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금요기도회 설교

2025-10-03 · 마태복음 5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 Intro. 한 달간의 연구월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려고 애썼습니다. 약간 폐인처럼 지내기도 했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로 책을 집필하며 생각지 못했던 신학적 통찰을 얻는 시간이었습니다. 총 16챕터 중 13챕터를 정리했고, 이것을 여러분의 신앙이 반짝반짝 빛나게 도울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금요일마다 마태복음 설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메시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팔복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 그리고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나누었습니다. 지난 설교는 이 메시지를 세 단계의 여정으로 구분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삶 / 종교에 속한 삶 / 그리스도께 속한 삶’ 세상에 속한 사람은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법으로 통제하지 않았다면 살인과 폭력, 성적 범죄들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것은 처벌이 두려워서 참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상태입니다. 종교에 속한 사람은 종교의 가르침으로 길을 정합니다. 유대인은 구약의 율법에 따라 살인과 간음 등 죄의 행위를 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이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온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살인의 행동뿐 아니라, 그 뿌리인 분노까지 다스릴 줄 아는 모습을 가르치십니다. 세상은 원수를 갚으라고 말하지만,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제한성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오른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대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겉옷을 담보로 잡으면 돌려줘야 하니, 계산적인 마음으로 속옷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속옷이 아니라 겉옷까지도 내어주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로마법에 따라 억지로 오리를 가야 하는 노동을 요구당하면, 십 리를 동행해 주라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 자기중심적 삶을 지향하는 세상에서도, 종교가 이웃 사랑을 가르쳐왔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박해하는

원수와 같은 이를 사랑하는 높은 차원의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적 말씀을 주십니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속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고민스럽게 만듭니다. Q1. 저렇게 어떻게 살 수 있죠? Q2. ‘온전하라’는 말씀은 불가능한 요구 아닌가요? 2. 신약과 구약의 도식 세상에 속한 사람(이방인)은 로마법에

따라 통제를 받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평화는 ‘팍스 로마나’처럼 강력한 힘에 복종하여 나타나는 평화입니다. 진짜 평화가 아니라 힘으로 통제하는 평화입니다. 종교에 속한 사람(유대인)은 율법과 유대 관습에 의해서 통제를 받습니다. 이들이 그것을 지키는 이유는 그것으로 의로운 존재라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종교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조금 더 도덕적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그런 자신들의 율법적인 삶을 보면서, “우리는 저들보다 낫지”라는 자기만족과 교만에

빠질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께 속한 사람(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생각을 뒤집습니다. 율법으로 만족과 위안을 얻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 앞에 걸음마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 자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3단계 도식이 여러 곳에서 등장합니다. 사경회 때 배웠던 도식은 ‘애굽’ - ‘광야’ - ‘가나안’ 이었습니다. (1) 애굽 : 세상에 속한 사람 세상에 속한 상태 = 세상의 가치관에 종속된 삶 = 세상적 성공과

만족을 추구하는 삶 이 애굽의 삶에서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출애굽 합니다. 그래서 어디로 갑니까? 광야로 갑니다. (2) 광야 : 종교에 속한 사람 교회에 속한 상태 = FAN 혹은 무리 / 종교인(바리새인) / 교회 안의 미회심자 = 교회 안에 있으나 아직 갈등하며 자기중심성에 머무는 삶 광야는 세상의 가치관에서는 벗어난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을 경험했지만, 광야는 머물러야 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들이 가나안적 삶을 훈련하게 하셨습니다. 만나의 원리: 매일 하루 분량만 거두고,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분량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는 광야이지만 이미 가나안의 삶의 원리인 하나님 의존, 탐욕 절제, 안식의 리듬을 미리 훈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막 중심의 삶: 광야에서의 이동은 무질서한 방랑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성막(하나님의 임재)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이동했습니다. 이는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너희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어야 한다”라는 예행연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이었죠? 가나안 정탐꾼 사건입니다.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은 ‘상식적이고 사실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저 땅에는 거인들이 있고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그들이 놓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계산에 ‘하나님’이 빠져 있습니다. 단 2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같은 것을 봤어도 다르게 보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그들 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 14:9)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다시 아까의 질문을 떠올려봅시다. 산상수훈을 보면서, “저렇게 어떻게 살 수 있죠?”, “온전하라는 말씀은 불가능한 요구 아닌가요?”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그 생각 안에, 어쩌면 ‘하나님’은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배제한 나의 기준으로 우리 또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3)

