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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2일차 (2024.03.26) / 마가복음 14:43~52 / 설교 : 강정규 목사

2024-03-26 · 마가복음 14:43~52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편. (막 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막 14: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막 14: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막 14: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막 14: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막 14: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막 14: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막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막 14: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막 14: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저희는 이번 특새 기간에 매일성경 묵상 흐름에 맞춰서 설교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어제는 예진 전도사님이 설교를 맡았고, 저는 미국 일정을 마치고 오늘 오후에 귀국하므로 이 설교는 영상으로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보는 본문은 우리가 계속 설교로 듣고 묵상하는 마가복음 일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다가올 고난을 아시고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셨고, 또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달리 미래에 일어날 일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기도하기보다는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의해서 배신을 당하여 잡혀가게 된 예정된 순간이 온 것입니다. 마가복음 초반부에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됨을 선포하는 유명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것입니다. “가까이 왔다”라는 단어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이것을 마가가 다시 한번 사용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막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막 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가룟 유다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실 때, 이미 유다는

온 것입니다. 무척 가깝고 곧 임하기 직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선포는 오고 있다는 진행형의 의미도 있지만, 지금 막 도착했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포와 함께 하나님 나라는 임한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이해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유다가 옵니다. 기억하실 것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는 유대인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군병들도 함께 기록되는데, 아마도 이들은

성전의 지도자였던 대제사장에게 포함된 성전경비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날 예수님을 잡아간 무리의 주범은 동족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죠. 그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마치 진압을 위한 출동처럼 무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유다는 어떻게 예수님이 이곳에 있을 것을 딱 알고 여기로 찾아왔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이곳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종종 사용하셨던 기도처입니다. (요 18: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예수님이 평소에도 제자들과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오셨고, 가장 큰 고난을 앞두고도 그곳에 계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기도라는 방법 외에도 다른 소통의 방법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께서 기도하셨다면, 우리에게 기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너무나 중요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무리와 가룟 유다 무리가 마주쳤을 때, 시간상으로 밤이었고, 아마도

사람들은 누가 ‘예수’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미 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예수에게 입을 맞추는 인사를 건넬 것인데, 그것을 암호로 보고 그를 체포하십시오.” 제자가 스승을 만났을 때 입맞춤하는 것은 유대 문화에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우리로 보자면, 현우가 저에게 다가와서 “반갑습니다. 목사님”하며 포옹하고 나니, 군인들이 달려들어서 저를 체포하는 모양입니다. 가룟 유다와 무장한 군인들의 갑작스러운 등장,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님에게 달려들자, 제자 중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반격합니다. 마가복음은 이 부분에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만, 사복음서의 내용을 모두 종합해서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예수님 곁에 있던 제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칼을 빼어 반격한 자는 ‘베드로’입니다. 그가 칼을 빼어 휘둘렀을 때, 한 사람의 귀가 잘립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였습니다. 그의 오른쪽 귀가 잘립니다. 베드로의

이 행동은 앞서 그가 했던 호언장담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베드로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베드로의 이 모습과 이후의 모습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내일 설교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죠. 예수님은 말고의 잘린 귀를 회복시켜 주시는 기적을 발휘합니다. 그는 자신의 체포와 죽음 과정은 오롯이 인간으로서 어떠한 능력도 행하시지 않고 모든 고난을 감내하십니다. 그래야만 그가 우리의 고난을 대신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 이전에 예수께서 행하신 마지막 능력은 베드로가 행한 폭력의 피해를 해결하고 치유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강도에게 하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가르치고 있었건만 너희는 잡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다." 앞서 말씀드렸듯, 그곳에 있는 무리 중 대부분은 ‘성전 경비대’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지난 며칠 동안 가르치셨고, 그에게는 어떤 폭력적 행위도 없었습니다. 그저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였을 뿐입니다. 그 모습을 봤던 성전 경비대라면, 예수님이 폭력을 행하지 않는 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강도단을 진압하듯 무장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성경 말씀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 전, 성전을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성전

