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_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찼다 / 하나님의 나라가 / 가까이 왔다 / 회개하여라 / 복음을 / 믿어라. 우리는 6주간 이렇게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말씀은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의 나라가”라는 주제를 다뤄보겠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주요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신다면 뭐라고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요 사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랑은 바로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윤리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사랑’과 ‘하나님 나라’ 중에 더 크고 포괄적인 개념이 ‘하나님 나라’인 것이죠.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가 예수님의 복음을 설명하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아시다시피 천국은 하나님 나라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이 부분은 이제 사귐의교회 교인들이라면 너무나 잘 아는 얘기죠? 천국은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유대인의 표현 양식에 따라 ‘하늘나라’라고 완곡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전하고 싶었던 가르침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죠. 아까 이야기했듯이 사랑은 그 행동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산상수훈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의 시작인 팔복의 첫 번째와 마지막 구절이 무엇을 말합니까?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인클루지오를 사용해서, 결국 팔복도 하나님 나라를 얻는 사람들의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는 신약에서 본격적으로 표현되지만, 그렇다고 구약에 없는 이야기를 갑자기 말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없을 뿐,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주제는 구약 전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외침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시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내면적인 것, 내 심령에 일어나는
것, 내 영혼을 만져주는 것 정도로 나의 개인적 신앙과 영성에 대한 이야기로 여긴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저 ‘내 죄 사하시고 나를 구원받게 하시는 분’ 정도로 여긴다면 그것은 정말 좁은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바라보지 않는 신앙은, 철저하게 ‘교회’라는 건물과 개인의 영혼 속에 갇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신앙생활이 어떻게 되냐면, 주일마다
예수님 면회하러 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다가 주일이 되면 ‘성전’에 갇혀 계신 예수님께 찾아와서 사식 좀 드시라고 헌금 넣어드리고, “안녕히 계세요, 다음 주에 다시 보러 올게요” 하고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중의 삶은 세상에 속해서 세상의 유혹을 받으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엇다고 말하며, 일주일에 한번 회개하고 깨끗해지고 죄의식을 덜어버리고자 교회에 나오는 삶밖에 되지 않는 것이죠. 이것을 전문 용어로
‘사우나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교회 와서 내 죄의식을 씻어버리고 개운한 마음으로 세상에 나아가 죄를 짓고 다시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고귀한 명령을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음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만약 대통령이 당신을 초청했으니 지금 당장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청와대로 달려가겠지요. 그러나 이 땅의 대통령은 곧 지나가고 바뀝니다.
또한 대통령이 우릴 부를 일도 거의 없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 속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어요.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보다는 자신의 통치권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죄악의 시작이죠. 하나님은 이렇게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죠. 전 세계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 순간에 딱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준비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그러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거부하는 역사를 반복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실패를 합니다. 그 상황에서 구약에서 선포된 것은 무엇이냐면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this age), 반역의 시대가 끝나고, 새롭게 오는 시대(age to come)가 시작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바로 그 새롭게 오는 시대의 시작점을 이렇게 부릅니다.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 메시아의 날인 것이죠. 그러므로 죄악된 세상 속에서도 신실하게 살아가던
믿음의 백성들은 모두 그 약속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주의 날이 되면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을 떠난 이 반역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이 바라보는 이 메시아는 온 세상의 주인이며, 온 세상에 구원을 베풀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구약의 시대적 배경을 알고 있다면, 이것은 너무 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잘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역사에도 일제 강점기가 있었지요. 만약 그때 어떤 선지자가 나타나서 “한국을
일본의 압제에서 회복하는 것은 아무 문제없이 쉬운 일이다. 이제 후로는 한국이 전 세계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야기 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주권도 없는 나라가... 그런데 구약의 선지서는 온통 그런 이야기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시대조차 하나님의 말씀은 포로 귀환 그 이상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온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지입니다. (사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여기서 만민은 ‘모든 사람’(all people)이 아니라, 모든 민족(all nations)을 의미합니다. 모든 민족이 찾아 모여들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비전입니다. 그리고 신약은 이렇게 선언한 것이죠. “때가 찼다.” 바로 그 주님의 날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시대에 대하여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라는 사실입니다. 일전에
복음서를 가르치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것을 제가 2가지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가르치심과 고치심’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복음서는 수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통치하고 있던 사탄의 세력이 예수님을 만나면 내어 쫓기는 것을 보여줍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들어오자, 어둠의 나라, 사탄의 나라, 인간의 나라는 그냥 밀려 나가는 것입니다. 성육신. 우리가 예수님이
