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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2025-06-01 · 역대상 1~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부터 우리가 4번의 시리즈 설교로 역대상을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설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백성을 만들어가는 계획을 시작하십니다. 이 약속이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모든 가족을 애굽의 보호 아래 두시고, 400년 기간 동안 나라를 이룰만한 백성의 숫자가 되도록 이끄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빠른 성장을 보며, 애굽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학대하고 탄압하며 후에는 사내아이는

태어나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 혼란의 상황 속에서 모세가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준비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는 언약을 맺습니다. 그후 광야의 시간을 거친 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와 사사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도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거부하셨지만, 결국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다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신정 안에서의 왕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왕을 통해서 대신하여 다스리는 것이었죠.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여 왕이 세워집니다. 사울-다윗-솔로몬으로 이스라엘의 왕권이 이어지는데, 이중 다윗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신정 안에서의 왕정이라는 취지에 딱 맞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다윗 시대에 언약을 주십니다. 다윗 가문에서 나올 ‘영원한

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영구히 세워가시겠다는 엄청난 약속입니다. 이것을 다윗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영원한 나라를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봅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왕권과 다윗의 나라가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적 같은 이야기로 여겼습니다. 사실 다윗 언약이 특별해 보이지만 특별한 내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또한 조건적 언약인데, 언약의 조건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이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약속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순종의 책임은 다하지 않고, 보호의 권리만 주장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다윗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는 망하지 않도록 약속했다고 우기기 시작합니다. 원래 이단이 한끗을 다르게 해석하다가 탄생하는 것이죠.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이들의 불순종은 점차 심해집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 결국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합니다.

마치 남한과 북한처럼 분열된 상태로 두 개의 왕조가 이때부터 각기 다스리게 된 것이죠. 다윗의 아들이 다스리는 남왕국을 ‘유다’라고 부르고, 쿠데타로 떨어져 나간 10지파가 세운 북왕국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신정 안에서의 왕정’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북의 왕들은 자신이 주인 된 자기중심성으로 세상의 왕들처럼 통치를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잘못된 것을 가르쳐서 바로잡아야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바로 이 역할을 위해 하나님이 세운 메신저들을 ‘예언자 혹은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왕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있을 때는 가장 중요한 동역자가 되었고, 왕이 하나님의 뜻을 엇나가고 있을 때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조언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남북을 합쳐 39명의 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통치했던 왕은 8명뿐이었습니다. 결국 북왕국과 남왕국은 차례로 멸망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 멸망이 하나님의 징계이자 정화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회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북왕국은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다윗의 후손이 다스렸던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남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머나먼 바벨론 땅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심판에 대해서 예언하셨고, 70년이라는 징계가 끝나면 다시 그들을 돌아오게 하셔서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바벨론은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통치하게 되면서, 유대인들은

예언처럼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구약은 그 돌아온 백성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장황한 구약의 역사를 제가 정리해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역대기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역대기는 바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귀환 공동체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바벨론 땅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질문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우리는 누구이고, 왜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신학적 대답이 역대기입니다. 역대기의 독자들 대부분이 어디에서 태어났을까요? 바벨론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들에게 가나안 땅은 그냥 조상들의 땅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신학적 기초가 굉장히 약합니다. 정체성도 모호합니다. 조상들로부터 받은 신앙적 유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돌아와, 도시와 신앙적 정체성을 재건해 가는 소수의 유대 공동체입니다. 둘째, 제가 구약의 장황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을 통해 역사와 신학적

이해를 도왔던 것처럼, 역대기는 매우 독특한 내용을 초반에 다루고 있습니다. 무려 9장에 걸쳐서 족보를 소개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 선생님의 글입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독사신론>과 같은 글을 통해 ‘역사는 민족의 혼’이라며, 과거를 잊으면 정체성과 주권도 사라진다고 경고했습니다. 뿌리를 알아야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윗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취이지만, 구약의 시대 사람들에게는

