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시간에 역대상의 족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그 중심에 혹시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하시나요? 무엇이 있었는지 혹시 기억한 분 계신가요? 네. 예배가 있었는데요. 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이었고 그 예배를 통해서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그런 회복이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 오늘은 지난 시간에이어서
역대상 두 번째 시간인데요. 어 역대상은 1장부터 9장까지 아주 길고 긴 족보를 기록하고 있었어요. 1장에서 아담부터 시작했던이 족보가 쭉 이어져 내려오다가 혹시 어디서 끝이 나는지 아시나요? 혹시 9장 읽으셨던 분들 기억이 안 나시나요? 원대이 원발 많이 하실 텐데 다 까먹으셨나요? 네. 사월 왕가의 족보에서 어 그 족보가 끝이 납니다. 어 사사기 시대를 어 막을 내리고 또 왕정 시대에 문을 열었던 그 사울왕의 이야기로 이 족보가 끝이 나죠.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어, 성경에 보면 사울을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해요. 그의 얼굴이 잘생겼다. 그리고 그가 저처럼 키가 컸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외적인 모습을 봤을 때 어, 왕으로 좀 괜찮은데라는 느낌이 있었겠죠. 그리고 또 그의 아버지 또 즉 사울의 집안을 소개할 때는 그의 집안이 유력한 집이었다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에서 유력하다라고 하는 말은 돈도 좀 있고 또 나름 이름도 좀 있고 나름 괜찮은 집안이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어 사울도 나름대로 외적인 모습이나 또 그의 어떤 배경이 그렇게 남들과 비교했을 때 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이런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통해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들은 사울의 반응이 이렇습니다. 아, 저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반응하죠. 여러분 앞에서 설명했던 사월의 어떤 그 배경과 또 지금 사무엘에게 보고 있는 이 사월의
반응을 비교해 보면 아 그는 그래도 나름 겸손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외모, 집안, 인성이 모든 조건들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꽤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사무엘의 예언처럼 진짜 왕으로 세워졌을 때 어 백성들도 굉장히 기뻐했어요. 아, 우리에게도 이제 이런 멋진 왕이 생겼구나 하고 말이죠. 또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왕이 된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 오늘날로 말하면 성령을 부으셔서 그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잘 다스리고 이끌어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여러분,
사울의 시작이 나쁘지 않아요. 출발이 좋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렇게 잘 시작한 듯 보였던이 사울의 왕조가 첫참하게 몰락하는 장면으로 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어떤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요.이 전쟁에서 사울도 죽고 그의 온 가문이 멸망하게 되죠. 여러분,이 전쟁에서 블레셋이 막 쳐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이스라엘 전세는 기울었어요. 왕도 또 그 왕을 이어 그 나라를 다스려 줄 왕자들도 다 이미 죽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런 나라의 국민이라면 마음이 어떠실까요? 큰일 났다. 우리나라 망하는구나. 쉽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판국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기저기 다 뿔뿔이 피난을가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나라 자체가 엄청난 위기와 혼란에 어 쌓이게 된 것이죠. 여기까지만 들어도 너무 비참해요. 그토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이 드디어 생겼는데 1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까요. 그런데 더 비참한 것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 블레셋 군인들이 사울 왕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그의 목을 베어서 그들이 섬기고 있는 박곤이라고 하는 신의 신전으로 가져가죠. 그리고 어떻게 하냐면 그 신전에 그의 갑옷과 머리를 매달아서 전시해 줍니다. 어 이렇게 했던 이유는 그 당시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데요. 당시 고대 근동에서 전쟁은 아 여기 이만큼 우리가 더 땅을 차지하자 정도의 의미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했어요. 그 당시의 전쟁은 우리의 신과 당신의 신 중에 누가 더 강한지 겨로워 봅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대리자라고 생각했죠. 그러니까 사울의 갑옷과 머리를 어 블레셋의 신전에 보란듯이 전시에 뒀다는 것은 그들의 신이 마치 이처럼 어 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에게 이들의 신이 졌다. 그러면서 일종의 승리의 세리머니를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시작은 좋았지만 사월의 끝이 첫차마리만큼 비참한 모습으로 끝이 났죠. 그렇다면 여러분 사울은 왜 이런 종말을 맞이해야 했을까요? 그의 출발이 썩 나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사울이 주님을 배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점쟁이와 상의하며 점쟁이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주님께 지도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의 나라를 이세의 아들 다윗에게 맡기셨다. 네. 사울이 이토록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주님을 배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들었지만 이스라엘의 왕정은 그냥 일반적인 왕정이 아니었어요. 그냥 왕이 나라를 다스리면 돼가 끝이
아니라 신정 안에서의 왕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있지만 그 왕조차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그 나라를 다스려야 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과 방향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사울은요 그 신정 안에서의 왕정, 즉 하나님 아래의 통치를 실패합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요. 오늘 성경에서 본 것처럼 오히려 점쟁의 지도를 받으며 나라를 다스렸죠. 하나님이 세우신 그분의 질서가 있어요. 그분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무시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셔서 사울의 잘못을 꾸짖기도 하시고 경고도 하세요. 너 돌이켜야 돼. 이렇게 하면 안 돼. 이건 내 방법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울은 안타깝게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이키지 않고 끝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며 변명하게 바빴죠. 그러자 결국 하나님도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그를 버릴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으로 유명한 다윗이 세워지게 되죠. 하나님이
처음 사울을 도우셨을 때 하나님의 영으로 함께 하셨던 것처럼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와 함께하시며 다윗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그 나라가 세워져 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여러분, 이미 사울의 때에 전쟁으로 나라가 위기를 막 어 겪었잖아요.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이스라엘이이 다윗과 함께 점차 회복되기 시작해요. 그리고 다윗의 왕권도 자리를 잡고 강성해졌습니다. 어, 그의 왕건이 얼마나 강성해졌는지 그 당시에 두로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는데요.
