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러분, 오랜만에 금요 설교로 여러분과 또 말씀을 나눕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금요설교를 했던 것이 10월이었죠. 10월 초에 ‘산상수훈 리터치’라는 제목으로 마태복음 5장의 내용을 나눈 바 있습니다. 왜 그 설교를 나눴냐 하면, 그전에 제가 산상수훈을 몇 번 설교한 뒤에, 제 안에 이상하게 무거움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 무거움 가운데서 하나님께 받은 깨달음과 발견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했던 설교가 지난 설교였어요. 1. 산상수훈 자체가 어떤 말씀이냐
하면, 회심한 사람들,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침서와 같습니다. 그냥 세상적인 삶, 또는 종교 안에만 들어와 있는 삶을 넘어서 그리스도께 속한 삶으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기 위해 이런 저런 걸 해야 한다”는 말씀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서 거듭난 삶을 받았다면, 이제 이런 삶이 ‘가능한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가만히 읽어보면,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죠. “진짜 내가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 속옷을 달라는 이에게 겉옷까지 주라, 원수를 사랑하라… 하나같이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정답입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기로 잠깐은 할 수 있죠. 그런데 곧, 내가 이것을 행하기엔 너무 작은 존재라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오른뺨을 맞고 왼뺨을 돌려대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선행을 베풀며, 원수 같은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거창하고 위대한 일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는 매 설교 시간마다 듣는 대부분의 말씀을 삶 속에서 그대로 살아내기도 벅찰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정답은 무엇입니까?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여기까지는 맞아요. 그런데 그 판단에서 누가 빠져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빠져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예로 들었던 가나안 땅 정탐꾼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열
명 정탐꾼의 이야기는 사실 정확했습니다. “가나안 땅 좋긴 한데, 우리에겐 버겁다.” 틀린 말이 아니에요. 그들의 평가 자체는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판단과 이야기 속에서 배제된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나로서는’ 불가능한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회심한 사람’만이, 다시 말해 하나님을 배제하고 살던 옛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진 내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 비로소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삶의 모습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2.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정말 감사한 것이 있다면, 이 교회 안에서 처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 달라진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볼 때마다 “이 분이 이렇게 변했다고?” 싶을
만큼, 정말 놀라울 정도로 신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 변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 사람의 마음 중심에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그 삶을 우리가 기대보다 훨씬 풍성하게 빚어가고 계신다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중심을 잡으시고, 여러분을 이 예배 자리에 보내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 잘 오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본성은 어떨까요? 우리 본성은, 이 시간에 예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예배보다 쉬고 싶고, 예배보다 놀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몇몇 분들은 쉬는 것을, 노는 것을 선택하셨을 겁니다. 그분들을 정죄하기보다, 우리가 더 잘 이해해 주고, 사랑으로 격려해 주면 좋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사가 있습니다. “그들도 주 알게 되면 함께 기뻐 춤을 추게 되리~” 지금
이 예배의 기쁨을 오늘은 놓친 분들도, ‘주를 알게 되면’ 언젠가 함께 기뻐 춤추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예배 안에서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존재가 달라졌다.”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이 사실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자꾸 움츠러들게 합니다.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게 합니다. 우리 안에 있던 자신감도, 소망도 매일같이 사라지게 만드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세상의 페이스, 세상의 방식에 맞추도록 요구합니다. 그때 내 안의 중심되신 주님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무조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이 자리에 와서 다시 이렇게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맞다,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지.” “나는 거듭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 사람이지.” 흔들렸던 나의 삶을 다시 바로 세우는 시간이, 예배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이제 오늘 함께 볼 말씀, 마태복음 6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 하나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염려’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의 시스템을 세팅하면서 처음부터 가장 공을 들인 것이 사역 시스템입니다. 원칙이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섬길 사람이 없으면, 그 사역을 멈춘다.” “매년 사역을 마무리하고, 번아웃을 막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헌신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면 보통 목사님들이 많이 놀랍니다. “그래도 교회가 굴러가냐”고 물어보시기도 합니다. 성도를 위해
고갈보다 자발성을 선택한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도, 사실 매년 다음 해를 바라보며 염려에 빠지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누굴까요? 바로 저입니다. 사무연회를 준비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제 눈에는 지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이고, 다음 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인간적인 어려움에 부딪힐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제 안에 염려가 올라옵니다. 여러분, 염려의 뿌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결국
이걸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6: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마 6:32)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먹고 사는 문제는 모든 사람에게 늘 찾아오는 고민입니다. 하나님을 놓아버린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이 생존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염려할 수밖에 없는 세상, 그런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중년판 ‘미생’이라고 불리는 드라마가 하나 있죠. 제목이 깁니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보신 분도 있을 겁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 정말 현실적인 고민들이 쏟아집니다. 제가 봤을 때 50대 남자는 최소 한 번은 운다고 생각합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버거울까…” 공감이 되는 지점이 너무 많습니다. 인간이 왜 염려할까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은 살아가야 하는데, 삶은 내 뜻대로 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염려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본능입니다. 창세기에서도,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 사람들이 홍수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아,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해야겠구나.” 하고 나아갔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심판하시면 어떡하지? 그 변수를 막을 방법을 만들자.” 그래서 뭘 쌓습니까?
