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양주골 베들레헴

2025-12-25 · 미가 5장 2~5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하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제가 기사를 보니까, 요즘에는 종교적 표현에 예민하다 보니 미국에서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잘 안 하고 “해피 홀리데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물론 밖에서는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을 배려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예배 안에서는 우리가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고 있으니, 주님을 마음껏 높이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예전만큼 캐럴도

안 들리고, 성탄의 분위기도 많이 나지 않죠. 오늘 오면서도 저희 가족끼리 “성탄절인데 참 성탄절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시끄러운 성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성탄절이 되기 위해 이곳에 예배하러 모였습니다. 오늘 이 귀한 날, 여러분이 예배하러 나오셨으니,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성탄. 거룩한 탄생이라는 의미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물론 12월 25일에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12월 25일을 그분을 기억하는 날로 기념하여 모이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시기로부터 한참 지난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왜 오셨고, 무엇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인지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막 세상에 나와서 활동하던 시기, 갈릴리는 유대인들에게는 수도권이 아니라 지방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지도를 보면 갈릴리가 위에 있고, 가운데 사마리아가 있고, 아래가 유대인데, 수도권은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였죠. 그곳에서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사역하셨죠. 갈릴리 인근에서 ‘빌립’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뭔가를 느낀 빌립이 바돌로매라고도 불리는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내가 구약이 예언하는 그분을 만난 것 같아.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분이셔.” 그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즉시 반응합니다. “야, 나사렛 예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어.” 이 이야기는 나사렛이 촌 동네이며 기대심이 없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구약이 예언하는 ‘메시아’의 탄생지로는 언급될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우리가 기다리는 그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인 중 성경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이었습니다. 이때 빌립은 나다나엘과 언쟁하지 않고 딱 한 마디를 남깁니다. 뭐라고 하죠? “와서 보라.” 복음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복음은 논쟁해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토론, 논쟁 이런 것을 꽤 잘하는 편이어서, 젊은 날에는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논쟁으로 입 싹 다물게 해주겠어.” 이런 마음이 있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복음을 계속 전하면서 느끼는 것은, ‘논쟁’에 이기면 복음의 초대에서는 더 멀어집니다. 내가 논쟁에서 이길 수는 있어요. 상대의 길을 꺾어 놓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럼 그 사람을 복음으로 초대하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내가 승자로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소중한 사람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 대상자를 VIP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대상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빌립을 따라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죠. 그런데 나사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는 왜 나온 것이며,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이니 메시아가 아닌가?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메시아의 출생지에 관한 유명한 예언을 담은 말씀이 미가서 5:2입니다.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 선지자가 예수님 탄생으로부터 무려 700년 전에 남긴 예언입니다. 그리고 재미나게도 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죠. 원래 거기서 예수님이 태어나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로마의 황제로부터 명령이 떨어져서 ‘호적 등록’을 하라니까, 마리아는

가뜩이나 지금 만삭이라서 심기가 불편한데, 아마도 투덜투덜하며 베들레헴에 갔던 것이죠. 가다가 언제 애가 나올지 몰라서 갈릴리에서 유대로 내려오는 길에 어쩌면 예수님 탄생지가 요단 동편이 될 수도, 사마리아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이 아기도 안 나오게 잘 밀어놓고 계시다가, 베들레헴 오니까 갑자기 태를 여셔서,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이 된 우연 같은 이야기. 그래서 미가서가 예언한 메시아의 탄생지 예언은 그렇게 이뤄지고, 곧바로 일 다 마친 후에는 나사렛으로

돌아왔으니...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고 여겨서 ‘나사렛 예수’가 된 것이죠. 그러니 사람들의 생각에서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인물이 나오겠느냐?” 그럼, 베들레헴은 뭐 특별한가요? 유다 지역에 속한 도시 가운데 아주 별 볼 일 없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었지요. 모든 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성지순례를 가서 예루살렘에 머물며 거기서 돈을 쓰고 상권을 살리는 걸