그 나라의 왕이었던 히암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에게 직접 사절단을 보내요. 그 사절단을 보낸 목적은 다윗의 군거를 지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게다가 군거를 지을 수 있는 모든 재료와 인력까지도 다 제공을 합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 왕의 군거를 지어 주기 위해서 사절당과 모든 것들을 후원한다는 것은 그 다윗이 그만큼 강해졌었다는 것이죠. 이런 에피소드를 볼 때 이스라엘이 이제는 주변에서도 쉽게 어 건드리기 어렵다 싶을만큼 회복하고 힘을 갖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 허물어져가던 나라를 다윗이 이렇게 회복시켜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아 우리 다윗이랑 너무 멋지다. 역시 이런 사람이 왕이 되었어야 돼. 진짜 이렇게 됐어야 돼라면서 칭송하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이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든지 어깨에 이렇게 힘 좀 들어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그 영광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대요.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굳건히
세워 주신 것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번영하게 하시려고 그의 나라를 크게 높이신 것을 깨달아 알았다. 자신이 왕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왕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다윗은 주님께서 진짜 왕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과 그 나라도 주님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긴 했지만 자신이 지금 앉아 있는 이 왕자도 그리고 이 백성도이 나라도 다 주님의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지
않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주님의 것이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왕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그는 잊지 않았던 것이죠. 여러분, 이러한 다윗의 정체성은요. 그가 잘 나갈 때만 유지됐던게 아니었어요. 그의 나라가 다시 한번 국가적으로 어떤 위기를 맞닥들렸을 때도 여전히 그는 그 정체성을 지켜냅니다. 역대기는요. 마치 앞에서 실패했던이 사울의 왕의 이야기와 다윗 왕의 이야기를 대조라도 하듯이 그때와 비슷한 위기 상황이 있음을 기록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시 한번 쳐들어온 것이죠. 이미 한번 승리를 경험했던이 블레셋은 아, 우리가 사울 왕을 죽였던 것처럼 이번에는 저 다윗왕을 죽이자. 저 사람을 끌어내리자라고 하며 거침없이이 나라를 또 쳐들어 옵니다. 아, 이제 좀 나라가 이렇게 안정되고 좀 살만해진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위기가 왔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데 이전에 사울 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죠. 입장이 조금 다릅니다. 왜냐면 이제는 이스라엘이 꽤 강해졌거든요. 여러분, 또 다윗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전쟁의능한 용사였죠. 그동안 쌓인 그의 경험치가 적어 어 전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붙어 볼 만한 상황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실까요? 막 가서 싸우지 않겠습니까? 만약 저였다면 아 그 나 그래도 이 정도 힘 생겼는데 나에게 이런 경험치가 있는데 그 어디 한번 붙어 보자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얼마든지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죠. 그러나 그는 이렇게 반응하지 않아요.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어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는 블레셋이 자신을 잡으러는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가 블레셋을 실어 가도 될까요? 이것이 사울과 다른 모습이었죠. 여러분, 그런데 다윗은 왕이잖아요. 근데 다른 이방 국가가 나를 잡으러 또 우리나라를 침략하러 쳐들어오고 있다면 당연히
나가서 싸우는게 마땅한 반응 아닙니까? 아, 다서 방어라도 해야죠. 그런데 다윗이 그런 급박한 순간에도 주님 제가 싸우러 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다는 거예요. 이것이 어쩌면 오늘 우리와 다른 그래서 우리도 다윗에게 배워야 하는 모습인 거 같습니다. 어, 여러분 잘 아는 속담이실 텐데 우리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죠. 왜냐하면 우리는 위급한 상황일수록 그 상황을 빨리 해결해 버리고 싶어해요. 그런 본성이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불안하고 불편한 그런
요소들을 우리 삶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어 하죠. 하지만 때로는 그 성급함이 오히려 우리에게 독이 되어 큰 화를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침착하게 급할수록 돌아가야 해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어, 저는 이 말이 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고 우리에게도 급할수록 돌아갈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백성들이죠. 그렇다면 돌아가는 길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급할수록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윗이 보여준 모습처럼 그 위급한 순간에도 하나님께로 가서 그 뜻을 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나는 주님이 것이지. 그러니까 저들이 나를 잡으러 오지만 내가 정말 그들과 맞춰도 되는지 주님께 물어봐야 해. 이 나라는 주님의 것이지. 그러니까 이 나라의 위기도 주님께 먼저 물어봐야 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산 개인으로 살아가는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왕으로서의 살아가는 그의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간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하죠. 그런데 이에 지지하고 블레셋이 또 쳐들어와요. 골짜기를 침범해 버립니다. 다윗이 이때 어떻게 했을까요? 어떻게 했을 것 같으십니까? 어, 나 한번 이겨 봤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또 가서 이겨 주겠어 했을까요? 다윗은 이때도 하나님께 먼저 묻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려 주신 방법대로 다윗은 다시 한번 승리를 얻어내죠. 여러분 다윗의 이야기를 보면 그가 승승장고하고 있는 그의 왕권이 강화되고
