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금요기도회 설교

2025-05-30 · 야고보서 3장 · 박예진 전도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은 어 야고보 시리즈의 세 번째 시간인데요. 어 야고보 첫 번째 시간에는 시련을이기는 것에 대해서 함께 어 나눴습니다. 기뻐하고 또 인내로 온전하게 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우리에게 시련은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온전하게 성장시키는 디딤돌이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어 두 번째 시간에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서 나눴었는데요.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그랬었죠. 그래서 우리가 믿는 믿음이 정말 참된

믿음이라면 조금 더 순 있지만 반드시 우리 삶에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그 행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비로서 인정해 주신다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어 야고보는 이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예시로 차별없는 사랑에 대해 말하기도 했었는데요. 우리가 정말 사랑의 하나님 또 가난한 자와 소해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 가난한 자들에게 그분의 나라를 약속하신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제는 우리도 그 주님을 따라서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어 차별하지 않는 주님을 닮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뒤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어 유명한 가르침을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믿음의 삶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야고보서 3장의 이야기입니다. 어 야고보서 3장은 우리 말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리스도인의 언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 우리에게 언어는 참 중요하죠. 내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를 떠나서 우리 모두의 삶에 어 참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언어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말과 관련된 교훈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어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는 속담에도이 말과 관련된 것들이 참 많이 있죠. 난말은 새가 듣고 반말은 누가 들을까요?네 네, 맞아요. 쥐가 듣습니다. 말 한 마디에도 천양빛도 네, 갚을 수 있다고 우리는 배우죠. 말이 씨가 된다 등등 여러 가지

속담을 우리는 배웁니다. 여러분, 이런 속담들이 또 세상이 주는 교훈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어, 항상 말 조심하고 그리고 한 마디 말이라도 예쁘게 이왕이면 좋은 말, 서로 덕이 되는 말을 나누라는 것이겠죠. 이처럼 말은 우리에게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요할수록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약할까요, 셀까요? 네, 세겠죠. 말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 말의 힘을 다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죠. 어 아마 여러분 여기서 제가 어 말로 상처받으신 분 손 들려고 하면 아마 모든 사람이 다 손을 들 거예요. 어 저에게도 그런 말에 관련된 상처가 있습니다. 어 저를 굉장히 어 아프게 했던 또 저를 무너지게 했던 말 다 한 마디가 있었는데요. 제가 그 말을 듣고 몇 날 며칠을 끙끙 앓다가 너무 화가 나서 그 사람을 찾아가 용기를 내 물어봤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이죠. 그 사람이 뭐라고 했을까요? 혹시 예상이 되시나요? 내가 나 기억 안 나는데라고

말을 했습니다. 늘 가해자는 기억이 안 나는 법입니다. 네. 상대방은 기억도 안 날만큼 무심고 툭 던진 그 말 한마디 일부로 상처 주려고 한 말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무심고 던진 돌멩이에 누구는 맞아 죽을까요?네 네. 개구리는 맞아 죽습니다. 우리는 때로 무심고 던져진 그 말 한마디에 마치 큰 바위라도 얻어맞은 얻어맞은 듯 무너지고 상처받고 좌절하는 개구리가 될 때가 있죠. 그만큼 말은 베는 사람조차 모르게 상대방을 벨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흉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 야고보 또한 이러한 말의 위험성 알고 있기 때문에 야고보서를 통해서 경공하고 있는데요. 우리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는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현은 곧 불이요 불리의 세계라. 현은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술해받기를 불사르나니 그 사른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네. 야고보는 말의 위험성을 혀에 대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혀은 우리 몸 중에

아주 작은 지체에 속하죠. 하지만 그 혀를 통해서 내뱉는 말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 개혁 계정에서는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운다라고 번역했지만이 성경을 세 번역에서는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운다라고 번역합니다. 작은 불씨가 아주 큰 숲을 혼라당 다 태울 수 있는 것처럼 혀도 작지만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거죠. 또한 말은 우리의 온 몸을 더럽히는 것을 넘어서 우리 삶의 술의 박퀴까지도 불사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어, 여기서 삶이라고 하는 이 게네시스란 단어는 존재 또는 창조된 세계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레박히는 인생의 모든 과정 그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말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의 존재, 인생까지도 얼마든지 망가뜨릴 수 있는 그런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어, 여러분 행동으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고 누군가를 죽이는 그런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나 말로 폭력을 가하고 상처를 주고 그 한 사람의 인격을 죽이는 것은