가나안 : 언약적 관계에 속한 사람 하나님의 통치에 속한 상태 = 하나님 나라 백성 / 제자 / 성도 / 참된 그리스도인 = 성경의 약속을 믿으며 그에 합당한 모습을 추구하는 삶 우리가 온전한 삶을 꿈꾸는 근거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바꾸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영적으로 산상수훈이 추구하는 온전함과 같습니다. 가나안을 차지하는 세대는 여호수아 세대입니다. 성경은 가나안을

차지하는 장면을 이스라엘이 강력해서, 이스라엘이 뛰어나서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순종’의 싸움이었습니다. 여기에 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나’입니다. 가나안 전쟁에서 유일한 패배는 이스라엘 내부의 죄, 아간의 욕심과 거짓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다는 것을 막는 것, 그 실체는 우리의 연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꾸 넘어서는 나의 태도는 아닐까요? 3. Doing & Being 가나안을 차지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약함은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힘이 되니까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인은 약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고 하여도, 조금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으면 “차라리 애굽이 좋았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던 마음의 태도였습니다. 제자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우리의 능력 부족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은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태도가 된다면요.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 앞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앞세워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향해 순종의 걸음을 내딛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Being(존재)과 Doing(행동)의 관계를 다시 한번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늘 Doing이라는 행동을 통해서 결과로 Being이라는 존재에 이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성공해야 인정받는다는 가치관)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진짜 믿는가? 이것만을 보십니다. 놋 뱀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놋 뱀을 만들어 쳐다보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슨 놋 뱀이 날 살려~”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귀담아듣고, 믿고, 바라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예’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결과가 Doing입니다. 우리는 요단강을 마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고 나아간 사람들을 통해 Doing이 나옵니다. 세상적 가치관은, 성공해도 나의 의를 앞세웁니다. 행동의 근거가 ‘나’니까요. 무언가를 해내도, 해낼수록 위험합니다. 바리새인이 빠진 율법주의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행동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기에, 타인에 대해서도 늘 실망하고 시험 들기를 반복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새로운 정체성에 기초합니다. 정체성의 근거가 하나님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 5:13-14)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소금답게 살라, 빛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빛으로 사는 것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분노를 표출했던 상황에서, 내 존재를 바꿔주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고 그분과 마음을 맞추면, 이전과 다른 마음에서 다른 행동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에서 나오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나를 뒤에서 욕합니다.

그러면 나도 맞받아치고 싶죠. 내가 가진 능력과 관계성을 더 활용해서 더 갚아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애굽 반응).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그분과 가까워지면 그분의 마음과 생각이 내 가까이에서 나를 깨닫게 합니다(가나안 반응).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깨어진 마음’을 보게 합니다. 그러면 화를 내고 보복하려는 마음보다, 어떻게 그 사람의 상한 마음이 괜찮아져서 비방하면서 자신도 망가지는 삶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나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을 믿고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해서 해봐야 압니다. “아, 진짜 내가 변했구나.” 행동을 통해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려던 태도에서는, 혹시 어떤 좋은 모습이 나와도 그것을 나의 선행, 나의 업적으로 돌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존재를 세워주신 하나님에 나의 정체성을 기초하고 있다면, 내가 소금답게 살았을 때, 나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내가 소금답게 살 때마다 더 감사하겠죠. 나의 삶을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타인의 삶을 평가하는 것보다, 타인의 삶도 기대합니다. 만약 능력의 크기로 우리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라면 기대할 수 없죠. 그런데 우리를 바꾸시는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무능력과 한계를 볼 때마다 더욱 느끼기에, 이런 나의 삶도 사용하시는 하나님,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함을 세상에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누가 깨어진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깨어진 세상에 만연한 거짓된 진리를 깨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비추어 내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글 서두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그 높은 기준으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처럼 온전하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가 아닐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그 온전한 삶의 핵심은 우리 ‘행위’를 개선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 거하는 우리 ‘존재의 변화’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새로운 정체성이 불가능해 보이는 순종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삶이지만(애굽/광야의 관점),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약속과 능력을 의지할 때(가나안의 관점), 불가능해 보였던 순종이 그분의 은혜 안에서 가능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전함은 우리가 성취해야 할 목표라기보다는 우리를 온전하게 빚어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여정 그 자체이며, 그 여정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 여정에서 악한 존재는 늘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가나안의 삶,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든 광야의 삶, 종교적인 삶에 우리를 묶어 두려고 합니다. 그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에 속삭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보다 더 낫다는 만족을 주며 머물러 있게 하고, 그리스도께 속한 삶은 불가능한 것이라며