바벨탑을 쌓습니다.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자기 힘으로 통제권을 손에 쥐고 있으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이 염려를 없애기 위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 조금 생기기 시작하면, 담장을 더 높이 쌓습니다. 왜냐하면 불안해지거든요. 돈이 많아지면 더 자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오히려 가장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에게서 볼 때가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입니다. 4.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 그것도 이 사귐의교회 목회를 분명히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부르심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정말 잘 세워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저의 열정이기도 합니다. 그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의 갈망에는 항상 양면이 있습니다. 이루어질 것에 대한 갈망이 크면 클수록,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불안도 같이 커집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클수록, 그것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도 함께 커집니다. 그래서 저는, 그 갈망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그 갈망이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싸우기 위해 계속해서 고백하고, 묵상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의 주인이시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세워지는 일은, 나보다 하나님이 더 급하신 일이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좋은 목사, 좋은 성도로 서 있으면 된다. 그 이상은 주님의
교회니, 주님이 하실 것이다.” 저는 우리가,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 주님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마음으로 주님께 집중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사역자 미팅을 앞두고 저희 사역자분들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사역에 대해서도 사람과 먼저 상의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집중해 달라. 그리고 끝까지 주님의 손 안에 있자.” 왜냐하면, 우리가 염려를 이겨내는 방식은 결국 시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을 진짜 갈망하고 하나님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해진 사람에게는, 정말 이렇게 고백이 생깁니다.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모세의 평생 소원이 뭐였을까요? 우리는 보통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모세의 진짜 소원은 그것보다 깊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5절에서 모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마옵소서.” (출 33:15) 모세는
약속의 땅보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할 것을 더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모세야, 너는 여기까지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모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런 말씀을 읽으면 마음속으로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규야, 사귐의교회 목회는 여기까지야.’라고 하신다면, 그때
내 진짜 믿음이 드러나겠구나. 나는 ‘사귐의교회 목사’가 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지…” 다윗도 그렇습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시 51:11) 다윗은 자기 죄의 무게도 너무 무겁게 느꼈지만, 그보다 더 두렵게 느꼈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 그분이
계시는 것이 나의 갈망이 되고, 그분이 계시는 것이 나에게 중요해질수록, 다른 것이 조금 없어도 정말 괜찮을 수 있습니다. “이것도 원하고, 저것도 원하지만 둘 다 못 가진다면 그 중에 더 유익한 것을 택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그때 하나님을 택하고, 그것에 감사하기로 결정하는 것, 저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6. 오늘 본문은, 염려를 다루면서 함께 다루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재물의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형제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지금이 제 인생에서 물질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장 평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형제는 지금, 인생에서 하나님과 가장 친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형제는 이번 주간에 저를 찾아와, 주일성수 문제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제일 먼저 한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아내가 허락했어요?” 남편에게는 가끔, 하나님보다 더 눈에 잘 보이는 신적인 존재가 있죠.
