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그리스도 때문에" / 강정규 목사

2023-12-31 · 빌립보서 2-4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는 성탄절을 통하여 빌립보서에 대한 설교를 나눴습니다. 오늘이 이어지는 두 번째 설교입니다. 빌립보 성은 로마 제국의 도시 가운데서도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굉장히 강한 곳이었습니다. 복음은 그곳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은 선교지에 가면 항상 유대인이 모이는 회당에 먼저 갔는데,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빌립보 성의 선교 이야기를 보면, 바울 일행이 회당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볼 때, 이곳에는 유대인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강가로 갔다가 그곳의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루디아라는 여성이 빌립보 교회의 첫 성도가 됩니다. 그리고 루디아의 가족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그 가족이 함께 회심하고 세례를 받으며, 루디아의 집이 곧 빌립보 교회가 모이는 예배 처소가 됩니다. 초대교회는 모두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나눴지만, 빌립보 교회와 바울은 매우 소중한 동역관계를 맺습니다. 바울 또한 빌립보 교회를 향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죠.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만난 것은 2차 전도여행 초반인데, 3차 전도여행까지 마친 후, 바울은 투옥됩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속국인 이스라엘 영토가 아니라, 로마에 직접 가서 황제의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가이사(카이사르)에게 상고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작전이 펼쳐지게 됩니다. 군인들이 그를 로마로 데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바울을 죽이려고 계획했던 사람들이 바울을 공격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성경에 나오니, 바울에게 있었던 시민권은 매우 의미 있게 사용된 것입니다. 그 상고로 말미암아 드디어 바울이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 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바울은 재판받는 동안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게 됩니다. 자유롭지는 않았으나,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행 28: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행 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로 이 가택 연금의 상태로 있으면서 바울은 4편의 옥중서신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중의 하나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에 로마 황제는 기독교 박해자로 유명한 네로였습니다. 바울의

이 편지는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지 10년 정도 되었던 시점에 기록하여 전달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생활을 할 때도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그들은 ‘에바브로디도’라는 형제를 통해 바울에게 필요한 여러 선물과 재정을 후원합니다. 지금의 그리스 지역에 있는 빌립보에서 이탈리아 로마까지 바울을 위해 찾아온다는 것만 하더라도 대단하죠. 에바브로디도는 이 여행길에서 위중한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병을 회복하게 되었고, 이제 다시 빌립보로

돌아가는 에바브로디도 편에 이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단순히 와서 물품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바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겠죠?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 공동체의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옥에 갇혀 있듯, 당시의 상황은 기독교인들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이러한 박해의 위협 안에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바울의 상황을 걱정할 것이 분명했기에, 바울은 자신은 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기뻐하고 있음을 확신시켜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서신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기쁨’입니다. (빌 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빌 2:2)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빌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 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빌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셰익스피어가

했던 이야기가 있죠. “힘들 때 우는 자는 삼류다, 힘들 때 참는 자는 이류다, 힘들 때일수록 웃는 자가 바로 일류다.” 이것은 우리가 사실 힘들어 죽겠는데 ‘정신 승리’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그런 마음가짐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정말 괜찮을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로 투옥되는 과정에서 당당하게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그가 삶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초점은 그만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뒤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이 바울의 ‘회심’이었습니다. 회심 이후로 그는 그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죠. (빌 3:4) 하기야, 나는 육신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빌 3:5)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빌 3: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간증문을 쓸 때, 회심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before & after라고 하죠. 바울이 스스로 회심 이전의 삶에서 추구했던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남 부러울 것 없는 환경이었고, 종교적으로나, 개인의 열정이나 충만했으며,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정도의 경건함을 추구하는 완벽한 종교인으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던 그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빌 3:7)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빌 3: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빌 3: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삶의 초점이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는 변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그리스도 때문에’ 나타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전과 다르게 사는 부분이 하나씩 늘어가야 하는데, 그 이유를 묻는다면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위해, 그는 그가 추구했던 다른 것들을 모두 내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기꺼이 스스로 잃었습니다. 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전에 자랑하던 무엇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내가 고작 그것

자랑하며 살았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이제는 그것에 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 저는 우리 각자의 삶에 그런 경험들이 생겨나고 있다면,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이 되는 삶. 그저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사귀며, 그분과 동행하므로 그분의 고난에도 동참하여, 최선을 다해서 주님 따라가는 것. 우리가 성찬예배 때마다

마지막에 부르는 찬양이 있죠. 저는 그 ‘고백’이라는 찬양을 20대 초반에 처음 듣게 되었어요. 컨티넨탈 싱어즈 집회였는데, 앞에서 인도자가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고백’이라는 찬양을 부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찬양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 위해 죽겠습니다, 주 위해 살겠습니다. 순서로 고백합니다. 주님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주 위해 죽겠다고 고백할 수 있고, 주를 위해 죽겠다고 진심으로 고백한 사람만이 주 위해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제가 이 찬양의 원작자인 ‘이길승 형님’과 에스라에서 동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20대 초반 이후로 이 찬양을 어디서나 너무 자주 불러왔기에, 원작자를 만나서 찬양의 의미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순서에 따라서 주님이 그렇게 먼저 사신 것을 따라가자는 의미로 사랑, 죽음, 삶을 붙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2절에서 ‘주 위해 죽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사실 처음 듣는 사람은 얼마나 섬뜩합니까? 그런데 바로 수긍되는 것은 ‘주님 먼저 날 위해 죽으셨네’라는