오신 것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죠. 하나님의 임재하심. 믿음으로 그분의 통치 안으로 들어간 자들은 그분의 통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벽하게 임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었던 시간입니다. 당연히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어둠은 쫓겨나고 사람들은 회복되고 치유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럼 여러분,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런 완벽한 치유가 일어나고 있나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것처럼 완벽하게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지만, 완벽한 치유와 회복이 나타나지는 않음을 우리는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질병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낫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진실하게 믿었다면 예수님 때처럼 나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물을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도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실 이유가 있을까요? 마지막 날,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 땅에서 일어날 치유와 회복은 불완전한 치유와 회복입니다. 우리는 그 한계를 안고 살아갑니다. 지금의 우리의 시간 속에서도 치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치유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 아픔과 어려움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견디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완전한 통치의 그 날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병이 있습니다. 특별히 내면의 병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그것을 붙들어주십니다. 이 땅에서 완벽하게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상처에 매이지 않을 정도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지난 5월 12일 OECD에서 ‘코로나19 위기가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해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2020년 우울증 유병률을 조사한 것인데, OECD 15개국에서
한국이 1위입니다. 37%.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힘들어 합니다. 현대의 무서운 병이죠. 자살 충동을 겪기도 합니다. 기독교인 안에서도 자주 경험합니다. 저는 이 나라에 정말로 종교가 아니라 참된 신앙 안에서의 치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내면이 하나님 안에서 치유되는 것이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주님이 만지시고 다스리시고 치유해주셔야 해요.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는 즉각적인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보여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우리가 꿈꿀 수 있기 때문이죠. 주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깨닫고 소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까지 이 땅에서 그때처럼 완벽한 치유는 보류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나라가 완벽하게 세워질 때까지 완벽한 치유는 아닐지 모르지만, 이 땅의 삶에 필요한 치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그 안에서 우리는 이 땅에 속하였으나 하늘을 소망하며 살아갈만한 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아무 소망 없이,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저 죽음 이후의 세계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이 땅에 임한 그의 통치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로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초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말 그대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그가 부르신 사람들의 조건이 우리보다 좋다면 어쩌면 우리는 거기서 한번 더 좌절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가장 연약한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일하셨고, 신약에서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을 모습으로 오셔서 그저 그런 사람들을 부르셨지요. 예수님이 부르신 것은 실패하지 않을 만한 인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을 부르셨다면, 저는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같은 사람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곁에 따라다니면서도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실패. 마가복음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기 전까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끊임없이 실수하고, 끊임없이 실패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오늘도 예배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잘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주님은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사람들은 이 초청 앞에, “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되었다” 말하며 초청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준비되어서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알지만, 제가 아는 것이 과연 그분의 크심에 비해서 얼마만큼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주 작은
부분일 것입니다. 그저 그분이 나를 살리시는 나의 창조주라는 것을 알고 고백할 뿐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몇 가지를 알고 믿을 뿐입니다. 제가 신학교부터 공부를 하면서 경험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신학대학 1학년이 제일 교만합니다. 마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도 교만했던 적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많은 지식을 쌓으면 조금씩 더 하나님을 아는 부분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알면 알수록 그 분은 더 크시고 오히려 제가 모르는
부분이 훨씬 더 많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식의 총량은 늘어났지만, 모르는 부분에 대한 것도 더 확장된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분의 진리를 다 깨달아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진리를 붙잡고, 또한 그 진리가 나를 붙잡아 나를 변화시키고, 그분의 큰 존재 앞에 더욱 겸손해져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높은 기준과 신분을 가진 존재가 아니더라도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님을 우리가 인정했다면, 성경이 말하는 그 나라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살펴봅시다. 1) 믿고 따르는 자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믿고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식이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지식의 작용은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오히려 바리새인 서기관 등 더욱 지식 있는 자들은 그분과 멀리 있었습니다. 믿음은 지적인 능력과 전혀 다릅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믿고 배워가며 알아가려는 자들이 따르는 자들인 것입니다. 함께하고 싶으니까요. 여러분.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고, 설교를 찾아 듣고. 이것은 그냥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고 따른다는 것은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담음
성경을 주셨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에 한번 예배하는 사람과 삶 속에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삶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저는 농구를 좋아하는데요. 시키지 않아도 공부합니다. 시키지 않아도 묵상합니다. 시키지 않아도 경기를 찾아봅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인데, 공부하지 않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소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죠. 요즘에 유튜브가 워낙 잘 되어 있으니까 좋은 콘텐츠 많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것에 너무 의지하여 성경을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제 가르침과 설교가 정말 성경과 일치하는지 확인하셔야죠. 제가 성경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지적하셔야죠. 여러분, 성경과 다른 길을 가면 저는 버리셔도 됩니다. 저로 인해 성경을 버리시면 안 됩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시고,
