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FORGIVE

2026-08-16 · 마태복음 18장 21~35절 · 박예진 전도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형제님들과 자매님들이 나누어서 읽으실 텐데요. 형제님들 먼저 읽으시고 마지막은 함께 고백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 베드로가 예수께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주시며 내가 몇 번이나 합니까 일곱번까지 하라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다 이른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라면 왕이 샘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는 주 있는

그 종에게 자식과 자과 그밖에 못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주인은 그 종을 열서 그를 도와주고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사를 잡고 말하기를 내가 진 빛을 갚아라 하였다. 그 동물은 말하다 잡아에 내가 갚.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보고서 가서 주인에게 그를 따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이 악한 종아 내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 것처럼 내를 불쌍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놓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 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아멘. 네. 우리가 방금이 읽은 본문을 아마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거 같아요.

우리가 흔히 어떤 비유라고 합니까? 일만 달란트를 비쳤던 종의 비유라고 어 하죠.이 말씀은 무엇에 관해서 말하는 말씀일까요? 네, 맞습니다. 용서에 대해서 어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으시면 어 어떤 마음과 좀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읽으면 어 조금 마음이 불편합니다. 더 솔직하게 말해 보자면 너는 왜 용서를 못 하니? 라고 왠지 좀 혼나는 거 같고 [콧방귀] 아 내가 용서하기 싫은 건 아닌데 그 어려운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은 채 야 기독교회는 무조건 용서해야 돼라고 강요당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어 다소 언짠 기도합니다. 제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이 말씀을 처음 읽었던 그 당시에 저에게도 용서하기 너무 어려운 더 솔직하게 말하면 별로 용서하고 싶지 않은 그가 있었기 때문이죠. 오늘이 말씀 읽으신 여러분 어떠신가요? 혹 여러분들 중에도 저와 비슷한 그런 마음이 느껴지는 분이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정말 이 말씀이 비유가 우리에게 오늘 전하고자

하는 그 메시지가 너는 왜 용서를 못 하니라고 꾸짖기 위함일까요? 용서하기 어려워하는 우리의 마음엔 일도 관심이 없고 너는 그리스도이니까 용서하는게 당연해라고 말하고만 있을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 저는 오늘이 질문을 가지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진짜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 여러분,이 이야기에서 누가 질문하죠? 방금 읽었는데 자, 베드로가 질문을 하면서 시작을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어요.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할까요?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어, 저는 성경을 볼 때 다른 번역번을 여러 개 보는데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메시지 성경을 좀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성경에이 부분을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주님, 제게 상처를 주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그 형제나 자매를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될까요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용서가 어렵죠. 왜 어려울까요? 그 사람의 죄가 너무 커서

어려울까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더 직접적인 이유는요. 내가 받은 상처가 크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처를 많이 받을수록 우린 용서하기 더 어려워지죠. 용서의 어려움은 그 사람의 잘못에 크기나 어 크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받은 상처에 크기 때문에 어렵다는 거예요. 여러분 혹시 이런 경험이 있지 않으신가요?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어떤 속상함이나 어려움을 막 이야기했어요. 아니 글쎄 걔가 나한테 일했다니까 막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걸 듣고 있는 상대방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야 근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니? 그냥 좀 넘어갈 수도 있잖아. 이렇게 말합니다. 근데 여러분,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죠. 그리고 나도 그렇게 반응하면 참 좋겠죠. 나도 쿨하게 반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지가 않는 부분들이 우리 각자에겐 다 있다는 거예요. 왜냐면 그것이 나에게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냥 넘어가기 너무 어려운 상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같은 행동, 같은 말이라도요.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어,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어. 이렇게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어요. 아주 작은 마음에 스크래치 하나 남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다 경험하죠. 그 똑같은 말, 똑같은 행동에 누군가에게는요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요. 우리는 그렇게 상처받았을 때 그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여러분. 그런데 유대 시대의 그 랍비들은요. 이런 잘못을 한 사람, 나에게 너무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을

세 번까지는 용서해 보라고 가르쳤어요. 우리랑 좀 비슷한 거 같아요. 여러분, 우리도 몇 번은 참아주죠? 세 번을 참하죠. 엄마 두 번 참았다. 이제 한 번 남았다. 그만해라. 이렇게 많이 하시잖아요. 속담도 그런 거 같아요. 우리가 참으리도 몇 번까진 새겨 보래요. 세 번까진 새겨 보래요. 아마도 인간의 인내심이 동사양을 막론하고 세 번까지가 한계인 거 같아요, 여러분.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는 거예요. 주님, 일곱 번이면 되겠죠? 베드로의 이 제한이 질문은요.

