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순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마가복음 14장을 함께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샌드위치 구조로 쓰여진 어 에피소드를 살펴보았죠. 오늘도 퀴즈를 통해서 지난 내용을 함께 복습해 보면 좋겠습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퀴즈이기 때문에 좀 더 집중하셔서 틀리지 마시고 모두 올백 맞으시기 바랍니다. 유월절 전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머무시면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웬 무명의
한 여인이 등장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져온 향위 옥합을 어 와장창 깨뜨리더니 그 모든 것을 예수님 머리 위에 부었죠. 사람들은 그 여인을 보고 비싼 향유를 낭비한다며 나무았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아주 극찬을 하셨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녀의 이름도 그녀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녀를 칭찬하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기 때문이다가 맞으면 동그라미 틀리면 X입니다. 자, 충분히 생각하시고 들리지
마시고 자, 하나 둘 셋. 네, 정답은 5였습니다. 자,이 여인이 과연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확실하게 답할 수 없다라고 했었죠. 그러나 이 여인이 주님의 장례를 몰랐었을지라도 예수님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그 귀중한 것, 소중한 것을 드리고자 했던 그 헌신 헌신의 결과가 결론적으로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셈이 되었다라고 우리는 지난 시간 나눴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수없이 들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들을 대신하여이 무명의
여인이 그것을 대신 행했던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 다음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에서 샌드위치 구조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서 향유를 부었던 그 여인과이 인물의 배신을 대종하고 있었습니다.이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1번 베드로, 2번 가유다. 자, 중분히 생각하시고 자, 하나 둘 셋. 네, 정답은 2번. 가 유다였습니다. 마가는 샌드위치 구조를 이용해서 향유를 부었던 여인의 헌신, 믿음의 헌신과 가륜 유다의 배신을 대조하여 보여 주었습니다.이
대조를 통해서 그가 원했던 것은 독자들에게 질문하는 것이었을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서겠는가? 당신은 향유를 부은 여인의 편에 서겠는가? 제자였지만 주를 배신한 유다의 편에 서겠는가?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도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향유를 부었던 그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갖도록 말입니다. 먼저 자신을 아낌없이 깨뜨려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에게 우리도 그렇게 우리의 전부를 드릴 수 있기를 마가복음은 요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은 전부를 다 걸어야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좀 기억이 나시나요? 네. 정리가 되었으니 이제 지난 시간에이어서 오늘은 14장의 12절부터 31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련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였죠.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평소라면 그들을 통 어 피해서 그들의 눈을 피해서 도망가셨을 테지만 예수님께서 이제 피하지 않으시고 죽음을 맞이하실 준비를 하십니다. 죽음의 때가 인박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날에 또 월날에 자들이 말하였다 우리가 가서 선생님께서 이걸 시게 준비하려 하는데 어디에다가 하기를 하십니다. 예수께서 제가 상을 보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들어와라 그러는
대고 상니 그를 따라가라 그리고 그는 집으로 가서 그 주인에게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저와 함께 주식을 먹을 때 사랑이습니다 나라 너희에게 거기에 우리를 위하여 주하다 제자들이 떠나서 서로니 예수께서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그 유월절을 준비하였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유대인 역으로는 니산월 14일에서 15일에 해당하는 명절입니다. 보통의 14일은 준비하는 날로서 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15일이 되면 그들은 유월절 만찬을 즐겼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총 이틀에 걸쳐 일어난 일이지만 사실 우리의 날짜 개념에서는 하루에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달리 유대인들은 하루가 오후 6시에 시작해서 그다음 오후 6시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자정을 기준으로 하는 우리의 시간과는 다른 계산법을 그들은 사용합니다. 어 이렇게만 설명을 하면 여러분이 이해가 좀 어려우실 것 같아서 제가 간단하게 표로 한번 정리를 해 봤습니다. 어 정확한 시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고난 중간 수요일에 향유를 깬 여인의 이야기가 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요일에 오후 6시 해가지고 나면 그들 유대인들에게는 14일이 시작되었죠. 그러면 유월절을 준비하는 준비일이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 저녁부터 그다음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양을 잡으며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로 치면 고난 주간 목요일 어 15일 오후가 되면 유월절 만찬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이 만찬 이후에 가른 유대의 배신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의 게임 때문에 심판을 어 신문을 받으시고 십자가 처연까지 당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이틀에 걸쳐 일어난 일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유월절 단 하루에 일어난 일이라고 우리는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방금 읽었던이 말씀은 고난 주간 목요일에 해당하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월절 양을 잡고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아주 분중하게 움직이며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어디에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까요? 왜냐하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이미
