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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주심, 그리스도를 얻음" / 강정규 목사

2023-12-25 · 빌립보서 1-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성탄감사예배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빌립보서입니다. 오늘과 주일을 통해서 이 말씀을 다룰 예정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빌립보서라는 책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신약의 파노라마>를 통해서 공부했지만,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에골빌빌’ 옥중에서 쓴 서신 가운데 한 편입니다. 빌립보는 지금의 그리스 지역에 있습니다. 동유럽에 세운 최초의 예수 공동체이고, 이 내용은 사도행전 16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행

16:9) 여기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행 16:10) 그 환상을 바울이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행 16:11) 우리는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서,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고, (행 16:12)

거기에서 빌립보에 이르렀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으뜸가는 도시요, 로마 식민지였다. 특별히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많이 이주해서 살았던 지역입니다. 그러다 보니 로마에 대한 충성심도 굉장히 강했던 장소입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에 처음으로 응답한 사람은 ‘루디아’라는 여자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또 빌립보에 대하여 알고 있을 만한 이야기는 바울이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니까 옥문이

다 열리고 모든 죄인의 결박이 끊어집니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모두 도망한 것에 놀라서 스스로 자결하려 합니다. 그때 바울이 우리가 도망가지 않았다며 그를 말리죠. 그리고 바울이 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결국 그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이 일로 예수를 믿게 됩니다. 루디아와 감옥 간수의 가족들이 빌립보 교회의 초기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바울과 인연이 시작된 빌립보교회는 그 이후

그곳을 떠나서 선교 여행을 계속해나가는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바울의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고집이 있고 부러질지언정 자신이 믿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죠. 바울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출하는 사람입니다. 원래 그는 바나바를 돕는 부교역자와 같은 사람인데, 위아래가 좀 없어요. 자신보다 훨씬 영향력이 있는 거의 총회장급 위치에 있는 베드로가 복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니까 바로 그것을 지적하며 따지는 그런 사람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지금 시대에 어디 가서 부교역자는 잘 못할 성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개척자로 쓰시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그렇게 섬세하고 따스한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제가 바울을 통해서 느끼는 인상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 보낸 편지에서 느껴지는 바울의 마음은 매우 다릅니다. (빌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저는 그래서 이 구절이 참 좋습니다. 그런 바울이기에 이

말 한마디가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빌립보교회는 바울에게 늘 위로가 되는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었지만, 그와 함께 교회라는 소중한 가족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종종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자비량 사역을 했습니다. 바울은 의외로 참 돈 얘기를 많이 합니다. 헌금하라는 얘기를 가는 곳마다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계를 위한 헌금이 아니라, 대부분 다른 교회를 위한... 특별히 자신들의 출발점이 되었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모금하여 전달하기도 합니다. 바울도 항상 일을 하면서 사역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고린도에서는 사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천막 짓는 기술을 통하여 일하면서 생계를 책임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후원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저는 돈이 굉장히 특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 특별함이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보면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가만히 지켜보면 다 보입니다. 보통은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어디에 쓰는지 보면 거의 맞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돈을 잘 쓰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어디에 가든지 잊지 않고 그에게 후원금을 보냈고, 바울이 추진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에도 적극 동참했던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있다는 소식에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통해 필요한 것을 보내주었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바울이 살면서 얼마나 적이 많았겠습니까?

그의 젊은 날 원수가 되었던 기독교에 회심하여 합류했으니 그를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참 많았을 것입니다. 이방에서 사역을 하면서 바울이 겪은 어려움은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아시다시피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외롭고 힘든 그 길을 정말 묵묵히 가야 했던 것이 바울의 사명이었죠. 빌립보교회가 그의 마음이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런 곳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그들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빌 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빌 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 1: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서로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나올 수 있는 관계,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할 수 있는 그런 관계. 이런 교회와 목회자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삶에 이런 소중한 선물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저도 정말로 사귐의교회의 목사로 제가 섬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역이 쉽냐?’라고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때론 목숨 걸고 해야 하는 버거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써 내려가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참 좋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더 의도적으로 제 안에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때까지만 사역하는 것’이라고 억지로 더 되새기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우리 사귐의교회를 목회하면서 가장 보람되고 값진 것은, 이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복음으로 인한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스도를 정말로 만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저는 수없이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교회를 목회하면서 복음이 정말 엄청난 것임을 배웠습니다. 저는 교회가 정말 이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같은 고백이 존재합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니까요. 그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고, 그리스도를 정말로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의 이끄심을 경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재림의 날이죠.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계속 변화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삶은 깨어진 세상입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좋은 목회자, 좋은 교회라고 하여 이들의 상황이 좋은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늘 신앙에 존재하는 아이러니 같은 것이죠. 빌립보교회 안에는 적어도 큰 2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외부적인 박해와 내부적인 분열입니다. 그중 1장은 외부적 박해에 관한 이야기이죠. 일단 지금 목회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그런 박해의 시대를 이들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교회가 불안한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 제가 지금 복음을 전한다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또한 얼마나 위태롭겠습니까? 우리가 코로나를

