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왕이란 이름의 거울들 (1)

2025-10-12 · 역대하 21~28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역대하 4번째 설교를 시작합니다. 저희교회는 2019년부터 매일성경 본문으로 주일설교를 이어왔는데, 역대하는 2020년에는 주일, 금요일, 수요일까지 11번에 걸친 시리즈로 자세히 다룬 바 있습니다. 그때 제가 만든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일명 ‘남유다 왕조 song’입니다. 우리가 조선왕조 목록을 ‘태정태세문단세’로 외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르-아-아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여-아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야 아-요-아-웃 아달랴,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요-아-히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아-요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여-여-시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이번 시리즈에서는 지난주까지 3번 설교했는데, 다윗과 솔로몬을 빼면 분열왕국의 왕은 고작 4명을 다룬 셈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까지 두 편의 설교로 남은 16명의 왕을 효과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어떤 방식이 좋을까 고민을 많이 해봤습니다. 이미 성경의 기록에 따라 모든 왕들의 역사적/신학적 평가가 소개되었기에, 이 왕들의 평가를

한 눈에 정리해서 소개하려 합니다. 제가 임의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기준을 따라 저는 깔끔하게 정리해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역대기를 기초로 하되, 열왕기서와 기타 성경의 평가를 종합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크게 4가지의 평가 기준이 등장합니다. ① 신앙 개인의 신앙은 물론이고, 왕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신앙에 관해 어떤 일을 했는지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및 우상숭배 여부, 그리고 종교개혁 등이 중요한 신앙적 평가 기준이 됩니다. ② 회개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대부분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의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주십니다. 그때 회개를 했는가? 이것이 또한 성경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왕도 회개가 끝까지 없으면 평가가 좋지 않습니다. ③ 신실함 위의 신앙적 모습이 끝까지 유지되었는가? 혹은 초반만 좋았다가 결국에는 변질되고 말았는가? 회개 이후 삶의 모습 등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신앙과 회개의 진실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④ 백성들의

평가 신약에서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도 공동체의 평판이 중요하게 거론되는데, 역대기에서는 이들이 죽은 후 어디에 묻혔느냐가 매우 흥미로운 기준이 됩니다. 다윗성에 묻혔느냐, 거기서도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느냐, 그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애도했느냐? 이것이 기준입니다. 이 네 가지 기준이면, 성경이 이 왕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우리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준을 종합해 보면, 총 6개의 유형과 단계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랑 (신앙·회개·신실함·백성평가

- 모든 영역에서 탁월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왕) 안정된 선한 왕 (전반적으로 선하고 신실했으며 약점은 있었으나, 전체 흐름을 무너뜨리지 않은 왕) 빛과 그림자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며 좋은 신앙의 모습 혹은 회개가 있었으나, 동시에 중대한 흠도 남긴 왕) 형식적 종교인 (하나님을 믿는 형식은 갖추었으나, 한 번도 제대로 섬긴 적 없는 표면적 신앙에 머무른 왕) 완고한 불순종 (대다수 영역에서 악을 행하며 말씀을 따르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던

왕) 하나님의 대적 (하나님의 언약 자체를 끊거나, 신앙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했던 최악의 왕) 이것을 조금 더 명료하게 ‘S급, A-B-C-D급, F급’으로 표기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금 고민하는 것은 자칫 너무 단순화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입니다. 같은 B급에 있어도 같은 모습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쉽고 단순하게 설명하고자 그렇게 표현을 해도, 이것이 성경이 그 왕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기준에 대한 포괄적이고 간략한 안내라고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마치 MBTI의 장단점처럼(E-I처럼), 쉽고 빠르게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 사람이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왕들의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더욱 깊이 추적하는 일입니다. 그때 은혜와 깨달음이 더 클 것입니다. 오늘 저의 안내를 그 출발점으로 삼아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역대기는 이 왕이 ‘어떤 업적을 성취했는가? 얼마나 오래 다스렸는가? 전쟁에서 몇 번 이겼는가?’ 이런 것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신앙, 회개, 신실함, 공동체의 평가’라는 기준을 기억하시고, 왕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럼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고민하며 나아간다면, 오늘 설교가 주는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유명한 두 명의 왕을 이 기준으로 정리해 보면, 어떤 느낌인지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이야기해 봅시다. *다윗 (S. 하나님의 자랑) 다윗은 예상하시죠? 네. ‘하나님의 자랑’에 속합니다. “다윗의 길을 걸어갔는가?”