많은 순례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만찬 장수를 준비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고 급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아주 자세하게 답을 하십니다. 성 안에서 물동이를 매고 오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에 집주인에게 이렇게 말을 하려. 그러면 그 말을들은 집주인이 너희에게이 방을내어 줄 것이다. 아주 이렇게 디테일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어, 한국어 변역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는데요. 성경의 원어에서 눈에 확 띄는 아주 이상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물동이를 매고 오는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헬라어는 우리와 다르게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를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물동이를 메고 온 사람은 지금 현재 남성 명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헬라어를 잘 모른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 물동이를 매고 오는 어떤 한 남자를 만나겠구나. 우리가 보기엔 전혀 이상한 점이 없죠. 그런데 이것은 이 글을 읽는
당시 헬러를 사용하던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이상한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물동이는 여자들이 들고 다니는 것이었고 남자들은 주로 가죽으로 된 물통을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물동이를 매고 온이라는 표현 다음에 나오는 말은 여성 명사가 나와야 어 그들이 느꼈을 때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물동이를 메고 온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버전으로 좀 어 다르게 번역을 해 보면
이런 것과 좀 비슷할 것 같아요. 어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묘월절 만 어디에 준비할까요? 어 너희가 이 옥정 중심상과 사거리를 가면 말이야 치마를 입고 돌아낸 남자가 있을 거야. 걔를 따라가. 여러분 그럼 좀 어색하게 느껴지잖아요. 어 치마를 입은 남자 왜 요즘엔 물론 남자도 치마를 입지만 조금만 세월을 더 전으로 가면 치마를 입고 온다고 안에 의문점이 드는 것처럼 아마 이들에게도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또 이것과 비슷한 패턴을 우린 앞선 마가복음을 통해서도
종종 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미리 세 번씩이나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점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새끼 나귀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너희가 그 나귀를 어떻게 데려와야 하는지까지도 주님께서는 미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는 과정에까지 제자들이 만날 물동이를 매고 온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까지도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마가가 기록하고 있는 것은 어 예수님의 예언자적 지식을 강조하는 요소가 됩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가른 유다의 배신에 넘어가 잡히신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한 구속 사역의 성취를 위해 기꺼이 순종하고 계시다는 점을 마가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미쳐 피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라고 생각했겠으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 아시면서도 기꺼이 죽임을 당해 주신 것이었음을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죠. 마치 부모님들이 자녀와 함께 놀아줄 때 자녀가 어 하는 행동이 너무 뻔하잖아요. 다 알지만 그 자녀를 위해 속아 주는 것처럼 주님도 오늘 우리를 위해 다시면서도 일부러 속아주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유월절 만찬은 준비되어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함께 모여 최후의 만찬인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즐깁니다. 제자들은 이것이 예수님과의 마지막 시간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명절의 기쁨을 느끼고 있었겠죠.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 유다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의 스승인 예수를 언제 넘겨 주어야 가장 정확한 때일까?이 예수가 언제 홀로 있을까? 그런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만찬을 제대로 즐기지 못합니다. 주님은 그런 유다를 바라보시며 안타깝게
