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청년·기타

사귐의교회 강정규 목사

2021-06-13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하시고 부르셨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신 궁극적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이것에 답을 하기 어렵다면, 성경에서 답을 찾아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그를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럼, 여기에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여러분이 구원받는 것이 시작되고,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파되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맞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는 것이 구원의 끝이 되면 안 되는 것이죠. 그것은 반대로 아까 그 이야기에 접목하면 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끝이 났다면요?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혹은 신약의 교회

공동체가 자신들의 구원에 만족하고 끝났다면요? 아주 간단합니다. 복음은 그 세대에서 끝나버립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끝나 버립니다. 하나님 그러셨겠어요? 하나님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진 백성과 세대를 그냥 두고 보시지는 않으시죠. 그렇다면 우리는 내 삶이 매우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 구원받은 백성들과 하고 싶은 주님의 비전이 있는 것이죠.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지 않으면 우리의 복음은 축소됩니다.

복음이 그냥 나를 살리는 것, 개인의 구원으로 축소되어 버립니다. 실제로 내가 구원받는 것을 종착지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든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복음으로 낳았다’라는 표현들이 있거든요. 여러분에게 다 복음의 전달자가 있겠죠. 그럼 그 복음의 전달자에게는 전달자가 없을까요? 아니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누군가가 또 있을 것입니다. 그 위의

사람에게도 또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쭉 도표를 따라서 올라가면 한국에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또 그것을 추적해 올라가면 어디로 가겠어요? 초대교회로 가겠죠. 그러면 그 위에는 예수님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복음의 도표가 2000년 동안 이어지는 그 과정 속에,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쓴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핍박을 받은 사람은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삶을 바꾼 사람은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드린 사람은요? 있었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잠언의 말씀을 단순한 윤리적 교훈으로 받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내가 조금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로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 잠언의 가르침대로 살면 좋지. 그런데 안 돼도 어쩔 수 없지.” 이러한 뭔가 내 신앙의 업그레이드를 해주는 옵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삶은 내가

이런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축복받고, 구원받는 것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내가 의롭고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내 개인의 어떤 만족과 성취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저는 글쎄요. 굳이 그것을 위해서 내 삶을 성숙시키고 훈련하며 살지는 않을지도 몰라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 훈련에 굉장히 강하지만, 저는 아니거든요. 지난주에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저는 교회에서 자라다 보니까 어설프게 뭔가를 배우긴 했어요.

나를 위한 삶을 살면 안 된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안 했어요. 왜? 나를 위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요. 무식한 자의 무식한 신념이죠. 저는 목사가 된다는 것이 사역을 열심히 하는 일이라고 봤던 것이죠. 진리를 연구하고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몰랐어요. 왜냐하면, 제가 자란 교회는 성경공부를 하는 교회는 아니었거든요. 저는 교회에서 설교 외에 성경이나 신학을 배워본 기억이 없어요. 제 모교회의 강점은 교회를 사랑하는 법, 헌신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었어요. 그건 감사한 부분이죠. 그런데 제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목회자가 진리를 다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하는지를 깨달아 가면서부터였습니다. 저는 설교도 그냥 설교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기도해서 영감을 받으면 할 수 있는 것쯤으로 이해하고 있었거든요. 오히려 그때는 원고를 치밀하게 작성해서 하면 영발이 없는 것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중학교 때부터 주일학교 보조교사였는데 고등학교 때쯤에도 주일학교 설교를 하기도 했어요. 설교의

무게와 책임을 잘 몰랐던 것이죠. 목사가 된다는 것은 특별히 설교와 목양을 감당하는 일인데, 내가 누군가를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군대에 있을 때쯤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부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과 섬김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죠. 그러면서 제 삶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깨달음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공부가 그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내게 맡겨진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 이해되니까... 허송세월을 보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 깨달음이 있고 난 이후에 복학하고 자발적 왕따처럼 지내기도 했어요. 너무 허송세월하였기에 그것을 만회하고 따라잡으려면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관계에 대한 욕심을 조금은 줄이고 배움에 초점을 두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밥값 아껴서 책 사서 보는 신학생 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모교회는 5년 사역하면 성지순례를 보내주는데, 4년 사역하고 떠나게 되었어요. 그때도 퇴직 선물을 주시겠다고 해서 ‘주석 세트’ 사달라고 하고 그랬죠. 저는 지금도 책을 많이 삽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 교회는 책을 사는 예산은 편성을 안 했어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올해부터 사례비를 허락해 주셨으니 여기에도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며, 여러분께 나누기 위한 공부와 자료 구입에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례비 받아서 에스라도 가고, 세미나도 가고, 이번 세미나에만

