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인터넷 문제로 설교 중간에 끊김이 조금씩 있습니다. 자세한 설교의 내용은 아래의 원고를 참고해주세요 *** 설교를 시작하며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최근에 꽤 많은 팸 모임에서 언약궤를 운반하다가 ‘웃사’가 죽은 사건에 대해서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특별히 설교 중 언급하는 다윗의 삶과 비교하여, 다윗은 실수했어도 돌이킬 기회가 있었는데, 웃사는 그만한 잘못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기회도 없었다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우선 저는 설교를 듣다가 이런 질문을 갖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과정을 거치며 성장해 왔습니다. 저는 정말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거든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질문’을 갖는 것은 좋지만, 질문 때문에 설교 전체의 내용을 놓치면 엄청난 손해입니다. 그래서 만약 설교 때 어떤 다른 부분에 빠져서 설교에서 멀어지면 저는 그 또한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는 영적인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질문이 생기면 잠시 메모해
두시고, 설교 이후에 깊이 고민해 보는 습관이 좋습니다. 둘째로 팸 모임을 통해서 그 질문에 대해서 나누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질문은 질문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우선 팸 모임 시간에 말씀의 나눔 질문들을 잘 다뤄가며, 내 호기심과 의문보다 하나님이 이 본문을 통해서 오늘 나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팸 모임을 하는 이유는 말씀을 통해서 내 삶이 나아갈 방향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시면 팸 모임 시간을 날리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나눔을 기본적으로 하면서, 추가로 말씀에 대해서 궁금했던 질문을 나누는 것은 팸 모임을 풍성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질문이 있는 사람의 그 질문을 귀하게 여겨주시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알고 싶은 그 마음을 아껴주십시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개인의 생각들을 그냥 나누십시오. 절대 논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누군가의 대답이 정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잘못된 오답을 안고 끝나버리면 좋지 않습니다. 필요한 부분은 저에게나 설교자에게 다시 질문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문제의 답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가는 것이 성경을 보는 눈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웃사 이야기를 했으니, 나름의 답을 드리고 가야 여러분이 이제 웃사를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렌즈를 따라 마치 영화를 보듯이 내용을 보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렌즈가 따라가는 주인공의 서사가 있고, 그 옆에 조연들이 있습니다.
영화도 그렇지만 서사가 잘 드러나면 이해가 되지만, 서사가 없는 인물에 대해서는 우리가 개연성을 갖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서사가 있으면 길 가다가 갑자기 쓰러지는 것이 이해가 되지만, 우리에게 정보가 없는 사람이 갑자기 주인공 옆에서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영화도 그렇지만,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 성경이 중요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따라가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옮기는 사건에서 사실 주인공은 웃사가 아닙니다. 웃사는 짧게 등장하는 조연이죠. 우리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잘 들여다보면, 웃사는 아비나답의 아들로 그 집은 오랫동안 언약궤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레위인이었기에 이미 언약궤를 다루는 규정 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궤를 만지면 죽는다고 경고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수레 운반은 블레셋의 방식이고,
레위인은 어깨에 메고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웃사가 명백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 뜻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행했다는 것이 초점이고,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방식이 아닌, 이방나라의 모습을 가장 거룩해야 할 레위인, 그것도 가장 엄숙한 언약궤를 대하는 부분에서 보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웃사가 이전까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과 관계해 왔는지, 그도 삶에서 몇 번의 굴곡이 있었으나 기회를 받아서
여기까지 왔는지, 이 마지막 기회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행했다가 이것이 심판의 결과가 되었는지, 그 외의 부분을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의 삶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다뤄오셨듯, 저는 웃사의 삶에서도 보이지 않지만, 그의 삶을 다뤄오셨을 것이며, 저와 여러분의 삶도 다루어가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웃사는 여기서 우리가 놓아주기로 합시다. 오늘의 이야기를 해보죠. 지금은 이런 것을 잘 묻지 않는데, 예전에는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이냐고 묻곤 했지요. 20대부터 제가 늘 이야기하는 저의 가장 중요한 좌우명은 ‘진실은 통한다’입니다. 저는 지금도 진실의 힘을 믿습니다. 제가 목회의 여정에서 진실하게 고민하는 것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20대에는 목회세습의 문제였습니다. 저의 부친이 목회자이고 저도 신학을 한 순간부터 고민해야 했던 문제였고, 일찍부터 포기하기 위해 싸웠던 문제였습니다. 9년 후, 실제로 그 문제 앞에 서게 되었고, 9년간 준비해 왔던 답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담임목사가 된 순간부터 또 고민해 오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교역자와의 관계였습니다. 저도 부교역자 시절에 워낙 서러웠던 경험이 많았고, 좋은 목회 동역의 관계를 맺지 못했던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과연 좋은 담임목사가 될 수 있을까? 제 안에도 자리 잡고 있는 꼰대 정신과 사울 왕과 같은 본성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미리 고민해 왔던 부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제가 받지 못했던 사랑과 기회를 주려고 제법 애쓰고 있습니다. 계속 힘써야
