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잘나가다가… 왜?”

2025-10-05 · 역대하 14~20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한 달 만에 다시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금요일에도 잠시 이야기를 나눴지만, 한 달의 시간 동안 그동안 미뤄왔던 일 가운데 하나였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집필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지냈습니다. 평소 목회 현장에 있으면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의 분야가 너무 광범위 해서, 하나에 몰입해서 연구하지 못했는데, 교회의 배려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오랜만에 연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우리 교회에서는 이미 긴 시리즈 설교로 3차례나 다뤘지만, 그 설교에 참여하지 못한 분들도 계시고, 부분적으로만 들었던 분들도 있고, 또 그 이후에 오신 분들도 계속 있는데... 어떻게 그분들에게도 우리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토대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주제는 전체적으로 들으면 이해가 깊어지지만, 일부분만 듣게 되면 오해에 빠지기도 쉬운 주제라서 이 내용을 하나의 책으로 다뤄서, 필요한 부분들을 공부하고, 또 통전적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풍삶초-첫-기처럼 교육하고 나눌 수 있는 교육용 교재로 완성할 생각입니다. 한 달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작업을 했고, 전체 집필 계획의 70% 이상은 작업을 마무리하고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복귀하니 생각보다 여러모로 바쁜데, 그래도 곧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성도님들과 나눌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4개의 각각 다른 교회에서 저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 스타일의 교회를 드리면서도,

우리교회의 예배도 모두 잘 들었습니다. 그 사이 역대하 시리즈가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전도사님이 두 편의 설교로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역대하는 유다의 왕조를 재평가하는 책입니다. 왜 재평가를 하냐면, 다윗의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는데, 바벨론의 침공으로 망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머나먼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갔고 하나님의 집이라 불리는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땅에서 유다 백성들은 늘 질문했습니다. “왜 우리는 이 땅에 오게 되었을까?” 처음에

그들은 ‘남 탓’을 했습니다. 누구 탓이었을까요? 하나님 탓이죠.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보다 약하신가? 하나님은 약속을 안 지키시는 분이구나.” 그런데 점차 그들은 냉정하게 가나안 땅에 살던 유다 왕국의 역사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점 하나를 발견합니다. “아, 우리가 망한 것은 우리가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준 삼아서, 자신들의 역사를 다시 재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잘못된 때마다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힘써왔다는 사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외면하고 무시했었다는 사실, 그리고 돌이켜보니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언자들의 외침이 모두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절망인 동시에 희망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를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뜻에는 유다를 향한 징계도 담겨있지만, 70년이 지난 후 다시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소망도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포로의 상황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붙들고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말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기회가 주어집니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점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기회를 잘 붙잡아야 했습니다. 그를 위해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 이 책을 읽고 묵상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역대기입니다. 돌아온 땅에서 다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먼저 기록된 열왕기서는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분석한다면, 역대기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른 ‘신학적 관점’에서 유다 왕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같은 왕에 대해서도 평가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을 경제적 성장 측면에서 분석하는 것과 민주주의의 발전 측면에서 분석하는 것은 확연히 다를 것입니다. 역대기의 관점은 왕의 정치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왕이었는가?

이 관점입니다. 여러분의 삶도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여러분의 삶을 세상의 기준에서 평가할 것입니다. 어떤 업적? 어떤 성취? 세상에서 주목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하나님의 평가가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록펠러라는 인물이 떠오릅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수많은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십일조 헌신으로 유명한 기독교 자선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와 책에서 ‘크리스천 기업가의 모범’처럼

소개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복잡합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독점적인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노동자 착취, 경쟁사 파괴, 기름값 조작으로 국민의 분노를 샀고, 결국 정부가 그의 회사를 강제로 해체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록펠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한 사람’이고, 종교의 기준으로는 ‘헌신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서는 어떠한가? 역대기는 바로 그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뭐라고 부르느냐보다,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기억하실 것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지난 두 편의 설교에서 다뤘던 것은 다윗-솔로몬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솔로몬의 아들이며 분열왕국의 시작점인 르호보암과 그의 아들 아비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역대기의 렌즈는 철저하게 남유다의 역사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따라갈 것입니다. 오늘 저와 다룰 이야기는

