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일독하는 분들, 사무엘서-열왕기서-역대기서 순으로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누구나 역대상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 이거 내가 분명히 읽었던 말씀인데?” 왜냐하면 역대기는 ‘다시 쓰는 역사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 자세하게 다룹니다. 사무엘상은 흔히 사사였던 사무엘의 이야기와 사울의 통치, 다윗의 준비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무엘하는 온통 다윗이 왕으로 통치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열왕기상/열왕기하는
솔로몬의 통치부터 그 이후 왕국의 분열과 모든 왕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마지막에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으로 끝이 납니다. 이미 이렇게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의 역사를 다룬 후, 다시 그 시절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역대상/역대하인 것입니다. 먼저 기록된 열왕기서가 공식적으로 3개의 자료를 인용하여서 기록했다고 밝히는 데 반해, 역대기는 무려 32개의 자료를 인용해 가면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또한 역대기의 50%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 인용하고 있으니, 당연히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사무엘-열왕기서가 조금 더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들은 포로기에 기록이 되었는데,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실패했는지를 깨닫게 하는데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열왕기상 첫 번째 설교 제목을 <실패 보고서>라고 다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인해서 우리가 망하게 되었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역사적 회고 형식입니다. 반면, 제가 2주 전에 설명을 해드렸지만, 역대기는 지금 누구에게 쓰고 있는 것입니까? 바벨론 포로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살아가고 있는 귀환 공동체에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 보고서’가 아닙니다. 바벨론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잖아요. 이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회복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먼저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아야죠. 우리가 어떤 민족인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민족입니까? 배달의 민족?! 광고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부터 시작합니까? ‘홍익인간’. 원래 정체성은 뿌리부터 다루는 것이죠. 그래서 역대기가 족보를 다룹니다. 아담부터. 그 이야기는 우리는 어떤 민족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라고 역대기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귀환 공동체에게 정체성과 회복의 소망을 말해주고 싶다면, 어떤 이야기들을 주로 다뤄야겠습니까? 실패 보고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다뤄야 하겠죠. 지금 우리에게 다시 무엇이 필요한가? 이것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약공동체로서 여전히 너희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면, 누가 부각되겠습니까? 다윗이죠. 다윗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 다윗 언약은 포로로 끌려가면서 그들에게 깨어진 약속과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들 안에는 다윗 언약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돌아온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너진 성전부터 재건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당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민족의 정체성을 다시 세워가는 것입니다. 역대기가
주어질 당시에 귀환 공동체가 만든 성전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성전은 과거에 비하면 너무 작았고, 과거와 달리 이들은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작고 초라했지만, 하나님은 그 안에서 임재하며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때때로 그 성전의 외형을 보면서 과거의 영광과의 비교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잘 가르쳐줘야 했어요. 성전을 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짜 예배는 무엇인지, 우리는 어떤 성전의 후손인지, 어떤 예배자들인지 가르쳐야
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예배가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작은 공간, 불완전한 상황, 연약한 마음.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환경이 아니라 그분의 언약에 따라 주어집니다. 역대기는 그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첫 번째 성전을 지었던 다윗의 성전 건축 준비 이야기와 그를 실행한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봉헌 이야기가 역대기의 중심 메시지가 됩니다. 이스라엘 모든 역사에서 다윗과 솔로몬을 가장 중요하게 부각하여 다루는 것이 역대기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이미 그런 이야기는 사무엘-열왕기서에 다 나옵니다. 유대인들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실패보고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기에서는 그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조금 더 희망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의 언약에 신실하시며,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로 돌아가자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무엘-열왕기서의 키워드가 ‘실패’이고
불순종에서 심판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면, 역대기의 키워드는 ‘회복’이고 언약에서 회복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다윗과 솔로몬이 있습니다. 역대상은 다윗에 관한 이야기가 메인이고, 역대하는 솔로몬에 관한 이야기가 메인으로 다뤄집니다. 이 책의 목적은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주 전도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사울에서 다윗으로 왕권이 계승된 이야기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이야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태도에 관한 부분이었죠. 언약궤가 하나님의 상징인데, 그것을 함부로 다뤘습니다. 짐을 싣는 수레에 그것을 가져오다가 참사가 나기도 합니다. 그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정한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위에 있어서 자신의 판단을 더 앞세우는 순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 되심, 하나님의
왕 되심입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위에 있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에덴도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첫 번째 원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무시한 순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던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깨진 것이죠. 하나님의 공의가 작동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또 다른 질서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방법을 주십니다. 구약에서 그것은 예배였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주 되심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왕정 사회가 되었음에도, 신정 안에서의 왕정이 중요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왕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왕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 신정 안에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가장 부합했던 왕이 다윗이었던 것이죠.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후의 이야기입니다.