어떤 ‘사명’처럼 여깁니다. 그에 비해 베들레헴은 별로 기대가 없는 그런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은 늘 세상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일하곤 하십니다. 여러분, 모세라는 인물을 잘 아시죠? 그는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삶이 인도됩니다. 놀랍게도 애굽의 노예인 히브리 민족으로 태어나서 곧 죽을 뻔했던 아기는 애굽 공주에 의해 구원되어 왕궁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는 소위 이런 것이 ‘간증’의 핵심 거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위기에서 놀랍게

뒤집힌 어떤 상황 같은 것 말이죠. 그래서 어떤 분들은 간증하라고 하면 “저는 드라마틱한 게 없어요”라고 말하기도 해요. 그런데 정말 재밌게도, 성경은 애굽의 왕자였던 시절의 모세는 하나님의 도구에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대합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 독자들뿐 아니라, 당시 히브리 민족 중 모세의 출생을 아는 사람이나, 모세 자신도 왕자로서 자신이 뭔가를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기대입니다. 제가

지난주 선교 탐방에서 미얀마 선교사님을 만났어요. 그분이 자신이 자랐던 교회에 가서 정말 아픈 마음으로 했던 설교가 있었다고 해요.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 잘 보이던 형님들이 입시 준비를 한답시고 하나둘 교회에서 안 보였다고 해요. 그래서 그 부모님인 권사님들께 “누구 형 왜 안 보여요?” 물어보면, “시험 잘 준비해서 대학 가면 잘 올 거야.”라고 이야기를 하고, 부모님들도 마치 그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우선순위가

뒤바뀐 사람들, 지금 다 교회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픈 마음으로 이야기했데요. “권사님들, 그때 저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런데 그 형들 지금 다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우리는 힘이 있고, 뭔가 지위를 획득하고, 외적인 조건들을 갖추면 하나님이 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우선 이루고 쓰임 받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뭔가를 이뤄서 영광을 돌리겠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영광이 내 영광이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안 쓰셔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나, 지금도 신학생들을 만나면 진짜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이야기가 뭐냐면 신학교에 파다한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였어요. 하나님의 길을 가겠다고 신학교에 왔는데도, 그곳에서 가장 많이 따지는 것이 “네 아버지 뭐하시노?” 이런 것입니다. 조금 규모가 있는 목회자의 자녀이면, 그 친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쟤는 금수저야, 쟤는 우리랑 달라.” 그런데 저는 그런 이야기가 신학생이나 전도사들 안에서 시대를 지나도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명색이 목회자인데, “안 부끄럽나?” 자기가 예수 안에서 거듭났으면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된 것이지, 외적인 조건이 어떠하다고 ‘수저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저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목회자들끼리 만나도 “우리 교회는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경에서 일하시는 것을 보면, “약해서” 쓰신다고요. “모자라서” 더 잘 쓰시다고요. 오히려 너무 힘이 들어있으면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려서, ‘무력해서 하나님을 찾게 될 때’ 비로소 쓰신다고요. 모세가 생각하기에는 40세에 왕자의 지위를 갖고, 힘도 넘치고 했을 때가 ‘하나님이 쓰시기 좋은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쳐다도 보시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때 모세는 ‘야생마’와 같았거든요. 자기 힘으로 뭘 하려다가 큰 실패와 상실에 빠져서 광야로 갑니다. 40년 동안 하나님이 모세의 힘을 빼십니다. 그리고 80세의 무력함에 빠져서 이제는 반대로 “나는 아무것도 못 해요”라고

할 때, 하나님이 이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듣고 겁났어요. 40세에는 자신만만했죠. 막 달려가려고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80세에는 자신이 없어요. 자기 힘으로 감당할 사이즈가 안 나와요. 예전에는 형의 도움도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 연약한 모세를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비로소 모세가 주변의 도움도 받아들일 수 있고, 조언도 들을 수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두고 “땅 위에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온유하다”라고 하셨잖아요. 그 온유함은, 야생마가 길들여진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좋은 상태가 된 거죠. 이 역설이 성경 전체를 도배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원래 무엇으로 유명했습니까? 바로 다윗이 탄생한 곳입니다. 그런데 다윗도 하나님이 쓰시기 전까지,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어땠습니까? 기대할 것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버지와 형들에게도 전혀 기대할 것이 없는 작은 존재.