마지막 경고를 하십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자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순종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열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마음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다.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령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갔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있다. 사람을 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엿보고 했던 유다도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먹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태어나게 함께 먹고 마시며 어 태어난척했겠지만 실상은 홀로 이방인처럼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무도 유다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주님만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에게 지금 경고하시죠. 유다야, 나는 다 알고 있단다. 어쩌면 이것이 유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담아 담담하게 유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는 거야. 하지만 나를 죽도록 넘겨준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단다. 유다, 나는 그 사람이 너는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유다는 그 말씀 그 경고에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계획했던 예정대로 예수님을 넘겨주러 그는 떠나갑니다. 여러분, 우리도 얼마든지 유다처럼 공동체 안에 속해 있으나 전혀 그 공동체와 상관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이름을 붙이고 여기 앉아 있지만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쩌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아직 그 나라 밖에 있는 이방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유다처럼 우리의 무서운 양면성, 그 이중성을 너무나 태어나게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예배하고 똑같이 나눔을 하며 똑같이 사역으로 섬기고 있을 때 우리는 서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 말과 그 행동을 하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가른 유대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경고하며 말씀하시죠. 사귐의 가족 어 가족들아 나는 다 알고 있단다. 저는 순간순간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공동체와 하나님의 지체들을 통해서 저희가 경고 저에게 경고하실 때가 있음을 경험하고 합니다. 예진아 그 길은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야. 그 마음은 지금 옳은 마음이 아니야. 그 자리에 돌이켜서 나는 네가 이렇게 살아가기를 바란단다. 그리고 저는 저에게 그렇게 순간순간 말씀하시고 경고하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신다라고
믿습니다. 사귐의 가족아 나는 다 알고 있단다. 그것은 옳은 길이 아니니 속히 돌이켜 나를 따르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을 향한 그 사랑이 담긴 주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우리는 이 유다의 선택을 반면 교사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경고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도 울려퍼지는 성령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기회는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끝끝내 자신을 외면하는 유다를 뒤로 하고 남겨진 제자들에게
빵과 잔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모을 때에 예수께서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태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바다 이것은 내 공이나 또 잘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를 모든 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어는 나에게 있고 너에게 있다. 예수님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있었던 빵과 잔을 가리켜서 이것이 내 몸이고 내 피다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전부 주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이라고 가르쳤던 그 빵은 목교병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에 누룩 없는 빵인 무교병을 함께 먹었기 때문입니다.이 무교병에 성경적인 별명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고난의 빵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과거에 그들을 올감던 400여년의 애굽의 종사리에서 그들이 탈출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던 그 고난의 때에 그들이 먹었던 빵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유월절과 무교절에 고난의 빵인 무교병을 먹으며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어떠한 구원을 받았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 가운데 있었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건져 주셨는지 우리가 얼마나 처참하게 살았는데 우리의 삶을 어떻게 회복시켜 주셨는지를 그들은 이 빵을 먹으며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그 고난의 빵을 가리켜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까 우리가 보았던 그 단력처럼 이제 불가 몇 시간 후면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완성시키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먹음으로써 우리가 어떤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죄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이를 위해서 스스로 고난의 빵이 되어 빵이 찢기듯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찢으십니다. 예수님 뒤어
포도주가든 잔을 드시고는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말씀을 반영한 것이었는데요. 출애굽기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리며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것은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따라 당신들에게 세우신 언약의 피입니다. 처음 이스라엘이 피로 언약을 맺은 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었을 때입니다. 그때 지도자였던 모세는 언약의 징표로 수소의 피를 이스라엘과 제단에 각각 절반씩 뿌렸습니다.
