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마가복음 1:15 / 3) 가까이 왔다 / 강정규 목사

2021-06-18 · 마가복음 1:15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새번역 _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찼다 / 하나님의 나라가 / 가까이 왔다 / 회개하여라 / 복음을 / 믿어라. 우리는 6주간 이렇게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말씀은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가까이 왔다”라는 주제를 다뤄보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오노다 히로’라는 사람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2차 세계대전 당시 22세의 젊은 일본군 장교였던 그는 필리핀의 루방

섬에 파견되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나고, 모든 일본군이 투항했지만, 일본이 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그는 필리핀 루방 섬의 정글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다음 해에는 부하들이 그를 찾아가서 전쟁이 끝났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그조차 미군의 속임수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식을 들은 일본은 오노다를 돌아오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하늘에서 전단지를 뿌려서 전쟁이 끝났다고 알리기도 했지만, 어느 것도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숨어 지내는 동안도 끊임없이 그는 자신만의 전투를 해나갔는데, 민간인과 필리핀 정찰대를 자그마치 30여 명이나 살해했습니다. 한 일본인 기자가 그를 찾아가서 만나게 되었는데, 자신은 자신의 상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결코 복귀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1974년에 그의 직속상관이 그곳을 찾아가 그에게 투항 명령서를 건넸습니다. 무려 29년 만에 그는 루방 섬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51세의 오노다 히로는 소총 한 점과

탄환 500발, 수류탄 6개 등 무기를 당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간수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의 이러한 삶을 보면서 어떠한 생각이 드십니까? 이미 망해버린 나라, 패배한 전쟁이라는 진실을 믿지 않고, 자신만의 헛된 망상에 빠져 22살의 청년이 51세의 중년이 되기까지 헛된 싸움을 하였던 그의 모습은 헛되고 한심하고 안타깝지 않습니까? 그는 시대를 분별하지 못했고, 시대를 읽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삶을 살았습니다. 이미 세상은 바뀌었는데, 그는 과거의

옛 시대에 맞춰 살아가면서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신의 젊은 날의 30년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시대가 바뀌었는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헛된 것을 주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기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렇다 할 꿈도 비전도 없는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단순한 교리 외에는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이해하지 못한 채, 오노다 히로처럼 바뀐 시대에 어울리는 꿈을 갖지 못하고 이미 지나간 시대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왔다”라는 단어 (엥기조)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가깝다, 가까이 오다, 가까워지다’라는 단어인 것이죠. 그럼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일까요, 아주 가까이 왔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막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막 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마가복음에 한번 더 기록된 ‘가까이 왔다’는 표현입니다. 유다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실 때, 유다가 온 것입니다. 즉, 무척 가깝고 곧 임하기 직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선포는 오고 있다는 진행형의 의미도 있지만, 지금 막 도착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제일 어렵게 느끼는 개념이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already, not yet’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매우 독특한 특징입니다. 사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비로소 성경의 천국 비유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저희 교회 성도님들은

이제 대부분 이해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님을 의미하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완전하게 임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임했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도표를 보십시오. 이 도표를 종말론적 이중구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새로운 시대와 이 세대 사이의 겹친 시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이 시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존은 곧 끝납니다. 다시 말해, 죄악의 시대에 하나님의 단호한 개입이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신 것이죠. 이것이 이미 이뤄진 일입니다. 그래도 현재의 이 시대는 좀 더 계속되다가, 예수님이 오실 때 완전히 끝이 납니다. 아직 오지 않은 재림입니다. 재림 때 이 시대는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 하나님의 나라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바로 이 두 시대가 공존하는 때입니다.

우리의 발은 이 시대에 속해 있으므로 육신은 땅을 딛고 살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가져오신 새로운 시대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씨의 비유를 보면, 씨가 뿌려지는 시점이 있고, 씨가 자라는 시점이 있고, 수확하는 시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비유는 이 과정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씨는 이미 뿌려졌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리고 수확하는 시점이 있습니다. 재림의 때입니다. 지금은 그 씨가 자라는 때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의

내용은 씨가 자랄 때 가라지도 같이 자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중간에 종들이 묻죠. “가라지를 뽑을까요?” 주인은 “뽑지 말아라. 뽑다가 밀도 뽑힐까 하니 뽑지 말고 내버려두어라” 합니다. 마지막에 함께 추수해서 가려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재림 때의 심판입니다. 판결이죠. 구분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이 진보하고 발전하면 종말도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문명의 발전이 이룩한 것도

