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마가복음 7:24-30 / 생동하는 믿음 / 강정규 목사

2021-05-21 · 마가복음 7:24-30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막 7: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막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막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막 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우리가 지난주에 ‘믿음 맛 샌드위치’라는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은 기대하신다는 메시지를 나눴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강조되는 것은 그것이 믿음이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아무나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인간이 자연스럽게 믿음과 그에 따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뚫고 발휘해야 하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한계란 여러 가지 일 수 있으나, 가장 기초적인 예로 든다면 하나님을 믿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음이라는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러므로 우리에게 유명한 히브리서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소망하는

그것이 실제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믿음이 특별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거저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얻기 위해 어떤 자격이나 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아무렇게나 모두에게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있는 장벽을 이겨내고 믿음을 발휘해야 하며, 때로는 계속 소망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은

자신에게 있는 믿음에 대한 공격을 이겨내고 믿음을 지키고 발휘하여 승리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부분에서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태도가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자녀라고 표현하며, 오직 유대인이 예수님의 복음과 기적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그것을 이유로 이 여인의 청을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막 7:26)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수로보니게(Syrophoenicia)라는 것은 수리아 지방의 페니키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페니키아는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의 해안 지대(동쪽)를 일컫는 고대 지명으로 기원전 3000년에 셈어족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이주해서 그 지방에 살았는데 그들을 페니키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은 수리아 지방의 페니키아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정과 부정,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구분하는 민족이었죠.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 여인은 함께 할 수 없는 그런 여인입니다. 이방인이고 게다가 여인이었어요.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자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그녀와 말도 섞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이라고 안 그럴까요? 원래 관계는 상대적이죠. 저 사람이 우리를 싫어하면 우리도 저 사람이 싫은 것이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님께 나오는 것 자체가 나름의 믿음을 발휘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대개 갈망하는 자가 은혜를 입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님께 찾아오기도 하고, 삭개오처럼 나무에 올라가기도 하고, 지난주에 봤던 것처럼 회당장이지만 개의치 않고 나오고, 옷자락이라도 붙들려고 하고. 이 갈망함 자체가 믿음의 모습이죠. (막 7:25)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이 여인은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고, 우리가 몇몇 사람들에게 봤던 것처럼 그 발 앞에 엎드립니다. 여기까지는

때론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는 모습입니다. 다급한 문제가 있으면 신을 찾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닥쳐오면 교회 와서 기도하기도 해요. 위기가 오면 사람들은 엎드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믿음인가? 아직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청을 거절하실 뿐 아니라, 굉장히 곤욕스러운 답을 하십니다. 이 여인에게는 굉장히 야박하게 말씀을 하시고, 그 내용은 놀랍도록 냉담하고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막

7: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을 자녀로 비유하고, 지금 예수님이 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자녀를 먹이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개’의 요청을 들어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여인도 나아갔잖아요. 엎드렸잖아요.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표현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태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흔하게 이방인들을 개라고 지칭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표현을 쓰며 그녀의 요청을 거절하시는 것은 매우 의아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니까 이렇게 하시는 것에도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을 합니다. 그럼 이 말씀이 우리에게 뭘 가르치는지 더 신중하게 계속 살펴봐야겠죠. 어쩌면 여인의 입장에서도 유대인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딸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에 대하여 “나는 개들에게는 떡을 주지 않아”라고 말했을 때 어떠했을까요? “에이 치사해, 지가 그렇게 잘났어?” 우리는 보통 저런 얘기를 들으면,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잠시 내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내려놨던 자존심을 챙기고 싶은 마음이 들겠죠. 그러나 이 여인은 더 내려놓습니다. 즉, 전부 내려놓습니다. (막 7: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개’라고 부른 예수님을 참 멋쩍게 하는 표현이죠. 그리고 구속사역에서 유대인들의 우선권도 인정합니다. 또한 자신을 ‘개’라고 표현한 것도 수용합니다. 더 나아가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개에게도 주어지는 최소한의 권리가 있음을 요청합니다. 유대인들이 먼저 떡을 먹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방인인 자신도

그 부스러기라도 먹기를 기대하며 기다릴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이 주는 유혹이 아니라, 믿음의 테스트로서 ‘시험’ 말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엎드림인지, 진짜 엎드림인지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감정’에 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녀는 감정의 위기 앞에서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믿음이 ‘진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떨어지는 은혜라도 주시면 됩니다! 이 여인의

대답에 대한 결과가 이렇습니다. (막 7: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이 여인의 이 반응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믿음을 방해하는 요소를 이겨내고, 그 안에서 진짜 믿음을 보였습니다. 믿음의 테스트를 이긴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크든지 작든지 믿음을 갖고자 하는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만히

자동적으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올해 ‘체외충격파’라는 치료를 몇 번 받게 되었습니다. 몸 밖에서 충격파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픈 부위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 자극을 통해서 오히려 치료가 됩니다. 그런데 그 치료는 ‘아프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일부러 아프게 느껴지는 곳에 충격파를 보내고 몇 초 지나서 안 아파지면 다시 아픈 부위를 찾아서 충격을 줍니다. 믿음이 자라가는 과정도 늘 이런저런 장애물을 극복하며 자라갑니다. 시험을 만나죠.