그에 비해 너무 쉽습니다. 인격을 모독하고 그의 명예를 훼손하고 그의 자를 짓밟는 근고도 없는 말들이 결국엔 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세워 가는 일을 우리는 일상에서 뉴스와 기사를 통해 너무 어렵지 않게들을 수 있죠. 또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를 실제로 간간하거나 추행하는 것보다 말로 희롱하는 일들이 훨씬 더 비일비지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우리 삶에는 많이 있는 걸까요?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참아 옮길 수 없는 그 악함도 얼마든지 이 말이라고 하는 도구 안에는 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로 누군가의 삶에 술레바퀴를 불사를 수 있는 어 그런 일들이 우리 삶에 있죠. 그래서 야고보는 이 혀의 악한 불씨가 마치 지옥불에서 나는 것과 같다고 매우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말이라고 하는 것은 늘 이렇게 악하기만 할까요? 말은 늘 위험한 도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이 가진 파괴력은 엄청나지만 그 말을 잘 사용하면 파괴력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파워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말의 상처받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에 그 돌에 맞아 죽었던 개구리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기도 어 하거든요. 어 여러분 기억하실지 모르겠는 작년말에 여러분이 전교인 설문 조사를 했었죠. 그때 전도사님에게라는 항목이 있었는데요. 여러분이 설문 조사를 마치시고 며칠 후에 어 저에게는 그 전도사님에게라는 항목이 잘 정리되어 전달되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적었는지 알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가 저에게 온 거죠. 어, 감사하게도 그 상자를 열었을 때 여러분이 저에게 보내 주신 많은 사랑과 응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 그런데 그중에 유난이도 제 마음에 딱 꽂혔던 한 마디가 있었는데요. 진짜 딱 한 마디였어요. 덕분에 교회 생활이 즐거워졌습니다. 이게 끝이었습니다. 어, 저도 몰랐는데 그 당시 저에게 참 필요했던 말이었었나 봐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명의 누군가가 어 저에게 보내 준 그 한마디에 저는 저도 모르게 지쳐했던 마음에 위로받고 다시금 힘을 얻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말은 누군가를 살리는 도구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세상에서도이 도구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 말을 조심하고 좋은 말을 하라고 수없이 강조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이 가진 힘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노력하죠. 어, 말과 관련된 강의와 책을 찾아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시간과 돈을 기꺼이 들여서 말을 잘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 말은 그만큼 중요하고 강력하기 때문이죠. 어, 여러분,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세상에서 말을 위해 노력하는 그들처럼 그리스도인 다운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얼마나 공부하고

훈련하고 애쓰고 있을까요? 어 안타깝게도 저는 제 주변에서 교회의 말, 그리스도인의 말 때문에 어 내가 힘을 얻습니다. 내가 살아났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어 나는 상처받아서 나는 이런 경험이 있어서 난 교회 안 가. 난 그래서 교회 다 사람들이 싫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난 거 같아요. 어쩌면 우리는 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이 말 때문에 서로 상처받고 또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말에 대해 계속 권면하죠.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릴 수 있고 길들여 왔거늘 현은 능히 길들을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어, 야고보가이 3장의 말씀을 시작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즉 야고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권면과

경건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들에게 하고 있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말하죠.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말에 실수가 없다면 그는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어 제가 세앙 성경을 찾아보니까 세앙글 성경에서선이 말씀을 우리는 모두 많이 헛디니다. 누군가 말을 할 때 헛띠지 않는다면이 사람은 완전한 사람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더라고요. 말실수는 마치 발을 헛띠는

것과 같다는 것이죠. 어, 저는 이 표현이 참 적절하다라고 느꼈는데요. 여러분, 어린아이수록 걷는 것이 미숙하죠. 그래서 자주 발을 헛띠고 그만큼 자주 넘어지곤 합니다. 그리스도에는 언어 사용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어, 많은 사람들이 회심 이후에 나타나는 변화로 언어의 변화를 어, 자주 말하곤 하는데요. 그리스도의 언어에도 분명히 변화가 나타나죠. 그렇지만 아직 영적으로 어릴 때, 그럴 때는 어린아이가 발을 자주 헛띠리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걸음말을 배우고 걷는 법과 뛰는 법을 조금씩 배워 가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 그 언어를 조금씩 배워가고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 그런데 여러분 어른이 되면 발을 헛뜯지 않나요? 어린아이들만큼은 아니지만 어른이 된 우리도 가끔은 헛띠들 때도 있고 때로는 휘청하고 넘어질 때가 있죠. 그리고 말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느 정도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이 말이라고 한 영역에서

