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7: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행 17: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 17: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행 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행 17: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행 17: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행
17: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행 17: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행 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나비효과란 말을 아십니까? <네이버 사전> 초기치의 미묘한 차이가 크게 증폭되어 엉뚱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 1963년 유체역학의 이론을 바탕으로 수학적으로 모델화를 통해 일기예보의 이론적인 예측을 시도하던 미국의 기상학자 Edward
Lorenz가 "갈매기의 날개짓 한번이 날씨를 영원히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한 데에서 유래된 말로 후에 형상에 따른 표현이 나비로 바뀌었다. 이것은 결국 아주 작은 것에 의해서 매우 큰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날씨와 관련된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도 일어나는 일과 결과입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셀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에 있어서 광기의 역사』를 말합니다. 즉, 역사는 정상적인 사람들 가운데 있는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끌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뭔가 모난 듯하고 돌출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반감을 같습니다. 주류의 흐름에 어긋난 사람에 대하여서 보이는 반응이지요. 그러나 결국 역사를 바꾸고 이끌어오는 사람들은 그런 광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길러내야 하는 4가지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성, 지성, 영성에 대해서는 많이 듣고 이야기 합니다 인성.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선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야 방향이 정확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방향을 알았으면 그 삶 안에 주어진 각자의 사명에 대한 지혜를 기르는 것도 필요하겠죠. 그리고 영성, 성령님과의 동행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죠. 우리는 영을 통해 예배하고 영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고 영의 것들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그것은 ‘야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야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포인트는 바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야성’입니다. 우리는 온실 속의 화초들이 아닙니다. 거친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지키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종종 우리를 군사라고 표현합니다. 야성 없는 군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적을 누를만한 기세가 보일 때 우리는 그 군대를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다듬어진 야성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기는 총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에 세상을 향한 야성은 있어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패배자들이 아니라 승리자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주의 자녀가 되어서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오실 주님의 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우리는 주의 승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주를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과 패배의 날이지만, 우리에게는 영광과 승리의
날입니다. 그것은 흐릿한 약속이 아닙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에 연합군과 독일군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 전쟁의 성패를 가른 연합군의 작전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습니다. 사실상 이 작전의 성공과 더불어 전쟁의 성패는 결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바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승리를 가늠하는 사건이었지만, 전쟁은 마침내 최후 승전일에 완전히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은 이미 세상과 죄에 대해서
승리를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기신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 확신과 그 감격 속에 최후의 완전한 승리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는 조금 더 당당하게 세상으로 인하여 흔들리는 게 아니라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활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의 기독교는 완전한 소수였습니다. 주류가 아니었어요. 이들이 전한 복음이 당시 최대의
제국인 로마의 심장부에 들어가서 로마의 국교가 되고, 더 나아가 전 세계에 퍼져 가장 많은 사람이 믿는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17장에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이 총 3번의 전도여행을 했는데, 첫 번째는 바나바와 함께 비교적 짧은 선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전도여행은 실라와 함께 팀을 이뤄 떠나게 됩니다.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죠.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메시지를 받고, 유럽
땅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빌립보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며 복음을 전한 바울은 이제 아래지방으로 여행을 하며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에서의 일입니다. 마게도냐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많은 곳에는 회당이 있었죠. 바울은 이 도시에서 세 번의 안식일을 보냈으니 20일 가량을 머물게 됩니다. 바울은 선교를 할 때, 우선적으로
회당으로 갑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죠. 당시 회당에는 회당장이 있는데, 매 안식일마다 정해진 성경을 읽은 후 회중에게 “누가 성경 말씀을 잘 강해해서 우리 모두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없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구약성경을 강해하며, “이 예언이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어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라고 선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게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모독이라는 죄명 하에 십자가에 달린 죄인이지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3주간의 전도의 결과 몇몇 유대인들과 이방신을 섬기던 헬라인 무리들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는 바울의 복음을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죠. 회당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되자, 바울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도시에서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이후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에 보낸 편지입니다. 1:9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살전 1: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그러나 바울 일행의 선교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소동에 휘말리게 됩니다. 소동은 유대인들이 일으킨 것인데, 유대교에 호감을 갖고 회당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에 대하여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을 처단하기