많지만 사실 그 발전만큼 파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온전한 것을 보지 못한 땅에서의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핵이 발견된 이후, 핵에너지로 인류가 발전할 줄 알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가장 위협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에어컨이 있으니 여름에도 더위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기술 발달로 지구 온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 위협이 매우 실제적입니다. 기술 발전이 우리를 편하게 해주는 것 같지만, 과연 우리 미래를 정말 지켜가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생명을 걸고 주님을 따랐을까요?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그 부활의 역사를 바라보며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구나. 그리고 자신들이 그 시대에 속했다는 새로운 비전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였어요. 하나님 나라와 ‘구원’, ‘영생’ 등은 거의 같은 것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이니까요.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영국의 한 유명한 신학자가 학교에서 퇴근하는데,

한 청년이 담대하게 전도를 하기 위해서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그때 그 교수님이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교수님은 씩 웃으며, “에베소서 2:8에 따르면 있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8에 따르면 지금 그냥 진행 중이지. 그리고 디모데후서 4:18에 따르면 아직 못 받은 게 확실하네.” 여러분. 구원받았습니까? 예전에 교회에서 이런 것 잘 물어봤어요. 그리고 대답 못하면 믿음이 없다고 했어요. 한번 성경을

잘 봅시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은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시제이죠. 많은 사람들도 교회에서 말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때로는 손들고 고백하게 하죠.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구절에서는 ‘구원을 받는’, 영어로 보면 ‘to us being saved’라고

하여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미 받았다고 했던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조금 사라진 것일까요? (딤후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죽음이 임박해서 기록한 디모데후서에는 ‘구원하시리니’라는 미래시제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보다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당당히 말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가요, 받고 있다는 것인가요, 받으리라는 것인가요? 바로 이러한 성경의 표현들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종말론적 이중구조’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신학 안에 구원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개입하신 그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왜 힘을 잃었습니까?

현재와 미래의 구원 부분은 잃어버리고,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확신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백을 갖고 있는 자들이 뭘 힘들게 성경 말씀대로 살고자 하겠습니까? 이미 다 이뤘는데...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완전한 구원이 남아 있고, 우리의 구원은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흔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가운데 살아가면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의 약속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었던 사람들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우리에게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강력하게 소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땅은 사라질지라도 나는 거할 곳이 있다고 말입니다. 이 비전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 시대가 주는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들이 지금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날 것이고 사라질 것이며, 소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 교인들의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왜 이렇게 기쁘지 않으며, 왜 이렇게 무력한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 하나님이 이루실 이 나라에 대한 비전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한 번 받으면 끝이고, 그 다음부터는 그냥 구원의 확신만을 되뇌며 죽을 때까지 목적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유가 무업입니까? 구원받았으면 바로 바로 데려가시지 왜 구원받고 나서도 이 땅에 살게 하십니까? 저는 이곳에 모인 모두에게 구원이 시작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혹은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인생을 더 살아갈 것입니다. 그 시간들 속에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살면, 주의 재림의 날에 우리는 완벽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주님이 오셔서 끝이 날지, 내가

그 전에 내가 먼저 죽어서 끝이 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이 땅의 삶을 마칠지는 알 수 없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이루어가다가 그 날을 맞이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세속에 묻혀서 정신없이 지내다가 그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종말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마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인생을 마음대로 산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완전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며, 이 땅에 있는 허무한 것과 세속적인 것과 결국 없어질 것들의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통치를 따르는 주님께만 굴복한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구원의 여정을 해나갈 때,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믿음을 잃지 않고 온전한 구원으로 나아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2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와 성령입니다. 여러분, 이 두가지를

잃으면 안 됩니다. 소중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은 교회가 이 중간 과정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교회는 우리가 구원의 여정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지만, 저는 이 세상에 교회가 없고, 여러분이 없다면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것 같아요. 또한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새로운 시대를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능력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이 비전을 주셔서 인생에 대한 꿈을 꾸게 됩니다. 성령님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우리는 성령이 충만해지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 무관심하면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근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안에 기쁨이 없는 것은, 대부분 우리 안에 성령께서 근심하시기 때문입니다. 근심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계속 무시하면