말씀을 안고 살아가기 위해 힘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눈이 열리고 인생을 살아갈 방식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잘 모를지라도 진정으로 그 부르심 앞에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 같은 자들 3주년 예배 때에도 양용의 교수님이 오셔서 어린아이 같음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죠. 이것은 잘못 해석하면 이상한 길로 갑니다.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나 이런 것이 초점이 아니라, 하찮음이 초점입니다. 당시 시대의 어린아이는 그래요. 어린
아이는 스스로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미비한 존재입니다. 어린아이 같다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고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현대 사회의 가르침은 전혀 반대 아닙니까? 자신의 능력이, 가정의 배경이,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자신을 지켜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있으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거대하게 압도해 오는 세상에서 나를 지켜줄 스펙을 쌓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나를 지켜줄 수는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보통 학생들이 공부의 즐거움이 없습니다. 공부가 자기 방어를 위해 갖추어야 할 스펙 쌓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공부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배우고 준비하는 일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의지하는 삶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와 무관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
속에 주신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을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게으름으로 인해 그것이 발현되지 않으면 불행한 것이죠. 그것들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도 나를 방어해 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없다. 하나님이 없으면 난 안된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는 구절이 있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필요하다면 그 어떤 것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부자 이야기는 재물을 더 소중하게 여긴 이야기지요. 우리는 재물이 내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르침은 TV만 켜면 우리에게 누릴 것을 말합니다. 이것 소유해야
해, 저것 가져야해,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냉장고는 이 정도 사야하고, 아파트는 이런데 살아야 하고, 차는 이런 걸 몰아야 해.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유혹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빼앗고자 하는지 잘 보셔야 해요. 세상의 가치관을 붙들고 살아가면 백전백패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실력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력 있는 그리스도인 되어야죠. 다만, 우리가 실력을 쌓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달라야 해요. 뭔가를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잘못된 초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미 우리를 부르셨어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 내 삶에 주신 사명을 완전히 드러내고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삶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뭔가 더 초월적인 능력을 얻거나, 갑자기 우리 머리 위에는 링이 생기거나, 내 성품이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중심이 바뀐 것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 것이고, 나의 영적 정체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면 많은 것이 바뀝니다. 나를 압도시키고 절망시키는 세상 가운데 여전히 살아가고 있지만,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수록, 새로운 소속감과 새로운 정체성이 내 존재의 기반을 만들어, 그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초청을 따라 그 분의 나라에 속하게 되었을 때,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것을 넘어, 우리를 가족으로 삼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창조 때, 삼위 하나님의 그 사귐 속으로 인간을 초청하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던 것처럼, 다시금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 삼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여기는 한 가족이 되는 것, 이것이 교회가 갖고 있는
놀라운 비전입니다. 교회를 하늘 가족 공동체라고 부르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랑하겠다고 발버둥 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과 구별된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일부로서 하나님 나라 없이 살아가는 삶을 택할 것인지,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그 나라의 일부로서 이 땅을 살아갈 것인지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삶은 길이 달라요. 두 군데 속할 수는 없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의 나라, 세상의 나라, 사탄의 나라와는 대비되는 나라가 열린 것이며, 그곳으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이미 그 나라를 고백하시는 분이라면,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나의 정체성을 다시금 고백하시고, 아직도 세상 나라에 속한 삶을 살았음을 깨달았다면 이제 이 부르심 앞에서 ‘나는 주를 따르겠습니다’ 고백하며 나아오십시오. 건너오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해 있습니다. 기도제목 1. 세상이 말하는 수많은 메시지를 들어보십시오. 한번 뿐인 인생을 말하고, 때로는 그것을 별 의미 없이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냥 즐기면 된다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면 그것이 답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그것에 동조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 나라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그보다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주어진 인생이 아닙니다. 대충 살다가 대충 갈 인생이 아닙니다.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우리는 길을 찾고, 아직도 길을 찾지 못해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을 밝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발견한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삶이 우리 안에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2.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시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엇을 보여주는지 아십니까? 시인은 ‘젖 뗀 아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젖을 바라며 엄마 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떤 필요 때문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젖을 뗀 상태임에도 엄마 품에 있는 것은 그냥 그 엄마를 사랑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내 삶을 바꿔주는 어떤 도구가 아니라, 내 삶이 그냥 하나님에게 맡겨져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중심에 서서 하나님을 내 삶으로 끌어내리려고 하지 말고, 내 삶을 다 들고, 내 인생을 다 들고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3.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대가를 치른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 삶이
하나님을 따르고 있음이 고백되는 것입니다. 포기하셔야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내 삶에서 내가 내려놓아야 할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어떤 세상적인 것들, 감정, 욕구, 욕망들이 있다면 구별하여 내려놓으십시오. 이 시간 생각나게 하시는 것들을 내려놓고, 내 삶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며 그 나라를 더욱 추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내 삶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