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5:10)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삼상 15:11)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엘은 괴로운 마음으로 밤새도록 주님께 부르짖었다. (삼상 15:12)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누군가가, 사울이 갈멜로 가서 승전비를 세우고 나서, 거기에서 떠나 계속 행진하여 길갈로 내려갔다고 전해 주었다. (삼상 15:13) 사무엘이 사울이 있는 곳에 이르니,
사울이 그를 보고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님의 명령대로 다 하였습니다." (삼상 15:14) 그러자 사무엘이 물었다. "나의 귀에 들리는 이 양 떼의 소리와 내가 듣는 소 떼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삼상 15:15) 사울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아말렉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우리 군인들이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가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진멸하였습니다." (삼상 15:16)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었다. "그만두십시오! 지난 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내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울이 대답하였다. "말씀하십시오." (삼상 15:17) 사무엘이 말하였다. "임금님이 스스로를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던 그 무렵에, 주님께서 임금님께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이 되신 것이 아닙니까? (삼상 15:18)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전쟁터로 내보내시면서, 저 못된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들을 진멸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삼상 15:19) 그런데 어찌하여 주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면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주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시는 대로 전쟁터로 나갔고, 아말렉 왕 아각도 잡아왔고, 아말렉 사람도 진멸하였습니다. (삼상 15:21)
다만 우리 군인들이 전리품 가운데서 양 떼와 소 떼는 죽이지 않고 길갈로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진멸할 짐승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온 것입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나무랐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삼상
15:23)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간청하였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명령과 예언자께서 하신 말씀을 어겼습니다. 내가 군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는 ‘순종’이러면, ‘부담’ 이렇게 느끼실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이 주제를 잡은 것은, 일단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던지 말던지, 어떻게 해야되는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 대해서 아십니까? 무엇이죠?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사람마다 자기가 사랑이라고 느끼는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순종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받고 싶은 사랑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순종입니다. 우리의 힘든 삶에 추가하는 의무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것을 내게 할 때, 내가 가장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 알려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저에게는 그래서 순종이 제가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고백이고, 마음이고, 삶의 태도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의무라기보다는 제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받고 싶은 것이 이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교회에도 자주 가르치는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순종의 사람은 방법을 찾고, 불순종의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 어쩌면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이래서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혹은 적어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귐의교회는 조금 비현실적인 모습을 지금까지 보여왔어요. 정말 순수하게 개척한 교회가, 그것도 성도가 없어서 목회자가 일하면서 목회를 병행한 교회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사례는 굉장히 드문
케이스로 꼽히고 있습니다. 저도 사실 누군가에게 정확히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가 적어도 믿는 것은, 우리교회만큼 무식하고 용감하게 그냥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면 그게 정답이라고 믿으며 달려온 교회가 많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원래 ‘비저너리’, 즉 꿈꾸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조금 원래 무모한 도전을 좋아하고 그런 것을 꿈꿉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해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뭔가
제 머릿속에 있는 조금 추상적인 어떤 계획을 말하면... 제 옆에는 “가능한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진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도록 저도 힘썼지요. 죽도록 힘썼지요. 그런데 함께 그것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감사한 이유는 희생 없이, 대가 지불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이 전달되기까지 그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사람들, 수없이 많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죽은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안락과 유익을 포기하고 고생길을 간 사람들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저의 가장 궁극적인 꿈은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삶, 공동체, 교회,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삶은 가능하다고 진짜로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이것 자체를 신기해합니다. 가끔 누군가 저와 이야기하다가 “목사님처럼 진짜 믿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라는 이야기를 해요. 진짜 믿는다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는데, 그러면 가짜 믿는 방법도 있습니까? 진짜 믿지 않는 것이라면 아예 안 믿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습니까? 그것을 정말 믿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이 창조도 하셨다면, 그분이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이지요. 그분이 ‘하나님밖에 모르는