이것이 왕들의 기준이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윗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간음했고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나의 마음에 합한 자”(삼상 13:14)라고 부르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 앞에 무너지지 않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나단의 책망 앞에 그는 변명하지 않았고, 즉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그리고 그의 믿음은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요새시요 구원자시라”(삼하 22:2) 찬송하며 떠났습니다. 백성들도 그를 끝까지 사랑했고 왕실 묘지에 존귀하게 묻혔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실수 많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자랑’이 된 왕입니다. *솔로몬 (B. 빛과 그림자) 솔로몬이 조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초반과 후반이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빛과 그림자’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습니다. 성전을 지었고, 이스라엘의 국력을 최전성기로 이끌었습니다. 신앙으로만

봐도 초기에는 다윗급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끝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 하나님보다 안정과 번영을 더 붙잡았습니다. 수많은 이방 여인을 맞이했고, 그들과 함께 우상을 용인했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산당을 세웠더라”(왕상 11:6-7) 이후 그의 삶에서 회개의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그가 분열의 단초가 된 통치(무거운 멍에-르호보암 때 반란 발생)를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빛났으나, 교만으로 그림자가

짙어진 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지난 시간까지 다뤘던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은 어떨까요? 1대왕. 르호보암 (B. 빛과 그림자) / *실수는 컸으나 하나님을 끝내 버리지 않은 사람. 르호보암도 공과가 섞여 있죠. 실수도 했고, 또 하나님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빛과 그림자’ 유형에 속합니다. 2대왕. 아비야 (C. 형식적 종교인) / *입은 살아있는데, 삶은 따라오지 못한 사람. 아비야는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라!”라고 외치며

입으로는 하나님을 잘 말했습니다. 그러나 삶 전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상숭배도 용인한 모습이 있었죠. 그러므로 아비야는 말은 그럴듯했지만, 삶은 따르지 못했던 ‘형식적 종앙인’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3대왕. 아사 (B. 빛과 그림자) / *처음은 뜨거웠지만, 끝은 차가웠던 사람. 아사는 초기에 정말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우상을 철저히 없애고, 심지어 태후의 우상숭배도 맞서고 우상을 찍어 부숴버렸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이 아니라 의사만

찾았습니다(대하 16:12). 아사는 처음엔 불꽃같았지만, 끝은 흐려진 ‘빛과 그림자’의 유형입니다. 4대왕. 여호사밧 (A. 안정된 선한 왕) / *실수는 했으나, 회개를 아는 사람. 여호사밧은 대체로 좋았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아합과 혼인동맹을 맺은 약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책망 앞에서 겸손히 듣고, 다시 돌아오는 등 좋은 모습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완벽하진 않아도, 실수하면 다시 돌아오는 ‘안정된 선한 왕’으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왕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의 뒤를 이은 여호람부터 아하스까지 8명의 왕을 소개해 봅니다. 5대왕. 여호람 (D. 완고한 불순종) 여호사밧은 7명의 아들에게 유산을 공정하게 나눠줬고, 왕권은 맏아들인 여호람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북이스라엘 아합 가문과 혼인동맹을 맺었다고 했는데, 바로 맏아들 여호람이 아합의 사위가 됩니다. 여호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여호람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완고한 불순종’입니다. 지금까지 이 단계는 없었습니다. 우선