온 백성과 온 나라가 다윗을 칭송하는 그런 순간에도 또는 그의 삶의 위기가 찾아온 그 위급한 순간에도 항상 한결같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삶이 승승장국 오르막을 오를 때에도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는 교만함이 없습니다. 그의 삶이 어 금방이라도 내리막기를 치닫을 것 같은 그런 위급한 위기의 순간에도 삶의 핸들을 여전히 주님께 의탁하고 있어요. 여러분 어쩌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것에 기초하는
거 같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의 것인지에 따라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는이 정체성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해요. 여러분,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사울처럼 처음 시작은 좋은 신앙인으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어느새 내가 왕이 되어서 내 맘대로 살아가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아마도 이 역대기의 저자는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이 귀한 공동체 이스라엘에게이 정체성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정체성을 따라 그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죠. 이렇게 살면 실패하는 거야. 이걸 기억하고 실패하면 안 돼. 너의 정체성을 기억해야 해. 너의 주인 누구인지 기억해. 그래야 실패하지 않아라고 끊임없이 말해 주는 것이 바로 이 역대기라는 책입니다. 여러분, 삶이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 영광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면 우리의 정체성을 알 수 있어요.
삶이 위급한 그 순간에 내가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면 나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또 여러분은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영광은 누구에게 있나요? 여러분은 어느 길로 위기의 순간 돌아가고 계십니까? 다윗은요 자신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이스라엘도 하나님 안에서 잘 다스리고 싶어 했던 왕이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가 온 백성을 다 불러모으고 언약궤를 옮겨오자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올 때에는 우리가 죄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백성의 눈이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사울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것을 다윗은 이렇게 말해요. 사울은 하나님의 앞에서 묻지 않았어. 그러면 우리는 하나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묻기 위해서 언약궤를 옮겨오자라고 말하죠. 대체이 언약궤가 무엇이길래 다윗은 이렇게 말했을까요? 하나님께 그냥 물어도 되잖아요. 우리의 말을 다 듣고 계시는
분이시니까. 그런데 왜 다윗은 굳이 그 언약의 앞에서 내가 물어야겠다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어,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언약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무엇을 맺죠? 네, 더 좀 더 자신있게 무엇을 맺죠? 네, 맞습니다. 언약을 맺습니다.이 언약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란 적정체성도 가질 수 있었던 거예요. 즉 이스라엘은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분과 함께 동행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 너희는 이제 내 백성이야. 그래서 내가 너희와 한편이 돼 줄 거야. 너희를 도와줄 거야.라고 라고 하는 그 마음의 상징으로 그들에게 성막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하나님이 그 성막 안에 갇혀 계신 분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성막을 바라보면서 아 우리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구나.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임재가 그 성막 안에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하나님을 상징하는이 성막의 중심에 바로 오늘 말하는 언약궤가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하지만 이 언약궤는 성막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심 그분의 임재, 통치, 다스리심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 언약궤가 그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다스림, 통치가 없었던 그 사울의 때를 마치 보여 주는 것처럼 그 언약궤가 아무도 모르는 것에 그저 버려져 있었다는 거예요. 사무엘이 있던 시절에 언약궤를 블레셋에 한번 빼앗긴 적이
있었는데요. 하나님이 그래서 블레셋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다 그 사람들이 겁을 먹고 아이 언약궤를 다시 돌려 보내야 되겠다라고 말하며 이스라엘에게 다시 돌려보냈던 사건이 있어요. 그리고 그때 이 언약궤가 기랴앗 여야메라고 하는 곳에 사는 아비나비라는 사람의 집에 보관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다윗이 말했던 것처럼 사울은요 그 언약궤를 찾지 않았어요. 하나님께 묻지 않았거든요. 사울을 거쳐 다윗에 이르기까지 약 70년 이상의 연약계가 그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이 되고 나서 바로 온 국가적으로 언약궤 옮겨 프로젝트에 착수하죠. 여러분이 프로젝트의 분위기가 어땠을 것 같으신가요? 성경을 보면 그야말로 축제의 현장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 역대상 13장 8절에 보면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재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라고 그 당시 상황을 기록하는데요. 온 나라가 그야말로 축제가 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우리 언약께 이제 다시 받아오자. 다시 옮겨오자라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어 조금만 뒤로 넘어가 보면 이 한껏 들뜬이 분위기의 찬물을 확 끼었는 거 같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성경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기도의 타장 마당에 이르서는 소들이 뛰로 우사가 손을 펴서를 붙들었더니 우사가 손을 펴서를 붙들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어, 언약궤는 그동안 계속 어, 아비나담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부터 다윗성까지 운반해 와야 했어요.이 운반 팀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요.
