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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 사귐의교회 성탄절 예배 설교 /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1-2장 / 마음이 네게 있느냐 / 강정규 목사

2020-12-25 · 마태복음 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수요일 바이블클래스 영상에서 다뤘듯이, 하나님은 항상 계획이 있는 분입니다. 유다의 19대왕인 여고냐(여호야긴)는 18세에 왕이 됩니다. 그러나 100일의 통치 후에 바벨론에 2차 포로들과 함께 끌려갑니다. 그러나 37년이 지난 후 풀려나서 바벨론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스알디엘이라는 아들을 낳죠. 그리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죠. 바로 이 스룹바벨이 귀환민들을 이끌고 다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인물입니다. (라 5: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그러니까 역대기는 결국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살고 평안할 수 없으며(요시야, 히스기야까지도), 또 어떤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치트키 : 역대하 7장 14절)을 믿고 전심으로 돌이키면 그는 회복시키신다(므낫세, 포로 백성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약속에 스스로 매여서 신실하게 행하시는 분이므로, 그분의 약속인 말씀이 우리가 붙잡을 신앙인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환한 백성들로 하여금, 지난 과거들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말해주는 것이죠. 그리고 역대기와 사무엘서와 나온 다윗과의 언약, 그 언약의 약속대로 우리 안에 오신 구원자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 약속의 결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

1: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태복음이라는 책의 성격을 이해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는 그가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깨닫고 그에 대한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전하고자 기록을 했습니다. 그가 하고 싶은 메시지는 예수님은 바로 우리가 기다리셨던 그 메시아이며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왕으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 그것을 설명하려면, 유대인들이 항상 붙잡고 있는 약속, 바로 다윗 언약을 통해서 설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봤던 역대기의 말씀이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이죠. 잡혀갔던 여고냐를 통해서 다윗의 혈통을 보존하시고, 스룹바벨을 통해 귀환을 시키셨던 그 하나님. 그 계보에서 요셉이 태어났고, 바로 예수님이 요셉의 계보에 들어가면서 다윗의 후손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족보를 한 줄로 설명하는 마지막 절을 보면 이렇게 나와요. (마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우선

드릴 말씀은 이 족보가 다윗의 족보를 변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왕가의 족보입니다. 유명한 집안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족보를 통해 우리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의아함을 갖고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를 통해 마태의 의도에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왜 족보를 굳이 14에 맞췄지? 이 족보가 ‘다윗’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표는 예수님이지만 족보 자체는 다윗에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1-17절 사이에 예수님은 3번 나옵니다. 다윗은 무려 5회나 나옵니다.

그리고 14라는 숫자가 가진 의미가 다윗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글자에 원래 모음이 없었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이렇게 씁니다. 조금 쉽게, 영어로 예를 들어 발음을 표현하면 DAVID이죠. 히브리어는 모음이 원래 없었기 때문에 D.V.D 가 다윗의 이름입니다. 히브리어에는 각 글자마다 고유의 숫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강정규가 ‘ㄱㅈㄱ’ 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는 숫자가 매겨져 있습니다. 다윗은 4.6.4입니다. 즉 4.6.4를

더해서 나온 ‘14’라는 단어는 다윗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숫자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을 ‘게마트리아’ 라고 합니다. - 나는 그 이름이 545인 그 여인을 사랑한다. (폼페이 도시에 남아있는 기록) - 참조. 계시록의 ‘666’; 바나바 서신의 ‘318’ (계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네로 카이사르를 풀면 666이다) 성경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당시의

독자들이 이해하는 수준으로 우리도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게마트리아의 형식을 활용하고 있었고, 이 족보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14가 다윗을 상징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이 족보는 다윗을 통해 설명되어지는 족보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다윗일까? 바로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약속에 따라서, 즉, 구약의 다윗 언약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지키셨으므로, 약속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오셨음을 신약을 시작하며 가장 첫