주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잊은 시선으로, 하나님을 뺀 나의 계산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며 <스크루테이프>의 형식을 빌려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사람을 유혹하고 넘어뜨리는 일에 고수인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처음 상대하는 조카에게 조언하는 편지입니다. 오늘의 설교를 마무리하며, 사탄이 실제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한번 상상하며 ‘지피지기 백전불태’의 마음으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에필로그

: 사탄의 편지 사랑하는 나의 조카야, 네가 맡은 인간이 요즘 꽤 진지하게 신앙을 고민한다고 들었다. 주말마다 교회도 가고, 가끔 설교를 들으며 눈물도 흘린다지.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라. “감동”은 위험하지 않다. “결단”만 막으면 된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하다. 그를 애굽으로 돌려보낼 필요도 없다. 그냥 “광야에 오래 머물게” 하기만 하면 된다. 첫째, 바쁘게 만들어라. 그는 나름 책임감이 강한 인간이다. 직장, 가정, 육아, 경제 문제… 이런

것들을 ‘하나님보다 우선해야 할 현실’로 보이게 해라. 기도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 이렇게 속삭여라. “지금은 너무 피곤하잖아. 컨디션 좀 괜찮을 때 제대로 하자.” 그 말이 입버릇이 되면, 기도는 평생 ‘내일 할 일’이 된다. 둘째, 걱정을 신앙보다 더 거룩한 것처럼 느끼게 하라. “믿음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계산은 해야지.” 이 말은 우리가 만든 최고의 명언 중 하나다. 그가 가계부를 볼 땐 아주 세밀한데, 말씀을 볼 땐 집중이 안 되게 하라. 불안은

죄책감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사슬이니까. 셋째, 공동체를 ‘위로’가 아니라 ‘비교’의 장으로 만들어라. 교회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느끼게 해라. “쟤는 너무 율법적이고, 저 사람은 너무 형식적이고, 나는 그들보단 낫지.” 칭찬도, 도전도, 격려도 전부 “비교”로 번역해주면 그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절대 함께 걷지 못한다. 넷째, 감동은 허락하되 실행은 미루게 하라. 설교 듣고 울어도 좋다. 간증 듣고 흔들려도 괜찮다. 단, 그날 저녁엔 유튜브나

드라마 한 편이면 된다. “조금만 정리되면 제대로 해볼게요” — 이 말이 나오면 거의 성공이다. 결단이 ‘언젠가’로 미뤄지는 순간, 그의 가나안은 ‘평생 입구’가 된다. 이제 기억해라, 조카야. 그가 죄인으로 살도록 만들 필요는 없다. 애굽을 떠나 있는 만족은 주되, 광야 수준의 신자로 평생 남게 하라.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를 해도 괜찮다. 그의 결정마다 ‘하나님 배제된 상태’에 고정시키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그는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도 가나안은

다른 사람의 간증으로만 듣게 될 것이다. 너의 활약을 기대하며. - 네 삼촌, 사탄으로부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또한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외인에서 무리에서 제자로 가는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사탄의 공격을 지혜롭게 분별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안에 빚어져가는 여정에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