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마가복음 1:15 / 1) 때가 찼다 / 강정규 목사

2021-06-04 · 마가복음 1:15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사귐의교회가 가장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바로 그 내용을 누군가에게 가르쳐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떤 설명을 듣고 깨달으면 안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막상 그것이 정말로 내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면 가르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가르침을 위해서 내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공부를 해나가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도

사귐의교회에서 목회를 해나가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여러 번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저 자신도 얻는 유익이 매우 큽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를 더욱 확신하게 되고, 또 가르치고 나누면서 주시는 은혜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신앙의 스승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 몇 분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갖게 된 스승님들이 있고, 몇 분은 그저 멀리서 저에게 영향을 주시는 선배 목사님들, 교수님들입니다. 그중에는 나들목교회를 목회하다가 은퇴하시고, ‘하나님 나라 복음

네트워크(하나복)’라는 사역을 하고 계시는 김형국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교회가 초창기에 했던 <사귐의 편지>는 제가 개척하기 전 나들목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가 그 교회에서 하는 것을 저희에 맞게 해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이것이 단순히 신학적 지식이 아니라, 어떻게 교회 공동체 내에 흘러가야 할까? 그 고민을 2013년 이후로 계속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다음 주 3일 동안 <하나복 네트워크 세미나>에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3개의 과제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그 과제 가운데 하나가 <청년아 때가 찼다>라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과제를 위해서 그 책을 읽으면서 사실 새로운 지적 정보를 얻는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저도 들을 만큼 들어왔기 때문에 비슷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소개하는 방식이 너무 좋고, 그 안에서 제게도 던져지는 질문들을 경험하며, 이것을 우리 교회에서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6주는 그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제가 설교를 준비하여 전달할 것입니다. 저는 설교 표절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입니다. 표절과 인용의 차이는 표절은 남의 지식을 자기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고, 인용은 그 출처를 밝히는 것입니다. 6주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청년아 때가 찼다>라는 책을 인용하여 재료로 삼고, 그것을 요리하여 설교를 전할 것입니다. 아마 6주의 설교를 들으시면 그 책 1권을 읽은 셈이 되겠죠. 오늘은 그 첫 시간입니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4편의 책이 신약성서 제일 앞에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쓰인 책이 무엇이죠? 마가복음입니다. 마태와 누가 두 사람은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을 읽고 그것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마태/마가/누가복음은 내용의 상당수가 겹칩니다. 요한복음은 한참 후에 쓰였기에 공통분모가 가장 적습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 예수님의 삶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기록된 복음서가 마가복음이죠. 이 복음서의

핵심 구절로 꼽는 것은 1장 15절입니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새번역 _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찼다 / 하나님의 나라가 / 가까이 왔다 / 회개하여라 / 복음을 / 믿어라. 우리는 6주간 이렇게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말씀은 나눌 것입니다. 때가 찼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때를 보내고 있습니까? 때라고 하면 ‘시간’과

관련을 지을 수 있지요? 제가 시간의 2가지 개념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먼저 물리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크로노스’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시계의 시간이죠. 반면 ‘카이로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죠. 나이를 먹습니다. 저도 3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내년에는 40대가 됩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은 크로노스적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모두 ‘청년의 때’가 있었죠. 혹은

지금 ‘청년의 때’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청년의 시기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때는 ‘카이로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논함에 있어서도 ‘때’를 이야기합니다. 영적으로 유아기가 있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성장은 결코 크로노스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카이로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영적 아이의 때, 영적 청년의 때, 영적 부모의 때가 있습니다. 영적 아이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막

시작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 “아,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구나.” 이것이 영적 아이의 특징입니다. 이런 영적 아이의 특징이 있다면, 자기 혼자 잘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누군가가 돌봐줘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혼자 잘 성장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돌보고 도와줘야 합니다. 영적 성장이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라고 말하는