그리고 이 신내상 언약은 구약에서 이루어진 모든 언약의 중심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피를 가리켜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언약은 옛 언약과 같이 수소의 피,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세워지고 그것이 징표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를 언약의 피와 연결하여 잠시 후 다가올 자신의 죽음이 곧 하나님과의 새 언약을 맺게 하는 징표가 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죠. 이것은 이미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서 예언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운과 누가 다 가운의 언약을 세우겠다 말라 이것은 내가 그들의 손을 붙잡고 지방에서 데리고 나오는데 세 것이다 내가 그들의 테이 되었어도 그는 나의 언약을 베어버렸다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에 내가 이스라엘 방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반속에 넣어주며 그들의 나의 세계 기록하여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주라
결국 예수님은 빵과 잔을 통해 자신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빵처럼 찍길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사망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새 언약을 위한 희생의 재물. 유월절 얼린양 피로 잡히신 그래서 피를 모두 쏟으신 그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 새 언약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옛 언약은 돌판에 새겨졌겠으나 예수님으로 통한 새 시대의
새 언약은 이제 우리의 가슴속에 들어 있고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셔서 그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들, 그 마음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그 언약을 마음 가운데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새 언약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과거에 어린양의 피로 그들의 죽음을 면했던 유월절처럼 새언약 공동체는 이제 예수님의 피로 죄 용서와 그들의 참된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들의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새 언약 공동체로서의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이 만찬을 기억하며 이것을 토대로 성찬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찬에는 과거와 같이 유대인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옛 언약이 이제 끝났고 새 언약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성찬이 어 새롭게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옛 시대의 유월절을 초월하고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참여하는 하나님 나라의 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그 식탁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 여기까지 이해가 되시나요?네 네, 좋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조금 어려울 수 있어서 제가 간단하게 또 표로 정리해 봤습니다. 유월절과 주의 만찬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의 옛 시대가 유월절 속한 것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원과 옛 언약에 참여한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켰다면
구속과 새 언약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의 만찬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 함께 먹고 마실 수 있게 됩니다. 구원받은 출애굽을 회상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우리에게 이루어 주실 구 그 구원을 바라본 것이 유월절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구원의 십자가를 회상하며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시련, 그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에 감남산으로 가셨습니다. 어, 감남산은 감남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요.
감남나무는 올리브 나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마 새번역 성경에는 올리브라고 번역되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만찬에서 유다에게 경고하셨던 것과 같이 이 산에서도 다시 한번 슬픈 경고를 하십니다. 성경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다 너희가로서 질 것이다. 가자를 쓸 것이니 내가 알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가 러너질지라고 하나님을 하지 않을 것이니라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순종으로 너에게 말하다 오늘밤에 각이
구원기 전에 내가 세번 나를 본다고 하시다 그러나는 힘서 말했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중앙이 있을지라도 저희도 선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모두 부르게 하였다. 예수님은 스가랴 13장 7절에 기록된 말씀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떼가 흩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여서 제자들이 그 양떼처럼 모두가 흩어지고 도망갈 것을 어 경고하시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나서서 다른 사람들 예수님을 다 버릴지라도 자신만큼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 듣기에 좋은 말이죠. 수제자 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예수님을 더 잘 따르고 있다라는 베드로의 자만심과 이기심이 깔려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만해 하며 자신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는 그 베드로에게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차 말씀하실 때는 진실로 진정으로라는 말씀을 덧붙여 더 강하게 경고하십니다. 진정으로 진실로라는 표현은 어떤 문장을 강조할 때 쓰이는 표현이었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아주 디테일하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러자 이번엔 베드로도 그 예수님의 강조한 경고에지지 않습니다.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며 힘주어서 대답합니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후원 장담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곳에 있던 나머지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 모두 그렇게 고백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의 고백이 거짓이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한편으로는 베드로처럼 자신이 있었겠죠. 내가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아, 내가 예수님과 함께 먹은 밥이 몇데? 내가 예수님 따르기 위해서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가족도 버렸다고. 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아. 그러나 우린 다 알고 있듯이이 제자들 중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예수님을 떠나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가련 유다가 예수님의 경고를 외면하여 무시했다면 이들은