바로 아내입니다. “아내가 뭐라고 했어요?”했더니, 아내가 먼저 “그만둬라.”라고 했답니다. 제가 비슷한 설교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아… 내가 괜히 설교를 했나…” 싶기도 했지만, 막상 그런 결단을 하고 찾아온 형제를 보니 한편으로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날 같이 이야기도 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 또 이렇게 대책 없는 사람이 있구나…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대책이 없으니, 하나님이 이 사람의 대책이 되어 주시겠구나.” 여러분, 저는 이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믿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붙잡힌 사람, 무엇을 주셔도 우선순위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물질을 아무리 많이 주셔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 또 사람을 붙여 주셔도 함께 하나님을 꿈꿀 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때가 되면 그것들을 맡기신다. 하다못해, 하찮은 인간인 저도 무언가를 맡길 사람을 고를
때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조금 맡겨 놓았더니 금방 그게 우상이 되어버리는 사람, 그것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더 맡기실 수 없으시겠지요. 저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쓰실지는 주님의 몫입니다. 다만 나는,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6:19)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마 6:20)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마 6:21)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돈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라는 말이 있죠. 성경적으로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가 우선인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위한 삶을 설계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이렇게 물어봐야 합니다. “이건 지금, 누구를 위한 삶인가?” 그게 사역이라도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정말 누구를 위한 삶인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은 이 땅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어떤 것도 하나님의
라이벌로 만들지 말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맡길 수 있는 분명한 삶의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6장은 이렇게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 6: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뭡니까? “아무도”입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저는 균형 있게
둘 다 잘 섬길 수 있어요.” 만약 정말 그렇다고 믿으신다면, 배우자나 애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보십시오. “나는 당신과 다른 이성을 균형 있게 사랑할 거예요. 그러니 나를 믿으세요.” 어떻게 될까요? 네, 불가능합니다. 그냥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타협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나의 삶에 다른 것들을 세팅하겠습니다.” 이 고백을 양보하기 시작하면, 한 발 물러선 것
같지만 두세 발은 금방 더 멀어집니다. 이 훈련이 안 되면, 여기 나오는 물질을 비롯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을 빼앗아 가게 됩니다. 7. 여러분, 우리가 회심했고, 거듭났다고 해서 삶에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 받았냐, 안 받았냐”만으로 완전히 잘라서 이분법으로만 보는 것은, 신앙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의 바람과 파도를 보는 순간 빠져 버렸습니다. 회심한 이후, 우리 안에는 이전과 다르게 바다 위에 발을 내딛을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생깁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현실을 보며 빠질 수 있는 연약함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정 안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끝까지 붙들고 나아갈 분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걸 어떻게 지켜요, 목사님. 맨날 이렇게 부담 주면,
너무 피곤해요.” 맞습니다. 예전의 나로서는 못 합니다. 지금의 나도,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 안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아, 내가 또 하나님을 배제하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맞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는 해 봐야지. 하나님이 하실 거니까.” 베드로는 그런 마음을 정말 잘 보여줍니다. 마음이 꽉 차 있을 때는 “주님, 저는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자기에게도 위험이 올 것 같으니까 부인하고 도망칩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건, 그 부인하는 현장에라도 베드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실패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시도도 안 해 보니까요. 산상수훈을 보고 “아, 안 되는구나…” 이건 해 보려고 했던 사람만이 정말로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회심의 삶은 갈등과 고민의 현장에 들어서는 삶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내적
갈등이 거의 없습니다. 오직 그들의 고민은 현실뿐입니다. 회심 전 우리의 고민은, “현실”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물론 그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회심 이후에는 우리에게 이제 다른 종류의 고민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게 뭘까…” “이 선택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주님을 향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이전처럼 내 삶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다른 부딪힘, 걸림, 갈등이 생깁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아마 이런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 주는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한 번 서야지…” 그래서 이 자리에 오신 분들, 또 어떤 분들은 지금 이 시간에, 여기저기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중에라도 이 설교를 다시 찾아 듣고 자기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고자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완전히 없는 사람은 이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아도 별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은 이 시간에 대해 아무런 감각이 없는 사람도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해주면 변합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 중에도 지금의 모습과 전혀 달랐던 시절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같이 예배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예배를 섬기고, 함께 예배를 세워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찬양 가사처럼 고백합니다. “그들도 주 알게 되면 함께 기뻐 춤을 추게 되리.” 8. 자, 이제 다시 염려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염려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염려는 죄가 아니지만…”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염려 자체를 죄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시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염려가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염려가 내 모든 결정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것” 염려에 붙들리면 아직 오지도 않은 최악의 경우를 늘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최악의 시나리오를 미리 앞당겨 끌어와,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고민하며, 그 앞에서 내 행동의 근거와 핑계를 만들어냅니다. 염려는 힘이 셉니다. 그래서 염려는 충분히 그 염려에 어울리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주변 사람들 다 이렇게 사는데, 나만 이렇게 안 살 수는 없지…” “나도 저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한 가지를 더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게 뭘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성경이 염려를 계속 다루는 것은, 염려가 사탄이 우리를 조종하기 좋은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속삭이는 것밖에 못 합니다. 그런데 이 속삭일 때, 우리를 가장 자극하는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야, 너 나중에 이런 상황 맞이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걸 준비해 놔야 해.” 그래서