경비대는 도리어 예수님을 “강도”와 같이 대우하며 잡으러 왔습니다. 이사야 53:12에는 메시아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느니라”는 예언이 있는데, 이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예수님은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어떠한 저항도 없이 그 무리에게 끌려가십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만큼은 보호하기 위해 경비병들에게 ‘그들이 가도록 용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끝까지 보호하고자 하셨으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체포를 보면서, 두려움에 휩싸여 도망치고 맙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슬프게도 현실이 되고 맙니다. 오늘 말씀 본문에는 마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짧은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단 2절입니다. (막 14: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막 14: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마가복음이 매우 짧고 간략히 기록되어 핵심만 담으려 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자면, 이 구절이 마가복음에만 등장한다는 것은 더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한 청년’이 저자인 ‘마가’ 자신을 투영한 것으로 봅니다. 어쩌면 그에게 있던 부끄러운 과거를 뒤로 하고 지금은 이렇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전하고 있음의 진전을 자기 고백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죠. 본문에 좀 더 집중해서 보자면, 이 청년은 도망친 제자들과 달리 갑작스럽게 예수님이 잡히셨다는 소식을 듣고, 거의 맨몸에 이불 같은 것만 걸치고

급히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반대 무리에게 잡혔다는 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의 편에 속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도 체포의 위기를 맞이하자, 제자들처럼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이 짧은 장면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제자가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음을 더 쓸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메시지를 한가지로 꼽자면, 제자들의 배신입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떠난 것도 배신이고,

무엇보다 가룟 유다가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것은 가장 뼈아픈 배신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분명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도 있었고,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낸 서운함의 증폭이 말도 안 되는 증오로 이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가룟 유다와 완전히 다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죄와 그렇게 무관하거나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도 조금만

틈을 내어주고 방심하면 얼마든지 실수하고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우리는 주변에 어떤 잘못을 저지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죄하는 것에는 익숙합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나는 그와 달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와 같을 수도 있는 자임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와 같으니 ‘죄’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군가 특별한 어떤 결함이 있어서 죄에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특별히 달라서 말도 안

되는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한 끗입니다. 한번 내어준 틈을 사탄은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빈틈’이 있음을 잘 인지하고 하나님을 더욱 굳게 붙들고, 나를 잘 살피어,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타고난 방어체계가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매일의 삶 가운데 주님을 얼마나 더 의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왜 주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물리적으로 두 손을 모으고 항상 기도하고

있으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한순간도 주님을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은 우리보다 부족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던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말 그대로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놀라운 결단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그들도 위기 앞에서 나약해지고 넘어지고 실패했습니다. 성경이 그들의 실패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우리를 실패하지 않도록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붙들고 살아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2편. (막 14: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막 14: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막 14: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막 14: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막 14: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막 14: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막 14: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막 14: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막 14: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막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막 14: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막 14:64)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막 14: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막 14: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막 14: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막 14: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막 14: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막 14: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막 14: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막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아마도 여러분이 마가복음 설교를 들으면서 유독 많이 들어봤을 문학기법이 ‘샌드위치 구조’일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자 마가가 좋아하는 기록 양식입니다. 이런 양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면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굉장히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비로소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을 우리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시대만 하더라도 지금 우리처럼 강조하고 싶은 것을 형광펜으로 긋거나, 굵은 글씨 처리할 수가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기법을

통해서 무엇이 핵심인지 보여주는 것인데, 그걸 우리가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죠. 오늘 53절부터 72절 부분이 모두 샌드위치 구조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여러번 설명햇듯이, 샌드위치 구조의 특징은 빵에 속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을 둘로 나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삽입되었을 때, 샌드위치 구조라고 하거든요. 한번 봅시다. 먼저 빵의 첫 번째 부분부터 읽겠습니다. A: 베드로가 예수님의 심문 장소까지 멀찍이 따라감(14:53-54) (막

