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복음에 미친 사람

2025-05-18 · 빌립보서 1~4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의 본문은 빌립보서입니다. 매일성경의 여정으로는 5월 23일부터 말일까지 묵상하게 되는 책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다음 주는 체육대회가 있으므로 강해설교를 하기 어려워서 오늘 설교로 빌립보서 전체를 다루려고 합니다. 저희교회는 2017~2018년에는 주일에 주제설교를 했습니다. 그때는 수요일마다 <매일성경>으로 묵상모임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니까 개척 후부터 저희는 계속 매일성경으로 말씀과 동행하는 삶을 훈련해 온 것이죠. 2019년부터는

주일마다 매일성경 본문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빌립보서는 그때부터 설교로 만났습니다. 2019년 10월 : 매일성경 42~44번째 설교 2023년 12월 : 매일성경 266~267번째 설교 성경 66권 중 유일하게 빌립보서를 오늘까지 3번째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저도 새롭게 설교를 준비했고, 여러분들도 처음 듣는 것처럼 들어주시리라는 강력한 믿음이 저에게 있기에,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나게 해주신 이 소중한 책을 함께 기쁜 마음으로 나누겠습니다. 1.

바울 : 복음에 미친 사람 바울은 위대한 기독교 신앙의 스승이죠. 물론 바울의 신앙은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이라면 바울은 그 복음을 신학적으로 체계화 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성향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이죠. 사람은 결국 타고난 모양대로 쓰임을 받습니다. 단점을 보완할 수도 있고, 장점을 더 극대화할 수도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성장이나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각 사람의 성향과 기질은 어느

정도 유지됩니다. 다만 우리가 믿는 것은 그 다양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모습이고, 그중 무엇이 더 낫다, 못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곳이나 몇 사람만 모여도 그 안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자녀를 둘만 낳아도 둘이 너무 다릅니다. 만약 우리에게 다양성만 주셨다면 우리는 함께하기에 너무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성과 동시에 ‘함께할 힘’도 주셨지요. 무엇보다 교회는 다양성이 있되, 성령님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양성이 있지만, 하나 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 각 사람이 성령을 따르고, 성령님 앞에 순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 극치입니다. 성령님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이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성령님이 우리를 돕고, 어떻게 성령님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실 수 있을까? 이것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살펴봅시다. (요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내 말이 아니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이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성령에 대해서 나옵니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은 그의 생각과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삶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이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또한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 뜻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말한다고 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16장을 보면 성령께서도

임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예수님의 것을 받아서 되새겨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분의 뜻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 생각나고 가르치실 때, 그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뜻은 곧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삶이고, 복음과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뜻은 성경의 뜻과 사실상 같습니다. 나는 성령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 추상적이고

믿기지 않는다면, 그냥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그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면 됩니다. 그것이 곧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설교로 듣거나 말씀을 묵상하며 들을 때, 그것이 내 삶에 주시는 명령으로 들리면, 그것이 악한 것이 아니라면 실천해보는 것이 성령의 뜻을 따르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입니다. 기도하다가 누군가를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휴대폰을 열어 그 사람에게 응원하는 메시지라도 보내는 것이 성령의 뜻을

따라 보는 과정입니다. 누군가는 자의적인 자신의 주관을 성령의 뜻으로 포장합니다. 자기 뜻과 자기 의를 성령의 뜻과 성령의 의로 포장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말씀으로 그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분별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은 곧 말씀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 성령 사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게 사실이어도 그들의 도구일 뿐 그들의 능력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제가 진짜 존경하는 사람은 말씀대로 살고자 목숨을 거는 사람들.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없이 정말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자신을 말씀 앞에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신자의 가장 큰 능력은 성령께 순종하는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목사의 가장 큰 능력도 성령께 순종하는 능력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바울은 복음에 미친 사람입니다. 제가 앞서 성향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성령께 순종하는 것도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회심하고 성령이 충만해진 후 베드로답게 사역했습니다. 자신을 불태웠죠. 그래서 그의 삶은 활활 타오른 후 십자가로 향합니다. 거기서도 그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 삶을 마감하기 위해, 자신을 거꾸로 못 박아 달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요한의 성향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모습으로 사역했습니다. 그 덕에 그는