대체로, 염려의 반대말이 믿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염려스러운 현실 앞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가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염려가 지배자가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너무 쉽게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염려가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염려가 왔을 때 그 염려를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염려를 이기는 무기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너희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염려 속에 살고 있는 너희들아, 나의 제자들아,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아, 염려 이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니? 너희가 누구인지 아는 거야.” 우리 주변에 염려가 있지만, 염려보다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염려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길지만, 같이 읽었다고 생각하며
들어보십시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마 6:28)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여러분,
우리의 현실은 땅에 있습니다. 땅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늘 염려를 밟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다른 것은, 우리는 동시에 하늘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염려 속에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저것 대책을 세우지만 그래도 염려 속에 머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염려는 내가 아무리 애써도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 아버지이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가 염려를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하지 못하는 관계의 결핍 속에서는 우리는 염려를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록 염려 속에 살지만, 그 안에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9.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염려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여기서 “먼저”는 우선순위입니다. “나와 함께하는 너희들아, 나 때문에 새로워진 너희들아, 너희도 염려 속에 살고 있지만, 너희와 함께하는 내가 앞에서 말한 그 모든 일을 행하는 분이니, 너희는 이런 나를 믿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라.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안다.
내가 널 안다.” 한번 옆에 있는 분에게, 하나님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이렇게 말해 봅시다. “내가 널 알아.” 오늘 이 예배 안에 오신 여러분들이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내가 널 안다. 네가 어떤 염려를 안고 왔는지, 네가 오늘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어떤 마음의 싸움을 했는지, 내가 다 안다.” 믿음은, 염려를 아무 감정 없이 싹 없애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염려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삶을 선택하고, 추구하고, 실제로 거기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염려 때문에 움츠러들기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어쩌면 남들과 반대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비슷한 상황을 계속 겪으면서, 그때마다 다시 믿음으로 선택해 보고, 하나님을 경험한 그 기억 때문에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또 믿음으로 선택하게 되고, 그렇게 우리 믿음의 지경이 넓어져 가며 조금씩 염려를 이기는
법을 배워 갑니다. 여러분, 어떤 분들은 절대 “무리”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많습니다. 상황도 있고, 형편도 있고, 가족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런 분들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취약합니다. 나의 통제 범위를 딱 정해 놓고, 그 안에서도 잘 움직이지 않는데,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겠습니까? 믿음은, 애초에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안에서 우리가 이렇게 결단하면
좋겠습니다. “염려가 판치는 현실이지만, 나의 안정된 기준을 때로는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 깨뜨리고, 내려놓고, 염려의 한복판으로 믿음의 걸음을 내딛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의 행동 범위가 넓어져 갑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세상은 알 수도 없고, 세상은 경험할 수도 없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자를 보면 사람들이 놀랍니다. “야,
너한텐 뭐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삶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삶이 되는 줄 믿습니다. 10.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외면할 수 없습니다.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사람, 사건, 관계,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들을 다 외면하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붙들어야 할 것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붙들고 그것만 보고 있으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붙들고 난 다음에, 우리가 반드시 나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내 염려, 나의 관계, 나의 마음, 나의 어려움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염려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가 꼭 기억했으면 하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지 말자.” “하나님을 인정하자.” “하나님을 바라보자.”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배제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제 방식대로, 제 논리대로만 풀려고 하면
늘 똑같은 문제에 막힙니다. 왜냐하면 저는 요만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하지 말자.” “하나님을 인정하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내가 그분과 어떤 관계인지 다시 바라보자.”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너희의 노동력이 필요해서 ‘야, 일 좀 해라’ 하고 부르는
게 아니다. 이 염려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염려에만 붙들려 사는 너희가 너무 안타까워서, ‘너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너를 그렇게 살지 말라고 새로운 삶을 준 건데…’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아,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의 삶의 방식은 여기에 있다. 너희의 삶의 방식은 이 길이다.” 우리가 이걸 놓치면, 우리는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염려 가득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부르신 주님,
오늘 바로 그 염려 가운데 있는 여러분을 마주하시고, 여러분과 함께하시기 위해 이 자리에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안다.” 이제 이 기도의 시간에, 우리가 그 주님과 함께 우리의 삶을 나누며, 그분께 우리의 염려를 올려 드리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다시 붙들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찬양과 기도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