것은, “저는 예수 믿은 지 10년 됐어요”라는 물리적 시간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10년이 됐든, 20년이 됐든 영적 아이의 특징을 보인다면, 영적 아이인 것입니다. 영적 청년의 때는 무엇일까요? 청년의 특징은 2가지입니다. 1) 자립하기 시작한다는 것, 2) 자아 정체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독립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살아나갈 수 있는 자립을 배워나가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갈지를 발견해나가는 때입니다. 영적 청년이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자기가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영적 아이일 때는 모호하고 흔들거렸다면 이제 자기정체감이 확실해집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이런 존재가 되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자립의 능력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감격하고, 넘어져도 은혜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영적 청년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부모의 때가 있습니다. 부모란 아이를 낳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돕고, 갓 태어난 영적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돌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영적 부모란 가정을 꾸리고 이끌어가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이 영적 부모입니다. 자, 그럼 한번 물어야죠? 여러분은 어디쯤 와 계십니까? 갓 태어난 아이처럼 영적 아이로서 돌봄을 받고 있습니까? 자립을 배우고 훈련하며 자아 정체감을 발견하는 영적 청년의 때를 살고 있습니까? 혹은 누군가의 영적 탄생을 도우며 사랑으로

양육하고 공동체를 섬길 수 있는 영적 부모가 되었습니까? 이것은 내 육체적 나이가 청년이라고 할지라도 영적 부모일 수 있고, 장년이라고 할지라도 영적 아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 시기에 대한 ‘때’를 살펴봤다면, 이제 하나님의 관점에서 ‘카이로스’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때에 와 있는지, 영적 성장의 어느 때에 와 있는지보다 더 중요한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때’,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때’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읽었던 마가복음 1:15은 “때가 찼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구약에서부터 기다려온 하나님의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역사를 주관해오셨죠? 구약에서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의

선택은요, 참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쓰십니다. 이스라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택하신 이유가 가장 작고, 가장 약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불러서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 나라는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역할입니다. 연약한 이스라엘을 불러서 일하시면서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내가 소망 없는 너희를 이토록 사랑했으니, 너희는 나만 섬기어 나를 세상에 드러내라”는 뜻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애석하게도 구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민족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버린 일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나라가 분열되고 모두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배웠다시피 남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갔지만,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귀환합니다. 성전을 재건합니다. 스룹바벨 성전이죠. 그러나 중간기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잠시 독립했다가도 다시 정복당합니다. 결국 로마의 지배 아래에 들어갑니다.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몇 대에 걸쳐 헤롯 가문이 이스라엘 땅을 다스립니다. 로마에 붙은 권력자들은 돈을 벌고, 종교 지도자들조차 힘 있는 자들에게 붙어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며 자기 배를 불리는 일에 몰두합니다. 민중들은 더욱 힘겨운 삶을 삽니다. 독립에 대한 희망도 사라지고, 삶이 버겁기 그지없던 그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십니다. 우리는 이때가 하나님의 때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셨던

때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의 다니엘서 7장은 이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단 7:27)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다른 예언서에도 동일하게 예언되고 있는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전 세계를 구원하시려던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중단되고 폐기되었으나, 이제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종,

당신의 메시아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회복된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이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예언서는 모두 이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합니다. 구약의 예언들이 끝나고 400년간은 침묵기로서 어떤 예언도 없었으나,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준비하고 실현해 나가시는 기간이었습니다. 드디어 그 침묵을 깨고 세례 요한이 나타납니다. (막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그때가 찼음을 보여줍니다. “때가 찼다.” 헬라어로 이 단어를 분석하면 시제는 현재완료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보통 2가지로 이것을 번역합니다. 1) The time has come. (현재완료) 2)

The time is fulfilled. (수동태) 헬라어의 이 문법이 나타내는 것을 영어로 옮길 때는 2가지를 함께 표현할 수 없으므로 어떤 번역은 현재완료를, 어떤 번역은 수동태를 취한 것입니다. 먼저 현재완료란, 어떤 일이 이루어졌고 그 영향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과거완료는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끝이지만, 현재완료는 그 결과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경우이죠. 그렇다면 ‘찼다’를 현재완료로 표현하는 것은, 그때가 왔는데, 단순히