하는 부분이죠. 그 외에도 여러 부분을 다루어가고 있습니다. 연약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생존을 걱정하던 시기가 지나고 어느 정도 안정적인 공동체가 된 이후부터, 제가 계속 마음으로 준비하며 다루는 문제가 있다면, ‘목회의 마무리’에 대한 문제입니다. 나의 가고 서는 것,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살아가는 것.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의 명령 앞에 온전히 깨끗하게 반응할 수 있을지, 어떤 부르심에도 따르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언제일지 알 수 없고,
어떤 마무리일지 알 수 없으나, 어쩌면 20년도 넘게 남은 일에 대해서, 미리 제 스스로가 마음으로 준비하며 애쓰는 것은 저는 목회자로서 끝까지 실패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은 녹화로 다 남는 이 시대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제 스스로가 이 마음 앞에, 주님의 주권 앞에 최선을 다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목회자도 이렇게 마음을 다해 ‘마무리’를 준비한다면, 한 나라의 왕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게 될 본문은 역대상 마지막
장면, 다윗 왕의 마지막을 다룹니다. 그는 이제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1. 예배 공동체로서의 영적 시스템 정비 (23-26장) 다윗은 왕의 마지막을 ‘정치’로 마무리하지 않고, ‘예배’로 마무리합니다. (대상 23:1) 다윗은 나이를 많이 먹어서 늙었을 때에, 아들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 (대상 23:2) 다윗 왕은 이스라엘 모든 지도자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불러모았다. (대상 23:3) 서른 살이
넘은 레위 사람의 인구를 조사하였는데, 남자의 수가 모두 삼만 팔천 명이었다. (대상 23:4) 이 가운데 이만 사천 명은 주님의 성전 일을 맡은 사람이고, 육천 명은 서기관과 재판관이고, (대상 23:5) 사천 명은 문지기이고, 나머지 사천 명은, 다윗이 찬양하는 데 쓰려고 만든 악기로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이다. 저는 사람의 변화를 믿습니다. 사실 그 마음이 없다면 목회와 목양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다윗의 삶을 성경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실수를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는 그런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계속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보통 교회는 0~30명을 개척기로 봅니다. 30명이 넘어서면서부터 이제는 그에 맞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100명이 넘어서는 공동체가 되면 또 그에 맞는 영적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계속 배워가고
있습니다. 저도 교회에 대한 이해가 많이 비뚤어져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어쩔 수 없이 제가 봐왔던 것들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정말 힘써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해서 헛다리를 짚기도 했습니다. 목회자도 교회를 공부해야 하고, 성도들도 교회를 공부해야 합니다. 어디로부터요? 성경으로부터입니다. 다윗도 실수하고 깨달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국가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나중에 이스라엘에 그런 왕이 없어서, 주변 나라 따라가다가 망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지난주에 봤지만 ‘인구조사’에 신경을 썼다는 것은 다른 것에 다윗의 초점이 빼앗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욕심을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것이죠. 다윗의 최대 장점은 경고를 잘 깨닫고 돌이키는 능력입니다. 이제
그의 삶의 초점이 다시 하나님과 같아졌습니다. 다윗은 이제 성전 건축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윗이 비록 성전 건축을 수행하는 역할은 아니지만, 솔로몬이 그것을 잘해 나갈 수 있도록 체계적인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전까지는 ‘성막 시대’였습니다. 성막은 이동형 예배 공간입니다. 이제 도래하는 ‘성전 시대’는 건물로 고정된 예배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배를 담당하던 ‘레위 지파’의 사명의 내용에도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이동을 위한
역할이 레위인들의 주된 사역이었다면, 이제는 찬송과 다른 섬김을 위한 사람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예배를 흔히 포도주와 잔의 비유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포도주를 담아내는 그릇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예전에는 가죽 부대에 담아서 마셨고, 지금은 유리잔에 마시기도 합니다. 잔은 시대마다 문화마다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포도주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형식에 있지 않습니다. 예배의 진정성은 예배자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여러분이 드려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예배 안에 여러분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예배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 옛사람의 모든 본성, 아직도 살아있는 나의 자기중심성, 내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든 것이 죽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우리는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 안에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심기고 성령님이 내 삶의
방향타를 잡아주실 때, 우리의 삶은 말씀의 요구를 삶으로 실천하는 예배자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역대상 23-26장까지는 레위인, 제사장, 찬양사역자, 성전문지기를 세우고 그들의 역할을 정비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가 됩니다. (대상 25:1) 다윗과 군대 지도자들은,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들을 뽑아 세워, 수금과 거문고와 심벌즈로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직무를 맡겼다. 이 직무를 맡은 사람의 수는 다음과 같다. (대상 25:6) 이들은 모두 그들의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며 심벌즈와 거문고와 수금을 타면서, 주님의 성전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맡은 일을 할 때에, 왕과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의 지도를 받았다. 25장에 나오는 것이 찬양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안에서 팀을 구성하고, 리더를 세우고, 그들에 의해서 아름다운 예배가 드려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 안에서 찬양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찬양의 시간에 대한 경계심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찬양은