한 명은 우사이고 한 명은 아히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이 두 사람은 어, 언약궤를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그 아비나답이라고 하는 사람의 아들들이었어요. 아마도 아히오가 형이고 동생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이 이 형제가 어 다윗의 명령을 받고 이 언약궤를 운반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일이 터진 거죠. 처음에는 잘 가는 듯 보였어요. 그런데 수레를 끌고 가던 소들이 갑자기 막 미쳐 날뛰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소들이 뛰니까 그 뒤에 매어했던 수레가 어떻게 됐을까요? 어
흔들리고 이렇게 됐겠죠. 난리가 났겠죠. 그러니까 거기에 신뢰했던 언약궤도 같이 떨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사가 그걸 보고 언약궤를 떨어뜨릴 수 없으니까 그것을 얼른 이렇게 붙잡습니다.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요. 어쩌면 우사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을지도 몰라요. 어 하나님을 상징한이 언약궤가 떨어지게 줄 수 없어 하고 붙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런 우사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죠? 그 자리에서 그를 쳐서 죽이고 마세요. 여러분,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니 이게 이렇게까지 하실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는 더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여러분, 언약궤를 옮겨놓은 일에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그냥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기뻐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진노하시죠. 어, 물론 율법에는요. 언약궤를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라고 하는 어, 조항이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이
율법을 어긴 것 때문에 우사에게 진노하셨던 거 같아요. 여러분, 그런데 아무리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사가 죽을만큼 잘못을 한 건가요? 아니 그러면 하나님을 상징하는 언약기가 조금 있으면 떨어지게 생겼는데 이렇게 가만히 어 떨어지나 보다 보고 있어야 했을까요? 저는 하나님이 그 언약궤를 옮겨오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과 열정 또 언약궤를 지키고 싶었던 우사의 진심을 다 아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분노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아, 우리 마음도
몰라주고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그들에게도 들었겠죠.이 소식을들은 다윗이 어땠을까요? 굉장히 당황스럽고 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사마 그 언약궤를 바로 다윗성으로 가져오지 못해요. 그래서 언약궤를 어 가드 사람 오베데돔이란 사람의 집에 잠시 맡겨 두기로 합니다. 언약궤가 돌아오지 못하고 또다시 다른 누군가의 집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어 그렇게 언약궤는 오베데돔의 집에서 약 3개월 동안을 머물게 되는데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기간 동안
오베네돔 집과 그 모든 소유의 축복을 내리셨다고 성경이 기록해요. 그러면 앞서 우리가 읽었던 그 산을 했던 주님의 반응과 온도가 너무 차이나죠. 앞에서는 너무 차갑게 반응하시더니 여기서는 막 축복하시며 너무 따뜻하고 온 하나님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옮겨울 생각에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수고하며 열정을 쫓는 자기 백성에게 맹렬하게 진노하세요. 그리고 오히려 이반인에게는 언약궤를 보관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의 집을 축복하시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십니다.
여러분, 가드사랑 오베돔은 사실 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이 가드라고 하는 지역은 그동안 그토록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괴롭혔던 블레셋의 한 지역이었어요. 그리고 오베데돔이라고 하는 이 이름의 뜻은 에돔 신을 섬기는 사람이란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단서들을 종합해 보면 이 오베데돔은 블레셋에 사는 한 이방인이었을 것으로 보이죠. 그런데 대체 왜 그는 축복하시고 오히려 언약 백성에게는 분노하셨냐는 것입니다. 어,이 두 사건의 차이에는 바로 율법이
있었는데요. 어, 제가 좀 전에 언약에 대해서 잠깐 설명드렸었죠. 여러분, 언약 안에는 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지하셔서 그들을 돌보시는 것이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노래일 수 있는 특권이었어요. 그리고 이 특권을 눈에 보이는 상징물로 주신 것이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 안에는 특권과 함께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의무와 책임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죠.이
이 율법을 지킬 때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유지되고 그래야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임지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있었습니다. 저 두 개의 바퀴가 같이 맞물려서 돌아가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과 이스라엘은 어쩌면 그들이 이제 곧 노릴 그 특권에 너무 기쁜 나머지 그들이 지켜했던 의무와 책임은 놓쳤던 거 같아요. 어 여러분 이스라엘에는 성막과 성전 기물과 관련된 사역을 맡은 사람들이 따로 있었는데요. 어 바로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고핫 자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언약궤를 포함한 성막 안에 있는 그 모든 성물들 그 거룩한 물건들을 운반한 운반하고 관리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그 성물 관리를 그냥 그들 만들어 할 수 없었어요. 관리하고 운반하고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율법의 방법대로 이루어져야 했죠. 이와 관련된 민수기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모세가 족과 자손에게는 그들이 맡은 거룩한 임무가 어깨로 매고 다니는 일이었으므로 술에도 황소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이 고자손들이 거룩한 성물을 운반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그들의 어깨에 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애초에 그들에게 수레도 주지 않고 수레를 끌는 황소도 주지 않았대요. 왜냐면 성물은 거룩한 것이었기 때문에 수레에 실을 수 없었다는 것이죠. 어 이에 대해서 구약학 교수인 이희성 교수님의 설명을 빌려서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좀 더 도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언약교의 모습인데요. 딱 봤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으신가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무엇이 떠오르시죠? 네, 맞습니다. 가마입니다. 여러분, 가마는 누가 타던 것이었나요? 그렇죠. 왕이나 귀족들, 양반들이 타는 것이었죠. 가마는 당시 아무나 탈 수 있는게 아니었어요. 당시에 존귀한 사람들이 타는 것이 바로 가마였습니다. 마치 이처럼 언약궤를 어깨에 매고 운반하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만큼 종기하다는 의미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 언약궤에 함께하고 계신 종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으로 고아