가사 때문이죠. 주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고, 주님이 날 위해 먼저 죽으셨고, 주님이 날 위해 먼저 사셨으니... 이제 그 사랑과 그 죽음과 그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최선을 다해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고백일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위해 돌진할 필요는 없으나, 주를 열심히 따라가는 길에 때로는 고난과 죽음이 막혀있다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고, 주를 따르겠다는 것이 저는 바울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주에 아끼는

동생을 만났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는 형제입니다. 2년 전쯤, 부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깊은 우울감과 매너리즘에 빠져 있어서, 제가 차라리 사역을 쉬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습니다. 그래서만은 아니겠으나, 정말로 사역을 그만두고 지금은 제조업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깊이 깨닫는 것이 ‘수요일’, ‘금요일’에 직장을 마치고 예배를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가끔 이야기를 나누지만, 제가 부교역자였을 때,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 드라마가 보여주는 삶이 우리 성도님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면, 제가 그 성도들의 삶을 너무 모른 채 설교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다짐을 하죠. 언젠가 나도 목회자가 아닌 일터의 삶을 경험해봐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4년이 지나서, 개척을 준비하면서부터 5년 반 정도의 시간을 일터에서 돈을 벌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자영업자의 삶을 조금 경험해 본 것이죠. 제가 그때

솔직하게 느낀 것은 ‘돈’이 주는 기쁨과 위협입니다. 자영업의 특성상 매일 매출을 확인해야 하고, 기준선보다 매출이 좋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가, 어떤 날은 매출이 안 좋으면 걱정이 앞서는 삶을 경험하며, 이것을 넘어서는 싸움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깊이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 주어진 치열한 생존의 싸움을 해나가며, 신앙도 지키기 위한 영적 투쟁을 하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한편으로는 참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삶의 버거움과 무게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참 힘겨운 일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감히 제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더 힘겨운 싸움과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성도님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감히 제가 다 헤아린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이 그러한 우리의 삶을 충만케 하기 위해서 오셨음에 대해서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버거움을 주님은 돕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로 나오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어떤 찬양의 고백처럼, 그분은 자신의 편안 버리고 우리게 평안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짐을 벗고 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짐을 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쉼’은 짐을 벗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짐을 지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관계적 속성>으로 이해해야 쉽습니다. 바쁜 삶 가운데서도 마음에 맞는 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함께 교제하다 보면, 쉰 것이 아닌데 쉼을 얻습니다.

평안해집니다.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지 않는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충만함 가운데 우리는 회복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랑을 해보셨잖아요. 1시간 거리를 가서 단 5분을 보고 다시 1시간을 와도 행복하고 좋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람’에게 주신 특성입니다. 사랑을 하면 삶에 지각변동이 일어나죠.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감정도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그의 일부를 우리에게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죠.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면, 그분과 참된 사랑의 관계를 누리면, 우리의 삶에는 이전과 다른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사랑의 근원이 생겨서, 내 한계를 뛰어넘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삶이 가진 고난과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인류가 겪는 실존적인 고통이지만, 그 상태에 머무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스스로 ‘참되고 영원한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주님이 주시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나는 고갈되고 넘어지고, 이 상황이면 좌절하고 아파해야 하는데, 전과 달리 살아가고 더 내어주고 더 져주고 살아도 괜찮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가 속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또한 이것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제는 어떻게든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가는 그 삶이 이전의 자신과 같기에, 그들에게도 자신이 누리는 새로운 삶,

바로 복음이 변화시킨 그 삶을 증거하고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복음에 휩싸인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이것 때문입니다. 바울은 종종 ‘회심’한 상태에 대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구원이 시작된 삶이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안에 들어간 바울은 진심으로 현재의 삶에서 마주하는 것에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고백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내 주님으로 직접 아는 고귀한 특권에 비하면, 내가 전에 보탬이 된다고 여겼던 모든 것은 하찮은 것, 곧 개똥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멘. 우리도 이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우리도 세상을 살다 보면, 별수 없이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돈’을 위해 달려가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현재의 삶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도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냐고요? 네. 사람은 못 바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정말 만나면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힘이고, 진리가 주는 힘입니다. 김형국 목사님이 이런 예화를 든 적이 있습니다. “로또 1등 당첨권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지금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어도 그 어떤 비싼 음식을 먹는 사람보다 당당하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죠.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제 말을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재벌이 정말