어느 단계부터는 우리와의 소통이 끊기고 성령님이 침묵합니다. 성령이 소멸한다는 표현이 그것이죠.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성품이 변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비전을 품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함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과의 동행을 추구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갈 힘입니다. 교회 안에서 함께 연합하고 동행하길 힘쓰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끝으로, 성경을 미루어보건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특징 3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인 것이죠. 1)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내게 씨가 뿌려졌다는 것을, 나와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했어요. 우리가 청와대에도 마음대로 못 들어가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려했다가 혼난 것만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것이 있어요. 그들은 실제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며 자부심을 갖고 있었어요.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헛된 것을 꿈꾸기에 혼나고 오해를 이해로 바꾸시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이 예수님으로 인해 변화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그 기쁨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존재의 변화에 대한 감사가 있으십니까? 내게 이 은혜에 대한 감격이 무뎌졌다면 다시 이 기쁨을 잘 묵상하며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 제목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죠. “좋은 대학 들어가서”, “좋은 이성 친구가 생겨서” 이런 여러 가지도 감사제목이 맞죠. 그러나 그것이 나란 존재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게 된 것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참된 힘은 바로 이 감격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설령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갔어도,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없어도, 내 가정배경이 나빠도, 내 건강이 나빠도, 어떤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받은 축복 때문에만 감사하고 기뻐한다면, 무당 찾아가서 복채 내고 복 받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에게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온 존재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그 변화에 대해서 기뻐하십시오. 2)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자라가는 과정에 대해서 일하며 기도합니다. 소극적으로는 그 나라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그 나라가 완전히 임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내 인생이 없어질 것에 뿌리내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올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 내 인생을 어떻게 살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우리는 우선 영적으로 내 자신이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아까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다고 했어요. 내 힘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적 아이는 하나님 나라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쑥쑥 자라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동역자가 되기를 꿈꿔야 합니다. 여러분 참된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고, 그 비전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삶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살고 싶어집니다. 여러분,

저도 영적 침체기에 빠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함. 그런데요, 다시 성령충만함에 이르니까 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하나님이 제게 주신 시간, 건강, 재능들을 사용하고 싶은 열망이 넘쳐났던 것이 기억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면, 그런 소망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며 자라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비전을 보았기에, 새 시대를 바라보기에, 인생을 허무하게 낭비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자라가는 과정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을 시킬 수도 있고, 나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맡기실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든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묻고 찾고 꿈꾸며 나아가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일을 위해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추수할 것이 많으니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요즘 그런 소망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부름에 누가 응답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깨달은 자들이 꿈을 꾸고, 내가 해야 할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기대합니다. 수확할 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의미로 이것을 ‘소망함’이라고 부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완전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세상 속에 아직은 불완전한 회복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대합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어떤 결핍이나 실패, 고통도 유익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러한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아무 어려움이 없다면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그 불완전함을 경험하며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합니다. 공동체에서 관계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있는 사람은 ‘무슨 공동체가 이 모양이야?’ 하며 공동체를 나가버리지 않습니다. 완전하게 회복될

진짜 공동체가 오기 위해서 내가 여기서 불완전한 공동체를 경험하는구나, 이런 마음을 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이 그 공동체의 문제가 되지 않고자 부단히 힘쓸 뿐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공동체를 볼 때에, 기도하며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공동체가 온전해져야겠지만, 이것 때문에 내가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실 때에야 공동체가 완벽해질 것입니다. 내가 상처를 받을 때에도, ‘이 땅이 불완전하니 내가 여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여기서는 상처를 당할 수밖에 없구나,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견뎌내자.’ 이런 종말론적 시각을 갖지 못하면, 이 땅의 삶은 늘 상처받고 시험 들며 살아갑니다. 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서, 이 시대가 주는 불완전함들, 내 삶이 무수한 일들을 이겨나가며 점점 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구나, 구원을 이루어가고 계시는구나 고백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전진은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노다 히로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새로운

시대가 왔는데 옛 시대에 얽매여 살아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시고 그 나라에 걸맞게 살아가십시오. 비전을 품고 새로운 시대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제목 1) 끝을 알면 이길 수 있습니다. 장거리 달리기를 끝없는 곳에서 달려야 하면 대부분 못 달립니다. 그러나 결승점을 보고 달리면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인내하고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이 독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끝을 알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디며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날마다 내 삶을 적시게 하여주옵소서. 2) 성령의 충만함을 꿈꿉시다.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와 무관한 삶, 혹은 성령님이 내 안에서 소멸된 것 같은 삶을 살면 우리는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 안에서 나의 연약함을 뛰어넘어 주의 능력으로 일하시기를 기도하십시오. 3)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우리라고 완벽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소망을 잃기보다는 함께 더 연합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픈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 치유가 되고,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특별히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