14: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막 14: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먼저 이야기는 베드로에 대한 것입니다. 도망친 것으로 끝난 줄 알았던 베드로가,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몰래 뒤쫓아 온 것입니다. 집념의 베드로. 예수님을 밤에 몰래 잡아간 무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속국 이스라엘에는 로마가 인정한

나름의 자치 기구가 있는데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거기 수장이 대제사장이죠. 이들은 법적인 정식 처벌 권한까지는 없더라도, 나름의 소소한 권력은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나 이들이 할 수 있는 판단이 있고, 이들이 못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대표적으로 사형이 그래요. 그것이 나중에 예수님을 총독의 재판에 넘긴 이유이죠. 마가복음이 대제사장 무리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행한 일이 기본적으로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식 공회는 낮에 진행되어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심문과 판결을 해야하는데, 밤에 은밀히 모여서 공회를 개최했다는 것 자체가 불법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베드로가 ‘멀찍이’ 보고 있었다는 것은 베드로의 내면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죠. 모른 채 하고 아예 도망하기도 그렇고, 또 가까이 다가가서 예수님의 곁에 있기도 그렇고. 이 내용이 빵의 첫 부분입니다. 이후 베드로의 이야기가 빵의 뒷 부분에 다시 나올 것이고, 베드로의 이야기 사이에 삽입된 이야기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B: 거짓 증언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심문(14:55-65) (막 14: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막 14: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막 14: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막 14: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막 14: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막 14: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막 14: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막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막 14: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막 14:64)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막 14: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산헤드린 공회의 목적은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불법적으로 먼저 심문을 해서, 로마 총독에게 가져갈 명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데,

마땅히 죽일만한 명분을 얻지는 못한 것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는 로마의 사형이기에, 거기에 걸려들게 하려고 애쓰는 모양새입니다. 여기저기 거짓 증언자들을 포섭해서 예수에 대해서 불리한 증언으로 고발을 하게 하는데, 그 증언들도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죠. 본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거짓 증언자는 ‘예수님이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 지을 것이라’고 하며 성전을 모욕했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이 증언도 증언자들 사이에 일치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19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때 “너희가 성전을 한 번 헐어 보아라”라고 하셨지 자신이 성전을 헐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죠. 따라서 거짓 증언자들의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그들의 거짓 된 고발에 관한 의견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합니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직접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러자 예수께서 침묵을 깨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내가 그니라.” 헬라어 ‘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방식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신 것이죠. 거짓된 증언들 앞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이고 메시아라는

사실은 당당하게 밝히십니다. 다만, 사실 이 질문에는 대제사장의 교묘한 함정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이들은 ‘정치적 의미’로 포장하여, 로마 정권을 물리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쿠데타의 주동자로 엮으려 했습니다. 정치적 의미로 그리스도를 사용했던 것이죠.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는 개념은 본래 영적인 것이지만, 이것을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프레임을 씌우면 로마의 지배를 무시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는 ‘왕’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시편 110:1을 인용하여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또한 다니엘 7:13을 인용하여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그들이 볼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대제사장의 의도를 파악하시고 그가 원하는 형태의 그리스도라는 증언이 아니라, 성경이 예언하고 기다리는 그리스도로서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가 고백한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사실 의미를 잘 파악하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어차피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보다는 꼬투리 잡을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키워서 유대인들 안에 소요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선동하면 로마 정부도 그 소요를 두려워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동체 내에서 간혹 문제가 터지는 과정을 보면, 어떤 단어를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하고, 그것을 자극적으로 재생산하면서 여론을 만들어갑니다. 지금 대제사장이 원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에 집중하여, 이제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고 몰아갑니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증인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는 성인 남자 두 명 이상이 증인이 되어야 효력을 발휘하는데, 예수님의 이 말을 공회원들 모두가 신성모독으로 들었기에 들은 더 이상 증인이 필요 없고 사형에 해당하는 자라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판결 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나중에 로마 총독의 판결과 유대 지도자들의 주장이 엇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 총독은 예수를 무죄하다고 보았지만,