그래서 아버지 이새의 집에 사무엘 선지자가 방문했을 때, 모든 형들은 그 자리에 초대되었지만, “다윗, 너는 그냥 가서 양이나 쳐.” 그런데 다윗은 남들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목자의 책무를 목숨걸고 감당하고 있었죠. 자기만의 필드에서 다윗은 프로였죠. 자기에게 맡겨진 양 한 마리도 아끼고, 사자의 위협에서 구해내려고 갈고 닦은 물맷돌 던지는 실력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발휘되는 아이러니. 사람들은 “물매

좀 던지는 게 뭐 대수냐”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작은 자리에서의 충성을 가장 필요한 순간에 사용하십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시선, 가치관, 평가를 뒤집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세요. (미 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베들레헴의 특징은 유다의 여러 족속 중에서도 작은 족속입니다. 베들레헴을

하나님이 택하신 이유는 ‘작아서’, ‘세상이 기대하지 않아서’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고 싶거든요. 그런데 예루살렘 왕족으로 메시아가 오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세상의 가치관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가 와서 뭘 하면... “그니까. 그의 배경이 있으니까. 그는 나와 다르니까.” 베들레헴? 기대할 것 없는 곳. 갈릴리 나사렛 출신? 기대할 것 없는 배경. 양주? 어쩌면 많은 사람에게 “WHERE IS YANG-JU?” 저는 2015년에

이곳에 처음 왔는데, “뭐 이런 데가 다 있나.” 춥기는 엄청 춥고, 도심 조금만 벗어나면 다 논이고. 군부대 가까워서 헬기는 잘 날아다니고. 사람들에게 양주에 왔다고 하면, 한 번에 알아듣는 이가 없고. 남양주는 아는데 양주는 뭐 하는 곳이냐? 동두천 말하면, “아~ 거기?” 동두천, 포천보다 존재감이 없는 곳. 뭔가 다 밀리고 밀려와서 정착해서인지, 뭔가 알 수 없는 패배감들도 있어서, 기회만 되면 떠나려고 하고. “애들 교육하려면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서울 한번 나갔다 오면 머리가 아파서, “내가 시골에 사는 것은 맞나보다” 하게 되는 곳. 개척하고 얼마 후, 청년들과 수련회를 가서 “10년 후에도 양주에서 살 마음이 있는 사람?” 이렇게 물어봤더니,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제대로 개척한 것이 맞나? 지금은 정말 많이 좋아졌지만... 분명히 수도권인데, 수도권 아닌, 수도권 같은 곳이라서... 대학교 개강하면 청년들은 사라지고, 근처에 좋은 직장은 없어서 긴 출퇴근에 많이들

지쳐 있는 도시. 만약에 우리가 이런 눈으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 나의 삶과 처지를 보며... “양주에 뭐 선한 것이 있겠느냐? 강남은 가야지~” 이러고 있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어떤 이유와 부르심이 있어서 옮길 수 있지만, 세상의 판단 기준에 우리도 함몰되는 것을 우리는 힘써 뿌리쳐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와 태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뭐가 없습니다. 나는 이래서 안 됩니다. 나는 몸이 약합니다. 나는 마음이 약합니다. 나는 내성적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어요. “야, 네가 내 것이라며. 그러면 뭐가 문제야. 내가 일할 텐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꾸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니까 문제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을 빼버린 채 내가 책임지고 내가 주인처럼 살고 있으니, 자꾸 부족함과 불안에 붙잡히는 건 아닌가요?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말씀하실 것입니다. 미가서가 바라보는 메시아는 어떤 분입니까? 예언의 말씀을 이어서 봅시다. (미 5: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미 5:5a)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메시아는 양 떼를 먹이는 목자와 같이 자기 양들을 돌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평강’을 누립니다. 미가서의 예언이 주어지는 시대는