부분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인 구약에 신실하게 구원자를 보낸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미션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설명들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일단 그는 여자의 후손이어야 합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이야기는 구원자가 될 분은 남자의 씨를 통해서 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바로 이것을 설명합니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러면서도 그는 다윗 언약을 이루기 위해 다윗 계보에 들어야 합니다. 앞서 살펴봤지만 유대인의 족보는 부계의 족보입니다. 그러니 동정녀 탄생인데, 아버지가 필요하고 그 아버지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반드시 마리아의 남편이 되어서 예수님이 다윗의 족보 안에서 태어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요셉의 씨는 아니어야 하는 엄청난 고도의 미션인 것입니다. (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제가 성탄절이 되면 이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1:18에 보면 마리아와 요셉은 무슨 관계를 맺죠? ‘약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바뀌기 전에 개역한글성경에서는 무엇이었는지 혹시 기억나시나요? ‘정혼’입니다. 개역 : 정혼 _ 정혼하는 순간 법적 부부이다. 다만 둘 사이의 육체적 관계는 결혼 때까지 불가이다. 개정 : 약혼 _ 이건 법적인 아무런 구속력 없다. 이건 잘못된 해석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약혼이 아니라 정혼한 것입니다. 정혼은 결혼 1년 전에

합니다. 지금 18절은 두 사람이 정혼한 부부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혼한 상태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과부가 되는 것이 유대인의 법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왜 정혼기간을 두느냐? 정혼의 기간을 두는 중요한 이유는 여자의 정결함을 확인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기간 부정함이 드러나면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서 유대인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죽이는 것은 총독에게만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이혼’입니다.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방법이었습니다. 앞뒤 문맥을 고려해 볼 때, 마리아의 임신 시기는 정혼의 시기가 끝나는 시점, 즉 결혼을 얼마 앞두고 벌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천사가 처녀인 마리아에게 임신할 것에 대해 말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을 ‘수태고지’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마리아가 천사의 수태고지를 받았을 때, 정혼자인 요셉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요셉의 입장에서 마리아의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전까지 성경에서조차 그런 일이 없었으므로 요셉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배가 불러온 마리아를 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이혼을 하는 쪽으로 결정을 합니다. 바로 이때 성령께서 요셉에게 나타나서 알려주십니다.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셉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구약부터 내가 준비한 계획이 있는데, 이것을 위해서 너희 가정을 좀 써야겠다. 내가 너희 가정에 보내는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이렇게 설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미션을 성공합니다. (마 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마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뭐,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것만이 아니죠.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은 어떻습니까?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미 예언자를 통해서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합니다. 자,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는 어디에 사냐면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삽니다.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어디 움직일 형편이 아니기에, 원래는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낳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예언이 깨어져요. 기껏 아빠 엄마까지 메시아의 조건은 다 만들어놨는데, 출생지역이 안 맞으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디테일한 분입니다. (눅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눅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때죠. 갑자기 로마 황제가 모든 로마에 호적등록을 지시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는 곳이 아니라 각각의 고향에 가서 등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눅 2:4)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눅 2:5)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눅 2:6)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여러분.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곳이 어디냐고 헤롯에게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니까 당연히 헤롯 집안 어딘가에 태어났다고 막연하게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헤롯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묻습니다. “메시아가 어디서 나겠느냐?” 베들레헴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에게 베들레헴으로 가라고 말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정작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베들레헴으로 갈 생각도 없었어요.

