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에 대한 네 번째 설교입니다. 잠언은 여러 명의 저자들이 남긴 경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저자가 있다면 솔로몬입니다. 저작 시기도 불분명하지만, 대략 1-9장은 포로기 이후, 10-29장은 포로기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특별히 10-29장의 잠언은 개별 잠언들이 구전 전승으로 유래되다가 현재의 모습으로 정리되어 전해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잠언에 대한 처음 두 편의 설교에서는 1-9장에 해당하는 ‘지혜 담화’에 대해서
다뤘고, 지난주부터 다루는 내용은 솔로몬의 잠언 1집에 해당하는 내용들입니다. 잠언은 삶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을 다루는 부분이 많습니다. 저는 신앙은 언제나 앎이 아니라 삶의 영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은 올바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없으므로, 올바른 삶은 올바른 앎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앎이 삶으로 가지 못한다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인도의 힌두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며 기독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는 정말 이상적이고 멋진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정말 전혀 그분을 닮지 않았군요. 만약, 당신에 기독교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우리 힌두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순간은 훨씬 빨리 찾아왔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뼈를 때리는 이야기이지요. 우리가 삶으로 살아낼 때 그 복음은 세상에 들려질 것입니다. 마이클 고먼은 <삶으로 담아내는 복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나 개인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 복음을 삶으로 담아내지 않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복음의 한 모퉁이만 삶으로 살아낸다면, 그 증거는 효력이 전혀 없거나, 오히려 부작용만 드러낼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생명에 온전히 참여함으로써 그 온전함 속에서 복음을 구현한다면 그 교회는 적절하면서도 신뢰할 만한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알고 믿는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이 결국에는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하나님이 받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임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삶을 강조하면서도 절대적으로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까 소개했던 인도에 관한 이야기에서,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일화가 많습니다. 간디는 예수님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보였고, 성경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던 인물로 나옵니다. 산상수훈을 아침마다 읽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간디가 기독교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알 수도 있고, 우리가 때로는 그 가르침대로 선한 삶을 살수도 있지만, 그것을 우리가 신앙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으로 우리의 지식을 채우고, 삶의 선한 행실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성령님과의 동행이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헬라 사람은 말합니다. “겸손하라, 너 자신을 알라.” 로마 사람은 말합니다. “강해져라, 너 자신을 체계화 하라.” 유교는 말합니다. “위대한 자가 되어라,
너의 단점을 고쳐라.” 불교는 말합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라, 너 자신에게서 벗어나라.” 힌두교는 말합니다. “혼자가 되어라,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라.” 이슬람교는 말합니다. “복종하라, 너 자신을 확고히 하라.” 물질주의자는 말합니다. “근면하라, 너 자신을 즐겨라.” 기독교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를 따르라, 그와 같이 살아라.”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 함께 본 잠언 16:1-9는 잠언 안에서 ‘여호와의 주권’에 대해서 가르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잠언 전반이 삶의 실천적인 것을 강조하고 가르치지만, 그 모든 것의 기초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속에 살아감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 그 인과관계, 그 결과에 대해서 말합니다. 대체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고 이런 식으로 원인과 결과가 주어지는 가르침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오늘의 본문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 안에 이것의 운행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6:1-9에는 8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부분을 ‘여호와 잠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여호와께서 주권을 갖고 계심을 말하는 것이지요. 먼저 1절부터 살펴봅시다. (잠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이 말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주체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서 심사숙고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사람이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그것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다 설명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모르며 통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창세기에서 요셉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애굽으로 팔려가서, 또 그곳에서 무고하게 감옥으로 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 대체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어요. 그러나 요셉은 그 과정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그 과정을 이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만큼은 늘 신실하게 믿었고, 자신을 보내신 자리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여기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이죠. 지난 수요예배 끝나고 허공진 집사님과 또 두 아이와 함께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째가 척추측만증이라는
것으로 지금 고생을 하고 있고, 둘째도 조금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로 하였기에 기도를 받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갖고 기도를 받기 위해서 나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이지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자녀의 문제가 부모님에게는 가장 큰 어려움이죠.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이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제가 두 딸을 앉혀놓고 이런 얘기를 나눴어요. “성경에 보면, 질병과 고난이 죄로 인해서 오는 심판인