실수를 저지르곤 하죠. 어, 저는 적어도 우리가 정말 예수 따르의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면 그 전보다는 더 말을 조심하고 그리스도인 답게 말하기 위해서 좋은 말과 선한 말, 사랑의 말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노력하고 계시죠? 네.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도 때로는 우리가 걸어가다 순간 발을 헛뛰 넘어지는 것처럼 말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게다가 야고보가 7절에서는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나요? 모든 생물들을 사람이

길들일 수 있으나 사람의 현은 길들일 수 없다라고 기록하죠. 길들인다는 것은 나의 통제가 먹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상 모든 생물을 인간이 그 통제 안에 들어오게 할 수 있어도 우리 지체 안에 있는 이 작은 현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제 많이 실수 안 했다고 해서 오늘도 그러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에요. 아마 저는 여기 계신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아픈 말들만 골라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제가 잠깐 나눴던 예화처럼 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어요. 나는 아무 의미 없이 그냥 한 말이었어요.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상처낼 수 있기 때문에 아, 우린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조심해야 하는 것이죠. 또는 우리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지만 때로는 우리 안에 있는 못난 마음들이 툭툭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어, 내 안에 있는 어떤 질투심이나 시기심이 튀어나올 때도 있고 경쟁심이나 욕심 등이 삐뚤고 못난 언어로

튀어나와서 뵙고 난 후에 아, 내가 왜 그랬지? 후회하는 경우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발을 헛될 수 있는 존재들이고이 현은 쉽게 길들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할까요? 대체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 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크게 세 가지로 이걸 나눠 보려고 하는데요. 첫 번째 함께 읽어 볼까요? 부활하자. 네.이 이어서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임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먼저 야고보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동시에 나온다는 것이죠. 어, 여러분 앞에서 읽으셨던 삶의 수레박히란 표현 기억하시죠? 거기서 삶은 존재와 창조된 세계가 세계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야고보는 앞서 본인이 언급했던 그 표현과 함께 연결해서 지금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그분이 창조하신 존재인 사람을 저주하는 것 여전히 삶의 수레박해를 불사르는 말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한 입으로 하나의 말만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 선한 말, 사랑의 말을 하는 것보다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저주의 말, 비난의 말을 멈추는 것입니다. 어, 누군가를 응원하고 위로하는 말은 우리가 아직 잘 못 할 수도 있어요.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동안 그런 말을 주고받은 경험이 적은 사람일수록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상처 주는 말, 남을 찌르는 말, 비난하는 말은 멈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다운 말을 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건 어쩌면 침묵인지도 모릅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주님 안에서 구분하고 하지

않는 침묵 말이죠. 남을 헐뜯고 뒤에서 수긍거리고 오해가 쌓이게 하거나 이간지라는 말을 멈추는 침묵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또 더 나아가서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을 향한 비난도 멈출 수 있어야 해요. 어, 여러분, 사울이 다윗을 아주 오랜 시간 괴롭게 했었죠. 다윗을 좀 괴롭힌 그냥 그런 수준이 아니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쫓아다녔습니다. 자신의 군대까지 동원해서 말이죠. 그런데 그런 사월을 상대하는 다윗의 태도가 어땠나요? 다윗은 사울을 저주하지 않아요. 다윗이

너무 가만히 있으니까 오히려 그 주변에서 그런 다윗에게 아, 왜 당하고만 있느냐고 타박하기도 하지만 다윗은 그런 말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렇다고 다윗에게 괴로운 마음이 없었던 거는 아니었어요. 그도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도망쳐도 계속 텅미까지 쫓아오는 사울의 군대가 두렵기도 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죠. 그러나 그는 그런 순간에도 침묵을 지킵니다. 그리고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의 마음을 쏟아놓습니다. 여러분, 사실

다윗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그가 사울을 조금 저주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그 누가 다윗을 욕할 수 있겠어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욕 몇 마디 한다고 해서 아무도 그에게 손가락 손가락지 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끝까지 사울을 저주하지 않죠. 그가 사월로 인한 괴로움을 입을 어 괴로움으로 입을 여는 순간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 뿐이었습니다. 다윗의 입에선 사냥과 저주가 함께 나오지 않았어요.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다윗의 침묵을 배워야 합니다.