당신으로서도 굉장히 마음을 크게 쓴 겁니다. 관대한 제한이었다는 거예요.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으면서 이런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주님이 정도면 충분하죠. 제가 일곱 번 용서하면이 정도면 제가 그래도 주님의 제자라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세 번 참는다는데 일곱 번 참으면 괜찮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예수님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시나요? 충분하다고 하시나요? 이른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래요. 메시지 성경에서 뭐라고 하냐면요. 일곱 번 어림도 없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택도 없다는 거죠.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님 우리에게 야, 일곱 번은 좀 부족하지. 490번 정도는 해야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아니에요. 예수님의 이 말씀하신 이 말의 의미는요. 헤아릴 수 없이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정도면 충분하죠라고 베드로는 물었는데 그 마음이 무색할만큼 아니 어림도 없지. 용서는 충분한 횟수라는게 없는 거야. 헤아릴 수 없이 하는 거야라고 대답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일곱 번도

정말 마음을 크게 쓴 건데 주님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시죠. 뭘 그런 걸 세고 있니? 용서는 끝없이 하는 거지라고 말씀하신다는 거예요. 만약 여러분이 정말 마음 어려운 그 사람을 놓고 막 기도하다가 주님 제가 그래도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라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근데 주님이 어림도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럼 마음이 어떻죠? 어려워지죠? 내가 얘를 한번 용서해 보자.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마음 먹었던 그 마음조차 돌이키고 싶어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내가 받은 상처가 있는데 걔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무제한으로 용서한다고? 이건 말이 안 되지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얼마든지 찾아온다는 거죠.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렇게 불편하고 어렵고 힘겨울까요? 어, 사실 우리는 용서를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번에도 참았어. 저번에도 내가 먼저 사과했었잖아. 이번이 벌써 세 번째라고. 선을 넘었어. 이젠 더 이상 못 참아. 여러분, 우리는 용서에 별로 그렇게 후하지

않아요. 철저하게 계산된 용서를 합니다. 이만하면 됐어.이 정도 참았음. 많이 참은 거야. 나는 이미 그에게 많은 기회를 줬다고. 그래서 사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묻는 거예요. 주님,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이 정도 참았으면 되지 않습니까? 주님, 제가 이 정도 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제 책임은 아니죠. 저는 할만큼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묻는 거예요. 몇 번까지 용서하면 제가 충분히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까요? 여러분, 이걸 왜 모를까요? 그만큼만 하고 싶은

거예요. 일곱 번이면 일곱 번만 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용서할 때 그냥 하지 않아요. 아주 면밀히 계산하죠. 그리고 이만하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봐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는 것은 어림도 없다. 계산하지 말아라. 세지 말아라. 그리고 그냥 용서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산 없는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오늘 우리가 읽었던이 1만 달란트 빚진자의 이야기를 하시죠. 여러분, 왕에게 1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한 명 있었습니다.

이게 과연 얼마일까? 여러분, 사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여기서 의미하는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1만은요. 당시 헬라 시대에 가장 큰 숫자였어요. 그 당시 그 사람들에게 1만보다 더 큰 수의 개념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마 그 당시의 숫자 중 가장 큰 액수를 일부러 고르신 거 같아요. 또 거기다이 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시던 그 시대의 가장 높은 화폐 단위였습니다. 그러니까 1만 달란트라는 것은 어떤 의미냐면 해할 수 없는 금액, 첫문학적인 금액을

말하는 거예요. 1만 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천문학적인 빛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평생 쉬지 않고 일해요. 그리고 이런 한 푼 나를 위해 안 쓰고 다 빚을 갚는데 쓰는 그 삶을 수십번 수백번을 반복해도 절대 다 갚을 수 없는 빚이 바로 이 1만 달란트가 의미하는 거였어요. 여러분 우리가 몇 천만 빚을 줘도 허덕이잖아요. 천문학적인 빚이 있는 종이 있었다는 거예요.이 어마어마한 빚을 가진 종에게 왕이 말합니다. 너 그 빚을 갚아야

