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두 여인이 나를 부른다 / 강정규 목사

2021-05-16 · 잠언 1-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잠언은 인생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유익을 주기 위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1:1-7까지는 머리말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 그분을 진정으로 신뢰하기에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방향에 나를 던져 살아가고자 하는 결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지식과는 관련이 없고, 어떤 학위도 지혜를 보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삶에 대한 지혜는 세월을 통해서 배워가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경외의 지혜로 이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혜자는 그러한 경험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1-9장까지가 바로 이러한 ‘지혜 담화’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에서 자주 표현되는 것은 ‘길’입니다. 잠언에서 ‘길’이란 인생을 의미하고 ‘생명’의 길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하는데, 바로 그 순간순간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을 몰입해서 읽으려면, 잠언의 설정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잠언은 우리 모든 독자를

‘젊은 남자’ 역할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아’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것은 지혜의 스승이 제자를 부르는 것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치는 음성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언의 설정대로 젊은 남자의 입장에서 잠언을 읽어가는 것이 몰입하기 좋습니다.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구부러지고 어두운 길로 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 길로 가면 어려움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 따르면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라 그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바른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끊임없는 외침입니다. 그리고 길을 가면서 우리에게는 ‘만남’이 있습니다. 남자로서 좋은 여인을 만나야하죠. 잠언에서는 ‘지혜 여인’을 만나라고 거듭 권면합니다. 잠언은 1:20-33을 통해서 지혜 여인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잠 1: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실제로 지혜는 한국에서도 대부분 여자 이름이죠. 히브리어로도 여성명사입니다. 지혜가 의인화된 여인이 ‘지혜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곳이 8장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다시 의인화되어 말을 거는데, 지혜 여인은 우리와 대면하기를 원합니다. (잠 8: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잠 8: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 8:36)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어쩌면 지혜 여인의 이 목소리에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지혜 여인은 9장에서 아름다운 집을 짓고, 고기와 포도주가 곁들여진 잔칫상을 준비하고 사람을 불러 모읍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대한 잔치,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언급하셨던 그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잠 9:5)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잘 빚은 포도주를 마셔라. (잠 9:6) 어수룩한 길을 내버리고, 생명을 얻어라. 명철의 길을 따라가거라" 잠언 1-9장에서 지혜 여인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인생길에서 만나는 유일한 여인이 아닙니다. 잠언에서는 우리가 ‘음녀’를 조심할 것을 일깨워줍니다. 지혜를 여성화 하고, 독자를 남성으로 설정하다보니, 독자를 유혹하는 대상도 ‘음녀’가 된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이것은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악한 세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음녀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잠 2:17) 그 여자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은 여자이다. (잠 5:8) 네 길에서 그 여자를 멀리 떨어져 있게 하여라. 그 여자의 집 문 가까이에도 가지 말아라. 아버지는 아들인 독자들에게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다해 음녀에게서 자신을 지킬 것을 권면합니다. 음녀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죄에 대한