온 것으로 끝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 효과가 유지되고 있다는 독특한 표현이 됩니다. 우리가 비교적 최근에 봤던 누가복음의 나사렛 회당 장면을 기억하시죠? 거기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예수님이 읽으신 후 뭐라고 하십니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여기서 ‘응하였다’라는 말은 ‘찼다’와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기다리던 그때가 왔고, 그때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지금까지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실패 속에서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때에 자기 아들을 직접 보내셔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기다리고 고대했던 그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다가온 것입니다. “때가 찼다”라는 선언은 그 감격을 담은 표현이죠. 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그것이 현재완료로 보여주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수동태입니다. 말하는 자가 직접 행하는 것은 ‘능동태’라고 부릅니다.

수동태는 누군가에 의해 일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숨어서 이 일을 진행하고 계신 분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이때는 크로노스적으로 도달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때를 주도하시고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역사 속에 개입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라면 불가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때가 찼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이 늘 그렇듯, 예수님도 갈릴리 나사렛의 무명의 목수 출신 청년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학위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당히 선포했지만, 그 외침에 모두가 반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전파될 때도 똑같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외치고 계십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함께 하자!”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그

이야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듣고 반응하는 자들에게 그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우리 인생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1. 나에게 ‘그때’가 있었는가? 먼저 내가 새로운 시대, 그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선 ‘그때’가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특히 모태신앙인 분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모태신앙의 가장 큰 신앙적 문제는 뭐라고 했습니까? ‘거저 얻었다’라는 것입니다.

그저 누가 준 신앙이 아니라,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 신앙이 된 그때의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의 기점은 하나님이 없는 삶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개인과 사회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순간이며 그 하나님이 나에게 ‘실재’가 되는 순간입니다. ‘송하맹호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얼마나 잘 그렸는지 한국의 대표적 미술 작품입니다. “오, 참 잘 그렸네. 어떻게 저렇게 그렸을까? 털이 다 서 있는 것 같아. 정말 대단하지 않아?” 이렇게

말하면서도 누구도 그 호랑이를 보고 도망가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 진짜 호랑이가 나타난다면 가만히 서서 감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마치 종이호랑이 같은 존재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실존 앞에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살아계시는 분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내 삶이 바뀐 것입니다. 2.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가? 만약 그때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다음 문제는 영적 아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영적 부모로 자라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누가 끌어주지 않고 보호해 주지 않으면 내 신앙조차 스스로 지켜낼 수 없는 여전히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 질문에 반드시 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하는데도, 그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는데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자라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특별히 내 복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고 나누면서 우리는 자라게

됩니다. 부모의 삶을 살면서 한층 성숙해지는 것처럼, 영적 생명을 낳고 돌보면서 우리도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때’ 이후로 지속적으로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3. 내 인생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가 ‘그때’를 경험했다면,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내 삶의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때를 주셨고, 그때를 시작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그때를 만드셔서 여러분과 동행하시며 꿈꾸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못나고, 별 볼 일 없고, 때로는 소망도 잃어버린 사람들을 붙들고 사용하시는 것이 특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봐도 그렇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귀하게

쓰십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과 비전은 예수님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분이 내게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지 그것을 고민해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계에 때가 찼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은 몰라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삶에도 ‘그때’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때가 얼마만큼의 시간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은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로 다가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오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이 메시지 앞에 서서 듣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이끌고 도우시는 그 하나님, 그 예수님, 그 성령님을 우리가 의지하며, 오늘도 내 삶을 붙드시고 자라게 하시며 귀하게 사용하시는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때가

찼습니다. 우리는 반응했고, 그것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이야기가 되어서 주와 함께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1) 우선 우리 안에 오신 그 주님의 실존을 우리가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 앞에 마주하기를 원합니다. 복음이 실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영적 아이, 영적 청년, 영적 부모. 주님의 기대만큼 나는 자라가고 있는가? 3) 그때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그때가 임하기를 바라며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