예수님의 사랑의 성품을 닮아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에 꾸준히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사랑의 사도로 기억합니다. 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에도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덕후. 베드로는 감정이 앞서서 자신의 감정의 진실성만큼 따라가지 못해서 실패의 경험을 가졌다면, 바울이 했던 실패의 경험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는 자기 삶이 최고의 삶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 확신이 스데반을 비롯한 여러 그리스도인을 죽게 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했고 그 일에 헌신했으니까요. 주님은 그 바울에게 찾아가서 그가 가장 혐오하는 자신이 복음 그 자체임을 보게 하십니다. 그 주님을 마주한 바울은 그 순간 고꾸라집니다. 말 그대로 회심합니다. 물론 바울이 그것을 완전히 소화해서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그에게도 10년이 넘는 시간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을 보내며 바울은 이런

사람으로 재탄생합니다. 그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중심이 바뀌었고, 그가 확신하는 것이 바뀌었습니다. 2. 바울 : 확신과 의심 사이 여러분, 복음이 나를 바꾼다는 것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나의 삶의 확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한번 말씀을 봅시다.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회심한 이후 바울은 예수께 잡힌 바 된 삶을 사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온전하다고 말하지 않아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울도 이런데 우리는 얼마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족함을 느낀다고 목표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푯대가 흔들릴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목표입니다. 복음에 미친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처럼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입니다. 바울도 그런 한 사람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려고,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자 결단합니다. 대신 그가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에게 복음을 전한 후, 도리어 스스로는 버림받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쓴다”(고전 9:26)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확신과 의심을 잘 사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확신,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이 가진 연약함에 대해 진실하게 바라보며 그것을 주 앞에 맡기는 겸손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담대했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두려움으로 점검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성숙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자꾸 구원에 대한 문제에서 흔들리고 불안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 같고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이것이 의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복음을 아직 잘 정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을 잘 이해하면 복음의 능력을 확신합니다. 복음이 나를 놓칠까봐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다만 우리가 의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언제든 주님을 떠날 수 있는 악하고 약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날마다 내 방향과 삶을 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의심은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할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교만함과 싸워야 하는 자이며,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공격 앞에 있음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욱 피하고자, 향하고자 하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나는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다.” 빌립보서에는 이런 바울의 마음, 태도, 신앙, 신학이 잘 드러납니다. 3. 복음 : 참된 기쁨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들과 복음에 대해서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자비량 선교사로 알고 있지만, 그런 바울을 묵묵히 후원하고 도왔던 것이 빌립보교회였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너무 사랑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빌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언제 들어도 멋진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제일 먼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나는 복음으로 인하여 기쁘다”는

것입니다. (빌 1:4) 내가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늘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빌 1:5) 여러분이 첫 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 1:6)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서 누군가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이 정말 기쁨이 되죠. 복음의 불모지였던 빌립보에 회심한 성도들이 생겨나고 공동체를 이루고 이제는

바울의 사역을 후원하고 돕는 자들이 되었씁니다. 바울은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현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로마의 중요 도시였던 빌립보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영적 지도자의 부재. 그것도 바울이 복음으로 살아갔는데 그 결과가 ‘투옥’인 상황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신앙이 어린 성도들이 오해하거나 두려움에 빠져 신앙을 잃어버릴까 봐 염려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목사로서 충성을 다하고 저의 온 삶을 드려 주님을 위해 살았는데, 제가 중병이나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때 저는 하나님 안에서 저 나름의 시간을 보내며 믿음의 씨름을 하겠지만, 아마 저 또한 혹시라도 이 일이 누군가에게 오해와 두려움이 될 것에 대해 염려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고난이 동반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아직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을 오해하거나 두려워하곤 합니다. 우선 바울은 그 부분에 대해서 그들에게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어쩌면 바울에게는 자신의 죽음보다, 그로 인해 누군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더 슬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말씀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가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았고, 내가 애쓴 것도 헛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빌 2:17)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빌 2:18) 여러분도 이와 같이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바울의 기쁨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무리 세상 가운데 어려움을 겪지만, 변치 않고 하나님의 구원에 함께 참여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삶을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기에 바울은 기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에

대한 이런 미친 집착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깨어진 세상에 살아가는 한 사람을 하나님 안에 살게 하는 것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소망이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감옥에 갇힌 것도 사실 기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갇힘’이 복음의 ‘전진’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자 로마로 갔습니다. 그는 가택연금 상태로 일정한 장소에 머물러야 했는데, 병사에 의해서 24시간 감시를

