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게으름) / 강정규 목사

2021-06-06 · 잠언 18-1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잠언은 인간의 삶을 바라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내용을 가르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그중에서 우리가 다룰 내용은 ‘게으름’입니다. 잠언에 나타난 게으름에 관한 교훈들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데, 오늘은 우리가 이번주간에 묵상했던 18~19장에 나오는 게으름에 관한 구절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3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18:9, 19:15, 19:24입니다. 의미상 교훈을 위하여 역순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창조의 질서를 따르는

삶 (잠 19:24)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새번역) 게으른 사람은 밥그릇에 손을 대고서도, 입에 떠 넣기를 귀찮아한다. 24. 어떤 자들은 포크로 파이를 찍고도 너무나 게을러 입으로 가져갈 생각을 안 한다. 이 부분은 게으른 자에 대해서 익살스럽게 묘사한 부분입니다.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그것을 입으로 넣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사람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밥통을 안고 죽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풍자하는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주신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태도 또한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요? 그 밥그릇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중한 시간, 기회, 재능 등의 것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분명 저 태도는 그것을 지혜롭게 활용하지 못하는 삶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게으름은 성경적인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주어진 삶에 대한 책임감을 많이 말합니다. 특별히

그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삶의 방법과 질서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는 게으르면 죽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돈이 돈을 낳는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고대의 인류는 농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일을 해야지만 먹고 삽니다.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경건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 2가지 명령을 하셨어요. 일과 예배입니다. 성경을 펴자마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창조이죠. 창조는 며칠입니까? 6일이라고도 하고 7일이라고도 합니다. 6일이라는

사람은 ‘노동의 실제적 시간’에 좀 더 집중하는 것이고, 7일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신 일’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저는 창조를 7일로 보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시간을 사용하셨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엿새 동안 그분은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안식하십니다. (창 2: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일과 안식의

조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질서입니다. 안식은 휴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저는 이것을 휴대폰에 비유하기를 좋아합니다. 안식은 휴대폰을 끄는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충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은 안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새롭게 회복되는 날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엿새를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그렇게 좋아하시지만, 우리를 7일 중에 6일을

세상 가운데 파송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6일은 삶에서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성경의 언어가 ‘정복하라, 다스리라’ 하니까 마치 우리가 ‘we are the frontier’를 부르며 나아가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의 현대적 의미는 이렇죠. 메시지 성경을 보면,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라! 온 땅에 가득하여라! 땅을 돌보아라!” 말합니다. 돌보는 것이죠. 금요일에 영적 성장의 단계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영적 아이 – 영적 청년 – 영적 부모’가 있습니다. 영적 부모는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돌본다는 것은 힘이 들어가는 일이죠.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돌볼 것을 맡기셨어요.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나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노동이 죄의 결과로 주어진 형벌로 여기는 경우가 있어서 제가 가끔씩 수정을 해드립니다. 성경에는 죄가 등장하기 전부터 우리에게 ‘일하는 사명’이 있었음을 많이 말합니다. 창세기 2:15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의 관리인으로 두셔서 그것을 경작하게 하셨다고 말해요. 노동은 그러므로 거룩합니다. 죄가 없는 세계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삶의 질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터의 사명에 대해서 존귀하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는 한, 우리교회의 성도님들이 일하는 영역이 불법적인 곳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직업이 강도이시거나 사기꾼인 분은 여기 없겠죠? 여러분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는 세상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할 자리입니다. 고대 가톨릭은 자꾸 성과 속을 이분법적으로 나눴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성직으로

구분하곤 했어요.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고, 우리의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소젖을 짜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목회와 일을 병행하면서 더욱 이것을 확신합니다. 목사로서의 내 사명도 가치 있지만, 세상속에서의 내 부르심도 그에 못지 않은 사명의 자리로 여길 때 우리가 일주일 내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에 대한 잠언의 교훈은 ‘창조 질서’를 기준에 두고 가르치는 교훈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잠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 6: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잠 6: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 6: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잠

6:10)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잠 6:11)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은 그 질서 안에서 순종하며 맡겨진 사명을 다하며 살아갈 때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개미 관찰 해보셨죠. 개미는 정말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개미가 그렇게 해야지 사는 것이죠. 개미가 가만히 있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업주부에게는 그것이 일이고, 학생에게는 그것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직업’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맡겨진 삶에 대한 성실함을 갖고 게을러지지 않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잠언은 여호와 경외를 가르치죠? 무엇이 경외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최고로 여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고 박윤선 목사님의 자서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늘 이하루가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시간을 아끼며 살아왔다.” 우리에게 주신 밥통이 얼마만큼의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주신 것을 귀하게 여기며,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가장 우선적인 메시지입니다. 2. 자기사랑의 죄 (잠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새번역) 게으른 사람은 깊은 잠에 빠지고, 나태한 사람은 굶주릴 것이다. 15. 빈둥거리는