자칫 악기 연주와 선율이 주도하는 감정적 반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팀은 최선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음악을 연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주가 자연스러워지고 가사가 익숙해져서, 내가 음악에 얽매이지 않고 찬양이 나와 우리 팀을 통해 고백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설교자도 연습하지 않으면 자꾸 원고에 매여 버립니다. 설교자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최선으로 원고를 써야 하지만, 그것이 잘 숙지되도록 연습하고, 시선은
청중을 살피며 영적 흐름을 보고, 또한 하나님이 지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청중으로 찬양할 때, 감정을 찬양하지 마십시오. 내 기분을 찬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내 전심으로 고백해 드리십시오. 저는 그래서 찬양이 ‘알아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심과 동반되어 고백 되면 됩니다. 찬양은 그래서 음악이 아니라, 말씀을 담아내는 행위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내가 말씀을 통해서 배운 그것을 알아드리고,
가사로 고백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통해 우리도 말씀을 다시 되새기며, 그 고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찬양을 하나님께 많이 고백해 드리십시오. 2. 국가의 행정과 군사 조직 정비 (27장) (대상 27:1)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각 갈래에 부과된 모든 일을 하면서 왕을 섬기는, 각 가문의 족장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서기관의 수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한 해에 한 달씩 번갈아 가며 근무를 하였는데, 한 갈래는 이만 사천 명씩이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이라고 하여, 다윗도 매일 같이 예배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라를 돌봅니다. 그도 어떻게 나라를 잘 경영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왕이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선데이 크리스챤이라는 이야기를 쓰죠. 그것은 6일의 삶에서는 하나님을 잊고 세상의 방식과 추구대로 살아가다가, 주일에만 와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실 언어에는 우리의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이번 주 월요일에는 교수로 성결대학교에 가서 기말시험을 내고 감독하고 왔고, 그다음 날에는 배우는 학생의 입장으로 에스라성경대학원에 가서 성경강좌를 듣고 왔습니다. 그 수업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주일이라는 표현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쩌면 또 고민해 봐야 하는 용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로, 그리고 다른 날을 평일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럼, 일요일만 주님의 날인가? 이 이야기가 주일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하면서 은연중에 다른 날은 주님과 무관한 그런 날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워라밸’이라는 단어도 우리는 조금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워라밸이 무슨 뜻입니까? 워크(Work)와 라이프(Life)의 밸런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 필요하다. 이 단어가 왜 고민이 필요합니까? 그러면 일하고 있는 시간은 우리의 ‘삶’이 아닌가? 일터에서는 그냥 기계가 되어 일만하고 그 외의 시간에서야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런 표현은 성경적 가치관이
아니죠.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세상은 일을 그렇게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주어진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일터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워라밸이 아니라 워레벨. Work(일)와 Rest(쉼)의 균형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죠. 제가 몇몇 교인분들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면, 아름다운 고민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고민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보다 이 고민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이것이 만약 나의 특정한 사건과 이슈에 대한 것이라면, 저는 어떤 시일을 정해놓고 최선으로 나를 비워내고 최선으로 주님의 뜻대로 나아가기를 기도한 후,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주님의 확실한 응답?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확실하다면, 기도한 후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 믿고 나아가십시오. 중요한
것은 계속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인도받는 것입니다. 어떤 변화에 대한 것이라면, 우선은 내가 해야 할 나의 자리를 잘 지키며, 저는 그 변화에 대해 주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에게 말씀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변화라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다만 나의 감정이 앞서서 회피하고 도망 다니지 않으려면, 나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특별한 이슈나 변화의 필요에 대한 것이라면, 그 외에 일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때는 한 가지만 잘 하시면 됩니다. 예배를 드린 후,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으십니까? 간단합니다. 말씀이 요구하고,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을 하시면 됩니다. 뭔가 특별한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팸 모임을 통해서 나누고 결단한 그것을 한 주간 성실히 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기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이미 말씀을 통해 다 주셨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카톡으로 무엇을 말했어요. 그럼 그걸 보고 그렇게 하면 제가 원하는 것을 한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배 안에서 느끼고 깨닫고 말씀이 나에게 깨닫게 하는 것을 하시면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여러분의 삶을 말씀으로 살아가십시오. 다윗은 왕으로서 할 일을 그렇게 행했습니다. 여러분도 흩어져