17장을 읽어보겠습니다. (대상 17:1) 다윗은 자기의 왕궁에 살 때에 예언자 나단에게 말하였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살고 있는데, 주님의 언약궤는 아직도 휘장 밑에 있습니다." (대상 17:2)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무슨 일이든지 계획하신 대로 하십시오." 다윗의 ‘신 의식’이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존재로 여기는 것은 ‘나-중심주의’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중심주의’로 생각하는 실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온 이후로 마음이 불편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나보다 더 높으신 분인데, 내가 더 좋은 곳에 거하고 있는 것이 맞나?” 이런 생각입니다. 다윗은 내가 딱 할 만큼만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늘 이 생각을 하는 사람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은 늘 무섭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신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뭔가를 하는 마음의 동기가 심판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사장님 밑에서 일하는 직원 같은 마음이죠. 그러면 무슨 일을 해도 불안합니다. 혹은 지나친 인정욕구에 빠지기 쉽습니다. 반면 누군가에게 하나님은 너무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뭔가를 하는 마음의 동기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기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뭔가를 준비할 때 에너지가 들지만 기쁨이 있죠. 하나님이
뭐 안 했다고 뭐라고 하지 않지만, 내 마음에서 우러나서 뭐라도 할 수 없을까 생각하게 되죠. 저는 신앙생활이 후자의 방향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지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너무 크다 보니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서부터 이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왕의 곁에서 돕는 선지자 나단은 그런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왕과 함께 계십니다. 왕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을 행해보십시오.” 저는 우리 신앙의 최고봉이 하나님과 내 마음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심전심.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 마음 가운데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이 너무 찾으시는 사람이죠. 선지자 나단이 보기에 다윗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No. (대상 17:4)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왜 다윗의 이 마음을 거절하셨을까요? 이것을 아주 쉽게 바꿔보면 이런 분위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프로포즈급 되는 어떤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알았어요. 그리고 다윗의 입을 딱 막더니, “너는 고백하지 마. 네 마음 다 알아. 고백은 내가 먼저 할
거야.” (대상 17:10b) 나 주가 네 집안을 한 왕조로 세우겠다는 것을 이제 네게 선언한다. (대상 17:11) 네 생애가 다하여서, 네가 너의 조상에게로 돌아가게 되면, 내가 네 몸에서 나올 네 아들 가운데서 하나를 후계자로 세워 그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대상 17:12) 바로 그가 내게 집을 지어 줄 것이며,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해주겠다. (대상 17:13)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내가 네 선임자에게서는
내 총애를 거두었지만, 그에게서는 내 총애를 거두지 아니하겠다. (대상 17:14) 오히려 내가 그를 내 집과 내 나라 위에 영원히 세워서, 그의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게 하겠다.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먼저 다윗의 집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다윗의 후손이 하나님을 위한 집을 건축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하나님과 다윗이 완전히 서로를 위해서 먼저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로맨스의 절정입니다. “내가 먼저 하게 해줘.”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어쩔 줄 모르는 분이라니까요. 그런 사람에게는 아주 말랑말랑한 분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밖에 모르게 만드는 그 마음입니다. 저는 하나님밖에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우리 모든 이 자리에 있는 예배자들도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18~20장까지는 다윗의 시대에 경험했던 승리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합니다. 그런데 그 주체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대상 18:6) 그리고 다윗이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주둔군을 두니, 시리아도 다윗의 종이 되어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다윗이 어느 곳으로 출전하든지,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대상 18:13) 에돔에
주둔군을 두었다. 마침내 온 에돔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었다. 다윗이 어느 곳으로 출전하든지,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승리는 다윗이 경험했지만,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 라이프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는 결단입니다. 주 되심, 왕 되심.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삶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이 세상을 회복하고 변화시키는 그 놀라운 일에 내 삶이 사용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복되어야 할 대상에서 먼저 회복된 대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 사역에 동역하는 대상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부분에서 이러한 변화는 영향을 끼칩니다. 특별히 내 삶의 자리를 해석하는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신앙이 정말 좋은 사람과 신앙이 좋은 듯 보이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앙이 정말 좋은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명으로 받아들여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맡겨진 영역들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이해하며 최선으로 살아내어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신앙이 좋은 듯 보이는 사람은 말만 앞섭니다. 경건하게 보이는 말을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안에서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주신 사명보다는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합니다. 당연히 맡겨진 일은 사명보다는 부담일 뿐입니다. 다윗은 말뿐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신정 안에서의 왕정이라고 해서 “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하나님이 다 하실텐데...” 이런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어떤 성과를 맛본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성취와 성공을 틈타서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의 공격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셔야 해요.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걔는 그 생각밖에 안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있는 사람에게는 “잘한다,