자의 삶은 무너지고 게으름뱅이는 배를 곯는다. 잠언은 게으름의 문제를 언급할 때 ‘잠’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말을 합니다. 잠은 인간이 모두 추구하는 것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특별히 게으른 사람들이 열정을 갖고 대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잠’입니다. (잠 26: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성경에서 잠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표시로 주시는 잠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는 이 말씀 기억하시죠. 여기서 잠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고, 평안이고, 안식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통 게으른 사람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게으른 내 삶의 위로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합리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초대교회에 여러 이단들이 나타났죠. 여러분, 내가 속한

곳이 이단인가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누구를 믿는 것인가?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믿음의 대상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 또 자신들만이 옳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종말에 대한 가르침이 어떠한가? 이런 것을 따져봐야 합니다. 특별히 어떤 특정한 때를 거론하면서 종말이 있다고 말하며, 현재의 삶의 모습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단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곧 주의 재림이 있다고 말하며, 일하지도

않고 삶을 놓아버린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특별히 잠언 말씀은 게으름과 그로 인한 ‘가난’을 연결시켜서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잠언에서 가난을 말하는 것도 두 가지 관점입니다.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은 죄입니다. 그리고 정직함으로 인한 가난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즉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택하지 말라는 측면에서는 차라리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나 게으름으로 인해서 가난한 것은 책망 받을 일입니다. 저는 부자가 되는 것을 추구하자고 가르치는 기독교 내의 가르침과 오랜 시간 싸워왔습니다. 또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출세해야 한다는 고지론도 계속 반대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우리의 목표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실한 삶, 책임 있는 삶은 우리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부유해지고, 혹은 출세했다고 할 자리에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는

삶이었다면, 부유함이 오거나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끝까지 그 삶을 살면 됩니다. 그런 사람은 물질도 하나님 뜻대로, 그 자리가 주는 영향력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똥같은 자기 철학으로 공부를 안했던 이야기를 몇 번 전해드렸습니다. “난 나의 성공을 위한 삶을 살지 않을거야”라며 공부를 멀리했던 것이죠. 어리석음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위험하다고 말하는데, 게으른 자가 이런저런 좋은 신념을 갖고 포장하면 그 삶은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잠

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게으른 자일수록 그의 혀는 분주합니다. 핑계를 삼는 것이죠. 하다하다 밖에 내가 나가면 사자가 날 죽일 것이라며 나가지 않습니다. 당시 농경사회인데 밖에 안 나간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몸은 게을러도 혀는 게으르지 않고 핑계와 변명을 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데요.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사업 아이디어를 놓고 고심하다가 2명의 사람을 아프리카로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아프리카의 시장성을 타진해 보라고 한 것입니다. 얼마 후 그들은 돌아와 판이하게 다른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니므로 신발을 만들어도 사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의견을 냈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도 신발을 신은 사람이 없습니다. 시장성이 무궁무진합니다.”라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핑계는 언제나 끝이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죠. “순종의 사람은 방법을 찾고, 불순종의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 핑계 뒤에

숨는 것은 언제나 쉽습니다. 그러나 핑계가 아니라 뭔가를 해내는 열정과 그 방법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것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물론, 우리 몸은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이상의 쉼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내 삶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며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정욕을 따라 사는 삶에 대해서 경계합니다. 내게 어느 정도의 쉼이 적당한지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잘 파악하고,

부패한 본성의 요구에는 응하여주지 않아야 합니다. 쉼에도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치 엿새를 위한 안식이라는 창조의 원리처럼 말입니다. 잘 쉬십시오. 그러나 그 쉼이 목적이 되지는 마십시오. 김남준 목사님은 <게으름>이라는 책에서 게으름의 궁극적인 원인은 ‘자기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게으른 사람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하죠. 제 친구 중에서도 모든 부분에서 게으르다고 느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컴퓨터 게임 할 때는 그렇게 부지런하고

열정적인지 몰랐습니다. 그 친구 집에서 잠을 잤는데 새벽 늦게까지 게임을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또 게임을 하고 있더군요. 정말 게임 앞에 부지런했습니다. 컴퓨터가 고장 나면 그것은 들고 바로 용산으로 갑니다. 부지런합니다. 게으름이라는 것은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을 우선시 여겨야 할지를 판단하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의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잠언은 게으름을 어리석음의 범주에 넣습니다. 그 판단을 잘못하면 삶의 시간과

에너지와 열정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므로 삶 자체를 망쳐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만 열심인 사람은 ‘자기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게으른 사람치고 탁월한 영성을 소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은혜의 선물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만 온전하게 자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의 위치와 목적, 하나님께 받는 사랑의 정체, 그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행복, 그 안에서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의 기쁨 등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경외함 안에서 우리가 우리의 지으심의 목적에 맞게 살아갈 때 온전한 사랑이 우리 안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적인 변화와 성숙의 문제입니다. 게으름은 빗나간 ‘자기사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할 때 우리의 삶의 목표는 그분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조정되어 가고, 그 안에서 빗나간 자기 사랑을 죄로 여기며 멀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언에 게으름에 대한 경고가 많은 것은,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인 문제이며, 우리에게 삶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3. with Neighbor. (잠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새번역)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일을 망치는 자와 형제간이다. 9. 부주의한 습관과 엉성한 일처리는 파괴 행위만큼이나