아, 누가 그랬대? 내가 들어보니까 누구누구 형제가 그랬대. 와 같은 말도 멈춰야 하지만 나를 괴롭게 하는 그 사람을 향한 비난과 저주까지도 침묵할 수 있는 것이 저는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그를 향한 침묵에서부터 시작되는 거 같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대신 다윗처럼 우리의 괴로운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는 토로하십시오. 어, 내가 내 친구에게 말해서 푸는 것보다 내 지인들에게 말해서 푸는 것보다 더 큰 위로로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연어 두 번째는 선한 것을 쌓는 것입니다. 어, 야고보는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동시에 나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열매에 비유하는데요. 야고보서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짠샘은 단물을 낼 수 없습니다. 네.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을 수 없고 푸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처럼 어 한

샘에서 짠샘과 단물이 같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입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내용이었어요.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너는 내가 한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예수님과 야고보은

우리에게 오늘 이야기하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 열매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고 말이죠. 내 입술의 열매가 선하다면 나는 선한 사람이고 그 열매가 악하다면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나는 선한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니까 주님은 우리의 그 말을 보시고 우리가 무죄한 사람 즉 의로운 그리스도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 판단하시겠다고 말씀하시죠. 그만큼 우리에게 언어의 열매는 중요하고 세상과도

다른 모양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매는 선한 열매여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을 방법을 알려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선한 것을 우리 안에 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각자 자기가 쌓아둔 것을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 마음에 미움과 시기와 분노가득하다면 그것이 선한 말로 나올 수 없을 거예요. 처음에 몇 번은 선한 척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적당한 거리를 두어서 우리의 그런 그릇된 마음을 들키지 않게 감출 수도 있고

처음 몇 번은 아닌척 포장해서 나의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다 알고 있어요. 우리의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요. 어,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우리는 우리 속에 쌓인 것이 입으로 튀어나오죠. 어, 저도 요즘 흔히 MG라고 말하는 MG 세대인데요. 어, 그런 제가 느끼기에도 요즘 시대는 솔직함이라는 것을 이유로 이전보다 더 자기 마음을 감추려 하지 않는 거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느끼는 것을 상대방의 감정이나 상황을

어 고려하지 않고 쉽게 말해 버리곤 하죠. 그래서 일부는 이런 시대를 향해서 솔직함과 무래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어 비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더욱이 사회는 어 시간이 헤를수록 점점 더 경쟁이 가속화되어 갑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사이는 점점 어 상대방의 좋은 점 장점을 찾기보다 부족하고 약한 부분을 먼저 찾는 것에 능숙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그래야 내가 더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곤 그것을 서슴없이 선늘한 말과 언어로 표현해

버리곤 합니다. 어 나에게는 유리하게 말하고 남에겐 불리하게 말하는 그런 말들이 오관의 사회 속에서 우리도 사회생활을 하고 살아가죠. 어 그래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다르게 선한 말, 좋은 말을 지켜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아닌 척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 안에 악한 것만 잔뜩 쌓여 있다면 결국 우리도 그들 안에서 선언한 말과 언어로 우리를 보호하고 방어하려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론 역부족이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결국 우리가 진짜 선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우리 안에 선한 것들이 가득 쌓여 있어야 합니다. 어 이미 돈 동란 항아리에서 물을 퍼낼 수 없는 것처럼 선한 주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동나 있다면 우리는 선한 말을 낼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 내면이 어 선하신 주님으로 가득 쌓여 있어야만 우리의 입술과 혀가 선한 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이 담겨 있을 때 주님의 성품이 쌓여 있을 때 우리 입수의 열매도

그러한 선한 선선한 열매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죠. 어, 풍삶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세상도 비워내는 것까지는 잘 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명상이나 수련, 각까지 방법 등을 통해서 어, 자기 안에 있는 악하고 그릇된 마음들, 그런 것들을 비어내려고 세상 사람들도 노력하죠. 하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비우는 것을 넘어 채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내 안에 미움이 자꾸만 쌓여가는 것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그 미움을 비워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또 용서의 마음을 채울 수도 있는 것이 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채워냈을 때 우리의 언어도 그 마음, 그 쌓인 것, 쌓인 것에서 나와서 긍휼과 사랑의 열매가 맺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야고보는 세 번째를 권면하는데요. 바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성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 드리는 열매입니다. 어 우리가 보낸 성경책에는이 지혜에 관한 부분이 다른 단락으로 구분되어 있는데요. 어 그런데 저는 이것이 앞에서 야고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에 대한 권면과 어 아예 상관없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 사실

이건 야고보가 쓴 편지였으니까 애초에 단락이 없었겠죠.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이 내용을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앞 내용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 야고보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계속 열매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죠. 위에서 오는 지혜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지혜는 우리를 순결하게 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롭고 선하게 합니다. 편견도 없고 위선도 없습니다. 우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언어의 영역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말할 때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야 우리의 언어가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며 온순하고 자비롭고 선한 말이 되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말 속에 상대방을 향한 편견도 없고 나를 위한 위선도 없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어 우리의 힘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야고보서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야생마 같은