해. 너도 가서 스스로 종으로 팔고네 가족들도 팔고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이 빚을 갚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근데 그렇게 팔면 갚아질까요? 안 갚아지죠. 어림도 없습니다.이 종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종이 가진 자산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거예요. 평생을 이래도 불가능한 거예요. 처장식을 다 팔아도 아니 내 자식의 자식의 자식까지 줄줄이 엮어서 노예 시장에 갖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는 거예요. 가지고 있던 집도 팔고 차, 주식, 코인,

내 재산 다 처분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뼈빠지게 노력해도이 종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어요. 우린 이럴 때 가망이 없다라고 말하죠. 여러분이 상황까지 온이 종의 엘만 달란트가 그냥 빚이었을까요? 아니었을 것 같아요. 아마도 이 종은 내가 내 처자식 다 잡아먹는구나. 나 때문에 우리 집안 망하는구나. 아마 그런 아주 무거운 죄책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그 금액 앞에서 더 이상 꿈을 수 없고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희망이 없는 삶.

마치 사망 선고가 내려진 것 같았겠죠. 그래서 이 종이 왕 앞에 무릎 꿇고 아주 싹 비는 거예요.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아무리 시간과 기회가 더 주어져도 갚을 수 없다는 건 아마 그 종 자신이 제일 잘 알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 가족 다 노예로 팔아 넘어가게 그냥 둘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빌어보는 거죠.이 이 모습을 손이 발휘되도록 빌고 있는 그 모습을 왕이 가만히 봅니다. 자신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발 살려 달라고

비는 그 종의 모습을 왕이 보았습니다. 사망이 없는 그의 삶, 그의 눈물을 왕이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자 왕이 종을 불쌍히 여겨요. 그리고는 그 많던 빚을 모두 없던 것으로 해 주었습니다. 왕이 종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거예요. 왕이 그를 놓아 주었습니다. 그 첫문학적인 비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는 것이죠. 어, 여러분, 우리는 용서를 하기도 전에 먼저 계산을 해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어느 정도가 충분한지 그 선을 정해 놓습니다. 마진노선을

그어놔요. 그리고 그 선을 넘을 거 같으면 도가 지나치다고 말하죠. 그런데 여러분, 오늘이 비유에 나오는 왕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왕이 어땠나요? 처음에는 왕이 샘을 가렸어요. 왕이 계산할 줄 몰라서 봐준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왕도 계산할 줄 알았어요. 그 빚이 어떤 가치와 어떤 금액인지 왕도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왕이 종의 모습을 보고 그 샘을 가리려던 마음을 접은 거죠. 그 마음이 없었던게 아니라 그 마음을 접습니다. 계산하기를 포기했습니다. 계산을

포기하니까요.이 왕에게 더 이상 적당한 선, 충분한 기준, 마진노선이 사라진 거예요. 계산이 사라지니까 왕은 적당함이라는 것을 뛰어넘는 충분하고도 남는 그런 우리가 흔히 말할 때 도가 지나쳤다라고 말하는 그 용서를 갑없이 베풀었습니다. 왕이 베푼 은혜는 이런 은혜였다는 거예요. 계산하지 않는 용서였다는 것이죠. 그렇게 은혜를 입고이 자유를 얻은 종이 아주 기쁜 마음으로 나왔겠죠. 나와서 돌아나오자마자 한 사람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멱살를 확 잡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당장 내 돈 갚아. 내 돈 당장 갖고 와"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렇게 붙잡힌 사람의 정체는 종의 동료였는데요. 그 종료는이 종에게 약 4개월째의 일당과 만먹는 일데나리온이라고 하는 빚을지고 있었어요. 깜짝 놀란 동료가 아주 바짝 없죠. 빌죠. 조금만 기다려 주면 갚겠다고 아주 사정사정 애원을 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종이 어떻게 반응하나요? 그를 놓아주지 않아요. 멱사를 끝까지 붙들 끌고 가서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이

종이 왕에게 받았던 모습과 지금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대조되죠. 왕은 종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종은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왕은 종에게 헤아릴 수 없는 천문학적인 큰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종은 동료에게 아주 작은 은혜도 베풀지 않습니다. 왕은 종을 놓아 주었지만 종은 동료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어, 여러분, 우리도 어, 살다가 보면 어떤 좋은 일이 생길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가끔 아, 그래 좋아 기분이다. 내가 없던 일로 해 줄게.

