자기 몸을 그렇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깎아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깎아 먹으셨습니다. 세상의 피라미드 구조는 학벌, 연령, 재력, 성공으로 리더가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나라입니다. 세상의 조직은 처음에

고생하고 말년에 편합니다. “나 때는....”이 아니라, “주님은... 주님 따라... 지금 내가 더욱....”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헌신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힘주시는 데까지 주님 닮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울고불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 깊이 묵상하며, 그분 안에서 내 중심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수련회에 참석하고 수없이 많은 기도회에 가서 울었지만 변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셨다면, 우리의 변화는 감정적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변화에서 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을 따라 가십시오. 그것이 회개입니다. 3) 세 번째 회개 :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마가복음은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은 16장입니다. 성경을 잘 보면 16:9-20까지는 괄호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부분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연구를 16:8까지만 합니다. 후대에 첨가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겠죠. 그럼 모두가 인정하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기록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현대로 보면 ‘오픈 엔딩’입니다. 그럼 궁금해지죠? 어떻게 끝나길래...? (막 16: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복음 16장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가 경험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넋을 잃고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당황스러운 결론은 마가가 의도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전체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가 마지막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마가복음 전체에서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장면인 16장에는 제자들이 아예 등장하지 않고,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만 나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지도 않았던 제자들. 그런데 그들이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교회의 기둥이 되어 있었고, 이미 몇몇 제자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드리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안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어리바리한 모습과 마가복음이 읽혀지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 그 큰 간격. 누구나 궁금해 하게 되는 그 간격을 설명하는 유일한 이야기, 증거,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제자들이 지금 순교까지도 할 수 있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때가 찼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그 변화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 25~30년이 지난 후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은 메시지를 강력하게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마가복음을 읽는 당신도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바로 이 책속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변하지 않고 예수님을 알 수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당신이 아무리 연약한 사람일지라도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이죠.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없이는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가 믿고 고백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단순히 존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가 이 땅에 오셨던 참된 하나님임을 우리가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한계에 갇혀서 패배하는 어떤 인간 중에 하나가 아니라,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와 자리를 버리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참 하나님임을 우리는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지막으로 회개하고 회복해야 할 영역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내가 호감을 느끼는 어떤 인물이 아니라, 나의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단순히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의 관심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님의

관심을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맺는가? 나는 그분처럼 희생하고 섬김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인가? 존경의 대상인가, 내 모든 것을 걸어도 되는 나의 예배의 대상인가? 회개는 예수님에 대한 오해가 풀려 나가고,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생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회개가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지만 신앙생활을 해나갈수록 주님 앞에서 내 안에 있는 것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내 안의 깊은 세속성과, 죄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 방식에 자꾸 물들어 가는 나를 붙들어,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수련회 때 몰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 때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마다, 내 삶의 모습들을 주님의 모습대로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대한 고백은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요즘 이런 부분에서 변해가고 있어.” “내가 이 부분에서 주님 마음을 발견했어.” 이런 간증과 고백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울려 퍼지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