나쁘다. 이 말씀은 게으름이라는 문제가 가진 영향력에 관한 것입니다. 게으름이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을 넘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도 해를 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일을 파멸로 몰고 가는 사람과 형제라고 비교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관계를 맺고, 가깝게는 가족,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갑니다. 나의 게으름은 나만의 게으름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잠 10:5)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잠 10:26)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이것은 가깝게는 가족 공동체 안의 문제로부터, 내 주변의 모든 관계 안에서 영향을 미칩니다. 나의 게으름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알 것입니다. 제가 독서실을 관리하는 일을 할 때, 알바생 면접을 자주 봤습니다. 저는 일부러 독서실만큼은 가급적이면 고학력자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뽑으려고 했습니다. 독서실 일하는데 학력은 필요 없으니까요. 그 중에 한 친구가 있었는데, 딱 봐도 일을 빠릿하게 잘하지는 못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너무 착하고 성실히 할 것 같았습니다. 맞았어요. 일이 잘 안 늘어서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난무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자기가 일을 못하는 것 같아서 죄송하다고 그만두겠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수습해주면서도 그 친구와는 꼭 같이하고 싶었는데, 너무 성실하고 열심인 친구였기 때문이에요.

근무 교대도 15~20분을 먼저 옵니다. 어쨌든 열심히 합니다. 일의 능력으로 보자면 부족함이 있었지만, 저에게는 가장 기억에 남은 알바생이고, 가장 오랜 기간 함께 했던 알바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보통 게으르면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우리의 이웃사랑의 실천을 게으름이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멋을 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도 그것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웃사랑을 하는 것에도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게으름과의 싸움일지도 모릅니다. 대학교에서 그룹과제(팀플)를 많이 합니다. 몇 차례 진행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누구나 함께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고, 누구와도 함께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법입니다. 제가 공부했던 곳은 신학교인데도 그런 친구들이 간혹 있습니다. 능력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무책임하고 게을러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율적으로 팀을 짜니까 누구도 같이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비뽑기를 하거나, 번호로 끊거나 했던 적이 있습니다. 게으름은 능력과 실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게으름은 배려해야할 영역이 아니라, 고치고 훈련해 나가야 할 태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연약함이라고 말하지 않고 죄라고 말하고, ‘폭력’을 부족함이라고 말하지 않고 죄라고 말하듯, ‘게으름’은 우리가 방치하지 말고 이겨내고 깨어내어야 할 우리의 본성적인 죄입니다. 청년

시절 읽었던 <게으름>이라는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이 문구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세상을 고치기 원한다면, 먼저 나 자신이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말에 힘이 실립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교회와 세상의 구분 없이 어디서나 정직하고 올바른 삶입니다. 우리의 사회 활동의 최우선 목적은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직업의 소명의식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예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의 기도. 노동 운동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전도자가 된 사람의 기사. 불법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감옥까지 갔다온 사람이 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터뷰를 끝내며 희망사항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기도로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렇게 배운 것도 없고 갖춘 것도 없어서 더 크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언감생심 하나님께서 저를 크게 써 주시도록 기도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혹시, 하나님께서 귀한 사명을 맡겨주신 사람 가운데 게을러서 그 일을 제대로 안 하며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게으른 그 사람 굳이 쓰지 마시고 저를 대신 그 자리에 보내주세요. 잘하는 것은 없지만 정말로 열심히 주의 일 하겠습니다.” 저는 늘 교회 사역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태도는 항상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최고로 빛나는 것은 좋은 결과물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서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꾸준하게 부지런히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제일 좋습니다. 저는 하나님도 우리를 그런 눈으로 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씩 구원의 커트라인을 묻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느 정도를 살아야 해요? 실력으로는 결과로는 모두 못 들어갑니다. 의인은 거룩한 사람인데, 우리는 거룩한 완성의 모습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요. 실력으로 받는 구원은 우리 모두 불가합니다. 은혜로 받는 구원이 가능할 뿐이죠. 쉽게 말해서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면, 그 사람의 그 마음의 진정성을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성실하게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살아가고, 나를 보내신 자리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며, 이웃과 세상을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긴 여정입니다. 이 여정을 토끼처럼 뛰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거북이처럼 걸음마다 최선을 다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하나님께서 실망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생각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나면 결과에 대해 자유해 집니다. 그리고 일의 성패를 떠나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실천을 통해서 그 진수를 맛보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책상에 앉아서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을 공부할 때가 아니라, 그렇게 살고자 몸부림 칠 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름은 이런 실천을 방해합니다. 신자로 하여금 그 진수를 맛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은 우리의 친구가

아닙니다. 게으름을 다스리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그러하기에 오늘도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손을 그릇에 넣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말씀의 교훈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손을 그릇에 넣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 굶어 주는 미련한 자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삶을 바꿀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우리의 본성을 다스리고, 우리에게 맡기신

이 세상 안에서의 사명과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며,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올려드릴 수 있는 모든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