집이 나사렛인데 베들레헴으로 원정 출산을 가는 것이 더 이상하죠. 그런데 하나님은 로마의 황제를 이용해서 온 세상을 움직이게 하시고, 마리아가 만삭의 몸으로 어쩔 수 없이 갔다가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아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낳기는 베들레헴에서 낳았는데, 키운 것은 나사렛에서 키웠기에,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가 된 것이죠. 그래서 후에 사람들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나사렛은 메시아와 무관하다는 것이죠.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참 재미있지요? 그래서 성경은 알면 알수록 참 놀랍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적힌 내용들이 없어요. 우리는 역대기라는 나라의 운명을 다룬 책을 통해서 나라의 죄악에 대해서 나라를 통해서 책망하고 깨닫게 하시는 큰 하나님을 봅니다. 이 하나님은 바벨론도 사용하시고, 페르시아도 사용하셔서 귀환하게 하시고, 로마의 황제를 통해서 메시아의 출생지를 조절하시는 등 엄청난 분이시죠. 그런데 이 엄청난 하나님이 또 굉장히 디테일합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모든 것을

창조하고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지만, 꼭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가 낄 자리가 있나요. 그런데 하나님은 꼭 우리를 통해, 특별히 우리의 ‘순종’을 통해 일하시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나에게 관심이 있으시고, 나를 통해 함께 일하기를 원하세요. 예수님의 탄생은 어쩌면 우리가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나사렛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굴복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 말입니다. 마리아. 당시 유대인 여성들은

만 12세가 넘으면 결혼을 했습니다. 한국 나이로 따져도 14세-15세 정도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몸을 통해 일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이것이 혼자 결정한다고 그냥 아기가 낳아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눅 1: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눅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찾아가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말하는 것이죠.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마리아가 황당해서 말하죠.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즉, 아이를 낳을 만한 행동을 하지를 않았는데요. 그러자 천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 방법은 하나님께 있고, 순종의 마음이 네게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리아의 대답이 뭔지 아세요?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것이 마리아의 순종이었어요. 그럼 요셉은 어떨까요? 물론 자기 몸에 나타난 변화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래서 더 의심스러울 수도 있잖아요. 마리아는 자신에게 원인도 없는데 임신을 했으니 적어도 이것이 기적임은 알겠죠. 그런데 요셉은 정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겠죠. 좀 더 냉정히 말하면, 어쩌면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임신을 하기로 한 이상 그 이후에 다른 옵션은 없습니다. 출산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피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택한 것입니다. 역대기를 마무리하면서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결론을 드렸습니다. 신앙의 성숙함은 바로 ‘순종’의 능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또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배우고, 깨닫는 것이 첫째요. 그 다음은 그 명령과 방향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이것에 관한 한 구절에 눈이 번쩍였는데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난 장면입니다. (눅 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눅 1: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함에 있어서, 그 명령, 그 사명, 그 요구들이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잘 생각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내가 뭔가를 해야 하는 부담과 과제가 아니라, 실상 그것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목사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저에게도 때로는 버거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부분들이 있겠죠. 아마도 이번에도 사역지원서를 보면서 이러한 주님의 초청들이 숙제와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뜻에 대한 순종들이 은혜를 받는 길이라고 깨닫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자가 주의 일을 할 힘을 얻고, 그 순종 가운데 또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찾아온 주님이 그녀에게 주신 것은 은혜였습니다. 여러분이 삶에서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고민하는 지점들이 있죠. 순종에는 항상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여 주의 은혜 안에 살아가시기를 권합니다. 내게 순종을 결단할 무언가가 주어졌다는 것은 주의 은혜가 내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간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 길을 따라가실 마음이 있습니까? 정말 그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가 순종의 삶을 사셔서 온전하게 되셨던 것처럼, 이제 그분 앞에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자가 되신다.” 네게 순종의 마음이 있느냐? 참된 순종은 조건을 따지지 않고, 내 생각을 넣지 않고, 주님의 부름과 요청에 “아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예수님께 오늘 우리가 모여 감사하는 예배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가 우리에게 남기신 삶의 흔적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온전한 순종의 마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우리의 삶에 다가오셨고,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따를 순종의 모범이 되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고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제 말씀하십니다. 나의 길을 가겠느냐?

순종의 마음이 네게 있느냐? 저는 언제고 주님의 부름 앞에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아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제 대답은 언제든 Yes!입니다. 저는 순종으로 은혜로 나아가겠습니다. 그곳에 여러분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곳에 우리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