무너진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왕조가 적국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다윗의 나라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돌아왔지만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바벨론 땅에서 귀환한 사람은 느헤미야 당시에 약 5만 명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 주변에는 이미 다른 민족들이 삶의 터전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소수였고 극빈의 공동체였습니다. 불과 5만의 예루살렘 귀환 공동체가 페르시아 제국 아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입니다. 이들의 삶의 현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해야 하는데, 방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해나가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삶은 피폐하고 신앙도 위태합니다. 하나님과는 멀어져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돌아오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현실은 고생길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남아있는 감정은 좌절, 한계, 실패감뿐입니다. 간신히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도 세웠지만, 오히려 이들의 마음 성전이 위태했고, 마음의 성벽은 여전히 무너져있는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바벨론에서 이미 70년을 살았기에, 그곳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하고 쉬운 길일 수 있습니다. 즉, 돌아온 백성들은 나름 신앙의 이유로 자신의 어떤 것을 포기하며 약속의 땅으로 귀환한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그곳에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신앙의 회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굳은 결심을 하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현실은 자신들의 기대와 너무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쩌면 오늘날 한국의 성도들이 느낄 법한 마음들이 많습니다. 최근에 기독교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고, 코로나 팬데믹은 정말 많은 교회를 문닫게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기독교는 어느새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믿으면 성공한다”라는 이야기로 급격한 수적 부흥을 경험했던 한국교회는 오히려 지금은 그것으로 인해 발목을 잡히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세속적 성공주의가 활개를 치고, 그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하나님에

대해 실망합니다. 신앙으로 인해서 여전히 손해 보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니 신앙생활 자체가 내 시간을 쓰고, 물질을 쓰고,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입니다. 그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면 신앙 때문이지만, 때로는 그 신앙이 현실의 어려움 앞에 자꾸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현실의 고민과 문제 앞에서 약해 보입니다. 바로 역대기가 그런 자들의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을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아마도 오늘 같은 고민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은 이 역대상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역대기의 말씀들을 살펴봅시다. (대상 1:1) 아담, 셋, 에노스, (대상 1:2) 게난, 마할랄렐, 야렛, (대상 1:3) 에녹, 므두셀라, 라멕, (대상 1:4) 노아, 셈, 함과 야벳은 조상들이라 우리가 지금 4절까지 읽었지만, 이 족보가 9장까지 이어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구약의 가장 마지막 시대인데, 자기들의 정체성과 시작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서부터 시작합니까? ‘아담’에게서부터 시작합니다. 역대상 1~9장이 성경 안에서 가장 길고 포괄적인 족보입니다. 무려 407절 분량입니다. 창세기에도 신약에도 이런 분량의 족보는 없습니다. 아마 지금부터 우리가 1~9장까지 읽으면 그걸로 설교 끝입니다. 성경에 의미 없이 기록된 것은 없지요. 이 족보가 가진 신학적 메시지, 또 유대인들이 이 족보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것이 있으므로 주어진 것이라고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메시지는 그들은 실패로

기록된 역사의 끝에 서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을 결코 실패로 끝나도록 두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역사에 속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7년에 개봉된 <코코>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350만 관객이 들었으니, 나름 성공했던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기억해 주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문명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여러 요소가 있는

것은, 그만큼 누군가 내 삶을 기억해 준다는 것이 가진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역대기의 긴 족보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기억하시고, 그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고 계신다는 의미이죠. 9장의 족보를 4가지 부분으로 나눠보면 이렇습니다. 1) 아담에서 야곱까지 (1:1-54) 역대기는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는 모든 인류, 세계 열방 전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즉,