이런 말을 종종하곤 합니다. 왜죠? 그 일이 너무 감사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종은 방금 막대한 빚을 막 탄감받고 나왔어요. 여러분 그냥 빚이 아니라 하마터면 집안 말아먹고 내 처자 자식 다 줄줄의 노예 시장에 팔려갈 뻔한 걸 은혜로 막고 그것을 면하고 이제 막 나오는 길이라는 거예요. 빚을 탄관받을 만해서 받은 것도 아니었어요. 가능성이 전혀 없었고 왕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거나 어 네가 이런 걸 보니 내가 좀 마음이 좋은데 봐줄 만한데 이런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가 빚을 탄감받은 이유는 그에게 없었어요. 전적으로 왕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놓아 주었기 때문이죠. 왕에게 받은 은혜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끔 내가 받을 이유와 자격이 전혀 없는데 대체이 좋은 걸 나 왜 주지? 왜 이렇게까지 하지? 라는 그런 마음을 경험할 때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런 건 은혜라고 불러요. 지금 여러분 종이 경험한 것이 딱이 은혜였습니다. 말이 안 되고 다당하지 않고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것이 조금도 없는 그야말로 무조건적이고 제한이 없으며 한량 없는 왕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면 적어도 아 그래 내가 아예 없던 일로 해 줄 게까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조금 더 기다려 줄게. 너 요즘 힘들지? 내가 조금 더 기한을 줄게.이 정도는 할 법하잖아요. 안에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는 기다려 주지 않아요. 놓아 주지 않아요. 동료를 감옥에 가둬 버리죠. 말도 안 되게 큰 은혜를

입은 그 종에게서 아주 작은 은혜도 나오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 볼 것이 있습니다. 종이 동료에게 내 돈 갚아라고 박을 질렀어요. 그런데 그를 어디에 가둬 버리죠? 감옥에 가뒀어요. 감옥에 갇힌 사람이 빚을 갚을 수 있나요? 정말 그 빚이 목적이었다면 빨리 가서 돈 벌어라고 해야죠. 네가 지금 잠을 잘 때냐고 밥을 먹을 때냐고 가서 돈 벌어라고 하는게 맞잖아요. 말로는 네가 빚을 안 갚아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거야. 돈 갖고

와라고 말하면서 행동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린다는 거예요. 감옥에 갇춰서 어떻게 돈을 벗고 벌고 어떻게 빚을 갚겠습니까? 없는 거죠. 여러분, 어쩌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꼬집고자 하신 또 하나는 바로 이런 태도와 같은 거 같습니다. 아예 용서하려는 마음조차 시도하지 않는 거예요. 걔가 나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에 실망감을 안 겼기 때문에 그에게 작은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요.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빚을 졌잖아. 그러니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는

그의 멱사를 붙잡고 우리도 끌고 가서 내 마음의 가독에 감옥에 가둬 버릴 때가 있습니다. 나는 너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왕은 종을 놓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종은 동료를 놓아줄 생각조차 없습니다. 저는 이 비유가 예전에는 너 왜 그거 하나 용서 못 하니라고 들렸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불편했죠.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이 고작 그거 하나 용서 못 하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대나리온이 적나요? 4개월치 월급인데요. 적지 않죠? 내가 받은

상처가 고작이 아니에요. 그가 나에게 빚진 것이 겨우 그거 하나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여전히 쓰라리고 잊혀지지가 않고 결코 없던 거로 퉁쳐지지가 않은 그런 빚이라는 거예요. 결코 나에게 그것은 작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뭘까요? 야네 빚은 적잖아.네 상처는 작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용서해야지. 저는 이게 아니라고 생각해요.이 비유가 진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나는 너를 놓아줬는데 나는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풀어줬는데