자손들은 마치 가마처럼 그것을 어깨에 매고 운반해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짐을 싣는 수레로 운반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술레는 짐을 실는 것이니까 하나님을 짐처럼 취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어 그런데 이 역대기 본문을 잘 여러분 한번 읽어 보시면 처음에는 이들도 언약궤를 매고 오려고 했어요. 우리가 매어오자. 매서 옮겨오자라고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언약궤를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 그들이 율법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만 우사와 아이오가이 율법을
간과해 버리고 만 것이죠. 그리고 마치 이 그림처럼 짐작을 술레에 싣고 오듯 언약궤를 술레에 실어서 운반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이 과정을 하나님이 순탄하게 도우실 수 없었겠죠. 그분의 뜻과 맞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우스다가 율법을 어겨 거룩한 성물의 어 손을 대었을 때 주님은 율법대로 그를 엄중히 심판하십니다. 어 여러분 저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음이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형식도 우리에겐 중요해요. 다윗과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옮겨오려는 그 의도와 그들의 마음은 어 너무 칭찬할 만한 마음이죠. 무엇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만 놓고 본다면 흠잡을 데가 없어요. 그런데 이들은 언약 백성으로서 그들이 지켜야 했던 율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예 모르지 않았지만 그냥 그것을 소홀이 여겼기 때문에 간과해 버리고 만 것이죠. 여러분, 이들은 자신들이 그 하나님 앞에서 보였던 그 뜨거운 마음, 하나님을 향한 그 열정, 그런 것들을 이 율법 안에 담아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두 개의 바퀴가 완전히 맞물려져 있는 언약 백성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죠. 어,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 마치 그릇과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여러분, 율법은 하나님이 각 그 상황마다 어, 보여 주신 정해 주신 어떤 한 그릇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릇에 자신들의 마음과 삶을 담아서 주님께로 가져가야 했던 거예요, 여러분. 그런데 만약 그릇을 들고 왔는데 어, 그릇이 텅 비어 있어요. 그렇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그것을 받지 않으세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마음
없이 빈그릇과 같은 제사를 드리고 마음 없이 빈그릇과 같은 절기를 지킬 때 제발 이거 그만해라. 이런 빈그릇을 가져오지 말아라고 말씀하시며 분노하십니다. 이처럼 마음 없이 형식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죠. 그렇다면 여러분 반대로 한번 생각해 볼까요? 하나님이 정해 주신 어떤 그릇이 있어요. 나는 이 그릇에이 마음을 담아줬으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그릇에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그릇에 그냥 마음만 나 마음 진심이니까 하나님 마음
다 아시니까 이해하시겠지라고 하면 그것을 들고 옵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어떠실까요? 마음은 진심이니까 괜찮다라고 하실까요? 성경에 보면 그 또한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신대요. 그런데 우리는 종종 착각하죠. 내용물만 진짜면 괜찮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진실된 마음만 있다면 우리의 마음만 최선이라면 형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라고 쉽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무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하고 계신가요? 동기와 마음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지 않을 때 주님은 얼마든지 분노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만큼이나 형식도 중요하다는 것이죠. 어,이 형식,이 그릇의 모양은 시대가 변화하면서 조금씩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시대 율법과 똑같은 것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시대가 바르면 어, 흐르면 거기에 맞게 조금씩 모양은 바뀔 수 있어요. 하지만 시대가 흐른다고 해서 그것이 필요하지 않아지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그 시대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릇의 모양이 있기 때문이죠. 어 고대 근동의 법령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도 마찬가지로이 질서를 유지하는 맥락 안에서 쓰였어요. 근데 다만 율법이 그 금방에 있던 다른 나라의 어떤 법령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질서가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이 달랐습니다. 율법은 단순히 어떤 도덕적인 삶, 윤리적인 어떤 모습 그런 것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에게 율법은
아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야라는 것을 확인하는 도구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그 질서와 규칙 안에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방편이었습니다. 어 우리가 아까 보았던 그 성령 영상에서도 마침 그 질서와 무질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질서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할 때 우리에게 은혜가 부어진다는 것이죠. 어 윌튼이란 학자는 이것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율법은 보편적인 도덕 윤리 체계를 제공하도록 의도되지 않았으며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아가는 언약 백성으로서 이러한 질서를 유지할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어, 역대기는 포로기를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야. 너희는 나의 언약 백성이야라고 그들의 정체성을 알려 주죠.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그 언약 백성으로서, 주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정체성과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을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