이스라엘과 함께 이루고 싶은 하나님의 비전이 단순히 성전 재건, 약속의 땅 회복, 이런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태초에 있고, 창조적 사명의 성취와 회복에 있습니다. 그 장대한 역사 안에서 볼 때, 바벨론 포로와 귀환 이후 어려움의 시기는 영원하거나 긴 시간이 아닙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힘이 셉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우리는 이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지고 영원할 것처럼 느껴져서 두렵습니다. 군인들이 왜 탈영을 합니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신병의 시간도 곧 다 지나갈 것이라는 객관적 사실이 와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상황과 처지에 갇혀서 매몰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거나,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내가 살아가는 곳을 내려다보면, 생각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 높고 멋진 건물들도 그냥 똑같이 작아 보입니다. 그 안에서 아득바득 살아가던 내 삶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역대기는 바로 말씀 안에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끌어올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도, 내가 지나고 있는 고통의 터널도 그렇게 보면 넘어설 수 있는 마음을 먹거든요. 아담에서부터 시작하는 족보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저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도 ‘창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창조에 대한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복음에 자신의 삶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사명으로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세상이 아무리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해도, 분명한 신앙적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2) 유다 지파와 다윗의 가문 (2:1-4:23) 2장은 유다 지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유다는 다윗의 집안이기도 하죠. 그래서 유다 지파의 이야기는 3장에서 다윗의 족보로 이어집니다. 사실 이 지파는 유독 사건이 많습니다. 다말, 룻, 밧세바 등 많은 스캔들이 유다 지파의 족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도 이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죠. 다윗 언약을 사람들은 자기 잘못을 핑계하는 방어의 도구로 사용했지만, 사실 그 언약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부족함 속에도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을 지키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스캔들이 그 언약을 깨지 못합니다. 실수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진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의 약함과 부족함, 실수 때문에 움츠러든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함이지, 연약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런 부족함이 가득하니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느낀다면 저는 그것이 교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장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습니다. 연장이 조금 좋든 나쁘든 그것을 붙들고 사용하시는 분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그 연장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입니다. 3) 흩어진 열두 지파 (4:24-7:40) 이 부분은 나머지 열두 지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앞서 12지파가

하나의 나라에서 2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0개의 지파가 북왕국을 이뤘고, 2개의 지파가 남왕국을 이뤘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온 것은 남왕국 쪽이고, 북왕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그보다 먼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모든 열두 지파의 이야기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상 9:1a) 이와 같이 온 이스라엘이 족보에 오르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었다. 북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을 주변 나라들과 혼혈시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정체성을 없애려는 것이지요. 그 결과 순수혈통의 이스라엘 10지파는 사라졌죠. 북왕국에도 주변과 피가 섞인 사람들이 거주했습니다. 북왕국 수도가 사마리아였으므로, 그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이라는 표현은 마치 그들은 언약 백성 밖에 있다는 ‘배제의 언어’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역대기의 관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그렇게 되었어도, 그들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앗수르에 의해서 흩어진 형제들을 이 언약의 계보 안으로

다시 소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심판받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해요. (대상 5:25) 그러나 그들은 그 조상의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없애 버린 그 땅 백성의 신들을 섬겼으므로, (대상 5:26)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앗시리아의 불 왕의 마음과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의 마음을 부추기셔서,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쪽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로 끌고 가게 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오늘날까지

거기에 살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했기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의 계보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이 역사적 기록을 통해 경고하며 동시에 소망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4) 레위 지파 (6:1-81 & 9:1-34) 족보의 6장은 레위 지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하나이지만,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첫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집마다 첫째 아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죠. 성전에 관련된 일, 예배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가정에 한 명씩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아예 가족이 떨어져서 지내야 하니, 아예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이스라엘 장자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레위 지파 중에서 대제사장을 세우게 됩니다. 사실 역대기의 족보를 잘 분석해보면, 거기에는 2가지 가문이 특별하게 강조됩니다. 바로 다윗과 아론입니다. 이 두 사람의 족보만 족장 시대부터 포로기까지 모두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윗 가문은 어떤 가문이죠? 왕의 가문입니다. 다윗 왕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포로기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또한 다윗 왕조는 성전을 건축한 가문이죠. 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한 스룹바벨도 다윗의 후손입니다. 성전이라는

측면에서 다윗 가문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아론 가문은 대제사장 가문입니다. 대제사장은 모든 레위인을 대표하죠. 성전의 예배를 담당하는 역할입니다. 이들이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것은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대제사장과 레위인들. 예배자들이 귀환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 백성들로 정체성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언약과 예배. 언약은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늘 우리를 향한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것을 누리는 방식은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기에 하나님과 연관이 있고, 관계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서 레위 지파가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지는지, 족보를 도표화 하면 드러납니다. 우선 귀환한 공동체는 남왕국을 이뤘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입니다. 족보의 시작은 유다 지파, 끝은 베냐민 지파입니다. 이들이 처음과 끝에 위치하여 족보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멸망한 나머지 지파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포로 귀환자들이 존재하는 한 이스라엘

역사는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10지파 이야기 사이에 해당하는 6장에 레위 지파 목록이 들어가 있습니다. 족보의 중앙에 레위 지파가 놓인 것은 매우 의미 있습니다. 역대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레위 지파의 존재와 역할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정체성을 지키는 데 핵심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가 생존해 있고, 그들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귀환 공동체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인