받으며 사슬로 묶여 있었습니다. 방문객을 맞이할 수 있었으나, 외부로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바울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동시에 바울을 지키는 병사들도 복음을 듣게 되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또한 이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빌 1: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또한 이런 모습은 감옥 밖에 있는 여러 그리스도인에게도 도전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자유가 없을 때도 복음을 전했고, 억울할 때도 복음을 전했고, 감옥에서도 전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쁨은 자신의 안위나 자기 컨디션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가?”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그것이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고,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나를 바꾸지 않았다면....”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봐요. 그러면 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직 복음을 몰라서 헤매는 사람들. 교회 밖에도, 교회 안에도. 복음이 바꾸어준 나의 삶의 소중한 기쁨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해,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 아직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편이 되는 일입니다. 만약 그런 여러분의 삶의 수고로,

영적 생명이 탄생 되는 일, 자라가는 일에 여러분의 삶이 의미있게 사용되었다면, 적어도 저는 여러분의 인생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함께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복음 : 갈등을 넘어서다 이렇게 바울이 사랑하고, 바울을 잘 도왔던 빌립보 교회에도 갈등은 있었습니다. 아예 이름이 나오죠.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이 빌립보 교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리더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잘 안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럴 수 있죠. 갈등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보여야 하는 순종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안 따르는 사람이고, 성령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뭐 애써서 풀어갑니까? 그냥 투명인간 취급하고 살면 되죠. 아마 많은 사람이 교회에 자리를 잡고 나서, 관계적 갈등을 겪으면, “내가 이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나?”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그 질문이 있다면 축하합니다. 드디어 당신은 예수님의 길에 한 걸음 들어선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갈등을 그다지 겪지 않습니다. 애초에

갈등이 생기면 선을 긋던지, 피하거든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갈등은 그것 못하는 관계. 즉, 대부분 가족관계입니다. 친구는 갈아 타버리죠. 직장에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면 되죠. 그런데 가족은 그게 안 되니 어렵죠. 그런데 요새는 대부분 형제도 없습니다. 갈등을 훈련할 일이 적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특이하죠. 세상처럼 선 긋고 피하고 할 수 없는 상황에 자꾸 섭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다 사랑을 훈련해 나가고 있는 단계에 있지, 성숙한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서로 어렵죠. 와우~~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면, 다 좋은 사람들로 가면 쓰고 지낼 수 있죠. 그런데 사역을 함께하고, 또 소그룹을 함께하면 진짜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어쩔 땐 깜짝 놀라죠. 놀라지 마세요. 그게 원래 그 사람의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 다 그런 약점들이 있습니다. 그 연약함이 서로를 찌르고 힘들게 하죠. 그 찔리는 와중에도 사랑하려고 버티다 보니 힘들죠. 진짜 너무 힘들면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힘든 것은 참아내면서 우리가 성장해 가는 것이죠. 다 나를 성장시키는 아주 고마운 사람들이랍니다. 그런데 진짜 내 모습 알고도 옆에서 참아주며 품어주며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인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에 그런 사람 몇 명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내 친형제보다 교회 식구들과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있을걸요? 교회는 복음이 어떤 힘이 있는지 경험하고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모여 있는 우리는 모두

연약합니다. 소망이 있을까요? 네. 바울은 우리의 모든 문제도 하나님 안에서 이겨낼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복음의 가장 큰 능력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주는 가장 큰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 사람은 텄어. 이 사람은 절대 안 변해." 이런 무력함이 마구 찾아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오늘 말씀 안에서 다시 붙잡아야 할 것은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 소망으로 때로는 견뎌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진단해주기도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갈등에 대해서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빌 2: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갈등은 무엇에서 오는가? 자기주장에서 옵니다. 비교에서 옵니다. 이기적인 경쟁에서 옵니다. 저희교회도 갈등이 있습니다. 어떤 갈등은 지켜보며 멀리서 조언하고, 어떤 갈등은 저도 가까이 다가가서 함께

씨름합니다. 그런데 비슷해요. 자기주장, 비교, 경쟁.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서 혹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내 안에 있는 자기중심성, 비교 의식, 경쟁의식을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문제의 근원을 찾으려는 모습이 가장 나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변화시키고 싶은 것은 ‘나’이지, ‘그’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의 하나님이 일하고 계세요. ‘나’의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변화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가르치십니다. 나는 그것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를 걱정하세요. 그것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예배 안에서 그 마음을 구하십시오. 그 소망을 다시 찾으십시오. 복음은 갈등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5. 복음 : 서로를 돌아보라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안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깨어진 삶과 반대되는 것이 복음이죠. 복음은 우리를 이타적으로 바꾸길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목표입니다. (빌 2: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돌보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스코페오’라는 단어인데, 여기서 ‘SCOPE’가 나왔어요. 현미경, 망원경 등에 들어가는 단어이죠. 돌보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플보다 나쁜 것이 무플이다.” 사람은 싸우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외로워서 죽습니다. 외로워 보면 싸울