그 경고를 자신을 믿음으로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부정함으로 그것을 무시한 것입니다. 가련 유다도 베드로도 주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생각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팔아야겠다라는 자기의 계획. 자신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라고 생각한 그 자만함이 결국 그들의 귀를 어둡게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세운 철저한 계획이 또는 나는 잘하고 있어. 내가 이만큼 주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주를
떠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그 자만함이 우리의 귀를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 들을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14장 17절부터 31절의 마가복음은 어 14장에 기록된 두 번째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두 제자의 배신에 대한 예언 및 경고가 앞뒤로 빵의 자리에 위치하여 있고 그 가운데에 최후의 만찬에서 가르쳐 주신 떡과 잔에 대한 의미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뒤에 이어지는 마가복음 14장 72절까지의 말씀과 연결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구조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다 그리고 제자들의 도망 베드로를 향한 그들의 그 경고 그리고 그 예고가 차례대로 성취되어져 가는 것을 마가복음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고하시고 경고하셨던 그 내용들이 14장이 한 장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그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그들의 고백은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14장은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배반, 도망, 부인에 대한 무거움이 아주 가득 짓눌려져 있는 장입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그저 마음만 무겁게 돌아가면 되는 걸까요? 제자들의 연약함이 오늘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도 있다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도 경고하시고 계심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아마 마가복음을 읽었던 로마 교회 독자들 중에서 어느 한 사람도 제자들을 쉽게
비난하거나 비웃지 못했을 것입니다. 에이 제자라면서 수제자였다면서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했다 하면서 저렇게 쉽게 버린다고 에이 저게 뭐야? 이런 마음을 아무도 쉽게 내비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미련했다라고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제자들의 연약함과 그들이 느꼈을 그 두려움이 그들에게도 똑같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부터 그들은 멀리 도망쳐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안전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부인해야 하는 순간들이 그들 앞에는 수없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을 지키는 것, 예수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정말 생사가 눈앞에 걸리는 죽음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성경에 기록된 이 제자들의 실수를 로마교회 공동체가 반면교사 삼아서 그들은 똑같이 행하지 않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가복음을 읽고 있는 2차 독재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 연약함과 두려움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말씀을 읽는 우리의 마음도 무거운 것이 무거운 것입니다. 남일 같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지난 설교를 통해서 향유를 깬 어 여인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린는 다 같이 결단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옥합을 깨자. 우리도 향유를 다 주님께 드리자. 우리도 아낌없이 주님 주님을 위해서 우리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자라고 말입니다. 물론 저도 수없이 결단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를 믿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그렇게 눈물로 고백해 놓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고백이 흔들릴 저를 저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도 경고하고 있습니다.이 이 세상의 완전한 사람, 넘어짐으로부터 온전히 안전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과 3년을 함께 했던 제자들이 넘어지므로이 세상에는 아무도 완전한 사람이 없다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도 죄송하지만 언제든 넘어질 가능성의 소유자들입니다. 온전하기를 힘쓰나 온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얼마든지 제자들처럼 고난 앞에서 그리고 죽을 것만 같은 그런 상황 앞에서 예수님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거 없으면 죽을 거 같고 이거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삶의 순간순간을 앞에서 말입니다. 어 저는 회심한 이후에 하나님의 사랑과 또 저를 구원해 주신 그 구원의 감격에 어 정말 한동안을 미친 사람처럼 날 뛰며 다녔던 거 같습니다.이 이 세상이 정말 너무 어 아름답게 보이고 나를 사랑하신이 세상 때문에 어 하나님 때문에 막 세상에 막 핑크빛으로
보이고 막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4학년 취업을 준비하던 제가 길을 돌려 기꺼이이 길을 가겠다라고 어 다짐하고 신학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이제 예수님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거 같습니다. 나를 이렇게 구원해 주셨다고. 나를 위해서 이렇게 사랑하셨다고. 그럼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나도 그런 삶을 들여야지. 어떤 상황이 와도 회심 전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라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 신학대학원이 총 3년의 과정이었는데 그 3년을 다 마치기도 전에 저는 몇 번이나 흔들렸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주님을 선택하겠다라고 결정했던 나의 삶에 크고 작은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아 이거 괜히 하겠다고 했나 봐. 이럴 줄 알았다면 이런 길일 줄 알았다면 시작하지 말 걸.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렇게까지 힘든 길인지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버거운 길인지 알았다면 아, 그때 그러지 말걸. 이러는 원망이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저에게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신 먼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떠오르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정말 부끄럽지만 한 때는 주님께 그렇게 원망하며 기도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주님을 선택한 것이 너무 후회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이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좀 더 이따가 할 걸 그랬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대못을 박는 저에게 주님이 저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너를 선택한 것에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단다. 그 사랑을 느꼈을 때 그 은혜가 저를 뒤덮었을 때 어 저는 다시금