유대인들의 종교적 특성과 민중의 소요를 두려워하여 결국 그들의 입맛대로 판결을 내리죠. 결국 대제사장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예수를 음해하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가는 일에 성공하자, 이제 그것을 빌미로 예수를 핍박하고 모욕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하며 손바닥을 치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과 모욕은 이사야 50:6(“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의 고난 받는 종을 반영하는 예언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A′: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함(14:66-72) (막 14: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막 14: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막 14: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막 14: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막 14: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막 14: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막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샌드위치의 마지막 부분인 베드로 이야기로 다시 말씀은 돌아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의 뜰에서 아마도 예수님의 심문 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인데, 그는 증언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거짓 증언할 때에 나서지 않고 침묵합니다. 그저 멀찍이 지켜만 보다가 여종이 그에게 예수를 따르던 자라고 했을 때는 자기를 변호하며 부인합니다. 대제사장이라는 유대의 최고 권력 앞에서는 두려워

나서지 못했고, 대제사장의 여종, 원어로 보자면 소녀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어린 여종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그의 모습 그의 모습은, 앞서 칼로 반격을 가했던 모습과는 대비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의 체포 현장에서 칼을 꺼내어 반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까지 베드로가 기억하는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군대를 쓸어버릴 수 있는 능력자였으니까요. 자기가 나서도 뒷일은 예수님이 해결해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입장에서는

충격적으로 예수님은 그 무리 앞에서 순순하게 양같은 모습으로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끌려갑니다. 그것이 어쩌면 그의 용기를 다 빼앗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심문 당하는 모습 속에서 그는 어떤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가 늘 내뱉은 호언장담은 결국 조건적이었던 마음이었을 뿐이죠. 결국 베드로는 계속 추궁을 당하자, 이제는 자신에게 올 피해가 두려운 나머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말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그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예수님의

이름’조차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편에서 펼쳐지는 베드로의 조용한 배신이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본문은 샌드위치 구조를 통해서 ‘핍박 앞에서의 증언’에 대해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베드로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헤드린 앞에서 거짓 증언자들로부터 모함을 받았지만, 용기와 믿음으로 당당한 모습을 보이셨으며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인자의 오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A와 A′―부분에서는

베드로는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한 후에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의 심문을 지켜보았고, 거짓 증언자들 앞에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의 여종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고 말했을 때 ‘부인’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인할 때는 저주하여 맹세까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샌드위치 구조는 가운데 위치한 부분, 예수님께서는 핍박 받고 거짓 증거자들 앞에서 용기 있는 모습으로 당당히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 모습을 통해,

바로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보여야 할 예수를 닮은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야할 길은 바로 그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경의 시대와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이 주는 교훈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분명한 요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순간순간 예수를 따르는 자임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적극적으로 부인하기보다는 소극적으로 숨깁니다.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으니까’라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불편함 때문에 숨깁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로 고백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를 감옥에 잡혀가게 하지는 않지만, 불편함 속에 메어 두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삶에서 은근히 예수와 한발짝 떨어져서 있으면서, 교회에 오면 한걸음 가까이 와서 친한 관계임을 인정받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마 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지금 내 삶에서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부인하지 않는 하루를 살아갈 것인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를 따르는 삶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불편함을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더 의미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를 따릅시다. 불편함 속에도! 3편. (막 15: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막 15: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막 15: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막 15: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막 15: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막 15: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막 15: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막 15: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막 15: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막 15: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막 15: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막 15: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막 15: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막 15: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막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특새 4일차에 함께하시는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어제 우리는 유대인 대제사장 무리에게 불법으로 잡혀가셔서 심문

당하시는 예수님과 그것을 지켜보다가 부인하게 된 베드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체포와 심문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들이 밤새 이미 일을 다 해놓고, 이른 새벽에 다시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정식적 공회를 열었다는 것은, 그 전까지의 모든 과정이 불법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에게도 절차가 필요했기에, 그들은 예수를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이죠. 산헤드린에서 종교적 판결을 받은