몇십만 원을 쓰고 책도 10만원 이상 구입했습니다. 이게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열심히 준비하는 것. 그래서 여러분, 저 말고 혹시라도 주변에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계시는데... 성도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시는 목회자가 있으면, 생각날 때 도서비도 보내드리고 하시면 그것이 응원이 될 것입니다. 사실 어제 온라인에서 제가 너무 사고 싶은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보았습니다. 설교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책이죠. 책 한 권이 10만

원입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여러분을 위한 섬김이니까 구입하고자 예약해뒀어요. 그런데 갑자기 저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목회하시는 개척학교 목사님들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개척 동역자가 8분 정도가 계시는데 개척 후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계시지만, 성도가 많은 분이 30명. 사례비 못 받는 교회도 많아요. 한 곳은 성도가 한 가정 있는 곳도 있어요. 제가 그분들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분들이 저런 책을 사고 싶어도 너무 부담이

크죠. 그래서 저희 구제비 통장을 찾아봤습니다. 가능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분들을 위해 책을 사서 보내드리려고 해요. 저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제 책은 제 돈으로 살 거예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렇게 책을 사고 공부를 하고, 이런 것들이 단순히 저의 신학적 역량과 지식을 높이기 위한 어떤 것이라면, 저는 결코 이것을 위해서 그런 열심과 시간을 쏟지 않았을 것입니다. 책 살 돈 아끼면 치킨이 몇 마리입니까. 저는 저의 발전에 그렇게 관심이

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자리에서 저를 부르신 이유에 합당한 책임을 다하고 싶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 잠언 21:31 _ 최선을 다하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여라. 그리고 승리를 안겨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여라. 오늘 하나님은 잠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삶의 어떤 부분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가르치면서 한 가지 꿈이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순종해나가는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일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으로 인하여 삶이 변화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변화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상이 있어요. 반드시 그렇습니다. (엡 2: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존재하도록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한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에베소서는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의 날 구원은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은 어떤 의무조항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진정성과 확신입니다. (엡 4: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백성인 사귐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그 안에서 그분의 온전함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제가 예전에는 성령충만도 오해했어요. 성령충만이 무슨 레이저가 나가고 기적이 발현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성령충만이란, 어떤 신비한

것을 막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동행하는 삶이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 성령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 아닙니까? 내 삶의 목표가 여기에 없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했는데, 그분이 내 안에 있는데 나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거나, 나는 내 뜻대로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내 삶의 주인이 바뀌지 않은 것, 거듭나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전에 이런 표현을 썼죠. 우리는 잘린 가지였으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접붙임을 받아서 다시 생명을 공급받은 그러한 가지이다. 그 일이 정말 여러분에게 일어났다면, 우리가 뿌리로부터 전해지는 것을 공급받고 그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는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성숙해지고 변화하여 갈 때, 우리를 바꾸시는 그 구원의 은혜, 복음의 역동성은 메시지가 되어 세상에 선포될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원하셨고, 이스라엘에게 원하셨고, 교회에게 원하셨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을 때, 우리의 삶은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 그것을 통해 누군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느끼며, 깨달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지금 시대의 키워드는 ‘진정성’입니다. 아무리 멋져 보여도 진실하지 않으면 이제 메시지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모습이 중요해요.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잠언을 통해 우리의 삶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 가르침에 진실하십시오. 이번 주에 묵상했던 본문은 잠언 20-22장까지입니다. 잠언 22:16까지가 솔로몬의 잠언 1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20-21장의 말씀 중에 키워드를 찾아 살펴볼 것인데, 이 말씀들은 솔로몬 1집의 끝부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에 주목했습니다. 성령님 안에서의 전인격적인 변화에 대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를

담아서 우리의 전인격을 부분을 차례차례 살펴보려 합니다. 1. 눈과 귀 (잠 20:12) 듣는 귀와 보는 눈, 이 둘은 다 주님께서 지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과 귀를 주셨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왜 주셨을까요? 귀는 들으라고, 눈은 보라고 주셨습니다. 눈과 귀는 특별히 두 개씩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눈과 귀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내 삶이 성령님과 연합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죄가 인간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해요.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두려워 숨고, 부끄러워 가립니다. 구원은 다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죠. 물론 온전한 회복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눈물도 고통도 어떠한 악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 그때 가서 변할 것인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성령님의

일하심 속에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며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며 염려했던 내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평안을 누리고, 세상의 소리를 듣고 세워졌던 내 안의 가치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변화되는 일이 우리 안에 시작된 것입니다. 눈과 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눈과 귀를 보호하여 세상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고, 눈과 귀를 통하여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을 행하십시오. (잠