경우들이 있어. 그런데 또 꼭 그렇지는 않음을 말해주는 본문들이 있어. 대표적으로 욥기가 그렇지.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닥친 고난을 보면서 고난이 온 것을 보니 네가 죄가 있다고 정죄를 해. 그러나 욥기는 욥의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이 아님을 말해줘. 또 예수님도 신약에서 병을 고쳐주시며 그것이 죄로 인한 것이 아님을 말해줘. 우리는 때로는 이유를 몰라. 왜 이런 고난을 겪는지, 왜 이런 질병을 만나는지...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의 삶을 지금도 이끌어가고 계시는 분임을 믿기에 그분께 기도하는 거야. 그 믿음은 엄마나 목사님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너희 스스로의 믿음이 중요해. 나는 너희가 질병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하게 되기를 기도해. 그러나 그것에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는 몰라. 때로는 바울에게 있었던 질병처럼, 너희가 계속 삶에서 가져가야 되는 것일 수도 있어. 만약 그렇다면 나는 너희가 그 질병으로 인해서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너희가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해.” 정말 감사하게도 어제 검사 결과 좋은 소식을 듣게 되어서 너무나 기쁩니다. 제가 두 아이에게 했던 이야기는, 이번 일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의 삶의 문제에 적용되는 주권에 대한 믿음의 태도입니다. (잠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수요일에 봤던 말씀 가운데 잠언 14:6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즉,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할 줄 아는 자입니다.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것은 오만함입니다. 가끔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특별히 저와 같은 목회자들에게 잘못된 생각이 자리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으면 모두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틀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헛다리를 짚을 수도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무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해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고, 비천하게 여기는 자가 하나님의 지혜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에 강한 힘이 있다고 말해요.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 경외라는 것이 잠언의 핵심이죠. 경외함 안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하나님이 될 때, 두려워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강한 힘이 되십니다. (잠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을 주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7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의 근심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면 해결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때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한계가 없습니다. 최근에 테슬라에서 ‘자동주행 자동차’를 계발해서 판매를 했습니다. 아직 그 기술이 완전한 것도 아닌데, 그것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자는 영상까지도 올라오더라고요. 아직 불안한 인간의 기술인데도 그것을 믿으니 잠을 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 127:2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근심이 있거나 불안하면 잠을
잘 못자죠. 맞습니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은 평안함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샬롬’이 내 삶 안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평안’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운전대’를 내어 맡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때로는 버겁습니다. 내 삶의 운전대를 주님께 맡기고 나는 그 차에 타서 동행하면 평안함이 있죠. (잠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쓰임에 적당하게’라는 것은 ‘그의 목적을 위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지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나름의 자리와 목적에 맞게 만드셨으니”라고 번역을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살다가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주권적 고백을 하는 것이지요. ‘악한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즉, 악인을 향한 심판도 연기된 듯 보일지라도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심판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바라보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또 하나님의 공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 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악한 자, 교만한 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의 존재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삶 가운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십니까?” 이것은 구약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던졌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악이 이렇게 판치는데, 하나님 정말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우리도 이 삶을 살다보면, 악한 자들의 형통함을 납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역할이 필요하기에 참고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교만과 악에서 떠나지 않으면 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여호와의 주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다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나님의 주권이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잠 16: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속하게 된다는 것은 죄악과 함께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죄악이 속량 받는 것, 용서를 의미합니다. ‘인자와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인자는 ‘헤세드’인데, ‘사랑, 인애’를 의미하고, 진리는 ‘성실, 진실’ 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단어입니다.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면 우리는 죄를 용서받으며, 죄악의 영향력으로부터 떠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뭐 이건 백번을 강조해도 필요하죠. 죄를 이기는 것은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추구하고 갈망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도 사랑의 한 모습이라고 했어요.