잘한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격을 합니다. 물론 사탄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공격은 ‘거짓말’ 뿐입니다. 그런데 이는 에덴에서부터 늘 잘 통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을 수없이 넘어뜨려 왔으니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좌절과 낙망이 오는 순간에는 우리를 찾아와서 더 우리의 마음을 무너지게 합니다. 우리를 쓸모없는 것처럼, 더 깊은 절망으로, 무력함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갑니다.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성취와 성공의 경험이 쌓여가며 뭔가 뜻대로 되기 시작하면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 못할 정도로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그는 잘 알고 있거든요. 우리가 하나님과만 멀어지면 우리의 어떤 성공도 실패가 된다는 것을요. 나의 영적 아킬레스건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시고, 내가 어떻게 사탄의 공격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속아 넘어가지 않고, 진리 위에서 승리할 것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영적으로 성숙하고자 한다면, 성숙의 과정마다 더 큰 시험과
유혹이 온다는 것을 항상 알고 자신을 잘 지켜내셔야 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잘 해야 하는 것은 거짓에 대한 분별과 유혹과 공격 앞에 약해질 때마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예배로 피하고, 기도로 피하고, 말씀 앞으로 피하십시오. 다윗은 왕이었으나 늘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연약한 자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도 넘어진 적도 있습니다. 제가 앞서 역대기는 다윗의 치부를 가급적 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지하듯이 다윗의 가장 대표적인 실패인 ‘밧세바
사건’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21장에 한가지 다윗의 실책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상 21:1)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일어나서,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게 하였다. (대상 21:2) 그래서 다윗은 요압과 군사령관들에게 지시하였다. "어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여, 그들의 수를 나에게 알려 주시오." 사탄이 다윗의 이 성공시기에 다윗을 부추겼어요. 그래서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고 나옵니다. 인구조사를
했다는 것이 왜 문제일까? 사실 인구조사 자체가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왔나 안 왔나 체크도 하고 전체 성도의 명부를 만들어서 관리도 합니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은 교회가 행정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한 영혼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팸 리더나 교육부 대표가 맡겨진 영혼들을 늘 살피고 점검하고 하는 것은 너무 귀한 일이죠. 다윗이 그런 마음으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죠. 그런데 여기서의 인구조사는 그런 의도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인구조사는 군대를 편성하고 세금을 거두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것도 필요하면 할 수 있죠.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그 일을 하는 다윗의 마음이 불순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큰 일을 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뜻을 묻지 않습니다. 역대기의 관점에서 다윗의 태도는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자신이 가진 힘과 자원을 신뢰하는 모습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능력과 혹은 축적한 재산이 크고 작음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삶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능력이 많아도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가는 종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나의 능력이 크지 않음에도 그 작은 능력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왕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자리잡은 이상한 단어가 하나 있다면, ‘주의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안타깝게도 ‘주의 종’이라는 표현이 목회자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어요. 그래서 아주 가끔은 목회자를 표현하면서 ‘주의 종님들을 축복하시고’, 이런 ‘주의 종님’이라는
이상한 표현이 생기기도 합니다. 종은 어떨 때 종입니까? 까라면 까는 것입니다. 주권을 누군가에게 내어놓았을 때 ‘종’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왕으로 살아가던 삶에서, 내 왕이 되어주실 분을 발견하고, 그분의 종이 되기를 결정하여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에서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귀 뚫린 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율법에는 종이 일정 기간 섬기면,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신이 섬기던 주인이 너무 좋아서 스스로
자유인이 될 기회를 포기하고, 평생 그 주인 옆에서 살아가는 종이 되기를 선택한다면, 그 의사를 확인한 후 그 종의 귀를 뚫어서 그것을 표시하였습니다. 귀 뚤린 종은 누군가를 평생 섬기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회심이 이런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이런 결단입니다. 아무에게나 내 삶의 주권을 내어줄 수는 없죠. 종종 우리는 세상에 내 주권을 다 내어주고 세상이 이렇게 하라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면 저렇게, 세상의 기준이 이러니 내가 그 앞에서 스스로를
작게 여기고, 절망하며 살아갑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에 내어준 주권을 되찾아오고 내 의지와 결단으로 하나님께 내 삶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에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왕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왕이 되어주실 수 없습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왕이었고 능력도 있었으나 종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제 자기가 왕의 태도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구조사에 담긴 그의 잘못된 마음이었습니다. 이 다윗의 마음을
다윗의 심복인 요압이 눈치 챕니다. (대상 21:3) 그러자 요압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 불어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높으신 임금님, 백성 모두가 다 임금님의 종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 이런 일을 명하십니까?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벌받게 하시려고 하십니까?" (대상 21:4) 그러나 요압은, 더 이상 왕을 설득시킬 수 없었으므로, 물러나와서 온 이스라엘을 두루 돌아다닌 다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대상
21:5) 요압이 다윗에게 백성의 수를 보고하였다. 칼을 빼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온 이스라엘에는 백십만이 있고, 유다에는 사십칠만이 있었다. 요압이 다윗이 지금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의지를 꺾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그만큼 지금 자기생각이 강했다는 의미입니다. (대상 21:7)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악하게 보시고, 이스라엘을 치셨다. (대상 21:8)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자백하였다. "내가 이런 일을 하여,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종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 참으로 내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을 하였습니다." (대상 21:9) 주님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시 나단 선지자도 사용하시고 갓 선지자도 사용하셨는데, 나단은 주로 국가적 사안이나 언약적 계시를 전했다면, 갓은 사무엘 시기 이후부터 다윗의 통치 기간 동안 다윗과 개인적으로 관계하고 있던 선지자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그를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한