21:2) 사람의 행위는 자기의 눈에는 모두 옳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잠 21:4)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이러한 죄는 악인을 구별하는 표지이다. 거만한 눈은 곧 오만한 마음이죠. 교만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곧 에덴에서의 죄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교만해지기 쉬워요. 우리는 우리가 옳지 않을 수 있음을 날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해요. 죄악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시선’을 어디에 두는가. 이것은 곧 내 발걸음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잠 21:13)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으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의 귀는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이 신음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우리를 통해 회복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구입니다. 세상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십시오. (행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 3: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 앉은뱅이의 구걸을 듣고, 그를 주목하여 보고,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변의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도지 한번 나눠줬다고 오는 시대가 아닙니다. 진실하십시오. 그것을 주께서 원하십니다. 2. 마음 (잠 21:10) 악인은

마음에 악한 것만을 바라니, 가까운 이웃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못한다. 눈과 귀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들었다면, 마음으로 결정을 합니다. 바로 이 마음은 배로 따지면 조타실입니다. 여기서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지요. 악인은 마음이 악합니다. 마음이 악하면 행동도 악한 것입니다. 의인이 선한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잠 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이 구절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단어는 ‘니쉬마트’인데, 이것은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멀피’(R. Murphy)라는 학자는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넣으신 양심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기준을 우리 안에 주셔서 그것이 등불 되어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을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잘 활용하면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과 교제하지만, 이 등불이 꺼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죄악은 자꾸 우리의 마음의 눈을 가립니다.

유혹이라고 말하잖아요.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죠. 잠언에는 양심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요. 특별히 이것을 ‘정의’와 연결시킵니다. 정의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이죠. 정직도 그런 것입니다. 정의와 정직을 따르는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 20:10) 규격에 맞지 않은 저울추와 되는 모두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잠 20:23) 규격에 맞지 않은 저울추는 주님께서 미워하신다. 속이는 저울은 나쁜 것이다. 속이는

저울을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깐의 유익입니다. 이득을 보고자 하는 것이죠. 나의 유익을 위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이 나에게 주는 현재적인 것들을 택하는 것입니다. (잠 20:17) 사람들은 속여서 얻은 빵이 맛있다고 하지만, 훗날에 그 입에 모래가 가득 찰 것이다. (잠 21:6) 속여서 모은 재산은, 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안개처럼 사라진다. 속이는 것도 같은 이야기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이

없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많이 말하는 것이 ‘코람데오’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에 대해서 저도 정말 많이 싸워왔지만 참 부끄러운 부분이 많아요. 저도 하나씩 하나씩 더 민감하게 제 삶을 바꾸고자 힘쓰는데요. 그중에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이 ‘불법 다운로드’입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죠. 그래서 최근에 많이 바꾸고 있어요. 돈이 들더라도 정당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아직 완벽하지는 않아요. 여러분도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힘쓰다 보면 그 안에서 과속방지턱처럼 내 삶에 걸리는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힘써야 해요. 한 번에 안 될 수 있죠.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성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생길 수 있어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치유입니다. 죄에 민감해지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거룩과 친밀해진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닮을수록 사실 더 부딪치는 것이 많아질 것입니다. 함께 이겨내 봅시다. 저도

여러분 앞에서 더욱 부끄럽지 않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계속 힘쓰겠습니다. (잠 21:3) 주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반기신다. 예배(제사)는 정말 중요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예를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십니까? 레위기 전체가 예배하는 방법을 가르쳐요. 그런데 하나님은 주일에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 닮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성령충만이 전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연합과 동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께서 어디 가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는 말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여러분의 삶의 순간순간 눈과 귀로 무엇을 보면서 마음에서 갈등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기도하옵기는 주께서 나를 이기시는 결과가 나타나길 바랍니다. 내가 패하고 주님이 승리하셨다면 기뻐하십시오. 3. 행동 (잠 21:8) 죄인의 길은 구부러졌지만, 깨끗한 사람의 행실은 올바르다. 사실 행동은 마음보다 앞서 언급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마지막에 다루는 것은 마음이 내 내면의 문제라면, 밖으로 드러나는 행실은 나의 문제를 넘어서 타인과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시작을 하면서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의 구원에서 끝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통로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을 봅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번에 세미나를 가서 듣고 동의하게 된 부분이 있었는데요. 우리 시대를 크게 3가지로 분류한다고 해요. 전현대(Pre-modern) 시대가 있었고,