그는 왕이 되자마자 자기의 6형제를 모두 죽여버립니다. 왕권에 대한 위협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내면이 얼마나 파괴되고 악의 놀이터가 되었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유다에 우상숭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국가 전체를 우상숭배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여호람도 사랑하셔서, 깨닫게 할만한 사건도 경험하게 하시고, 선지자도 보내십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엘리야 선지자가 남유다의 왕인 여호람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모습을 깨닫도록 경고합니다. 그가 여기서

돌이켰으면 ‘완고한 불순종’에 해당하지 않았겠죠. 여호람은 돌이키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주어져도 ‘조건부’인 경우가 많습니다. 회개하면 유예/철회되기도 하지만, 끝까지 완고하면 심판이 실행됩니다. 여호람에게 심판이 시작됩니다. 그의 가족은 침략군에 의해 사로잡혀 가고, 자신도 2년 동안 창자가 흘러나오는 끔찍한 병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삶을 보여주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대하 21:20) 여호람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는 서른두 살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덟 해 동안 다스리다가, 그의 죽음을 슬프게 여기는 사람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이 그를 '다윗 성'에 묻기는 하였으나, 왕실 묘지에 장사하지는 않았다. 한 줄 평가 : *돌이키지 않은 권력가. 6대왕. 아하시야 (D. 완고한 불순종)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아하시야는 늘 주변에 끌려다녔습니다. 아합 가문의 딸인 어머니의 꾀에 빠져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고, 외삼촌인 북이스라엘

왕에게 또 끌려다닙니다. 결국 그는 외삼촌을 만나러 갔다가 아합 가문을 심판하는 도구가 된 ‘예후 장군’의 쿠데타로 인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통치는 고작 1년이었습니다. 그도 모든 분야에서 아무것도 하나님의 뜻과 멀리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도 ‘완고한 불순종’의 상태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을 보여주는 한 구절입니다. (대하 22:4) 그는 아합 가문을 따라 주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아합 가문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다스리다가, 그만 망하고 말았다. 한 줄 평가 : *주도권 없이 끌려다닌 통치자. 아하시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신앙적 결정을 할 때 하나님 뜻을 묻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나 기대, 세상 유행에 더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에게는 때로는 좋은 신앙을 위한 단호함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7대왕. 아달랴 (F. 하나님의 대적) 그리고 오늘 설교의 ‘로우라이트’와 같은 인물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남유다 역사상 단 한 명의 ‘여왕’

아달랴입니다. 우선 그는 성경의 평가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유일한 F입니다. 왜일까요? ‘완고한 불순종’ 유형의 왕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면, F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고 더 나아가 파괴하려고 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합 가문은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쿠데타로 멸절당합니다. 가문의 남은 사람은 남유다로 시집온 아달랴 뿐입니다. 자기 아들 아하시야까지 죽게 되자, 아달랴는 아합 가문의

우상숭배를 남유다로 가져와 새롭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를 위해 다윗 가문을 멸절시키려고 합니다. 그녀의 숙청 대상에는 아하시야의 아들들, 즉 자신의 손자 세대까지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조를 통해 유다를 다스리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달랴의 힘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 피의 숙청은 성공합니다. 아달랴는 다윗 가문의 사람을 모두 죽이고, 유다의 왕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셔서 한 생명을 보존하십니다.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 공주입니다. 아하시야의 막내 아들, 갓난아기 ‘요아스’를 유모와 함께 몰래 빼돌립니다. 아달랴가 요아스의 존재를 모른 것을 봤을 때, 죽음을 잘 위장하여 숨긴 것 같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당시 제사장으로 있는 ‘여호야다’였고, 그들은 ‘요아스’를 성전에 숨겨 비밀리에 키웁니다. 아달랴는 피의 숙청을 마친 후, 유다를 아합 가문의 방식으로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유다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숭배하는 나라가 되고 있었던 것이죠. 6년 동안 요아스를 성장시키며,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의 통치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동지들을 모읍니다.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만들기 위한 이들이 모여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7세의 요아스를 왕으로 세웁니다. 결국 아달랴는 이 쿠데타 속에서, 하나님의 처벌과 역사의 심판을 받으며 처형당합니다. 한 줄 평가 : *언약을 끊으려 한 대적자. 여호야다는 백성들과 ‘바알숭배를