너는 왜 여전히 그를 붙잡고 살아가고 있니 하는 것입니다.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죠. 감옥에 가둬둔 채 풀어 줄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은 그 빚을 갚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빚을 앞세워 그 사람을 붙잡고 가둬 버리고 싶은 우리의 그 마음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요 자꾸 저 사람은 꼭 말을 해도 그렇게 해. 행동 하나도 꼭 그렇게 미운짓지만 골라서해. 그러니까 미워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걔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라고

말해요. 용서할 수 없는 이유. 그를 내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꾸 찾으면서 그 이유를 전가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에 전가합니다.이 종처럼 네가 빚을 안 갚았잖아라고 자꾸 이유를 대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어쩌면 정말 솔직한 우리의 마음은요.이 종의 태도처럼 그 이유들을 핑계 삼아서 그냥 풀어 주고 싶지 않은 거예요. 놓아주기 싫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손에 붙들린 그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멱사를 움켜지듯 두 손가 움켜지고 놓아주지 못하는

그 사건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를 놓아 주어야 합니다. 그 사건, 그 시간, 그 상처를 풀어 줘야 합니다. 왜냐면 이 비유가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죠. 우리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이 악한 종아, 네가 예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두게 하였다.이 종의 행동을 왕이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개심한 종을 다시 불러오죠. 그리고 그가 앞에서 베풀었던 그 은혜를 무효화시키고 그도 똑같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 왕이 처음에는 빚을 없던 일로 해줬는데 이제는 은혜가 없던 일로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비유가 끝이 납니다. 여러분, 그를 놓아주지 않으면요. 결국 잡히는 건 나예요. 결국 갇치는 것은 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했던

그 말 한 마디, 나를 무시했던 행동 하나, 나에게 준 상처 하나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놓아 주셨는데 나는 놓아 주지 못하는 거예요. 나의 미움이라는 감옥, 상처라는 감옥 또는 분노라는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가둘 때 결국 갇치게 되는 건 나입니다. 여러분, 그를 미워하는 거 같지만 결국 그 미움에 갇혀 사는 것은 누구입니까? 나예요. 여러분 제가 해보면요. 나에게 상처 중 걔는 속편하게 살아요. 나만

미움에 갇혀서 살아요. 나만 일을 갈고 살아요. 내가 상처받은만큼 너도 당해 보라고 가둬둔 거 같은데 사실은 그 상처에 갇혀서 회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상처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게 누굽니까? 나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정말 큰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셔도요. 정장 나는 은혜 없이 살 수도 있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자유케 하셨지만 내가 스스로 다시 나를 가둘 수도 있다고 오늘 말씀하시는 거죠. 여러분,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한 것도 있겠으나 그보다 먼저 나에게 주님의 은혜가 흐르고 내가 주님께서 베푸신 그 자유 안에서 살아가게끔 하기 위해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 어렵지만 그 손을 펴야 네가 너에게 주어진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내가 은혜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은혜를 흘려보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어 심리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죠. 어, 제가 작년에 지금 이렇게 설교 때 쓰고 있는

이 아이패드를 작년 말에 샀습니다. 어, 제가 사실 돈이 있어서 산 건 아니고요. 당시에 제가 갖고 있던 패드가 있었는데 이게 중고로 샀더니 수명을 다했니 자꾸 막 꺼지고 막 오류가 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바꾸긴 해야겠는데 여러분 아이패드 가격 다 아시죠? 워낙 고가잖아요. 그니까 쉽게 장바구니 오랫동안 가둬놓고 결제를 못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거를 제 동생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누나 내가 도와줄게. 기특하죠? 잘 컸죠.

누구 동생인지. 자, 그리고 나서 어 그 패드에 절반 이상의 꽤 많은 금액을 어 대신 내주었습니다. 저보다 동생이지만 저의 형편을 아니까 동생이 기꺼이 자기의 지갑을 열어서 저를 도와준 거죠. 너무 고맙더라고요. [헉 소리] 제 마음이 어땠냐면 너무 고맙고 근데 한편으로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좀 뭔가 묘한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래 내가 이 패드만큼은 못 해도 뭐라도 작은 거 하나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돈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근데 동생이 계속 아 괜찮나 괜찮나 하다가 최근에 저희 동생이 생일이었거든요. 그 제가 이렇게 계속 쪼니까 어 이제 못이기는 척 갖고 싶었던 신발을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래 내가 이 신발 정도 사 줄 수 있어 하고 신발을 어 선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런 어떤 고마움을 입을 때 어떤 은혜를 입을 때 이런 마음이 드는 거 같아요. 뭔가 너무 고맙고 또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뭔가 뭐라도 작은 거라도