의인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잠언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악한 세력을 ‘음녀(창녀)’ 혹은 ‘이방 여인(문란한 여자)’으로 표현합니다. 이방 여인이라는 것은 우상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아버지는 그 여자를 우리 인생길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라고, 그리고 너도 그 집 문 가까이에도 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이 여인에게 유혹을 잘 당합니다. 유혹을 당하는 것은 그만큼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잠 5:3) 음행하는 여자의 입술에서는 꿀이 떨어지고, 그 말은 기름보다 매끄럽지만, (잠 7:21) 이렇게 여러 가지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호리는 말로 꾀니, 여러분, 우리가 죄가 좋지 않은 것인 줄 몰라서 죄에 넘어지는 때가 있죠. 그런데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기준이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우리 안에 세워집니다. 말씀은 기준입니다. 죄는 그 기준을 벗어난 것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하마르티아.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음을 우리는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그 잘못된 것을 붙듭니다. 왜 그래요? 그것에서 매력을 느껴요. 잘 생각해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몰라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강력한 경고로 기준을 세워주셨어요. 그러나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무엇을 느껴요? (창 3:6a)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러분, 우리가 이런 말하잖아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죄가 똥과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최영 장군이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말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눈에 황금은 여전히 빛나는 황금이잖아요. 죄인 줄 아는데, 죄가 너무 빛나고 매력 있어요. 때로는 신앙을 저버리고 그것을 붙잡을 만큼 우리에게 유혹이 크다는 것입니다. 음녀가 요즘 말로 꽃뱀과 같다면, 반대로 남자 중에는 제비가 있죠. 그중 최고봉은 ‘카사노바’라는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탁월한 언어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여자를 유혹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어요. 132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사랑이겠습니까? 그냥 그는 누군가의 마음을 빼앗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죄가 그렇습니다. 죄는 사람을 유혹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음녀는 남자를 유혹하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며 매혹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받는 유혹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스스로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음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아닙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음녀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어요. 어떻게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지 아십니까?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입니다. 바로 지혜 여인을 더욱 사랑하며 그 여인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라는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권면을 가끔씩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한 청년에게 얘기한 부분인데요. 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크게 긍정강화와 부정강화가

있습니다. 긍정강화는 긍정교육이죠. 좋은 자극을 주는 것이죠. 부정교육은 반대로 ‘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데 있어서 더욱 효과적인 것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 관심을 갖는 것. 그분을 알기 원하고, 그분이 내게 바라시는 것을 추구하는 삶 말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에서부터 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음녀를 인생길에서 멀리하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그 유명한 헬라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계를 정복할 때입니다. 모두가 그의 권력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데, 정작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디오게네스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직접 만나러 갑니다. 디오게네스에게 호감을 느낀 알렉산드로슨느 원한느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테니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때 디오게네스는 말하죠. “당신이 나의 따뜻한 햇볕을 가리고 있으니 옆으로 한 발짝만 비켜 주십시오.” 음녀가 만들어놓은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가 내 안에

있고 그것을 추구할 때 우리는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경쟁사회이고 그 경쟁의 구조 안에서 거기에 휩쓸리면 우리는 대부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면 그 행복은 소수에게만 주어지고, 그 소수조차 게속 행복하지 않습니다. 만약 누가 서울대 법대를 갔어요. 잠깐 남들과 다른 우월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면 또 자기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거기서 반에서 1등하는 사람이 잠시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럼 끝인가요? 또 사법고시 합격을 누가 먼저 하느냐? 그 이후에는 또 누가 잘 풀리느냐? 이러한 경쟁구도를 인생의 가치로 삼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경쟁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사람이라서, 자신의 아버지가 정복을 해서 땅을 넓혀 갈 때에도 기뻐하지 않았어요. 왜요?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많이 정복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너무 많이 정복하니까. 그런 그가 디오게네스를 만났는데, 이 사람은 자신과 전혀 다른 가치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로 살고 싶다.” 죄악된 세상의 가치관에 빠진 상태로 거기에 물들지 않을 것을 바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가치를 붙들고 그것을 더욱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짓지 않아야지, 않아야지... 사실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으로 내 생각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죠. 그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묵상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죄에 대한 최고의 방어는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인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보며 그에게 행복한 삶을 주시고자 하와를 주어 서로 연합하여 온전케 하십니다. 잠언에서도 우리가 지혜 여인과 연합하고 하나가 되는 삶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 말해왔던 성경의 여러 이야기와 다르지 않아요.