율법을 통해서도 알려 주십니다. 여러분, 그런데 하나 이상한게 하나 있죠. 만약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이 우스의 사건이 일어난 거라면 왜 오베데돔은 하나님이 분노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잘 알지도, 잘 지키지도 못했을 것이 뻔한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이렇게 두 사건을 대하실 때 다르게 반응하신 이유는 그분이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오베데돔은 결과만 놓고 보면 같을 수 있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결과만 놓고 본다면요. 하지만 그 상황이 조금 달랐어요. 그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율법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율법대로 언약궤를 관리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어 유대인들이 그들의 토라 어 이것을 해석한 미드라시라고 한 어떤 해설서 주서가 있는데요. 그 책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베돔은 아침 저녁으로 언약궤를 극진하게 관리했다라고 말이죠. 어쩌면 오베돔은 하나님이 세우신 그 질서 안에서의 방법대로
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어쩌면 그가 살고 있는 그 금방의 질서 안에서 그래도 적어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언약궤를 섬겼겠죠. 아마 그만의 방법으로 그것을 관리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베데돔의이 마음을 보세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죠. 각자의 상황에 따라 우리를 바르게 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요 율법을 잘 모르는 그 오베데돔에게는 율법보다 그 어떤 형식보다 아 그래도 최선을 다해 섬기고 싶어 하는 그의 그 극진한 정성과 마음을 먼저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은 어땠죠?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나요? 그렇지 않았어요. 그들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신 하신 것이죠. 어, 여러분, 요즘 우리 교회에 풍삼촌 양육이 참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어, 풍삼 첫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예배하는 것, 또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는 것을 아주 많이 강조하며 가르칩니다. 여분 왜냐하면
이 양육의 주된 대상은 이제 막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 맺어가고 신앙생활을 막 배워가고 있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이제 막 태어나서 막 돌봄이 필요한 그런 사람들 말이죠. 어, 여러분 만약 여기 부모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여러분의 자녀가 그동안은 막 내가 할 거야. 엄마 아빠 안 줄 거야. 나만 먹을 거야. 막 이렇게 하다가 이제 좀 컸다고 아, 우리 엄마 아빠 날 사랑해 주니까 나도 뭔가 마음을 표현해야 되겠어라고 생각하면서 그 마음을
가득 담아 여러분을 위한 어떤 건강 주를 만들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애가 그 사람과 정소로 만든 그 주스를 여러분이 마시는 컵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뽀로로 핫핑 뭐 이런 그릇에 담아 가지고 온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이 부모라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어요? 이거 다시 컵에 다시 따라와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아, 그래도 그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비록 좀 적합하지 않은 모양이 그릇을 담아왔을지라도 아, 나를 사랑하는 그 아이의 마음이 너무 기특하고 사랑스러워서
그냥 원사 때리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 아이의 마음을 부모가 아는 거죠. 아,이 아이가 우리 딸이 우리 아들이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이것이 우리 엄마 아빠도 좋아하는 줄 알고 다았구나라는 그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저는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회심마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성숙해지나요? 그렇지 않죠. 아직 처음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 이럴 때 어떤 그릇을 써야 하는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영적 아이로 우리는 모두 다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어쩌면 주님께서는 형식보다 그 안에 담긴 우리의 마음을 더 먼저 보실 때가 있어요. 아직 어린 아이니까요. 여러분, 그러나 아이는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아이는 반드시 자라나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20살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하핀 그래 담아오면 마음이 어떨까요? 우리 애가 어디가 아픈가? 쉽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럴 때는 부모가 그냥 만약 그것을 그 마음만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기 어렵죠. 왜냐면
아이가 따라야 하는 어떤 규율과 규칙을 모르는 것 어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올해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아바 아버지가 원하시는 알맞은 그릇에 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진실된 마음을 하나님이 원화하시는 뜻과 방법 안에서 담아낼 수 있어야 해요. 이것을 뒤늦게 깨달은 다윗과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오베데돔의 집에서 옮겨올 때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다짐합니다. 언약궤 옮기 프로젝트를 다시 어 시행해요. 다윗은요. 이때는
먼저 언약궤를 안치할 거룩한 장수를 구별하여 준비합니다. 그리고 레미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이 일을 진행해요. 이에 대해서 성경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레위가문의 족장들입니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친족들을 성결하게 하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교회를 내가 마련한 장소로 옮기십시오. 지난번에는 여러분이 매지 않았으므로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규례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귀를 옮겨오려고 스스로를 성결하게 하였다. 레위 자손은 모세가 명령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를 애교어 그들의 어깨에 매었다. 어, 다윗과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돌이켜요. 아, 우리가 너무 이 특권에만 집중하고 있었구나.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를 레위 자손들이 어깨에 매고 운반하도록 다윗이 명령하죠. 그리고 그 일을 시행하는 레위인들도
그 언약궤를 운반하기에 앞서 스스로 자신들을 성결하게 거룩한 것을 대하는 것에 걸맞게 자신들을 먼저 준비합니다. 어쩌면 아마도 앞서 우사가 죽었던 일을 받기 때문에 더 두렵고 조심스러웠을 거예요. 아 이번에도 혹시 어떤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또 누가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보면 그들은 여전히 주님 앞에서 기쁘게이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전처럼 똑같이 기쁘게 찬양하며 온 마음을 다해서 마치 축제를 버리듯 언약궤를