죄수는 로마 정부에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됩니다. 메시아의 죽음에 대한 예언 가운데,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라는 예언이 있는데, 그것이 또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로마제국은 광범위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직접 통치하는 지역과 간접 통치를 하는 지역이 나눠집니다. 간적통치란 나름의 권한을 가진 인물을 통해 지방자치 형태로 다스리는 것인데, 그렇게 임명된

경우가 ‘분봉왕’입니다. 헤롯 가문이 유대 지역을 오랫동안 다스렸죠. 그러다가 어떤 경우에는 로마가 직접 통치하게 되는 곳이 있는데, 헤롯 가문이 다스리던 유대 지역에서 광범위한 폭동이 일어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유대 땅은 로마가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다스리는 지역이 된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잡힌 곳은 유대 땅 예루살렘이므로 유대 총독의 관할지였습니다. 우리에게 유명하기도 하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도는 유대의 5번째 총독으로 AD 26~37년까지

11년간 유대 총독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재직하는 동안, 그는 유대인들의 성전 기금을 빼돌려서 수로 건설 사업에 사용하였다가, 유대인들의 심한 반발을 받게 됩니다. 빌라도는 이를 잔인하게 유혈 진압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을 예루살렘에 세우려고 했다가, 유대인들이 저항하자 그것을 가이사랴로 옮겨 세우기도 합니다. 로마의 지배 하에서 총독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란이 생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전에

유대를 다스렸던 헤롯이 추방당하게 되었던 것도 결국 반란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빌라도가 의로운 인물이기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힘썼던 사람이라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마가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유대총독 빌라도가 꾀를 내죠. 판결의 책임이 자기에게 오지 않게 하려고 헤롯에게 예수님을 보낸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잡혀온 곳은 유대지역 예루살렘이지만, 가만히 보니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 거죠. 그러니까 갈릴리를 다스리고

있는 헤롯 안티파스에게 예수님을 심판하라고 보내며 자신이 판결의 책임을 피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이 그런 빌라도의 속내를 모를리 없죠. 예수님에게 몇가지 기적을 요구했어도 반응이 없자, 예수님을 모욕하고 화려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돌려 보냅니다. 빌라도의 잔꾀가 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문 과정은 4단계입니다. ① 산헤드린(눅 22:66-77) --> ② 빌라도(눅 23:1-7) --> ③ 헤롯(눅 23:8-12) --> ④

빌라도(눅 23:13-25) 마가복음에서는 헤롯의 이야기는 생략되고 산헤드린 공회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 것으로 이어집니다. 앞서 유대인 공회에서는 ‘종교적인 문제’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로 예수님이 성전에 대해 모독했는지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입장이 다르죠. 오직 정치적 측면에서만 이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말을 ‘정치적’으로 변질시켜서 고발합니다. 예수가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고, 로마에 반하는 새로운 나라의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죠.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는 결코 대한민국의 통치를 반하는 개념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로마 법정에는 쿠데타 세력의 수장으로 고발을 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빌라도의 첫 심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막 15:2)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그러자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대답하셨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 로마인들은 유대인의