3대 왕인 ‘아사’와 4대 왕인 ‘여호사밧’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의 제목이 “잘나가다가... 왜”입니다.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우선 이 두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을 했다는 점입니다. (대하 14:2) 아사는 주 그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다. (대하 14:3)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석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부수었다. (대하 14:4) 그는 또 유다 백성에게 명령을

내려서, 주 조상들의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게 하였으며, (대하 14:5) 또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 버렸다. 그의 통치 아래 나라는 조용하였다. 한마디로 솔로몬이 가져온 우상숭배를 없애는 ‘종교개혁’을 실행했습니다. 여호사밧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하 17:3) 여호사밧이 왕이 되면서부터, 그의 조상 다윗이 걸어 간 그 길을 따랐으므로, 주님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계셨다. 여호사밧은 바알 신들을 찾지 아니하고, (대하

17:4) 다만 그의 아버지가 섬긴 하나님을 찾으며, 그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 이스라엘 사람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으므로, (대하 17:5) 주님께서는 여호사밧이 다스리는 나라를 굳건하게 해주셨다. 온 유다 백성이 여호사밧에게 선물을 바치니, 그의 부귀와 영광이 대단하였다. (대하 17:6) 그는 오직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살기로 다짐하고, 유다에서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없애 버렸다. 제가 이게 오늘날로 말하면 어떤 느낌일까? 챗GPT에 물어봤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인이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는 것 교회는 다니지만, 삶의 기준은 여전히 세상의 방식이었던 사람이라면 — 그 기준을 말씀으로 바꾸는 것 기도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유튜브와 뉴스가 더 큰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면 — 그 흐름을 끊고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 신앙은 있지만 생활 습관은 그대로였던 부분들을 하나씩 하나님 중심으로 재정비하는 것 이런 모습으로 자신도 변하고, 주변도 변화시키는 정치를 해나가니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저도 우리 성도님들이 변해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변화는 진짜 아름다운 것입니다. 멋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사-여호사밧 시대에 정말 기쁘셨을 것입니다. 특히 아사 당시 태후라고, 우리가 사극 같은 것 보면, ‘대왕대비’가 종종 나오잖아요. 머리 이만하게 해서 맨날 “이보세요, 주상~” 이런 분위기가 있잖아요. 근데 당시 태후 ‘마아가’라는 강력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세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었어요. 아사 왕이 태후의 우상숭배를 보고

그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우상을 불태워 버립니다. 그러니까 매우 단호한 마음으로 신앙을 세워갔던 것이 아사입니다. 그래서 아사 초기에 나라가 아주 건강하고 10년간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외부의 공격도 있지요. 성경에서 ‘구스’라고 하는 오늘날 에티오피아 군대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공격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사가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병력이었습니다. 이때 아사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처절한 기도를 합니다. “인간이

주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유다를 보호하시고 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무식하고 용감하게 의지하는 자가 어떤 삶을 맛보는지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일들이었습니다. 이때 아사의 믿음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 큰 승리 후에 ‘선지자 아사랴’가 나타나서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대하 15:2b)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누군가는 아무리 이런 말씀을 봐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괜히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면, 남유다가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 버려.”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 말씀을 부적 삼아서

자기들은 하나님을 사실상 버리고, 자기 뜻대로, 혹은 우상을 더 좋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망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가 많습니다. 어쨌든 아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갑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이렇게 성공적인 신앙의 모습을 지녔던 아사가 변합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정말 놀라고 아프고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저랑 청년 시절을 보내며, 그렇게 열심히 섬겼던 사람들이 어느날 보면 신앙을

떠나 있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저의 제자들,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며 영혼을 챙기며 정말 헌신하고 힘썼던 그런 사람들이, 어느날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제가 너무 마음이 아픈 일들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변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변해야 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을 때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변화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좋게 변해갈 수도 있지만,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아사는 위기 때 기도하던 사람이었는데,