삶의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렇게 행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나의 직업이, 어떻게 하면 나와 사람들의 만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살아가 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행할 때, 여러분 안에 있는 거룩함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위태롭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적용이 ‘나’를 향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에는 다른
이를 향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나에게’ 집중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얼마나 잘하는가, 누가 어떠한가, 평가하는 눈을 거두시고, 말씀으로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3. 다윗의 유언 (28장) (대상 28:1) 다윗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 곧 각 지파의 지도자와, 왕을 섬기는 여러 갈래의 지휘관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과 왕자의 재산과 가축을 관리하는 사람과, 환관과, 무사와, 모든 전쟁 용사를 예루살렘으로 불러모았다. 다윗이
유언과 같이 뜻을 전하고자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으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다윗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 계획과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 성전건축 자체가 그러하죠.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꼭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가문을 통해서 그 일을 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집을 먼저 세워주실 것이고, 그 후손이 나의 집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28장 본문에서는 다른 이유들도
나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거절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뜻을 꺾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서 배운 것도 이것이니 그가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이것입니다. (대상 28:8) 이제 여러분은 온 이스라엘, 곧 주님의 회중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이 들으시는 가운데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열심히 따르고 지키십시오. 그러면 이 아름다운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고, 이 땅을 당신들의 자손에게 길이길이 물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후계자 솔로몬에게도 자신이 평생에 걸쳐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대상 28:9) 나의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섬기도록 하여라.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 모든 생각과 의도를 헤아리신다. 네가 그를 찾으면 너를 만나 주시겠지만, 네가 그를 버리면 그도 너를
영원히 버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도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어진 세상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도 그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라,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섬겨라. 하나님을 찾으라. 특별히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가는 여러분. 우리가 처음에 하나님의 어떤 일을 맡을 때는 어려움에 대한 생각보다는 무언가를 한다는 기쁨이 우리를 압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해나간다는 것이 참 어렵거든요. 어렵습니다. “와~ 쉽지 않네.”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는 사역을 통해, 내 힘으로 하려는 마음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책임을 맡아서 행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시험에 들만한 일도 많습니다. 우리교회를 무너뜨리려면 누구를 공격하겠습니까? 1순위는 저부터죠. 그리고 우리교회에서 책임을 맡은 자들, 저와 함께 동역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예전에 이찬수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본인에게 항상 떠오르는 한 가지 이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 멀리서 저격수가 한 사람씩 저격해서 쓰러뜨리고
있다는 거예요. 다름 아닌 소위 잘나갔던 목사들. 한국교회 안에서 사역을 잘한다고 한 시대를 주름잡던 사람들이 사탄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그 총이 본인을 향해 겨누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가장 좋겠네.”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책무를 평생 감당해 오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대상
28:20) 다윗은 또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말하였다. "너는 힘을 내고, 담대하게 일을 해 나가거라.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네가 주님의 성전 예배에 쓸 것들을 다 완성하기까지, 주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며, 너를 떠나지 않으시며, 너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대상 28:21)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갈래들이 하나님의 성전 예배에 관한 모든 일을 도울 것이며, 온갖 일에 능숙한 기술자들이 자원하여 너를 도울 것이며, 지도자들과
모든 백성이 너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분의 일을 할 때 그분과 가까이에 있으며, 그분의 일을 할 때 그분의 보호의 손길을 느낍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우리를 위축되게 만들고, 악한 사탄은 늘 우리의 마음을 헤집어 놓습니다. 하지만 눈을 들어 주를 보십시오. 그리고 조금 더 넓게 주변을 보십시오. 사역의 여정도 그렇고,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주신 동지들이 있습니다. 4.