종교적 문제에는 원래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을 물은 것이죠. 이에 예수님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로 대답하십니다. 직역하면 “너 자신이 말한다”(You yourself say)인데, 아마도 예수님은 실제로 왕으로 오셨지만, 이것이 정치적 의미는 아니라는 뜻을 담아 대답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애매한 답변을 하면서 상황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고 판단한 대제사장 무리는 다양한 주장으로 예수님을 고발하기 시작합니다. (막 15:3)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로 예수를 고발하였다. (막 15:4) 빌라도는 다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사람들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당신을 고발하는지 보시오." (막 15:5)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대제사장 무리가 여러 가지로 예수를 고발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 침묵은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인 이사야 53: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 . .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빌라도가 예수의 침묵에 놀랍게 여기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빗발친 고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심으로 의연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자신에게 닥친 이 상황을 어떻게 회피할까 고민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사면입니다. 당시가 유월절 기간이었으므로, 유월절과 같은 큰 명절에는 죄수에 대한 특별사면을 해주는 권한을 총독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고발자가 아닌 무리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방법을 찾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특별사면 이야기를 꺼내면, 무리들 중에 예수가 인기가 있으므로, 예수의 사면을 요구할 것이고, 그러면 고발자들에게 ‘무리’의 요구에 따라 사면을 한 것으로 회피를 할 요량이었던 것이죠. 우리는 사실 바라바에 대해서도 오해를 합니다. 바라바는“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한 명으로 소개됩니다. 마태복음 27:16에서는 바라바를 “유명한(=악명 높은) 죄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민란”이 “예루살렘 성”에서 일어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요한복음 18:40에서 사용한 “강도”라는 표현이 기억에 많이 남아서 바라바를 ‘강도사범’ 쯤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강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레스테스”는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서 “열심당원” 혹은 “혁명가 혹은 반란자”를 가리킵니다. 만일 이 의미가 옳다면 여기서 말하는 “민란”은 열심당원의 반란운동을 뜻하고, “살인”은 로마인들이나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에 대한 암살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금 급직전인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 바라바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무리의 힘을 빌리면 자신이 판결하지 않고,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대제사장 무리는 다 준비를 해놓고 있었고, 관저에 와 있는 무리들에게 선동해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무리들은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칩니다. 사실

빌라도는 이 사건의 본질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이렇게 나오죠. “그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넘겨주었음을 알았다.” 원래 유대인 가운데 대제사장은 한 명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전임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현직인 가야바가 함께 이 일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장인과 사위 관계이기도 합니다. 즉, 모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합심하여 예수를 처단하고자 했고, 그러므로 원래라면 절대 함께할 수 없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함께 마음을 모읍니다. 그 강력한 악의 규합에 빌라도는 ‘정의’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암묵적 동조’로 함께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슨 악한 일을 저질렀냐고 말하면서 판결자로서 정당하게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였음에도, 무리들을 만족하게 해 주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허락합니다. 이는 빌라도의 비겁함을 보여주는데, 정의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고려하여 비겁함 가운데(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자신은 무죄하다로 하며

손을 씻음, 마 27:24) 예수님을 무리에게 넘겨 십자가에 달리게 합니다. (막 15:15) 그리하여 빌라도는 무리를 만족시켜 주려고,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다음에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넘겨주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얼마나 무고하게 희생당하셨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 어떤 악의 결합이 있었는지도 잘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빌라도는 결코 무죄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리의 요구에 이끌려 정의보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립니다. 무고하게

넘겨진 유대인 한명을 살리기보다는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만족시키는 편이 낫다고 정치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무엇인가? 목회를 하면서 꽤 많이 고민해보게 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다.’ 적어도 제가 지금까지 정리한 가르침입니다. 빌라도는 정의를 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죽여야 자신이 살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악에 동조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삶이 더 불편해진다고 느끼는 것은, 그전까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을 고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이렇게 행해도 괜찮았으나, 어떤 부분에 찔림이 있기도 하며, 이전처럼 살아가는 것이 예전만큼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전에는 나도 어둠의 일부였기에 어둠 속에서 행하면서도 편하였으나, 이제 내가 빛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겪는 충돌일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구별된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움을 추구하는 삶은 이전의 삶의 터전에 머문 나에게 그전과 달리 이질감을 줍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들을 선택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존재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이 주어졌음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무관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과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진리를 따르고, 정의를 추구하고, 옳은

것을 향해 헌신하는 우리의 삶은... 결코 세상 앞에서 무식하고 몰라서가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의 지혜라는 것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요구 앞에 우리가 헌신하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지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한번 타협하면 하염없이 무너지는 것이 죄 앞에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오늘도 다시 한번 말씀으로 내 삶을 지키기로 결단하고 나아갈

