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해나가며 저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이 저와 같이 부족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나가신다는 감격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변화들입니다. 교회의 성장도 성도의 성숙도, 사실 모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특별히 성장은 우리의 관심이어서는 안 되고, 성숙은 언제나 우리가 힘써야 하는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성숙하게 우리를 만드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다만 저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계획이 있기에 저를 목회자로 부르셨고, 저는 저의 자리에서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저의 모습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역할이라면, 성도의 역할 또한 같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감사를 느끼는 것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대한 궁금함과 추구함이 여러분 안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저는 매우 감사하게
느낍니다. 주일에 와서 이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들음으로 예배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는 것이 목표라면, 우리는 그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을 궁금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 하나님 앞에 놓여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내 삶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묻게 됩니다. 궁금해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뭘 좋아하실까?’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도 사랑을 하면 궁금해 합니다. 이 사람은 뭘 좋아할까? 또 있죠.
이 사람은 뭘 싫어하는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힘쓰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 힘쓰는 것이 사랑하면 나타나는 자동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도 늘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 함께 보는 잠언 12장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대해서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선 12장의 주제를 다루기에 앞서 1절을 보겠습니다. (잠 12: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훈계를 좋아하는 자가 곧 지식을 좋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식’은 지혜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지혜를 배우며 성숙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와 대조되는 사람의 특징이 뒷부분에 나타나는데 징계를 싫어하는 자입니다. 그는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른 짐승들과 구별되는 특징입니다.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배워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무인도에 홀로 살면서 윗세대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우지 못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그 삶은 인간으로 살아있으나 동물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본성대로 사는 것이 옳지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성은 길들여져야 합니다. 자기 본능대로 살면
짐승과 같습니다. 훈계를 통해, 때로는 책망을 통해 우리는 발전하며 생명의 지혜를 소유한 자가 되는 것이죠. 어쩌면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겠습니까?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죄의 본성대로 살던 우리가 그 전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자유한 것인 줄로 알았지만, 말씀의 교훈과
책망을 받으며 그로 말미암아 바르게 되고 의로 교육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 선한 일을 행할 능력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말씀이 내게 주는 교훈을 들어야겠지요. 12장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의 가르침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 가장 반복되고 두드러지는 가르침은 ‘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기억할 수 있도록 3가지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말은 삶의 이정표입니다. 8.
이치에 닿게 말하는 사람은 존경을 받지만 멍청이들은 멸시를 받는다. 23. 신중한 사람들은 지식을 과시하지 않지만 말 많은 바보들은 제 어리석음을 광고하고 다닌다. 말이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은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잠 12:23)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저는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2가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내 물질이 어디에
사용되고 있는지를 보면 내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압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에 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맨날 ‘비트코인’이나 ‘주식’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TV 프로그램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과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관심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올해 등록한 준형 형제가 ‘말’이 많은 사람이에요. 말하는 것을 엄청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자기가 퇴근 후에 모임을 갈 때, 그 모임이 성경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면 꼭 가고, 그런 것을 싫어하는 모임이면 잘 안 간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딱 느꼈습니다. 저 친구가 지금 미쳤구나. 우리는 말하는 것을 모두 중요시 여깁니다. 배우자를 만날 때에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많이 얘기하는데,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은 곧 마음이 잘 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말은 곧 진실한 마음, 의로운 말은 의로운 마음을 의미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비교적 적은 것 같은데, 우리 윗세대 신앙인들은 뭐만 하면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주여” 이런단 말이죠. 우리가 얼마 전에 초청했던 김복유 형제도 찬양 하다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렇게 말하죠. 저는 그 형제가 자꾸 왜 그러는지 이해가 돼요. 자기가
연예인 되지 않으려고 계속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욕’을 통해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죠. 모르겠습니다.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성품이 변한다는 것은 말이 변하는 것입니다. 다르지 않아요. 삶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싶으시면 입술을 열어 고백을 하십시오. 시험이 오면, “나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집중이 안 되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바라보자.” 말이 바뀌면 생각과 마음이 그리로 갑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할거에요. 내 삶 속에서 계속 주님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죠. 여러분 찬양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술로 고백하며 또 그 하나하나의 가사를 꼭꼭 씹어서 고백하면 그 찬양이 나의 고백이 돼요. 그것이 아니라 애국가 부르듯이 부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찬양을 듣는 것까지 하고 있다면, 부르기도 해보세요. 부르는 것에 마음을 더 집중하면 그것이 개인예배입니다. 고백을 담으면 그것이 기도입니다. 말은 내 마음의 거울입니다.
내 삶의 이정표입니다. 2. 말은 사람을 죽이고 살립니다. 12장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말의 힘입니다. 6. 사악한 자들의 말은 사람을 죽이지만 올바른 이들의 말은 사람을 살린다. 13. 나쁜 사람들은 험담으로 곤경에 처하지만 착한 사람들은 대화를 나눔으로 곤경에서 벗어난다. 14. 말을 잘하면 만족을 얻고 일을 잘하면 보상이 따른다. 18. 무분별한 말은 난도질로 상처를 주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상처를 아물게 한다. 25.