“하나님, 하나님은 그런 분이 맞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지위를 인정해 드리고 높여드리는 일이죠. 언제나 내 삶이 죄악의 유혹을 받고, 마음에 시험이 들면... 그것은 어두움이 몰려온 것이거든요. 그때 그것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주님을 찾고, 주님을 부르고,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잠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사람의
행위는 직역하면 ‘사람의 길’입니다. 잠언에서는 언제나 우리의 인생이 ‘길’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길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길이면, 원수들과 더불어도 화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화목하게 하다’의 주체가 ‘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관계의 문제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회복시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평화는 오직 여호와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잠 16:8)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바르게 살며 가난한 것이 부정하게 살며 부유한 것보다 훨씬 낫다.” 고대인들도 소득에 따른 공의와 정의 문제 앞에 고심했습니다. ‘불의한 많은 소득’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적지만 ‘공의와 함께 하는 소득’을 선택할 것인가? 저는 하나님은 결과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보다는 사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소득이 많고 적음, 부의 빈은 죄악의 여부가 아닙니다. 핵심은 정의로운 소득인가? 여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정의로울 것인가? 재물을 바라보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재물의 문제가 여호와의 주권을 말하는 이 부분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재물을 대하는 마음은 언제나 신앙의 문제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착한 임대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교수님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살아낼까? 이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집주인이라면 최대한 ‘전세’와 ‘월세’를
올리지 않는 것도 그 실천이라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격차를 줄이는 것, 재정을 더 열악한 곳으로 흘려보내는 것, 우리의 자리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고민하지 않으면 우리는 욕망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배부른 자는 화가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고민해봐야 합니다. 지금 잠깐 배고플까, 영원히 배고플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큰 존재 앞에 우리가 서는 것이지만, 그분이 우리의 삶에 원하시는 것은 큰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작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실천들입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우리에게 매우 유명한 말씀이지요.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삶은 스스로 선택하여 여호와의 주권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택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롤랜드 머피는 WBC 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궁극적인 결과는 인간이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여호와의 몫이고, 그 결과는 사람이 열망하던 그 성공이 아닐 수도 있다. 예레미야 10:23의 고백이 여기에 매우 적절하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렘 10:23)’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무능. Helplessness!” 저는
롤랜드 머피의 주석에서 인용해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Helplessness’라고 잡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이고, 실제로 무력해도 된다는 것이며,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반드시 무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우리의 삶에는 각자에게 맡겨진 주도권이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운전대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왕좌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운전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면 대리운전을 맡기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합니다. 그것은 내 상태가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요청하면 언제든 우리를 돕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운전하는 삶보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운전대를 맡아주시는 것을 더 기뻐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신 정말 맡겨드려야 합니다. 반만 맡겨드리면, 사고가 나는 법이죠. 예화 하나를 나누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주도권에 대한 설교를 나눌 때마다 이 예화를 떠올리는데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고 성능이 좋은 배가 있었습니다. 대서양이라는 바다를 횡단할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서 최첨단의 기술로 배를 만들었고, 그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배였습니다. 이 배를 만들 당시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선전되었습니다. 그만큼 완성도 높은 인류 최고의 배였습니다. 허나, 이 배는 지금 우리들에게도 너무나 유명한 배가 되었습니다. 그 배의 이름은 ‘타이타닉호’입니다. 이 배의 재질은 강철이었습니다. 배의 길이는 268미터였고,
시속 43km를 내는 당시로서는 굉장한 배였습니다. 이 배가 1911년에 제조되었는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그 때, 제작비가 1천만 달러(120억)였으니, 100년이 지난 지금의 값어치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총 탑승인원이 3547명이었고, 이 중에 승무원만 900명이었습니다. 900명의 승무원과 최고의 숙련된 항해술을 연마한 초특급 항해사가 운항한 타이타닉호, 이 배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 배는 북대서양에서 빙하를
피하지 못하고 충돌하여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1500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과연 타이타닉호는 그들의 선전 문구처럼,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항해사가 배를 움직이는 키를 잡고 있었고 첨단의 기술력이 그 배를 운행했지만 그것은 빙하에 부딪혀 침몰하는 배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그와는 전혀 다른 한 배를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그 배는 하나님의 배, 노아의 방주입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나무로 만든 배였습니다. 단 8명이서 만들어낸 배였습니다. 배를 조정하는 키도 없습니다. 움직이는 동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삼킨 큰 홍수 속에서 그 배는 떠다녔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그 배 안에는 노아의 가족 8명과 각종 동물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배를 움직이시고 돌보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배를 조종하는 키 하나 장착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이 조종하시는 그 배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침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참 역설적입니다.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가지’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우리에게 삶을 잘 살기 위한 여러 가지를 조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가지’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인정은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창세기는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시작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웁니다.
바로 그 믿음에서 우리의 삶은 새롭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맡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저에게도 이 훈련은 매우 필요합니다. 제가 연말이 되면 대담하게 늘 외칩니다. 마음 있는 분들만 사역에 지원하십시오. 그렇게 말해놓고 저도 이만저만 걱정이 많습니다. 작년에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마음을 주시더라고요. ‘맡기라.’ 그래서 처음에는 약간 설득 모드로 가다가 그 다음부터는 정말 사역의 자리가 채워지는 것은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5개월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저는 또 배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놀랍다. 저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매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자기가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 삶은 노심초사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삶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굳건히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프토코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조건이었습니다. 완벽하게 가난한 자. 삶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자. 다른 이에게 완전히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 하나님 나라는 그런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의 주권을 완전하게 내려놓을 때 그만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의 약함은 곧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단어를 기쁘게 외칩니다. Helplessness!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능합니다. 무능해도 됩니다. 무력해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요. 조금 부족해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요.
그 약함을 주님께 고백하여 주님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우리는 주께 두 손 들고 항복하지만, 세상 앞에 두 손 들고 승리를 외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