삶을 사는 사람’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분의 살아계심을 진짜 믿는다면, 그렇게 진짜 살아보면 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신앙적 실패는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서,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이 이야기가 신앙의 ‘답정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래서 안 됩니다”라는 것은 ‘불신앙의 답정너’는 아닐까요? 이미 내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답이 아니라고 정해놓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제가 여러분을
‘왜 그렇게 살지 못해’라고 정죄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저라도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세상에 속해 사는 것이 유일한 길인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정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더 나은 길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살아요?” 이 이야기는 재미있게도 성경의 모든 시대마다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요즘 세상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어요. 그런데 무식하고
용감하게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엄밀히 말해서 그 두 삶의 차이에 대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제 말을 잘 듣게 하는 목사의 추종자로 만들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이 저에게 순종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삶은 반드시 다른 것에 순종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듯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 길에는 동지도 많습니다. 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제가 배우고 받아들인 ‘순종’의 3요소가 있습니다. ‘즉시, 기쁘게, 온전히.’ 100점짜리 순종에는 이 3요소가 있습니다. “즉시.” 순종은 즉시 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밥 먹으러 와라”라고 하면, 그때 가야지 순종이 되는 것이죠. 내가 하고 싶은 것 한참 다 하다가 뒤늦게 가면 순종이 아닌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어떤 마음을 주시면, ‘나중에’라고 핑계할 때가 많습니다. “나중에 제가 여유가 좀 있으면...” 그 나중이 오긴
올까요? 내 시간, 내 물질, 내 에너지. 내가 필요한 것부터 다 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제한성은 내 필요를 채우기에도 늘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수태고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갑니다. “하나님이 네 배를 좀 써야겠다.” “제가 지금 결혼을 좀 해야 하는데, 결혼부터 하고요. 아이도 하나 낳고, 둘째 때 제가 좀 빌려드리면 어떨까요? 제가 순종을 안 하려는 게 아니라요. 할 거라니까요. 그런데 조금만 나중에요.” 그런데 이것을
순종이라고 하지 않아요. 다윗이라는 인물이 있죠. 우리 너무 잘 알죠. 다윗이 대단해요. 그런데 그도 실수도 했어요. 인간은 실수를 합니다. 그런데 실수가 반복되면 그것은 실력이죠. 다윗도 실수를 했는데, 그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가 밧세바를 왕의 권력으로 취합니다. 성범죄이죠. 은폐 시도도 하죠. 더군다나 사실상 그의 남편을 전투 시 가장 앞에 세워서 죽게 합니다. 다윗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악함이 내면에 가득한지
깨닫게 됩니다. 저는 우리 안에 그 나쁜 다윗의 모습도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가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서 그의 죄를 고발합니다. 다윗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서 또 은폐 시도를 했으면, 다윗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 앞에 돌아섭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눈물로 침상을 흠뻑 적셨다고 시편 6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전한 예언에는 하나님께서 네가 낳은 그 아이를
데려가실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을까요? 즉시, 기쁘게, 온전히 순종했을까요? 아니요. 아무리 자기 잘못에 대한 것이지만 그렇게 반응할 수 있었겠어요. 다윗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금식하며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옆에서 신하들이 그가 너무 슬퍼하므로 다가가 말도 못 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7일 후 아이가 죽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뀌지 않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이 순간이 우리 삶에서 중요하죠. 내가 7일
동안 금식하며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내 기도가 이뤄지지 않았어요. 다윗은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일어나 씻고 기름을 바르고 식사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것입니다. ‘기쁘게’까지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더 이상 감정에 휩싸여 슬퍼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울면서 이 악물고... “이씨~ 순종해야지...” 사춘기 청소년이 부모에게 보이는 이런
하나님과의 기 싸움이 아니라... “예, 주님. 이제 따르겠습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해주는 하나님께 나도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해주는 대상에게 내가 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예배했는데, 내가 이렇게 기도했는데, 내가 이렇게 순종했는데...” 이런 마음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예배를 하면서, 기도를 하면서, 순종을 하면서 하나님이 아니라 내 뜻에 대해 하고 있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배했으니
내 뜻대로 해주세요. 혹은 내 뜻대로 해주셨으니, 예배를 드려 드릴게요.” 이것은 신앙을 나의 욕구 실현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어요. 바울은 자기 육체의 질병을 없애달라고 3번을 기도했으나, 그것을 품고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도리어 육체의 질병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을 배웁니다. 모세는 평생의 목표였던 가나안 땅 바로 앞에서, 하차 통보를 받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거기까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사울 왕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어떠한 전리품도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전쟁에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들 앞에 양 떼와 소 떼 등 좋은 짐승이 전리품으로 주어졌습니다.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진멸하긴 합니다.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순종의 어떤 부분을 놓친 것입니까? ‘온전히’ 사무엘이 와서 사울에게 “순종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사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주님의 명령대로 다 하였습니다.” (13절) 어떻게 이런 대답이 가능합니까? 순종하지 않을 사람은 ‘핑계’부터 찾거든요. 자기 안에 불순종의 이유가 다 있었어요. 어떤 핑계입니까? “우리 군인들이(내가 아니고)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고(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남겨놨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진멸하였습니다.” (15절)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어요. 다 했다는 것입니다.