맞이할 준비를 다시 해요. 그들의 동기와 열정 마음 무엇과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신 바뀐 것이 있다면 그들의 그 마음을 담아내는 방법이 바뀌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대로 또 그분이 원하시는 뜻대로 율법을 따라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행동이 바뀌자 하나님께서도 반응을 바꾸세요. 이번에는 이전과 다르게 화답하십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께서 주님의 언약궤를 운반하는 레위 사람들을 도우셨으므로 그들이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순양 일곱 마리를
재물로 잡아서 바쳤다. 온 이스라엘은 환호성을 올리며 물나팔과 나팔을 굴고 신벌질을 우렁차게지고 검은고와 수금을 타면서 주님의 언약궤를 매고 올라왔다. 이전에 막 그 술레의 소들을 막 뛰게 하시고 웃사를 치셔서 언약궤를 옮기는 것을 멈추게 하셨던 어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주님께서 직접 언약궤 옮기는 것을 도와주고 계세요. 여러분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질서를 지켰을 때 그 질서 안에서 행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모두가 기쁘게 언약궤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죠.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는 언약궤가 드디어 그들의 곁으로 돌아왔을 때 다윗과 이스라엘은 너무 기뻐했어요. 어 다윗은 바지가 벗겨질만큼 춤을 추며 기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이 옮겨오는가 준비하던 때부터 막 기뻐했는데 이게 정말 아무 일 없이 사고 없이 무사하게 안치되자 정말 그들의 뭐 축제가 시작된 거죠. 여러분, 그런데 이스라엘의 축제는요. 마치 그들이 오랫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에 대한 어떤 축하하는 뒤풀이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우리끼리 아, 우리 성공했어. 우리가 해냈어. 자신들께 축하하고 격려하는 그런 뭐 회식과 같은 그런 어 일들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들에게서 축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였습니다. 어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를 장막 안에 앉치한 후에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서 번제와 화목죄를 드립니다. 어이 번제는 죄로 인해서 진노하셨던 그 하나님의 분노를 어 누구어뜨리게 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제사였습니다. 앞서 이스라엘
율법을 한번 어겼잖아요. 그래서 주님이 한번 진노하셨죠. 그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번제를 통해 회개하고 아 주님 우리가 돌이킵니다. 우리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 마음 푸세요라고 이런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번제에이어서 이번에는 화해와 연합을 의미하는 화목제를 드립니다. 화목제는 죄로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 또 우리 안에 어떤 공동체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연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제사였어요. 그래서 실제로 화목제를 드린 후에는 서로 음식을 나눠 먹으며
잔치를 버리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들의 잔치는요. 이들의 축제는 죄로 인해 깨어졌던 어긋나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에 대한 기쁨의 예배였어요. 그들 곁으로 돌아 그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이제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구나. 주님의 임재가 우리 안에 온전히 임하게 되었구나.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게 되었구나. 우리가 언약 백성이 되었구나라는 것을 기뻐하는 예배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를 시작으로 멈춰 있던 그들의 예배가 다시 시작되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다윗이 레위 사람을 임명하여 주님의 교회 앞에서 섬기며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리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다. 제사장나야 야하시엘은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항상 나팔을 불었다.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주님의 율법에 기록된 그대로 번제단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계속하여 주님께 번제를 드렸다. 어 다윗은 레위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다시 세워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게 하죠. 성경은 그들이 항상 언제나 계속하여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뭘까요?이 공동체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정체성 그 한가운 중심에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는 항상 언제나 계속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살다 보면 기쁠 때도 있지만 슬플 때도 있죠. 내가 건강할 때도 있지만 아플 때도 있습니다. 나의 삶이 어떤 성과를 내며 막 승승장고 성공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실패하고 고꾸라질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변화는 끊임없이 찾아올 거예요. 좋았다 나빴다 마치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바뀌든 말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 변화를 마주하는 우리의 정체성은 언제나 동일하게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인생이 맑은 날이나 또는 비가 오는 날이나 내 인생의 봄이나 겨울이나 우리는 항상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늘 그리스도인 답게 타는 하나님의 백성인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어, 오늘 저는 여러분과 계속해서 언약 백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는 정체성을 기억하는 것이었죠. 여러분, 사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 그것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왕의 정체성을
기대하셨던 그 주님의 마음과 달리 그 기대와 달리 자신의 욕심과 그 교만과 헛된 점쟁의지도 아래 있는 왕으로 비참한 체를 맞이하며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땠나요? 다윗은 자신의 정체성을 늘 기억하는 사람이었어요. 그의 인생이 잘 풀릴 때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이룬 거야. 이거 내가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야라고 말하지 않아요. 주님이 하셨습니다. 나는 그런 힘이 없는데 아 주님께서 날 붙드셔서 내가 이만큼