대상도 그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첫 번째 행동은 ‘관심’입니다. 관심이 있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그냥 조용히 살아가요. 남에게 피해 안 주면 된 것이죠.” 이것은 겸손한 태도가 아니라 ‘방관’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 나를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힘써야 합니다. 깨어진 마음이

우리 안에 아직 모두 있어요. 다름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 안에 갈등을 유발합니다. 그 순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태도가 구별됩니다. 보통 갈등은 서로는 보지 않고, 자기 마음만 보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서로의 마음, 서로의 어려움, 서로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시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음의 핵심은 ‘관심’이 아닙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떠나든 말든 그것이 하나님께 뭐라고…. 복음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필요를 위해 그분이 일하신 것이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필요였지, 하나님의 필요는 아니었지요.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신자의 모범이 되는 모습을 제시합니다. (빌 2: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빌 2: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빌 2: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삶이 아닙니까? 그것이 곧 성령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나에게는 성령께서 말씀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고, 오늘, 이 말씀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을 내가 어떻게 따라서 살아갈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마땅히 우리가 보여야 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앞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이 신앙의 실력입니다. 바울은 이와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십자가의 원수. (빌 3:18)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란, 십자가의 효력은 기대하되, 그 십자가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고 따르라고 명하신 자기 부인, 희생, 겸손,

순종을 거부하고, 오히려 자기만족, 성공, 쾌락, 인정욕을 따르며, 복음의 능력은 부인하고, 종교적 언어만 사용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는 무신론자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지요. 교회 안에 있으나 예수님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진짜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면 그냥 편하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자꾸 힘들게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 말할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을 따르지 않는 상태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반대편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간은 없습니다. 주님께 속하여 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빠르게 세상의 추구에 빠져듭니다. 동전을 던지면 앞면, 뒷면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어느 한쪽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랑하기에, 깨어진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라며 그리스도를 추구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인생의 방향을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정했지만, 마음만큼 잘 되지 않아서 고민하는 것은 무조건 응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향 자체가 다른 곳에 있는 삶에 대해서 괜찮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바울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평생을 힘썼습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도 늘 몸을 쳐서 복종하기 위해 힘씁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고백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입니다. 우리가 성찬 때마다 <고백>이라는 찬양을 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먼저 날 사랑했으니. 두 번째 가사가 “내가 주 위해 죽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 고백이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지 않고 어떻게 내가 주를 위해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기에 나를 죽이고, 예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목표입니다. 이것은 흔들림이 없는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의 목표입니다. 날마다 나를 죽여야, 날마다 내 안에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께 속한 내가 주도권을 잡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빌 2: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이 구원을 최종적 구원으로 보든지, 혹은 성화의 열매로 보든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신의 명령으로 우리는 받아야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있든지 없든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므로, 그분께 충성하는 것이 단순하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신앙의 목표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빌 4:2)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빌 4:3) 그렇습니다. 나의 진정한 동지여,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유일한 기준, ‘같은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게, 너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봐. 너나 나나 우리 생각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보자.” 이것이 우리의 모든 삶의 정답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모든 사람들에게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주십시오. 이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또한 교회의 갈등은 대부분 잘해보려고, 열심히 하려다가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애쓰는 사람들을 잘 도와주기를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복음대로 살고자 할 때, 우리는 그 과정에서도 갈등을

만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던 그 삶, 그 공동체, 그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 소망을 어떤 상황에서도 품으십시오. 바라보십시오. 소망하십시오. 이제 오늘 설교의 결론이자 빌립보서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함께 살아가자고 말합니다. (빌 4:8)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빌 4:9)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자기 욕망, 자기 편리, 자기 유익을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진리,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바울은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말씀 앞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확신할지, 무엇을 의심할지. 어떻게 복음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지. 어떻게 십자가의 원수로 남지 않을지. 복음은 듣고 배우고 생각하여 결단하고 새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들은 복음이 내 삶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바로 그렇게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을, 그것을 간절히 원하시고 그것을 위해 일하시는 성령께서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여러분에게 세 가지 적용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① 나는 복음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며,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점검하고 있는가? ② 내가 지금 품고 사랑해야 할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누구인가? ③

이번 한 주간, 내가 의도적으로 '돌보고 도와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을 품고, 매일 성경과 함께 말씀 앞에 서보십시오. 반드시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넘어,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리고 누구를 닮아가는가의 문제입니다. 바울처럼 날마다 복음 앞에서 나를 죽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공동체를 사랑하며, 실천하는 예수 따르미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