현대(Modern) 시대가 있었고, 후기 현대(Post-Modern) 시대가 있습니다. 프리-모던 시대에는 권위가 인정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권위를 갖고 전하면 거기에 사람들이 반응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외치면 반응했던 시대였습니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강력하게 전하면 먹히던 시대였습니다. 1980년대 이전까지의 시대가 보통 그랬습니다. 그런데 모던 시대로 넘어오면서 중요한 화두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합리성입니다. 이때부터는 사람들이

합리성을 따져요.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하면, “왜요?”라고 묻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잘 설명해주어야 하는데, 교회는 “그냥 무조건 믿어”라고 반응하는 곳이 많았어요. 합리적으로 질문하면, “기도가 부족한데... 믿음이 떨어졌냐?” 반응하기도 했죠. 그래서 교회 안에 지성인들이 많이 떠나갔습니다. 지금은 모던 시대적 사고를 가진 분들이 윗세대가 됐고, 젊은 층의 사고방식은 포스트-모던입니다. 포스트모던은 모든 것이 해체되고 있는

때입니다. 기존에 유지되던 것들을 다 부정하고 새로운 기준과 틀이 생겨나는 것이죠. 그러니까 기준은 사라지고, 그로 말미암아 너무나 중요하게 부각되는 가치, 이 시대의 화두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정성입니다. 이제는 기준이 없어서 기준에 빗대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고, 진정성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유튜브에서도 ‘뒷광고’ 논란이 크게 생겼어요.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것이 거짓이면 외면당합니다. 사람들은 진정성을 원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교회는

이 부분에 대해서 세상에 진정성 있게 다가가고 있는가? 여러분은 세상이 교회를 진정성이 있는 곳으로 바라볼 것 같습니까? 기윤실에서 작년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가톨릭(30%) > 불교(26.2%) > 개신교(18.9%)입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상당 부분은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양주 목사’가 유명했죠. 갑자기 제 블로그 방문자가 늘어서 뭔 일인가 키워드를 봤더니 ‘양주 목사’로 검색했다가 제 블로그에도 들어오고

했던 것입니다. (잠 20:3)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나 쉽게 다툰다.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는 기독교인이 그런 모습을 보여도 부끄러운데 목사라는 사람의 모습이 저러니 얼마나 세상 앞에 부끄럽게 됩니까? 이런 모습을 보면 잠언의 가르침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사람들이 교회와 교인들을 진정성 있다고 바라보지 않아요. 그런데 이것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도

그런 것이 당연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가르침과 삶이 동일했잖아요. 그는 진짜였잖아요. 주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정말로 그렇게 사랑하셨어요.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시고, 말을 건네시고, 용서하셨어요.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본성대로 하면 다툴 일도 많고 다 삭막하게 살게 되는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용납하는 것은 품는 것은 때로는 내 본성과 부딪히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기 위해 힘쓰는

것은 중요해요. 저도 가끔 마음에 어려움이 생기면 묻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제 마음과 다를 때가 있어요. 그러면 기도합니다. “주님, 그럼 제가 주님 뜻 따라 볼 테니, 제게 힘을 주세요.” 때론 명백하게 정의롭지 못한 것은 바꾸어갈 필요도 있겠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서의 문제들이 있다면, 상대방의 어떠함이 아니라, 적어도 내 모습이 주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라면, 우리가 바꾸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 사람의 잘못은 그 사람의 모습이고, 내 모습은 내 모습이죠. 그리스도인. 크리스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성도. 거룩한 무리. 우리가 이 이름 앞에 책임감이 있어야 하죠. 한 번에 바뀌지 못할 수 있지요. 그래도 씨름이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보시는 진정성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온전함’은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완벽하게 닮겠습니까? 그러나 닮고자 하는 내 모습,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세상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금요일에 ‘사우나 영성’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것은 일주일에 한 번 사우나와 같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통해 나의 죄의식을 씻어내는 것이 전부인 신앙생활입니다. 매주 6일 동안 마음대로 살다가 죄의식이 떼와 같이 쌓이면 주일에 와서 한 번씩 털어내고, 다시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인의 표찰은 잠시

내려두고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다가, 그래도 구원이 불안해지면 안 되니까 교회에 오는 삶. 만약 200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 모습으로 살았다면 결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대도, 계획도, 방법도 그 모습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우나 영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진실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전인격적으로 달라져 가는 사람. 저는 그 삶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을 가치

있게 살아내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 입에서 그리스도가 소개되지 않더라도, 이미 내 삶을 통해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궁금해하고 배워가는 삶. 네 삶을 보니, 나도 너무 예수님이 궁금하다고... 너의 삶의 모습을 보니, 나도 너에게 있는 예수님을 알고 싶다고... 그러한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거룩한 목표가 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아름다운 성숙의 과정으로 사용하여,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주님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진실한 변화를 일으키는 삶을 삽시다.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 옥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