그 길에 돌이켜 어 그 길을 다시 걷겠다라고 결단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겠죠. 제자들은 죽음 앞에서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떠나 도망했지만 주님은 그들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길을 끝까지 피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어야만 그들을 살려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귀의 가족 여러분, 때로 삶을 살아내다 흔들릴 때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이 두려워지거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빵이 찢기듯 살을 먼저 찢으셔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재물이 되어 모든 피를 먼저 쏟아 주셨습니다. 주님도 십자가를 향한 길이 두려우셨으나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홀로 둘 수 없어서 끝끝내 그는 돌아서지 않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의 손을 먼저 놓는 법이 없으십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다 보면
때로 흔들리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경고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도 유다처럼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주님이 가시지 않는다고 내 원함대로 이루어주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며 주님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또는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주님의 말씀보다 나의 자신만한 그 믿음과 신앙을 더 의지함으로 크게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부인한다는 것 주님을 도망하여 떠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헌금을 하다가
하지 않는 것일까요? 사역의 자리를 내려놓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우리는 교회에 있지만 일상 속에서 살아갈 때 아 주님 말씀 이렇게 하셨는데 그리스도의 삶은 이런 거라고 하셨는데 그런 마음이 들지만 애써 나의 작은 더 이익을 위해서 나의 안전을 위해서 그 음성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이렇게 해야 내 가족들 먹고 살지. 이렇게 해야 그 사람들 더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있을 수 있어라는 그런
마음 때문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삶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제자들이 보였던 도망과 다름 없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여 경고하셨던 그 말씀을 부디 기억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런 하나님을 경험했어. 나는 이렇게 회심했어. 나 하나님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나는 끝까지 주를 떠나지 않을 거야. 그런 자신만한 마음을 내려 놓으십시오. 높이 솟은 마음일수록 작은 바람에도 휘청이기 쉬운 법입니다. 사단은
그렇게 높아진 우리의 마음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님의 경고를들은 제자들에게 진짜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분의 경고가 나를 찔러 아프게 할지라도 도무지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가 필요했습니다. 자신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경고가 아플지라도 겸손히 듣고 자신이 원하는 길이 틀렸음을 인정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회개하고 돌이켜야만 했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경고가 도무지 인정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겸손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니요 주님 저는 할 수 있어요.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달라라며 엎드려 꿇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주님이 계시는 방향이 맞지 않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유다에게 말씀하신 경고를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맞아 세상을 살 때는 이렇게 하는게 맞아. 어쩔 수 없어라고 이야기하기보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 길로 돌이키는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제자답게 잘 살고 있다고 내가 이만큼 하고 있으면 내가 이만큼 헌금하고 이만큼 사역하고 내가 이만큼 예배하고 있으면 낯성 나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야라는 그런 마음이 여러분을 틈탈 때에 베드로에게 하신 경고를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고 싶은데 저는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일 뿐입니다. 제 연약함을 늘 도와주십시오라고 구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란
무엇일까요? 제자가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제자는 자신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믿고 의지하는 삶 사람입니다. 제자의 삶은 자신의 계획과 마음보다 주님의 말씀에 더 귀기울여 집중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제자는 날마다 자기 자신을 배신해야 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포기할 수 없고 주님을 떠날 수 없어서 주님으로부터 도망가는게 도저히 안 돼서 나의 계획과 나의 생각과 나의 감정을 날마다 배신하는 것이 제자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배신하지 마시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서 내 안에 일어나는 정욕과 교만함과 자기 중심성을 배신하십시오. 우리의 손을 절대 먼저 놓지 않으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오늘이 시간 여러분은 무엇을 배신하시겠습니까? 나를 위하여 주님을 배신하시겠습니까? 주를 위하여 나의 약함을 배신하시겠습니까?이 이 시간이 마음을 가지고 함께 찬양하며 나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