느헤미야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느 7:1) 성벽을 다시 쌓고, 문들을 제자리에 단 다음에, 나는 성전 문지기와 노래하는 사람과 레위 사람을 세우고 (느 7:2) 나의 아우 하나니와 성채 지휘관 하나냐에게 예루살렘 경비를 맡겼다. 하나냐는 진실한 사람이고, 남다르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성벽이 재건되자마자 느헤미야가 세운 직책이 ‘문지기, 찬양대, 레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성전 문지기라고 하면 아파트 경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대상

9:19) 고라의 증손이요 에비아삽의 손자요 고레의 아들인 살룸과, 그의 가문에 속한 그의 친족들, 즉 고라 족속은, 성막 문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의 조상도 주님의 성막 문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대상 9:27) 그들은 성전을 지키며 아침마다 문을 여는 일을 맡았으므로, 하나님의 성전 주위에 머무르면서 밤을 지냈다. (대상 9:28)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성전에서 사용하는 기구를 맡았으므로, 그것들을 세어서 들여오고, 세어서 내주었다. 이들은 예배의

온전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거룩과 속됨의 경계를 지켜내고 유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현대로 보자면 예배를 준비하고, 성찬을 준비하고, 올바른 예배를 위해 질서를 세우고 안내하며 점검하는 역할이었다는 것이죠. 귀환 공동체의 거주자 명단을 보면 레위인으로 섬기는 자들이 일반적인 사람보다도 더 많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자마자 세웠던 것도 예배 관련 인력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예배공동체. 예배가 기초이고 중심이죠. 교회에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모두가 의미 있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잘할 수 없죠. 그래도 하나를 잘해야 하면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예배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다른 것은 조금 못해도 됩니다. 그런데 예배는 그렇게 대충 할 수 없습니다.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 집 짓는 것보다 예배 처소부터 지었습니다. 무엇을 먼저 하는가? 이것이 내 관심이고 사랑입니다. 최근에도 다른 목사님이 저에게 회심을 어떻게 점검하냐고 물었습니다. 회심은 마음에 우선순위가 바뀌었는가의

문제입니다. 나의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얼마나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기 위한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핵심이죠. 역대기가 오늘 귀환 공동체에게 다시 일깨우고 싶은 것도 그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면 우리의 정체성을 깨닫지도, 맛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설명되며, 하나님의 꿈을 함께 꾸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귀환 공동체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기 때문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깨어지지 않는 언약이 여전히 그들을 향해 은혜로 주어져있습니다. 이제 그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예배하고, 자신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선된 삶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 역사를 반복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우리를 시작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을 따라, 내 삶을 다시 해석해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야기들과 가르침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의 가르침 속에서 내 삶을 해석하고 길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고, 그분의 역사 속에 그런 여러분의 삶을 기록하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역대상의 족보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아담에서부터 시작하여 포로 귀환 시대의 성전 문지기 이름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전과 같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이전의 영광은 지나간 듯 보이지만, 여전히 그 안에 숨 쉬는 이름들이 있고, 하나님은 그 역사의 토대 위에 내일을 건설해 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는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역대기 족보를 4등분 해서 살펴봤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인류의 시작점에 관한 이야기. 유다 지파와 다윗 가문에 비록 실수와 상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 모든 것보다 강하다는 것, 하나님은 그것도 사용하실 수 있는 우주 최고의 장인이라는 점, 흩어진 열두 지파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레위 지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 예배에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역대기가 주어진 이 시기 이후의 역사까지 알고 있습니다. 다윗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로 확장되며, 이스라엘의 회복은 열두 지파를 계승하는 열두 사도로부터 새로워진 교회의 이야기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혹시 주어진 상황과 환경 가운데 위축되고 좌절될 때가 있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만 바라보는 바보처럼 살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까? 성경의 역사는 바로 그 바보들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비록 그렇게 살다가 외면받아 소수가 되고, 비록

우리의 재정이 줄어들고, 세상이 교회를 비웃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어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삶에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며 감당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성실히 그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위하여 감당하십시오. 하나님은 성전 문지기의 이름까지도 기억하십니다.

크고 위대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작고 소소한 일을 힘써 하십시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섬기고 봉사하며, 오늘도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는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작은 순종 하나가 내일을 열어가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저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의 미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