다윗의 회개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징계하십니다. 용서는 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잘못에 대한 대가는 감당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종종 혼동합니다. “회개기도 하면 끝 아니야?” 회개는 용서의 통로이지, 우리가 저지른 모든 일에 대한 책임 면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에덴에서 추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불순종을 용서하셨지만, 그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맘껏 짓고 회개기도라는 마법을 부려서 용서라는 결과를 즉각 얻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진정성은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짜 회개는 책임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려는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종종 죄의 결과를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 상황조차도 회복과 성숙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대상 21:13)
그러자 다윗이 갓에게 대답하였다.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자비가 많은 분이시니, 차라리 내가 그의 손에 벌을 받겠습니다. 사람의 손에 벌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 전역을 덮친 전염병으로 나타났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이 사건은 다윗 개인의 잘못도 있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반영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방아쇠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깨우쳐야 할 상황에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또한 다윗에게는 더욱 아픈 심판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온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더욱 처절히 회개합니다. (대상 21:17) 그 때에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 백성의 인구를 조사하도록 지시한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닙니까? 바로 내가 죄를 짓고 이런 엄청난 악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백성은 양 떼일 뿐입니다. 그들에게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주 나의 하나님! 나와 내 집안을 치시고, 제발 주님의 백성에게서는 전염병을 거두어 주십시오." 다윗의 이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대상 21:18) 주님의 천사가 갓을 시켜, 다윗에게 이르기를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제단을 쌓아야 한다" 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을 심판하던 천사가 마지막으로 머물러 있던 곳이 오르난의 타작 마당인데, 이 일에
대한 회개의 의미로 그곳에 제단을 쌓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오르난에게 갑니다. 왕이 오니 오르난이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합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이 타작 마당을 나에게 파시오. 내가 여기에 주님의 제단을 쌓으려 하오.” 오르난은 그 이야기를 듣고 “왕이여, 그냥 가지십시오. 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소. 내가 반드시 충분한 값을 내고 사겠소. 주님께 드리는 것인데, 내가 값을
내지도 않고, 그냥 가져갈 수는 없소.” 그렇게 다윗은 터의 값을 손수 계산한 후, 그곳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는 번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화목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바로 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하나님을 앞으로 예배해야 하는 예배의 처소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회복된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여기까지가 역대상 2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무리하며
오늘의 메시지를 깊이 생각해봅니다. 역대상 말씀이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죠. 그들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주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예배하는 여러분들에게 역대상 말씀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대나, 귀환의 시대나, 오늘날 우리의 시대나 하나님이 동일하시기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 어느시대에나 요구되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가장 먼저 세워야 할 기초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여기서 시작되고 여기서 끝이 납니다. 우리의 그 결단이 있었다고 우리가 한 순간에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삶을 통해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도 그것입니다. 다윗에게는 그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다윗을 너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다윗은 하나님의 위로가 되었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그 하나님과 함께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하시며 그가 왕으로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나가고, 또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세상 가운데 잘 실천하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그 다윗도 사탄의 유혹 앞에 실수하기도 합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다윗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벌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돌이키시려고 일하십니다. 다윗이 요압이라는 첫 번째 방지턱에서
멈췄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잘못된 마음을 실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다윗의 행동을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죄를 눈감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때로는 죄로부터 온전히 돌이킬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복의 책임까지 감당하게 하십니다. 다윗이 그 마음까지 알고 다시 우리가 알던 하나님을 사랑하고, 종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다윗으로 돌아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다윗이 가장 하고 싶었던 성전 건축을 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먼저 온전케 세우시고, 이제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는 그 마음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야기는 성전을 세워가는 과정이지만, 사실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 다윗의 귀를 보셨습니까? 오늘 설교에 빗대어 본다면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삶을 다짐한 귀뚫린 종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 되시는
삶, 종의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평생을 하나님 앞에 살겠다는 귀뚫린 종의 마음이 오늘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