제가 자주 표현하는 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영적인 공허함’이 있다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자꾸 우리는 이것을 다른 것으로 채우고 싶어 해요. 그러나 끝까지 공허합니다. 다른 것으로 채우는 모든 행위가 잠언의 표현으로 보면 음녀와 함께 하는 삶인 것이죠. 결국 음녀가 우리를 이끌고 가는 곳은 사망입니다. 죄의 끝은 사망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해답이 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DNA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는 그분께로 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예전에 천국의 계단이라는 드라마에서 권상우가 ‘부메랑’을 던지며 외치지요.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그게 무의도에서 촬영을 했는데, 제가 그 드라마 직후 거기를 놀러간 적이 있는데, 부메랑을 팔더라고요. 부메랑을 던지는 이유는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부메랑은 돌아오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도록 지으셨습니다. 잠언에서는 ‘지혜 여인’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상징으로, ‘음녀/이방여인/우매한 여인’이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력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잠언 1-9장은 남성 독자에게 지혜 여인과 우매한 여인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말하며, 그 안에서 지혜와의 신실한 동행을 요구합니다. 지혜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므로, 지혜 여인과의 관계는 곧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왔던 유혹처럼, 우리 삶에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택하라는 요구가 수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 시험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까지도 시험을 당했지요. 40일간 금식하신 가장 연약한 때에 사탄은 어김없이 시험을 합니다. 예수님에게 온 시험은 3가지였죠. ① 돌이 떡이 되게 하라 (경제적 시험) ② 하나님의 아들이면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종교적 시험) ③ 높은 산으로 올라가 천하만국을 주겠다 (정치적 시험). 이 세 가지 시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시험의 종류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모든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말씀으로 이기십니다. 실제적 권세가 있지만, 인간처럼 낮아진 방식 안에서 이기는 방식을 택하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시험을 이겨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죠. 창세기에 나타난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움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표현됩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체가 가진 죄의 본성, 또한 바라보며 추구하는 욕망, 이 땅의 것에 대한 자랑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의 표현대로라면 바로 그것이 음녀입니다. 요한일서도 이렇게 말해요. (요일 2:14b)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가 강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으로 죄악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여러분,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동일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간은 부득이하게 여러분에게 음녀가 다가와요. 그러나 그것을 붙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말씀을 깊이 새겨서 이겨내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잃습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결국 지금 우리를 유혹하고, 세상에서 전부라고,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영원하지 않은 것을 마음에 품으면 영원한 것을 놓칩니다. 우리가 그것을 우선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 나라를 잃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것처럼, 우리가 세상의 것을 하나님보다 우선시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제가 최근에 재미있는 영상을 하나 봤는데요. 한번 같이 보시죠. <양 영상> 어쩌면 저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요? 주님이 이 구덩이에 빠진 나를 구원해줬더니 얼마가지 않아 다시 구덩이에 빠지는 모습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저 모양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여러분, 얼마나 우스운 모습입니까? 저 상태가 지속되면 죽는 것입니다. 저 양에게는 지혜가 없어요. 우리가 지금까지는 넘어지고 음녀와 동행했을지도 모릅니다. 시험을 당할 때마다 비틀비틀 거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이 주는 지혜를 갖고, 말씀이 주는 승리의 비결을 갖고 이겨내야지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결단입니다. 두 여인이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음녀의 소리가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우리는 지혜 여인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도 잠언 말씀에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 권면을 마지막으로 읽으며 우리 이제 결단을 합시다. (잠 6:20)

내 아들아, 아버지의 명령을 지키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아라. (잠 6:21)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간직하며, 네 목에 걸고 다녀라. (잠 6:22) 네가 길을 갈 때 그것이 너를 인도하여 주며, 네가 잠잘 때에 너를 지켜 주고, 네가 깨면 너의 말벗이 되어 줄 것이다. (잠 6:23) 참으로 그 명령은 등불이요, 그 가르침은 빛이며, 그 훈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다. 오늘 잠언이 주는 이 교훈을 마음 깊이 새기시고, 길을 갈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깨어 있는 그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동행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https://youtu.be/KMJcts2AGk8 다음세대 영상 https://youtu.be/GJkEslb3BLk https://youtu.be/vDDPJu_f_Uo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