완전히 청산하는 언약’을 맺습니다. 유다를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돌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 어린 요아스 왕의 멘토가 되어 요아스가 하나님의 뜻대로 잘 통치해 가도록 돕습니다. 8대왕. 요아스 (C. 형식적 종교인) 어린 나이에 왕에 오른 요아스는, 고모부인 제사장 여호야다의 협력 속에 좋은 통치를 합니다. 그는 아달랴의 통치 동안 방치되어 낡아진 성전을 재건합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좋은 통치를 해나갔지만, 그의 멘토인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게 된

후부터 그는 진짜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요아스는 주변의 영향을 잘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멘토가 있을 때는 좋은 삶을 살았지만, 나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부추기자, 중심을 잃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대하 24:17)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으니, 유다 지도자들이 왕을 부추겨서 자기들의 말을 듣도록 하였다. (대하 24:18) 백성은 주 조상의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렸다. 하나님은 늘 일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그릇된 길로 가기 시작한 유다에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왕도 백성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이 좋아하고 존경했던 여호야다 제사장의 아들, ‘스가랴’를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외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떠나느냐? 절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너희가 하나님을 버리면, 그분도 너희를 버리실 것이다.” 지난주에도 봤던 하나님의 말씀이죠.

하나님은 먼저 버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 그 결과를 우리가 감당하게 됩니다. 이 회개의 외침에 대한 반응, 이것이 중요하겠죠. 요아스는 스가랴의 예언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매우 충격적입니다. 요아스가 명령합니다. “저 스가랴를 성전 뜰에서 돌로 쳐 죽여라.” 요아스 인생의 평생 은인이 제사장 ‘여호야다’입니다. 스가랴는 그 여호야다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은혜를 그렇게 갚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참지 않으십니다. 선을 넘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유다의 편에 서지 않으시자, 유다는 주변 나라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요아스도 전쟁에서 중상을 입습니다. 그러나 그를 죽인 것은 여호야다의 복수를 하려는 유다 사람들이었습니다. 후에 요아스의 시체가 왕실 묘지에 묻히지도 못하는 것을 볼 때, 백성들도 그를 존경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아스에 대한 평가는 ‘형식적 종교인’ 혹은 그 정도 위치의 평가를 받습니다. 그의 통치 초반의

모습이 그의 신앙이 아닌 것으로 판가름 낫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신앙을 대놓고 떠난 적은 없지만, 제대로 따른 적도 없는 그런 왕이 요아스였습니다. 한 줄 평가 : *주변 따라 흔들린 형식적인 종교인. 9대왕. 아마샤 & 10대왕. 웃시야 (B. 빛과 그림자) 요아스의 아들인 ‘9대왕. 아마샤’와 그의 아들인 ‘10대왕. 웃시야’는 거의 비슷한 평가를 받습니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빛과 그림자’ 유형입니다. 아마샤와 웃시야는 모두 처음에는 좋았다가 나중에

무너진 ‘아사’의 케이스입니다. 아마샤도 좋았던 시절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패배한 에돔의 우상들을 전리품으로 가져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이상하죠? 또한 성경은 그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합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의 여부이죠. 그는 선지자의 책망도 듣지 않았고 그로 인해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끝내 그는 암살당하여 죽게 되는 비참한 결과로 맞게 됩니다. 한 줄 평가