“다 하긴 했는데... 요만큼... 그것도 좋은 이유가 있어서...” 사무엘이 말합니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예배입니까? 아닙니다. 순종입니다. 예배는 순종의 일부분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예배합니다. 그런데 예배라는
행위가 순종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할 때가 있다니까요. “내가 예배드려주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셔야지... 이렇게 안 해주시니까 나는 예배도 안 할래.” 그냥 이것은 순종도 예배도 모르는 비신앙인이거나, 아니면 너무 아직 어린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까지만 기억하고 그 뒤의 말씀은 기억을 못 하는 경우가 있는데... 23절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불순종은 우상숭배, 즉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정말 최고의 예배를 드리고 싶으세요? 내 가장 소중한 마음을 드리고 싶으세요? 그럼, 뭐 하시면 됩니까? 순종하시면 됩니다. 순종이 뭐냐고요? 내 생각을 덧붙이지 않고 나에게 주신 명령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에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나에게 어떤 요구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우리는 순종하지 않을 핑계를 붙입니다. “그건 이 시대에 안 돼. 그건 내 성향에는 어려워.” 하지 않아도 되기 위한 온갖 구실을 창조해 냅니다. 기가 막힙니다. 혹은 좀 더 고상하게... “저 말씀을 꼭 저렇게 해석해야만 하는 걸까?” 저는 이것이 정말 내가 잘 순종하고 싶어서 성경해석을 더 공부해 보겠다는 것으로 안 보여요. 그냥 피해 가려고 이것저것 덧붙이는 것이지요. 억지 논쟁을 만들어서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순종은 그냥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원하신다는 것이 느껴지면.... 다른 어떤 것도 그 앞에 가져다 대지 않고, 일단 그렇게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내 삶이 경험하는 놀랍고 특별한 인생을요. 끝으로 제 이야기를 짧게 할게요. 저도 순종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이미 제 삶에는 몇 번의 큰 순종의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신다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따르려고 힘썼던
경험들이 있고, 그 선택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하시고 지키시는지 또한 배우고 있습니다. 삶의 방향, 비전, 재정, 목회. 모든 부분에 걸쳐서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쉽게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헌금 해”라는 마음을 주시면, 그냥 헌금했고, “누구 줘”라고 마음을 주시면, 그냥 주었습니다. 작은 돈도 있었지만, 거의 전 재산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안에서 저를 위한 몫을 쓰기도 합니다. 항상 나는 다 포기하고
다 나누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늘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삶을 살고자 애쓰고 고민하며 걸어왔습니다. 그렇게 40세가 넘었습니다. 이기적으로, 성공 지향적으로 안 살기 위해 투쟁하고, 때로는 정직하게 살아가느라 포기하고 절제하고 느린 길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목사 안수가 늦어졌고, 그렇게 세습의 길보다 개척의 길을 갔고, 일하며 목회해야 했기에 분주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슬로처치’를 목표로 삼아 목회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목회하는 내내 교회의 숫자를
늘리거나 소위 부흥시키기 위한 목회를 추구하지 않았고 관심도 두지 않았는데, 우리교회는 교단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10명을 데리고 평생 일하며 목회할 줄 알았던 저의 삶은, 어느덧 200명이 넘어가는 공동체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주권을 내어놓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저는 여전히 치열하게 투쟁 중에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너는 여기까지다” 말하면 떠날 수 있도록,
제가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가 네가 죽을 자리다” 하면 끝까지 버틸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결정을 ‘즉시, 기쁘게, 온전히’ 하려고 늘 하나님 앞에 섭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만약에 제가 경험한 믿음의 삶, 순종의 삶이 더 힘들고 고생스러운 삶이라면 제가 왜 굳이 여러분에게 이 삶을 가르치겠습니까? 풍성한 삶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순종에 있기 때문입니다. 핑계하지 마시고, 그냥 해보십시오. 단순하고, 무식하고, 용감하게. 즉시, 기쁘게, 온전하게. 순종의
사람은 방법을 찾고, 불순종의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