나중에는 ‘돈과 정치’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이 오면 아람 왕에게 돈을 주면서 북이스라엘을 공격하라는 식으로 다른 수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 해결책이 성공했을까요, 실패했을까요? 성공합니다. 자,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그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안 살았더니 더 돈을 벌 때도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조금 양보하고 타협하니까 주변에 친구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이 좋아할 때도 있습니다. 아사에게도 아람 왕이라는 친구가 생겼습니다. 그의 위기가 해결되었습니다. 와우 - 이 성공이 성공이냐. 역대기는 가장 큰 위기에 놓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공이죠. 세상의 관점에서는.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위기입니다. 하나님이 아사를 사랑하셨을까요, 안 사랑하셨을까요? 사랑하셨죠. 그럼, 하나님이 아사를 위해 뭔가를 하시겠죠. 네. 사람을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하나니’를 보내어 아사의 잘못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눈으로 온 땅을 두루 살피셔서, 전심전력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이들을 힘 있게 해주십니다. 이번 일에, 임금님께서는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임금님께서는 전쟁에 휘말리실 것입니다.” 자, 중요한 지점입니다. 아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대하 16:10) 아사는 선견자의 이 말에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 때에 아사는 백성들 가운데서도 얼마를 학대하였다. 아사가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분노로 대응합니다. 그의 귀는 이제 하나님께도, 하나님의 말씀에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어둡고, 교만해지고,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아사는 발에 심한 중병도 듭니다. 그때라도 돌이켜야 하지만, 아사는 끝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사들만 의존하다가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아사는 왜 잘나가다가 넘어졌을까요? 저는 성공 안에는 늘 실패의 원인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사의 초기 개혁, 태후까지

폐위시키는 단호함, 대단한 성공이죠. 그런데 바로 그 성공 경험을 통해 “나는 옳다, 내 방식이 맞다.” 이런 자기 확신이 가득해져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지적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완고함의 뿌리가 된 것은 아닐까요? 이제 그의 아들 ‘여호사밧’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의 후반부를 보면서 뭔가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다시 유다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개혁합니다. 앞서 살펴본 여호사밧의 개혁은 아사 때보다

더 치밀하고 더 체계적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율법을 공부하고 교육하는 것을 전 국가적으로 힘씁니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유다 전역에 보내어 곳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합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혁신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말씀에 기반한 나라, 말씀에 기반한 통치를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이 성공은 하나님의 기준에서요. 오늘 설교 제목이 뭐였죠? “잘나가다가... 왜” 여호사밧이

이렇게 잘하다가 결정적인 실수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실수는 ‘인간관계’에 있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이 ‘아합’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아합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도 “여호사밧은 왜?”라는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어쩌면 그도 종교개혁에 성공하고 훌륭한 리더십으로 통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 갖춰진 시스템, 합리적인 정책에 대한 자부심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인간적 지혜나 정치적 계산을 하게 한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아합과의 동맹은 정치적으로는 ‘좋은 수’였습니다. 동맹은 서로의 힘을 키워줬고, 세력이 커지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합 가문은 성경에서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년 사역을 오래 하면서 연애와 결혼 상담도 종종 하죠. 많이 받는 질문이 “교회 안 다니는 사람 만나도 되냐?” 제 대답이 뭘 것 같습니까? “네가 어떤 인간인지에 달렸다.” 실제로 저에게 그 질문을 하는 청년의 신앙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답이 다릅니다. 전도까지는 못하더라도 자기 신앙은 흔들림 없이 지킬 수 있는 단호함이 있으면 만나라고 합니다. 애인이 신앙생활을 방해하면 관계를 끝낼 각오를 하고 연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알겠다고 하고 연애하는 것 보면 절반은 신앙이 안 좋아집니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죠. 전도를 하려면, 정말 그 사람을 위해 큰 사랑을 줘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상대가 나를 위해 교회에 온다는 것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다.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버티고 사랑하며, 우선 나를 지키고,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죠. 여호사밧이 사람이 너무 야들야들한 사람이었어요. 착했어요. 그래서 아합에게 끌려다니기 시작합니다. 아합이 함께 전쟁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자”라고 제안합니다. 나름 애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이 선지자를 400명을 데려와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데, 400명이 전부 전쟁에 나가면 승리한다는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사밧이