혀를 온유하게 다스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도 13절에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느끼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길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도우실 때 야생마 같은 우리도 절대 길들어지지 않을 것처럼 억던 우리의 혀도 온유하게 변화할 수 있습니다. 어 그런데 여러분 선한 말은 마냥 듣기에 좋은 말을 하라는 건 아니에요.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거두어드린 열매가 있는데 바로 정의의 열매였습니다. 선한 말에는 때로는 외면하고 싶지만 꼭 해야 하는 말. 또 회피하고 싶지만 꼭 들어야 하는 말들도 있죠.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대부분 정의와 관련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고 우리가 고할 부분들을 말하는 그런 순간들처럼 말입니다. 어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 이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쳐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가 정의를 말한다고 하는 그 순간에 어 평화로울 때가 많은가요?

아니면 오히려 평화가 깨질 때가 더 많은가요? 네. 제가 느끼기에는 정의를 말하는 그 순간에는 뭔가 평화롭다. 그런 어 뭔가 편안하다. 안락하다 이런 느낌보다 오히려 가쁜싸가 되거나 그런 너는 그렇게 뭐가 잘났는데라고 서로 감정이 상하는 순간이 더 많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야고보는 말하기를 정의의 열매는 평화의 씨를 뿌려서 거두어드린 열매라고 말하고 있어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씨를 뿌려서 맺은 열매가 정의의 열매라고 말이죠. 대체 왜 야고보는 이렇게

말을 했을까요? 정의의 씨를 뿌린다고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어,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랜 시간 고민해 보았는데요. 적어도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말씀 안에서 깨달은 것은 아무리 옳은 말, 정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 예전에 한 형제님이 대표 기도를 하실 때 하셨던 기도인데요. 어 그때도 그 기도를들을 때이 문장이 참 마음에 와닿왔는데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 한 번 정의를 말할 때 두 번 사랑을

생각하게 해 주십시오. 어, 저는 이것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해서 정의 열매를 맺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 우리는 내가 불편한 것, 내가 싫은 것,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정이다라고 종종 나조차도 오해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들새겨야 합니다. 여러분,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이 맺는 열매라는 것을 말이죠. 정의를 말하기 전에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위한 것인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말하기 이전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이 말이 정말 우리의 평화를 위한 말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라면 그것을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생각하고 과연 주님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고민하며 사랑이 담긴 언어로 건네 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나눌 때 늘 하는 말이지만 그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언어, 그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언어도 사랑의 방법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사실 앞에서 길게 설명했지만 간단하게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언어는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사랑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말하고 사랑해서 말을 삼키고 사랑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신중하게 한 마디 한 마디 조심스럽게 입을 떼는 것. 혹시 이 말이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닐까? 모난 돌 같은 내 마음을 주님 앞에서 깎아내고 다듬어서 온유한 말로 건내는

것. 저는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 우리 교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특별히 나눔이 참 많은 교회죠. 양육도 많고 모임도 아주 많습니다. 사실 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상처받고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많아진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민감하게이 부분을 연습해야 해요. 침묵하고 내 안에 먼저 그릇됨을 비워내고 선한 것을 주님으로 채우는 것 그리고 주님의 지혜를 구하여서 평화롭게 말하는 방법을 말입니다.

어, 기독교는 아니지만 카톨릭에는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라는 유명한 기도문이 있는데요. 이러한 내용입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한 주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주으로서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서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마태복음 12장 37절에 내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내 말로 정지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말은 그저 서로 상처 주지 않게 말합시다를 넘어서 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의로운 그리스도인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열매를 통해서 우리가 선한 나무인지 악한 나무인지를 알 수 있듯이요. 사랑하는 사귐의 가족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심으셨습니까? 또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열매가 맺치고 있나요? 여러분의 말이 사랑을 주고 있다면 그건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사랑이 쌓여 있지 않는 사람에게선 사랑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죠. 여러분의 혀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한 씨를 심고 있다면 여러분도 용서받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용서하는 자에게 나도 용서를 베푸시겠다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를 주님 앞에서 죽이고 내려놓고 부인하고 항복하여 삶의 술레바퀴를 불사르는 말을 침묵으로 삼켜내고

있다면 여러분의 삶의 술레바퀴는 안전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는 언어는 단순히 선한 말, 좋은 말 하는 것 이상입니다. 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나의 정체성을 매순간 증거하기 때문이죠. 오늘 여러분의 언어는 어떤 정체성을 말하고 있으십니까?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