때, 우리의 삶은 어둠속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4편. (막 15: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막 15: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막 15: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막 15: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막 15: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막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막 15: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막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막 15: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막 15: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막 15: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막 15: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막 15:28) (없음) (막 15: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막 15: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막 15: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막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특새 5일차 마지막 설교를 나눕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계략과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협력한 총독 빌라도의 정의가 무너진 판결을 통해 십자가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것처럼 금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시간으로는 제삼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운명하십니다. 약 6시간이라는 시간을 십자가에 달린 채 보내셨던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일어난 십자가에 달리기 전의 사건들은 오전 9시가 되기 전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오르시기 전에 군인들에게 조롱당하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우리는 이 처형 장면에 등장하는 로마 군인들을 로마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로마의 주력 부대 소속의 군인이라기보다는 주로

팔레스타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로 구성된 병력일 것입니다. 아마도 시리아나 가이사라 등 팔레스타인 주변의 나라 출신이 많았을 것이고, 이들은 주로 유대인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죄수가 자신들에게 넘겨졌으니,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조롱할 기회가 주어진 셈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멸시와 고난을 받았는데 이는 이사야 50:6, 53:3의 예언을 성취합니다. 이들이 예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운 것도 모두 조롱의 의미이죠. 왜냐하면 당시 자색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없는 색상이었습니다.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해서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왕과 왕족 등 특별한 계층을 상징하는 색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에 대한 조롱이죠. 마찬가지로 가시관은 왕관을 빗대어 씌운 것입니다. 그리고 경례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제대로 번역하면 ‘유대인의 왕께 충성’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롱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역설은 예수님은 정말로 왕이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구원할 왕으로 보좌가 아닌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보여주는 역설이고, 십자가가 갖는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보인 모든 행위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군인들은 희롱을 다 한 후에 왕을 상징하는 옷을 벗기고, 도로 그가 입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로마가 왜 십자가형을 고집했을까요? 이것이 ‘팍스 로마나’의

또 하나의 모습입니다.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는 강력한 힘에 의한 통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수많은 땅을 정복하고 속국으로 삼았기에, 그 정복국이 로마의 통치에 반하는 행동을 함부로 못 하도록 강력한 공포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죠. 그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십자가는 보통 로마가 낸 대로의 길 가나, 혹은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지는데, 십자가형의 목적이 고통뿐 아니라, 선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발가벗긴 채로 높은 나무에 매달아 서서히 죽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반역자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로마제국의 힘과 권세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 집행 장소는 골고다라고 불리는 언덕입니다. 해골을 뜻하는 데, 언덕의 모양이 사람의 머리 모양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 골고다까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당시 십자가형에 처한 죄수는 달리기 전부터 심한 채찍질을 당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보통의 죄수들보다 더욱 가혹한 폭력을 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그림에서 보는 것과 달리 십자가의 세로 대는 이미 사형장에 박혀 있습니다. 십자가의 가로대를 죄수가 직접 가져가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채찍이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동물의 뼈나 쇠붙이가 붙어 있어서, 때린다기보다는 살점을 뜯어내는 도구였습니다. 그것으로 심한 채찍질을 당한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질 사람을 찾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로마의 법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피지배국의 사람들에게 강제로 짐을 지울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이 말씀은 이런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목당한 사람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인 시몬’입니다. 우리가 구레네 시몬이라고 부르는데, 보통 가룟 유다, 나사렛 예수처럼, 출신 지역을 이름 앞에 붙여서 부릅니다. 구레네 출신의

시몬인 셈이죠. 그런데 마가복음은 그를 특별히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그들이 이미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로마 교회에 로마서를 써서 보내고, 마지막 장에 인사를 전할 때 16:13에 루포의 이름이 나옵니다. (롬 16:13)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구레네 사람