좀 미심쩍은 것이죠. 그래서 혹시 다른 선지자는 없냐. 그래서 아합이 별로 안 내키는 선지자가 하나 있다고 하면서 ‘미가야’라는 선지자를 만나게 해줍니다. 미가야는 400명과 정반대로 전쟁에 나가면 패배하고 죽는다고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미가야는 400명의 선지자가 거짓말하는 영에 의해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제 여호사밧은 잘 판단해야죠. 그런데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미가야 선지자를 통한 분명한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결국 아합을 따라 전쟁터에 나갑니다. 동맹관계에서 오는 압력, 참전하기로 약속했다가 바꾸기 어려운 이유, 400명이 해준 다른 예언에 대한 미련. 여러 가지가 있었겠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셨지만, 그것이 그에게 거부당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전쟁에서 아합은 죽고, 여호사밧은 죽음 직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숨을 건집니다. 그리고 전쟁 후 하나님이 예후라는 선지자, 아사에게 보내셨던 ‘하나니 선지자’의 아들을 보내서 여호사밧에게 말씀하십니다. (대하

19: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악한 자,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와 동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겠는가? 아합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였잖아요. 저는 여러분이 믿지 않는 주변 사람에 대해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속하기 전의 삶이 있었잖아요. 불신자가 아니라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찾는이’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더 선대하고, 더 섬겨주고, 더 사랑해야죠. 그러나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선을 정해야 합니다. 여호사밧은 그것을 잘못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아사와 여호사밧이 비슷하죠. 선지자의 경고. 아사는 어떻게 반응했었죠? 화를 내고, 선지자를 감옥에 가뒀습니다. 선지자 하나니의 아들 예후가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에게 와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여호사밧은 아사와 다른 길을

갑니다. 그는 선지자의 경고를 통해 깨닫습니다. 그는 실패를 인정하고 실패를 통해서 성장합니다. 그가 진짜 깨달았는가? 성경은 이후 다시 전쟁 앞에선 여호사밧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때 여호사밧의 태도는 이전 아합과 함께했던 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역대하 20장은 그의 변화를 아주 인상 깊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의 상황에서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아합과 연합해서 힘을 얻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몰라요. 사실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는 이번에 그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온 유다에 금식을 선포합니다. 여러분, 중요한 문제에 대해 금식하십시오. 결단입니다.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이 이렇게 하나님께 외칩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야하시엘’이라는 선지자를 보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싸우실 것이다. 두려워 말고 싸우러 나가되,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아멘. 여러분 아멘이십니까? 이것을 진짜 믿으면 믿는 자다운 행동이 있어야죠. 여호사밧도 용감하고 무식하게 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는데, 아주 파격적인 결정을 합니다. 군대 앞에 전투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예복을 입은 찬양대를 세운 것입니다. 마치 여리고 전쟁 때처럼 말입니다. 이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방식과 태도, 그분의 말씀을 향한 신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여호사밧의 군대는 승리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어떤 것이고, 그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어떻게 돌보시는지 보여주는 역대하 기록의 절정과 같습니다. 여호사밧은 이후에도 실수가 있습니다. 결코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도 여호사밧 이야기는 함께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의 인생은 모두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종합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왕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잘 나가기도 하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습니다. 이제 앞으로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실수를 넘어서며,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세워져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길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사와 여호사밧, 둘 다 처음에는 잘나가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실수합니다. 어쩌면 큰 성공의 이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사의 개혁 성공이 영적 독선으로,

여호사밧의 시스템 성공이 인간적 계산 의존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기에 그들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선지자를 통한 경고를 주시죠.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일하십니다. 말씀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시간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돌이키는 것이 능력입니다. 결국 두 사람의 결말은 달랐습니다. 아사는 성공 이후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도 화를 냈고,

결국 하나님 없이 생을 마쳤습니다. 여호사밧도 실수는 했지만, 말씀의 경고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었고, 하나님이 그의 전쟁을 대신 싸워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실수 때문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실수가 아니라, 그 이후 우리의 태도입니다. 지금 내 마음은 하나님께 들을 수 있을 만큼 집중되어 있는가?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오늘 이 시간, 우리도 여호사밧처럼 고백합시다. “주님,

우리는 때론 다 알지 못하오나,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답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오늘, 이 고백이 우리의 결말을 바꿀 것입니다. “잘나가다가 왜”가 아니라, “실패했어도 다시” 일어나는 인생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