걱정은 우리를 짓누르지만 격려의 말은 기운을 돋우어 준다.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말이 안 통할 때 참 답답하죠. 그러다가 말대꾸를 시작하면 “말 안할 때가 좋았어.” 뭐 이러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하듯이 말에는 위력이 있죠. 말은 사람을 죽이고 살립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구약에서는 ‘살인’을 행동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십계명에서 금지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시는 것은 형제를 향하여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구약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은 잊어버리고 그 명문화된 율법을 지켰는가 안 지켰는가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가르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한 측면인데, 그것이 단순히 꼭 살인을 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은 형제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부터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화를 내는 행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셨냐면 ‘욕하는 것’입니다. ‘라가’라는 욕을 말씀하시는데, 라가는 아람어로 ‘골이 비었다’는 욕입니다. 번역하면 ‘골빈 놈’
이런 의미입니다. ‘라가’라고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그럼 나는 ‘욕’만 안하고 다른 기분 나쁜 것은 다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자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일인데요. 군대에서는 워낙 ‘욕’이 생활화 되어 있는 곳 아닙니까? 그때 군대에서 여러 사건사고가 많아서 갑자기 ‘푸른 병영’을 하겠다고 대대적으로 군대의 문화를 바꾸는 시도를 위에서 명령을 내린
적이 있어요. 뭐, 갑자기 내무반 색깔을 하늘색으로 바꾸고, 경례 구호를 바꿨습니다. 원래 저희는 ‘돌격!’인데, ‘돌격, 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었어요. 뭐, 나름 효과가 있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중에 제일 황당한 지시가 뭐였냐면, 후임을 혼낼 때 욕을 하지 말고 대체어를 쓰는 거였습니다. 예를 들어, ‘야, 이 멍멍이야!’라고 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냐면 ‘야, 이 꽃사슴아!’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현장에서 잘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욕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말로써 사람을 세우느냐, 밟느냐, 살리느냐, 죽이느냐는 우리가 모두 뉘앙스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죠.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니까요. (잠 12:18)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여러분, 제가 지난주에 그런 말씀드렸어요. 목회자로서 가장 고마운 선물은 ‘헤아림’이다. 결국 그것도 말의 힘이죠. 특별히 이 시대에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만나서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는 그 따스한 말이 너무 중요하죠. 말을 잘 사용하셔서 사람을 세워주고, 살려내는 그런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할 수 있습니다.” 3. 말로서 하나님 나라를 세웁니다. 마지막으로 말로써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죠. 하나님은 의와 진리, 거룩함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따르려고 해도 닮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신학용어로 ‘비분여적 속성’ 혹은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하는데요. 전지, 전능, 무소불위,
자존, 불변, 무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만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의와 진리와 거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고 요구하시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는 주기도문에서 고백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것.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성품이 이 땅에도 임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죠. 여러분을 통해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6장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말합니다. 악한 영을 상대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기들입니다. 거기에 보면,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가 있어야 하고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은 우리의 말을 통해 ‘의’(공의, 정의)를 세우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는데, 유일하게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형상과 함께 설명되는 것은 ‘통치’입니다. 이 표현이 왜 쓰여졌냐면, 고대세계에서 왕들은 자신의 통치권이 직접 미치지 못하는 먼 지역에 자신을 닮은 석상을 세우고, 그것으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었거든요.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세상에 드러내는 대리자의 역할로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중에 이 사명을 가장 잘했던
사람으로 다윗을 꼽죠? (삼하 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다윗은 자신의 자리에서 백성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 32:1)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과 다윗에게만 주어지는 말씀이 아니에요. 따라해 봅시다. “왕, 왕, 왕, 왕 나는 왕자다.
하나님 나라의 나는 왕자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아까 얘기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나타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럼 우리가 있는 곳에는 뭐가 있어야 하냐면 ‘의와 진리’가 있어야 하죠. 의와 진리가 밝은 빛입니다. 의와 반대되는 것이 ‘죄’잖아요. 진리와 반대되는 것이 ‘거짓’입니다. 그것은 모두 어두움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잠언에서도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잠 2:9) 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잠 21: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잠언 21장은 마치 선지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난 너희의 예배가 기쁘지 않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는 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드리는데 그 예배자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서는 이렇게 외치죠.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 지어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거짓과 비진리와 부정직과 불의는 없는지요? 오늘 잠언 12장 17-22절까지는 구약시대 일상생활에서 익숙한 법정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7. 선한 사람은 진실한 증언으로 의혹을 일소하지만 거짓말쟁이는
속임수로 연막을 친다. 19. 진실은 길이 남고 거짓은 오늘 있다가도 내일이면 사라진다. 22.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자기 말을 지키는 이는 사랑하신다. 재판에서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사법부가 정의가 무너지면, 신뢰가 무너지면 그 사회 전체가 문제가 생겨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 속 시대에도, 무전유죄, 유전무죄.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부정직과 불의가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서 사용되는 것도 말입니다. 우리는 말로 진실을 세울 수 있고, 진리를 수호할 수 있으며, 공의와 정의를 추구하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속속들이 잘 모릅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답게 살아주십시오. 잠깐의 이익을 위해서 속이지 말고, 거짓에 하나님 자녀의 자존심을 팔지 말고, 불의한 일을 행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평안이 여러분에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추구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내 삶을 변화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 일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정직하기 위해, 진실하기 위해, 정의롭기 위해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에게는 오래된 좌우명이 있습니다. “진실은 통한다.” 10대 때부터 갖고 있던 좌우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때로는 안 통하는 것같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조금 더 그 시간을 경험하며 돌아보며 깨닫게 되어 좌우명이 길어졌습니다. “진실은 늦더라도 언젠가 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오늘은 잠언 12장에 나오는 ‘말’에 대한 교훈을 살펴봤습니다. 세 가지로 정리했는데요. 1) 말은 삶의 이정표입니다. 2) 말은 사람을 죽이고 살립니다. 3) 말로 하나님 나라를 세웁니다. 우리는 이 말로 누구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의 문제에 대해 우리의 신앙 안에서 ‘신앙인다움’에 승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설전입니다. (시 141:3)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다윗의 이 고백처럼 우리가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갈
때,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빛입니다. 여러분의 말이 여러분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이끄는 그러한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