시몬과 부인,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시몬은 우연히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였지만, 그와 그를 비롯한 두 아들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도 역설입니다. 그는 북아프리카 동북편의 구레네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우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마주하고, 억지로 십자가를 집니다. 아시겠지만,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리고

시몬은 이 길에서 예수를 마주하고 후에 제자가 됩니다. 골고다에 도착합니다. 예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지만 받지 않으십니다. 전통적으로 몰약과 쓸개 탄 포도주는 육체적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진정제 역할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몰약 탄 포도주는 거부하십니다. 이는 십자가의 고통을 온전한 정신으로 겪으려고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의 죄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양옆에는 강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이후에도 사람들의 모욕은 이어집니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의 이 십자가 사건은 참으로 많은 역설이 존재하는데, 예수님의 죄 패가 그렇습니다. (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요 19: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즉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은 3개 언어로 선포됩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했던 조롱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 조롱은 도리어 역설적으로 예수님 십자가의 의미와 구원 사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려온다면, 자신은 구원할 수 있지만 남을 구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내려오지 않고 달려 죽음으로써 남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 달려

있기에 “남은 구원하였지만” 자신은 “구원할 수 없어”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실 메시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용의 교수는 이렇게 그의 책에서 언급합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독론적 호칭들을 연이어 언급한다: ‘유대인의 왕’(26절), ‘성전 건축자’(29절), ‘이스라엘의 왕’(32절), ‘그리스도’(32절). 이 모든 호칭들은 조롱 가운데 언급된 것들이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신분을

역설적으로 확증해주는 기능을 한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형당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뜻하신 진정한 그리스도로서의 선교를 완수하신다.” (막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조롱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들의 조롱을 통해 역설적 진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십자가 자체가

온갖 아이러니의 집합체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봐주실 수 없는 정의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우리를 그래도 용서하고 기회 주시길 원하셨어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희생 제사라는 방법을 주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대가 없이 사해지면,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을 때마다 죄가 가져올 죽음의 대가를 우리에게 물으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살 수 없고, 주님을

향해 변화하며 자라갈 기회조차 없기에, 희생 제사를 통해 우리의 죄를 동물의 죽음으로 바꿀 수 있도록 룰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이 만드신 그 희생 제사의 룰을 사용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할 최후의 온전한 희생제물로 독생자를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룰 안에 자신을 내던져 우리를 살리시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그것이 사랑과 정의를 모두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로마의 가장 잔인한 사형 도구인 십자가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를

살게 한 생명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로마가 만든 평화는 힘으로 억누를 통치였지만, 그것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은 그곳에 달리심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며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 샬롬울 주셨습니다. 로마가 감히 줄 수 없는 그 평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화.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구레네 시몬을 떠올려 보기 원합니다. (눅 23: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가다가, 들에서 오는 시몬이라는

한 구레네 사람을 붙들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누가복음은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나 중요한 한 문구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뒤에서’라는 것입니다. 이 문구는 예수께서 제자도를 말씀하실 때, 자기를 따르려는 무리를 향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opiso mou)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9:23)고 말씀했던 것과 또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opiso

mou)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고 말씀했던 것을 상기시킵니다. 누가복음에서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랐던 제자도의 모델이며, 누가복음은 독자들이 이 모범을 따라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주간에 우리가 예배하고 금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결단과 다짐입니다. 그의 고난이 우리에게 새 삶을 주었던 것처럼, 새 삶을 받은 우리가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37에서 예수님의 제자 중 세베대의 두 아들은 예수께서 영광 받으실 때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이뤄진 곳은 십자가이고, 그 이야기는 십자가 좌우에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진짜 제자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은 호언장담하지만, 사실 제자들은 나중에야 진짜 제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입니까? 그리스도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있고,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세례를 평생에 걸쳐서 살아가고자 하십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팬클럽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멀리서 그에게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발자국을 따라 그가 가신 길을 걸으며 그를 끝까지 따라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