부럽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누리는 것은 부럽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저 또한 물질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삶에서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주거에 대한 불안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필요도 있습니다. 목사라고 신선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제 삶을 둘러싼 불안함, 위협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살아가는 이 자리, 지금 이곳에서 주님과 동행함이 좋습니다. 재벌이 가진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훨씬 크겠으나, 그 삶에 없는 것을 저는 누리고 있음을 진심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부럽기보다는 그들이 저와 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저 자유로운 로마 황제를 부러워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또 한편의 옥중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골 1: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은 이후, 그의 몸 된 교회로 살아가면서,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고난도 ‘기쁨’으로 여기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며 그 앞에 주어진 고난도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무언가 어떤 교회 안의 사역을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번 한주도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세상에 살아가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살기 위해,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행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과 표정과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었다면, 저는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이전의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지만, 내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행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살아간 그 삶이, 주님이 우리에게서 받으시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성도님들로부터 종종 듣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사업하면서 꼼수나 편법을 쓰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업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평소라면 이렇게

행동했을 터인데, 제가 그래도 그리스도인이라서 이전과 달리 이렇게 상대방에게 행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때문에 바뀐 여러분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께 속한 삶의 원리를 빌립보 교회가 경험하는 갈등의 상황에도 적용합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듣게 된 빌립보 공동체 내부의 갈등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거짓된 가르침’과 ‘성도의 다툼’이었습니다. 우선 거짓된 가르침에는 현혹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바울처럼 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조심하라고 말하며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 3:17)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빌 3:18)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삶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그들을 따라서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언제나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돼.” 혹은 “다들 그렇게 살아. 유별나게 살지 마.” 같은 이야기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가르침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 앞에서가 아니라 여러분들끼리 있을 때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쁜 교회일수록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삶을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삶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으나, 그런 사람을 따라가셔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여러분이 바꾸셔야죠. 저는 교회 안에는 아직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한 어린 신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죠. 문제는 언제나 스스로 회심했다고 여기면서, 사실상 회심하지 않은 채,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빌 3:19)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교회 안에 있어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혹은 아직 그것을 고민할 만큼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전히 전도가 필요하고 회심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주인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의 유익과 편의가 중요합니다. 하늘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회심한 사람들을 보고, 그 삶을 따라가기로 결단하는 곳이 되어야지, 회심한 사람들이 거짓된 가르침을 듣고 회심을 잃어버리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를 따라갈지를 잘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 나타난 ‘성도의 다툼’에 대해서도 복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빌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마음을

같이 하라. 한 마음을 품어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려라. 다른 사람을 돌보아라.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 이런 표현을 바울이 하는 것은 빌립보 교회 안에 이런 권면이 필요한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장에는 이렇게 먼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이야기했다면, 4장에는 직접적으로 당사자들에게 권면합니다.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에 언급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리더 역할을 하던 두 자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3절에 그들을 일컬어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들’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들이 바울의 중요한 동역자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두 사람이 사역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서로 불일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교회 안에는 ‘열심’ 있는 사람끼리

부딪칩니다. 사역하다가 부딪히지, 예배만 드리고 가는 사람끼리 부딪치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럼 부딪히지 않도록 모두 사역을 멈추고 예배만 드리고 모르는 사람처럼 흩어져야 할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끼리 부딪힐 수밖에 없는 삶을 살도록 그들을 모으시고, 함께 그 갈등을 이겨내며 동역하는 법을 훈련하셨습니다. 갈등은 사랑하고 동역하려는 사람 안에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갈등이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갈등을 넘어서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다만 갈등을

넘어서는 방법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대로 갈등을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착하고 좋은 사람이어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주께서 명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상대방과의 갈등 상황이 되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내 안에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저는 그 상황에서 누가 더 잘했고 잘못했고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느끼는 사람이 주의 마음으로 먼저 행하는 것으로 우리의 문제는 해결됨을 믿습니다. 그것이 교회가 공동체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갈등에 기름을 붓습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성도의 분열로 말미암아 교회가 분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교회를 평안으로 힘써 지켜내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끝으로 빌립보서의 마지막 권면을 살펴봅시다. (빌 4:9)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신앙은 삶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앎의 깊이가 아니라, 삶의 구체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편지 내내 전하고 싶었던 그의 진심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빌 4:10)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지금 다시 일어난 것을 보고,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나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사역에 대해 재정적 지원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지금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자신을 섬겨주고자 했던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에 대해서 바울은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보석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상황을 그는 받아들일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나, 부족한 상황, 혹은 반대로 풍부하거나 배부른 상황도 그에게 시험의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결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 안에서 ‘자족’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족’은 자기가 이룬 것에 대한 만족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삶에 대한 만족함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 선택이 역시 옳았군’이라고 늘 깨닫게 되는 삶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을 보며 고백하는 말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자족’의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능력을 주시는 분이 다 허락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나는 어떠한 형편도 감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나 기뻐하고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가고 계십니까? 한순간에 우리가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끝까지 살아가고자 힘쓴다면, 우리의 모습은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은, 또 그 삶을 시작한 누군가가 따라갈 하나의 본이 되어, 우리는 함께 주님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성도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새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끝까지 성도로 살고, 성도로 죽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