왔습니다.라고 하며 그분의 영광을 그분께로 돌려 드립니다. 인생의 위기가 찾아올 때 어땠죠? 그때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과 그 국가의 미래를 주님께 으합니다. 주님 저 주님의 것이라면서요.이 백성이 나라 주님 것이라면서요. 그럼 주님 책임져 주십시오. 우리 좀 도와주십시오. 구원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을 지키는 것은 이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거 같습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기억하고 그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 앞에서 내가 주께 드렸던 나의 믿음의 고백과 결단을 기억해내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신앙의 만각의 구덩에 빠지지 않도록 기억하여 지켜내십시오. 두 번째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모습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주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다고 말씀드렸죠. 여러분,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그 질서를 유지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신앙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것을 무질서와 혼돈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 무질싸한 세상 속에서 주님의 질서를 지켜내고 싶어 하세요. 우리가 언약 백성을 산다는 것은 그 질서를 지켜내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을 기뻐하시죠.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진실된 사랑을 원하고 계시고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그런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세우신 그 질서 안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방식대로
담아낼 수 있는 성숙함도 갖추기를 원하세요. 우리의 성숙함이 계속 자라가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내 입장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만 생각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이제 부모의 마음을 해하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사랑하며 사역하며 예배하기를 여러분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우리의 방법으로 사랑하려고 하죠. 사역과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 세워진이
하나님의 질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생각과 방법대로 사역하고 예배하고 싶어했을 거예요. 잡초 즐긴이 자기 중심성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오고 또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송하지만 우리의 방법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많이 언제나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죠. 정말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은 오히려 남을 상처낼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과 열정이
뜨거우면 뜨거울 수도 좋죠. 그렇지만 그것이 주님의 질서와 어긋날 때는 오늘 우리가 살펴봤던 우사의 사건처럼 오히려 우리를 집어삼키는 화마가 되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말씀 속에서 주님의 질서를 배우십시오. 진실된 마음과 올바른 형식을 갖추는 그리스도의 내 성숙함을 끊임없이 쌓아가십시오. 마지막 세 번째는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과 이스라엘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돌이켰고 예배 안에서 주님과 연합을 누릴 수
있었죠. 그리고 항상 언제나 계속해서 예배함으로 주님의 임재를 누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봤기 때문이었어요. 역대상 16장에서 그들이 예배를 통해 주목했던 하 하나님은 크게 세 가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신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세상은 자꾸만 우리의 시선을 막 빼앗아가요. 너무 화려하게 해서 빼앗기도 하고 때로는 비통하게 해서
빼앗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해야 해요. 우리 예배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흔들렸던 그 시선을 다시 주님께로 고정시키기 위해서죠. 사랑하는 사귐의 가족 여러분, 혹시 세상을 살다 마음이 흔들리셨나요? 아니면 누군가 지금 흔들리고 계십니까? 약속을 지키시는 주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변함없는 그분의 신실한 진리가 여러분을 지탱해 줄 것입니다. 나 정말 언약 백성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싶은데 아 내 삶의 현실이 녹록지 않아라고 생각하며 불안하고 두려움 가운데
떨고 계십니까? 온 세상의 창조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을 계속 찬양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의 한숨을 소망의 노래로 분명히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혹시 지금 깊은 상실감과 우울과 절망 가운데 주저 앉아 계시니까 구원의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의 영혼을 그 깊은 수렁에서 반드시 건져내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어, 저는 늘 예배에 진심이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인데요. 특별히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더욱더이 예배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 왜 더 많은 표현들이 있는데 왜 주님은 꼭 언약 공동체를 예배하는 공동체라고 하셨을까? 왜 그 많은 것들 중에서 예배가 우리 삶의 중심을 그 중심축을 잡아 주기를 원하셨을까 하는 그런 고민들도 있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도 주님의 질서를 알아가고 배우는 것도 그렇게 살아갈 용기를 얻는 것도 나의 시선을 주님께로 드리는 것 그 모두가 예배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를 그리스도의 특권이라고 부르죠. 특별한 권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예배가 특권이라지만 어떻게 예배가 벅차기만 하고 특별하기만 하겠어요? 솔직히 때로는 예배할 수 없는 그런 상황 또는 예배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떨어지지 않는
그 발걸음을 억지로 억지로 겨우겨우 옮겨서 그저 예배의 자리만 겨우 지키고 돌아갈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배가 우리에게 진짜 특권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이 그런 예배도 받으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다윗이 군궐에서 온 백성과 떠들썩하게 잔치를 버리며 예배하는 그것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쫓겨서 광야에 숨어 숨 죽여 예배했던 그 예배도 다 받으셨습니다. 그렇게라도 예배할 때, 그렇게라도 주님을 붙잡을 때 주님은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우리만 주님을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만 주님을 바라보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도 예배를 통해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며 예배할 때 주님도 그런 우리의 삶을 바라보시고 돌보십니다. 그래서 예배는 주의 자녀들만이 요구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 특권이자 주의 자녀된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혜 특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오십시오.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큰 은혜가
준비되어 있는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