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죠, 여러분. 그런데 만약 기대하지도 못했던 감히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까 꿈꾸지도 못했던 그런 어마어마하게 좋은 걸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겠어요? 이거 진짜 저 주셔도 괜찮겠어요? 저 이거 진짜 받아도 되나요? 아, 그러면 제가 이만큼 아니더라도 혹시 도움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필요하면 제가 뭐라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아마 우리는 이런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왜냐면 그게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라는 걸 내가 알기 때문이죠. 여러분, 주님께 우리가 입은 은혜가 마치 이와 같아요. 나에게이 첫문학적인 빚을 탐감해 준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한 거죠. 주님 이걸 진짜 탄감해 주신다고요? 정말 이거 없던 일로 해 주셔도 괜찮으세요? 너무 감사한데 어쩌죠? 제가 이거 다 못 갚아요. 저는 여러분 주님 그렇지만 제가 뭐라도 주님에서 뭐라도 한번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게 바로 이거예요. 그럼 너도 그를 용서해. 내가

너를 놓아 주었던 것처럼 너도 그를 놓아 주어라.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너도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라. 여러분, 오늘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친 용서란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분, 용서는 내 상처가 작아서 하는게 아니고요.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찾아서 어떤 미안함의 제스처, 사과의 제스처를 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래서 어쩔 줄 모르겠어서 하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신 그분께 너무

감사해서 그분이 원하시는게 이거라고 하니 그렇게 한번 살아보겠다고 말하는 것이죠. 용서는 내 상처가 작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용서한다는 게요. 그 사람이 한 일이 괜찮다는 말은 절대 아니에요. 나를 괴롭히는 그 사람에게 계속 괴롭힘을 당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던 일 덮으란 이야기도 아닙니다. 여러분 때로는 거리를 둬야죠. 나를 자꾸 괴롭게 하고 상처를 둔

이에게 우리는 거리를 둘 때가 있습니다. 잘못에 대해서 때로는 분명하게 책임과 사과를 요구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도 오히려 그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에 가서 죄를 이우치고 회개하고 사과할 수 있도록 가르치라고 말해요. 그것이 교회 역할 중 하나라고 가르칩니다. 그 과정에 책임질 것이 있다면 책임을 지도로 가르치고 사과해야 될 것이 있다면 가서 사과하도록 가르치죠. 여러분, 절대 주님은 용서를 방패삼아서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덮자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니라는

거예요.이 비유가 가르친 용서는 잘못이나 상처를 어떤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의 심판자가 되려는 마음. 그래서 그를 가게 가둬두고 싶은 그 마음을 왕에게 맡기라고 말하는 거죠. 무조건 참아. 무조건 봐 줘야 돼가 아니라 그 사람과 그 마음과 그 상처와 눈물을 주님께 맡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 여러분 사무엘상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이 오랜 시간을 누구에게 쫓겼었나요?네 사울 왕에게 쫓겼죠. 한 나라의 왕이자 다윗의

장인이었던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을 추격했습니다. 다윗을요. 여러분, 한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쫓아온다고만 생각해도 무너지는데 내 마음이 한 나라의 왕이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권력과 능력과 인력을 총동원해서 그 군대를 총동원해서 나를 죽이게 했다고 추격해 오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큰 트라우마였겠어요. 남이 나를 좀 미워만 해도 내가 죽겠는데 그게 우리 마음인데 남도 아니고 장인 어른이 내가 너무 미워서 죽이겠다고 쫓아오는게 얼마나

큰 상처였겠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사무엘서 24장에 가면요. 그 사울을 다윗이 처리할 수 있는 아주 저로의 찬스가 옵니다. 나를 죽이려고 쫓아는 그 추격자를 없애 버릴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펼쳐지죠. 다윗은 얼마든지 그를 없앨 수 있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다음왕으로 세우셨다. 기름 부셨다라고 하는 명분도 있었고요. 이제 그에게는 자신을 도와줄 부하들도 꽤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죽이고자 마음 먹으면 죽일 수 있었어요.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죠. 그의 옷자락을