믿음을 지켜내기 힘든 시험들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 시험은 외부에서도 오고 내부에서도 옵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있는 ‘감정’, ‘기분’ 등은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감정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요동칩니다. 그것이 감정의 매력입니다. 희로애락이 있지요.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다운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을 잘 사용하면 우리는 선한 것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자들에게 있어서 이성 친구인 남자들은 내가 울 때, 손수건을

건네지만. 동성 친구들은 함께 울어준다는 것이죠. 뭐가 더 위로냐면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기독교인들에게 우리에게 주신 감정으로 공감하고, 아파하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이런 감정들은 지극히 당연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좋게 사용하면 좋아요. 그러나 내 감정도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일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제 넘어지냐면 감정이 신앙을 이기는 순간 넘어집니다. 우리는 몸이

힘들어서 힘들기보다, 마음이 힘들어서 더욱 힘들어합니다. 그것이 인간이에요.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도 그 공격은 마음에 대한 것이죠. 방금 봤던 말씀 로마서 말씀 바로 앞 절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아세요? (롬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여러분, 누군가가 나를 박해할 때 그 사람을 내 감정으로 축복할 수 있습니까? 그걸 감정으로 하면 그건 비아냥거림이죠. 못합니다. 누가 날 박해하면 저주하는 것이 우리의 감정의 솔직한

반응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붙들지 않는다면 그럴 거예요.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여호와가 원하시는 삶을 따르고자 나를 드리는 것이죠. 그러면 내 감정과 말씀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말씀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은 삶임을 믿기에 우리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른뺨을 맞았는데 어떻게 왼뺨도 돌려댑니까?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나도 때리고 싶은 것이 감정입니다. 복수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면 세상의 방식을 그대로 인정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게 본성이라면 본성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거기로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배우고, 그 방향을 향해서 한 걸음씩 나를 바꿔가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방이 내 오른뺨을 때리지 않으면 좋죠. 그러나 죄악 된 세상에서 죄는 반드시 서로를 침범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때론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갈등 안에서 상대방이 바뀌면 좋죠.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신앙은 우선적 목표는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바뀌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어쩌면 끝까지 그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어요. (롬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것,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목 하라는 것.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죄악에 죄악으로 맞서고, 감정에 감정으로 맞서면... 그것은 세상 나라의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람 못 바꿉니다. 하나님이

깨우쳐야 사람은 깨닫는 것입니다. 북한 사역을 하시는 모퉁이돌 선교회 이삭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데요. 북한에서 기독교인이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형 집행자가 나중에 증언했던 것입니다.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죽이는 것인데요. 거기에는 5살 아이도 있었다고 해요. 아이의 형이 집행되는데 의자에 올라가서 목매달아 죽이는 것이었죠. 5살 아이에게 눈물이 그렁그렁 한 것입니다. 사형 집행자도 사람이니까

그 아이에게 묻습니다. “엄마를 찾냐?” 이 아이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아이 엄마가 있으면 나오시오.” 저 멀리서 엄마가 아이에게 다가옵니다. “아들아, 울지마. 우리 조금 있으면 위에서 만날 거야. 그리고 아들아, 너 이 아저씨 미워하지 마. 이 아저씨 무슨 일 하는지 몰라서 그래.” 사형 집행자가 그 말에 화가 나서 아이가 딛고 있는 의자를 차서 엄마 앞에서 죽였습니다. 다음은 그 아이의 7살짜리 형의 차례입니다. 이 아이는 엄마를 쳐다보며 말합니다. “엄마,

저 안 울 거예요. 우리 조금 있으면 위에서 만나겠죠.” 그리고 7살짜리가 감독관에게 말했답니다. “아저씨, 예수님 믿으세요. 예수님이 아저씨를 사랑하세요.” 결국 그 아이도 죽고 모두가 죽습니다. 모든 기독교 공동체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독관이 후에 변화되어 이 모든 일을 증언하게 되죠.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이 보이셨던 행동이고, 스데반이 따라서 기도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신에도, 제자들의 배신에도 그들을 사랑하고 품으셨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러분. 저의 고민도 여러분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도 인간이에요. 저에게도 감정이 있고,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 미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저에게는 꿈이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제 삶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감정에 넘어지지 말고,

말씀으로 내 감정을 이기고. 시험에 빠지지 않고,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고. 사랑하지 못할 상황이 오면 제 안에도 갈등하죠.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 모습 닮고 싶은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최근에 이런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인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영상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고민하고 있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강요’가 아니라 ‘기다림’에

대한 중요성이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으로부터 배운 것들을 삶에 적용하다 보면 한 번에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한 순종으로 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여러분이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다고 정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 삶을 우리가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조금 느려도

조금 멈칫거려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이 방향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저에게 또 여러분에게... 나아만 장군이 피부 질환이 심해서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엘리사가 그를 만나지도 않고 사환을 통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까, 그 태도에 나아만이 화가 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환대받지 못했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그 감정 때문에 그는 그냥 자신의 땅으로 가려고 합니다. “분노하여 떠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그때 나아만의 부하들이 말합니다. “해보시죠.

한번 해보시죠.” 어쩌면 이 시간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을 씻는 방법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그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는 그 요구를 지키지 못할 여러 위기에 직면합니다. 내 감정과 기분, 내 주변 사람, 여러 가지로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이니까. 그러나 제가 바로 여러분들에게 나아만의 부하들처럼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도 한번 해봅시다.” 포기하고 싶고, 화가 나서 다른 길로 가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말씀을 대항하는 사탄이 주는 죄성이지만... “그래도 한번 해봅시다.” 끝까지 순종하였을 때, 나아만이 누렸던 온전함의 역사와 같이... 수로보니게 여인이 믿음으로 끝까지 나아가 치유를 경험했던 기적의 이야기 같이... 우리가 다른 어떤 것에 내 신앙을 잃지 말고, 신앙으로 감정을 이기고, 하나님을 끝까지 믿으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