겪었지만, 그때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생기니까, 그로 인해서도 교회가 참 많이 문을 닫게 되었는데, 이 당시의 상황은 그 수준이 아니죠. 아까 빌립보 도시를 설명하면서, 이 도시가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도시의 분위기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황제에 대한 숭배가 강합니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원래 황제에게만 쓰이는 단어였음을 제가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죠.

이것은 황제의 탄생, 즉위, 전쟁 승리 등에만 사용되는 황제를 위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고백합니다. ‘예수가 복음이다!’ 주님이라는 표현도 황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는 로마 사회로부터 박해받는 요소가 다분한 종교였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점점 그러하죠. 저는 어쩌면 기독교에 대한 여러 공격들, 영화나 드라마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단골 소재가 되었고, 어쩌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이 우리를 막아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지도자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옥중의 바울도, 옥 밖의 교인들도 흔들림 없이 이겨 나가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언제고 가능하다면 여러분과 함께 이렇게 예배하는 목사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혹시 어떤 일이든 제가 여러분과 함께 예배하지 못하는 그때에도 여러분의 예배는 멈춰서도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무엇이 우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그러해야겠죠. 저는 사람을 너무 좋아하고 정도 잘 줍니다만,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놓치는 목사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되, 주님 안에서 가장 귀한 것을 내 마음에 두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오히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이 복음의 진전이라고

고백하는데, 그로 인해 불신자들인 시위대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옥에 갇히면 절망합니다만, 바울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봅니다. 또한 바울이 옥에 갇히면서 동료 신자 중 많은 사람이 더 자극을 받아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음을 그는 감사로 고백합니다. 기독교의 역설이죠. 순교자의 피가 흐른 곳에는 부흥이 일어납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도 수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흘렀고, 이제는 역으로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사람을 파송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은 감옥에 있고, 그에게 닥칠 미래는 ‘처형’ 아니면, ‘석방’입니다. 그는 무엇이든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가 처형을 당한다면, 예수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이어서 유익하고, 만약 석방을 당한다면, 더 많은 공동체를 세우며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에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으로 완전하게 삶의 모든 가치와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시험과 고난과 위협이 있죠. 그런데 그것을 뛰어넘어버리면, 사실 그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돈의 시험과 위협을 뛰어넘은 사람은 그것으로 사탄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뛰어넘었으니,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죠. 그는 이 그리스도가 자신에게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성도가 이것을 함께 고백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와 고난의 상관관계. 금요일에도 예진 간사님 통해서 마리아에 대해서 봤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참 역설적입니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와우. 우리가 인간이라면 모두 여기서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바에는 왜 은혜를 받아야 하는가? 그냥 고난도 안 받고 은혜도 받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만약 은혜 없는 삶이 고난이 없다면 좋겠지만 깨어진 세상은 그 자체가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은혜와 고난을 함께 경험하면서도 괜찮은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의 충만함은 우리가 받는 고난의 아픔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아이를 낳는 것이 고통임을 알지만, 기꺼이 그것을 소망하는 것은 그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기쁨이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얻는 기쁨. 이것은 감성적인 이해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잘 생각해보고 계산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아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한 전제조건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야만 합니다. 주시지 않은 은혜를 우리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습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리스도는 기꺼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낮아지심을 기쁨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한 낮아지심의 순종입니다. 마태복음은 임마누엘 인클루지오를 통해서 예수님의 삶을 멋지게 표현합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처음과 끝에 나오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인클루지오를 통해서, 그 안에 있는 마태복음 전체의 메시지는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분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에 가장 필요한 생명의 근원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 어둠 속에 빛이 되기 위해서 오신 주님. 오늘 우리는 그 주님의 오심의 의미에 대해서 뒤늦게 알고 감사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귀한 성탄 감사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도 기꺼이 감당하신 그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주를 섬기며 따르는 일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가장 행복하고 귀한 일이기에 기꺼이 순종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