조금 베웠을 뿐입니다. 그리고는요. 그 옷을 옷자락을 들고 사울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제는 주님께서 나와 임금님 사이에서 재판관이 되시고 나의 억울한 것을 주님께서 직접 풀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나의 손으로는 직접 임금님께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나는 재판관이 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자신이 그 사왕의 재판관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거예요.이 관계에서도

나의 이 억울한 아픔에서도 오직 완과 재판과는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고백하죠. 그러니까 그는 억울했지만 상처가 치유되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트라우마가 있지만 그 사울을 놓아 주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만 내가 재판관이 되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있으려고 해요. 그리고 자꾸 내 마음속 재판을 열어요. 그 사람 피고석에 세우고 그 사람이 했던 말을 다시 꺼내서 곱씹고 그때 상황을 다시 제언하고 내가 왜 옳은지 그는 왜 잘못했는지 내가 왜 미워할 수밖에 없는지 제차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판결합니다. 그는 유죄야. 감옥에 갇칠 만해. 그렇게 말했잖아. 그런데 미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잖아. 여러분, 제가 해 보니까요. 재판이 한 번으로 안 끝나요. 며칠 뒤에 재판이 또 열립니다. 몇 달 뒤에 또 열립니다. 몇 년 뒤에 또 열려요. 밤마다 열리는 거 같아요. 계속해서 나는 그의 재판관, 심판자로 살아가죠. 여러분, 용서는 그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하는게 아니에요.이 다윗처럼 재판장의 자리에서, 심판자의 자리에서,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왕이 아니에요. 나의 왕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그 사람의 최종 심판자도 내가 아니고 그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죠. 그의 삶을 다루실 왕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어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의 마음이 넓어져서 아니면 신앙의 연차가 싸고 성숙해질수록 뭐이 정도 찜이야. 아무렇지도 않아. 이런 마음이 들어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직 신앙의

연차가 그 성숙함이 아직 너무 짧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옛날에 어려웠던 건 지금도 어렵더라고요. 예전에 아팠던 상처는 지금도 아플 때가 있더라고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이죠. 내가 그 1만 달란트의 비지를 다 갚아서 하나님 앞에 섰던게 아니었어요. 내가 충분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받아들이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갚을 수 없었어요. 나에겐 가망이 없었고 소망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나를 그냥

갑없이 불쌍히 여겨 준 거예요. 은혜를 베풀었고 그 모든 빛을 다 덮어 줬고 용서해서 놓아 준 거죠. 가짜했던 삶에 자유를 주었습니다. 가망없던 삶에 소망을 주었습니다. 아흑처럼 얻었던 삶에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이 비유는 사실 이렇게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샘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왕과 같다. 여러분, 우리는 이 비유를 볼 때 주로 종에게 포커싱해요. 그리고 용서해야 된다라는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죠.

그러나 사실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라는 거예요. 왕에 대한 이야기라는 거예요. 여러분, 복음은 빚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복음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빚을 탐감해 준 왕. 한없이 은혜롭고 갑없이 자유로웠던 그 왕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걸 놓치면 우리는 그 용서하지 못하는 나에게 갇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이 비유는 내가 왜 용서해야 하지? 그것을 알려주는 비유가 아닌 거

같아요. 내가 어떤 용서를 받았는가? 전 이것을 기억하게 하는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받은 그 말도 안 된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상처가 작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을 만해서 그가 용서받을만 놓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요임을 받았기 때문에 용서받았기 때문에 나도 그를 놓아 주는 거죠. 왕이 먼저 새마귀를 포기했으니

나도 새마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충분했다고 그어놓던 마지노선을 지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처는 오래 아플 수도 있어요. 내가 보기에 그는 용서받을 만한 모습이 계속해서 1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자는 이렇게 고백하는 거죠.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받은 은혜에 말할 수 없이 켜서 당신을 놓아줍니다. 당신을 심판하던 왕도 나의 상처도 나의 판단도 진짜 재판관께 맡깁니다. 여러분, 이것이 용서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 사람을 놔라. 나에게 맡겨라라고 말씀하신 거 같아요. 네가 붙잡고 있던 그 사람을 모아라. 네가 붙잡고 있던 그 상처를 놓아라. 네가 붙들고 있던 그 판단도 놓아라. 그리고 나에게 맡겨라. 이것이 오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의 제목이 forgive인데요. 용서하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어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단어를 이렇게 나누면 참 좋겠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4는 완전이라는 걸 의미한대요. 기분은 다시다시피