성전 건축을 위한 헌신 (29장) 마지막 29장입니다. 이 부분을 전해야 할까 말까, 고민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므로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나누겠습니다. (대상 29:3) 또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성전을 지으려고 준비한 이 모든 것 밖에, 나에게 있는 금과 은도 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에 바쳤습니다. (대상 29:5b) 오늘 기꺼이 주님께 예물을 바칠 분은 안 계십니까? (대상 29:6) 그러자 각 가문의 장들과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족장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실 업무 관리자들이 기꺼이 바쳤다. (대상 29:9) 그들이 기꺼이 주님께 예물을 바쳤으므로, 그들이 이렇게 기꺼이 바치게 된 것을, 백성도 기뻐하고, 다윗 왕도 크게 기뻐하였다. (대상 29:14) 제가 무엇이며, 저의 백성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렇듯이 기쁜 마음으로 바칠 힘을 주셨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셨으므로, 우리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님께 바쳤을 뿐입니다. 재정이나 헌금에 관한 설교는 성도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주제이고, 목회자 역시 가장 피하고 싶은 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말씀으로부터 회피하면 안 됩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헌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은 먼저 자신의 개인적인 예물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립니다. 놀라운 장면은, 이 헌신이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기쁘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백성들도 왕의 본을 따라 자원하여 드렸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지금 시대는 100 교회가 개척하면 2~3개가 자립한다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위기가 없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셨죠. 공동체가 성장함에 따라 앞으로의 예배 공간에 대해 고민도 있습니다. 그상황 자체가 감사이죠. 그렇다고 제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께 무언가를 하자고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자, 건축헌금 합시다” 이런 것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꺼이 드리는 마음이 살아 있습니까?” 성경시대에도 중요했고, 우리 윗세대에서도 간직하고 있었던 그 순전한 마음. 혹시 우리는 너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상을 살면서 그런 마음은 다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 저는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쁘게 드렸던 신앙의 유산, 그 순수하고 진실했던 믿음이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정직한 마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대상 29:17)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정직한 사람을 두고 기뻐하시는 줄을 제가 압니다. 나는 정직한 마음으로 기꺼이 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제 여기에 있는 주님의 백성이 주님께 기꺼이 바치는 것을 보니, 저도 마음이 기쁩니다. (대상 29:18) 주,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의 백성이 마음 가운데 품은 이러한 생각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도록 지켜 주시고,
그들의 마음이 항상 주님을 향하게 해주십시오. 혹시 지금은 여러분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기쁘게 드릴 수 없다고 느끼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금을 징수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상황에 따라 계획했던 것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마음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진실함을 기뻐하시고, 그 속에 담긴 사랑과 중심을 하나님은 귀하게 받으십니다. 그러니 이런 부분에 대하여
정죄함을 받지 마십시오. 그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잃지 말고 그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드림은 ‘액수’보다 ‘자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아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기꺼이, 기쁘게, 정직한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헌신입니다. 이 헌신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될 때, 우리도 다윗처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드릴 뿐입니다.” (29:14) 이 고백이 오늘 우리 안에 살아나기를, 그리고 이것이 우리 신앙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의 설교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그의 인생 마지막을 ‘예배’로, ‘삶의 헌신’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왕으로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레위인과 찬양대, 문지기, 제사장을 조직하며 예배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또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질서 있게 준비했습니다. 다윗이 솔로몬과 온 백성에게
남긴 유언은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기라.” (대상 28:9) 그가 자신의 삶을 대했던 태도를 성경은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므로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드릴 뿐입니다.” (대상 29:14) 우리의 삶도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내 삶을 주님 앞에서 날마다 드리는 것. ALL DAY CHRISTIAN. 기꺼이, 기쁘게, 마지막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