전쟁이 가득하고, 탐심이 가득하여 서로를 짓밟는 약육강식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왕’은 가장 힘이 센 존재였습니다. 당시의 왕은 양을 돌보는 존재가 아니라, 양을 습격하고 도축하는 맹수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일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미가서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평강’을 얻기는 힘들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말하는 “이거는 있어야 해,

이게 중요해. 이거 준비 안 했어?” 이런 이야기를 다 듣고 있으면 그거 따라가다가 인생이 다 소비되거나, 늘 따라가지 못하는 불안함에 빠져들기 십상입니다. 이 시대에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처럼 공동체로 함께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의 아픔이 더 잘 드러나기도 합니다. 특별히 한국은 더 많습니다. 부자 동네가 더 많습니다. 삶에 주어진 부담감이 크고, 뭔가 끝없이 경쟁하게 만들고, 그 경쟁사회에서 이탈하면 뒤처지고 잘못된 것 같은 뭔가 극심한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은 대학입시 알아보다가 불안에 빠지고, 청년들은 취업과 결혼 준비하다가 또 작아지고 불안에 빠지고, 결혼하면 또 주변과 살림 비교하다가 넘어지고, 아이 낳으면 맘카페에 기준을 빼앗겨서 흔들리고, 어른들은 온갖 세상의 걱정은 다 하다가 삶을 허비하기 딱 좋습니다. 성경은 이런 삶을 목자가 없어서 방황하는 삶, 맹인이 맹인을 이끌다가 함께 망하는 삶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짜 하나님이 주고 싶으셨던 그

삶을 주기 위해, 우리를 위한 목자를 보내주십니다. 미가서는 약육강식과 폭력의 시대에 평강을 주시는 분, 양 떼를 먹이는 목자와 같은 메시아를 예언합니다. 세상의 추구와 가장 다른 우리의 왕. 예수님은 실제로 세상의 왕들과 가장 다른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는 십자가 사역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이루고 싶은 승리는 세상의 정점에 서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모습으로 죽는 것이었고,

그 역설적 승리로 말미암아 세상의 가치관이 틀린 것 같으면서도 허덕이며 따라가고 그것에 늘 삶이 메여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구원과 평안, 그리고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탄. 거룩한 탄생.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장 낮고 작은 탄생. 그러나 그분이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제 그분에 의해서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우리가 가졌다면, 우리에게 그 삶을 선사하러 오신 주님의 탄생을

깊이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이제 설교를 마무리하며 권면합니다. 세상은 크고 작음, 높고 낮음, 많고 적음 등으로 우리의 존재적 가치를 평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스라엘보다는 로마를, 갈릴리보다는 유대를, 베들레헴보다는 예루살렘을 주목하고 그곳에 자신도 속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도 자꾸 그 논리에 빠져듭니다. 세상의 소리가 우리에게 늘 있지만, 그것을 붙들 것이냐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내가 멈출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아직 보지 못하는 게 많고,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그 소리를 들을지, 붙잡을지, 그건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나의 삶과 나의 시선을 점검해 주십시오. 오늘 어쩌면 베들레헴과 같은 이 양주, 그리고 어쩌면 그리 대단하지 않은 우리 교회이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강남에 있는 교회도 쓰시고, 양주에 있는 교회도 쓰시고, 지방에 있는 교회도 쓰시고, 아프리카와 미국의 교회도 쓰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면, 내 약함은 하나님이 쓰기 좋은 조건이 될 것입니다. 내 어떠함보다, 나와 그분이 잘 연결되어 있는가? 내가 그분으로 인하여 새로운 존재임을 진짜로 믿는가? 어쩌면 여기에 우리의 정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래서 대부분 반기지 않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분의 오심이 어떤 의미인지 압니다. 그분의 오심이 이 세상에 어떤 균열을 내고, 어떤 흐름을 바꾸었는지도 압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주인으로 그렇게 맞이하며 높여 드립시다. 우리에게 온 가장 소중한 방문. 군림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오신 우리의 왕께 감사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