위해서 소동을 일으키고, 그 증거로 제시한 죄목이 바울이 “예수를 ‘왕’으로 선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여지가 있냐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일이죠.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 17: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세계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 새번역에서는 ‘세상을 소란케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황제숭배 사상을 강요하고 그것을 이데올로기화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체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카이사르를 포함한 로마의 황제들은 신으로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황제숭배사상이 만연한 땅에서 바울은 ‘예수가 왕이시다’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 17: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가이사의 명을 거역했다는 것은,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로마 제국 안에서의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이 황제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 또는 ‘왕’이라고 부르고, 그가 통치하는 새 시대가 왔다고 외친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 정부와의 정치적 대결을 초래한 듯 보이기도 했겠지요. 어쩌면 지금은 로마 사회처럼 황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흐름이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전 세계가 하나 되어
무신론을 외치며, 욜로(YOLO)를 외치며, 돈이 최고라고 말하고,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통치하에서 로마의 법대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전하는 사람들, 바로 이들이 세상을 소란케 한 광인들이었습니다. 주류에 도전하는 사람들.. 비록 소수였지만, 이들로 인해서 세상은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선교를 한 지역들에 많은 믿는 자가 생기는데, 바울 선교 시작으로부터 약 15년 후에는 4만,
약 45년 후에는 32만, 그리고 100년이 지난 후에는 240만에 이르는 기독교인이 생겨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바울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초대 기독교의 전파에 있어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울이라는 것에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나비효과와도 같은 것이지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날개짓이 이제 전 세계를 휩쓰는 복음의 역사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행되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도구가 된 나비와
같은 사람들의 날개짓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그 역할을 누구에게 기대하실까요? 하나님이 이 시대에는 주무시고 계시지 않고, 역시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가 전파되기 위해서 일하신다면... 그분은 누구를 사용하실까요? 세상에 가치에 물들기 보다 하나님께 물들어 있는 사람, 하나님의 진리를 굳게 부여잡은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무식하지만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삶을 향해 자신의 삶을 던질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점점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저는 기독교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원래 숫자에 의지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숫자가 많아서 강했던 것이 아니라, 전심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났던 것입니다. 제가 피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야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 앞에 연약한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이 내가 주를 더 의지하는
간절함이라면, 주님이 함께하시는 우리는 연약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그분이 나를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는 적은 숫자이지만, 기억하십시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광기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엘리야 시대에도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의 추종자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는 엘리야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한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정금과 같이 단련되어 가는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잘 단련되어야 하고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지식과 은혜가 필요한 것처럼, 또한 아름다운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 실력과 영성이 필요한 것처럼 여러분은 지금의 시간들을 통해서 잘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의 생각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객관적 기준은 무너지고 주관적 기준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각자의 생각이 중요하고 각자가 정의하는 가치가 가장 옳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시대. 이제 우리는 어느 누구도 ‘틀렸다’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다르다’라고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가 말하는 틀린 놈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틀렸다’라고 이야기하는 그 놈 뿐입니다. 성경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를 이야기 합니다. ‘이런 것들은 죄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가운데 죄는 없습니다. “나의 선택이고 나의 권리인데, 네가 뭔데 나에게 죄가 있다고 하느냐?”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가져다둔 사고의 방법입니다. 기독교가 욕을 먹습니다. 어쩌면 핍박받는 것이 당연하기도 합니다. 기독교가 바로 ‘틀렸다’라고 지적을 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을 먹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기독교인들조차도 이런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사고에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뭔가 지적을 받으면, “나의 영성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 내가 은혜 받고 있으면 되지. 틀린 게 어디 있어! 이건 나의 신앙생활 방법인데.” 혹시 우리들 가운데도 이런 모습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가르치시면서 내가 율법을 폐하려 함이 아니고 완성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명확한 성경의 기준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대한 모든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온전한 기준에 맞춰 살기를 원하셨던 것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바로 그 예수님의 기준에 맞춰서 세상의 가치에 물들지 않고 대항하여 살았습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베테랑이라는 영화에서 경찰로 등장하는 황정민이 뇌물에 흔들리는 사람에게 말하죠.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대해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꾸 물질의 가치로, 성공의 가치로, 세상의 가치로 우리를 흔들 때에 우리가 돈이 없어도 믿음의 가오는 지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야성입니다. 저는 철들지 말자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아마 무슨 의미인지 아실 것입니다. 제가 ‘온유’라는 성품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죠. 야생마가 길들여진 것이 온유입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서 온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길들여 지지 않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세상에 철들어버리면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론 좀 무모하고 때론 철없이 살아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필요하다면 모두가 'Yes'라고
하더라도, 단 혼자일지라도 ‘No'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광기, 세상을 소란케 하는 사람, 바로 폭풍을 일으키는 나비의 날개 짓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그런 사람을 찾으실 때,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 준비된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들,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때, 주님, 아버지 마음을 아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세요, 나를 보내주세요. 메마른 땅도, 거친 사막도, 모두가 나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네가 틀렸다라고 이야기하는 그곳에도.. 하나님 향한 변함없는 마음으로 제가 살아가겠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가치를 세우겠습니다. 제가 있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물들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