주다라는 걸 의미하죠. 여러분, 어쩌면 용서는 무죄를 선한게 아니라 완전히 드리는 것 같습니다. 내가 심판자의 자리를 내려놓고 나의 왕이신 주님께 완전히 맡겨 드리는 거. 내가 받은 상처까지도 치료자 되신 주의 손에 내어드리는 것. 내가 먼저 받은 그 한량 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내가 은혜의 자리를 내어주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 왕이 나를 놓아 주셨으니 나도 놓아주는 것.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용서라고 믿습니다. 용서는 상처가 작다는 선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보다 더 크다라는 고백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또한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 고백을 완전히 주님께 내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잠시 눈을 감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결단의 찬양을 어 깊어진 삶을 죽게라는 찬양을 골랐습니다.이 말씀을 묵상하고 또 준비하면서 보니까 새롭게 다가오는 가사들이 있더라고요. 은혜로 날 보듬으시고 사랑으로 품어 주셔도 내 마음 한자락 지키지 못하는 이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나는 은혜를 받았는데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 이 미움 하나 어쩌지 못하는 내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매일 마주한 슬픔 견뎌 나가며 그 아픔과 그 상처를 견뎌 나가며 이제는 은혜받은 답게 이제는 은혜받은 사람답게 주님을 닮아가고 싶습니다. 그 은혜를 흉내내고 싶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마음이 다가왔습니다. 여러분도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우리 함께 이 찬양을 그런 마음 담아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은혜로 날 보듬으시고 은혜로 [노래] 날 보듬으시고

사랑으로 품어 주셔도 사랑으로 품어 [노래] 주셔도 내 마음 한 자랑도 [노래] 지키지 못하는 이 [노래] 부끄럽습니다. 우리 다시 한번 고백합시다. 은혜로 [노래] 은혜로 날으시고 사랑으로 품어 [노래] 주셔도 내 마음 한 자랑도 [노래] 지키지 못하는 이 모습이 [노래] 매일 마주한 매일 마주한 슬픔을 견뎌나가며 [노래] 주 예수의 마음에 닮아가네. [노래] 두려운 걸음마다 [노래] 주가 동행하니 주지하며 [노래] 오늘을 얻는 주의 신실한 주의 신실한 소망을

깊이 [노래] 탐하며 주 예수의 분열를 채워하네. [노래] 하나님의 자녀로 명의 [노래] 지켜하며 기뻐진 삶을 [노래] 주께 드리네. 나를 놓아주신 [노래] 그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이제 그것을 놓겠다고 결단하신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함께 고백하며 나아가겠습니다. 따스한 곁을내어 [노래] 주신 따스한 곁을내어 주시 그 주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갑시다. 주님 [노래] 앞에 나아갑니다. 표현 못할 긍휼로 표현 [노래] 못할 긍휼로 나를 붙드시는 주 이름만 [노래]

바라봅니다. 매일 마주한 매일 [노래] 마주한 슬픔을 겪겨 나가며 주 예수의 [노래] 마음을 닮아 두려운 [노래] 걸음마다 주가 동행하니 주 의지하며 [노래] 오늘을 주의 신실한 주의 [노래] 신실한 소망을 깊이 다으며 주 예수의 풍요를 [노래] 채워하네. 하나님의 [노래] 자녀로 명예 지켜 기뻐진 삶을 주께 우리 다시 한번 고백합시다. 매일 마주한 삶을 매일 [노래] 마주한 슬픔을 연겨나며 주 예수의 마음을 주 예수의 [노래] 마음을 닮아하네. 두려운 [노래]

거마다 주가 동행하니 주지하며 오늘을 건네 주의 신실한 주의 [노래] 신실한 소망을 깊이 다으며 주 예수의 풍요를 채워하는 [노래] 아멘.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노래] 자녀로 명의 지 주님이 시간 나의 손을 펴 그 상처와 그 앞동과 그 사건과 그 놓겠습니다. 나에게 그런 힘 주십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