: *부분 순종에 머문 왕. 아마샤의 아들 웃시야는 무려 52년을 통치한 왕입니다. 그의 통치 초중반은 유다 역사의 황금기였습니다. 성경은 이 시기 동안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여러 성공에 취해서 경계를 넘어선 것이 문제였습니다. 나라가 강성해지자 웃시야의 마음에 교만이 생겨서일까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맙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역의 기준을 무시하고, 성전 분향을 직접 하려고 성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 80명이 그의 잘못된 행동을 막아섰지만, 왕은 분노를 터뜨립니다. 어쩌면 계속 반복되는 패턴처럼, 그의 성공이 그의 교만을 낳은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이마에 나병(문둥병)이 발병했습니다. 나병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완전한 격리를 의미하는 끔찍한 병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성전에서 쫓겨나 죽는 날까지 별궁에 격리된 삶을 살게 됩니다. 한 줄 평가 : *축복을 이기지 못한 교만의 왕. 11대왕. 요담 (A. 안정된

선한 왕) 요담은 우선 여호사밧 이후로 ‘안정된 선한 왕’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4가지 기준에서 모두 평균 이상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 웃시야의 좋은 모습을 본받았고, 아버지의 치명적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런 요담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대하 27:6) 요담의 능력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단호하고 한결같은 삶에서 나왔다. 다만 그가 ‘다윗 급’이 되지 못한 것은 그가 백성들까지 좋은 신앙으로 이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요담은 바르게 행했지만,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다”라는 이야기가 함께 등장합니다. 백성이 바뀌지 않은 것을 요담의 탓으로 할 수는 없지만, 영적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공동체적 신앙의 성숙이기에 이는 아쉬운 평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무명이지만 여호사밧과 더불어 유이한 ‘A단계’의 평가를 받은 왕이 ‘요담’입니다. 한 줄 평가 : *홀로 신실했던 왕. 12대왕. 아하스 (D. 완고한 불순종) 오늘 살펴볼 마지막 왕은 아하스입니다.

제가 예전에 요담과 아하스를 세트로 다루면서 붙였던 설교의 제목이 “신앙에 부전자전은 없다”였습니다. 예상하시겠지만, 아하스는 최악의 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의 평가는 ‘D. 완고한 불순종’입니다. 그는 다윗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그럼 어느 길로 갔을까요? 바알숭배로 갑니다. 신앙에 중간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게 됩니다. 당시 세상의 가치관이란 것이 바알숭배였습니다. 바알숭배는 농경과 목축업 사회에서는 ‘풍요’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삶의 방식이었으니, 오늘날로 따지면 ‘성공주의’와 ‘물질 우선주의’의 모습과 유사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성공과 돈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지르지 않고 비슷한 가치까지만 끌어올리면 사람들은 영적 경계를 풉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대기가 말하는 영적 실패의 첫걸음입니다. 예배의 기본은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최고란 ‘유일성’을 의미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다른 것을 대하는 방식을 찾고, 그렇게 대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최고의 신앙입니다. 제가 최근에 ‘부부 양육’을 합니다. 부부 양육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신 방식으로 결혼과 부부관계를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상대방을 대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삶, 직업, 물질 등에 적용하는 것이 성경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늘 “하나님보다 더”라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아래서”의 사고방식을 깨고, “하나님도

중요하고 이것도 중요하다”라는 논리로 우리를 설득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남유다에서 ‘아달랴’ 빼고는 단 한 명도 “나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배도 다 했습니다. 우상숭배했다는 것이 예배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는 예배했죠. 그러나 그 외에는 더 중요시하고 따르는 것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하스도 그렇습니다. 예배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들도 많이 행합니다. 그가 통치하는 유다도 함께 망가집니다. 그의 삶에도 하나님은 깨닫고 돌이킬 기회들을 주십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무력감’이라는 표현을 저는 신앙 안에서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의 무력감은 곧 제가 하나님께 나아갈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도 전쟁 상황에서 왕으로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가 나아간 곳은 하나님이 아니라, 강대국인 앗시리아의 왕이었습니다. 이 방식이 성공했을까요? 네. 성공합니다. 지난주에

얘기했죠? 세상의 방식이 잠깐의 성공처럼 보이는 일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도움의 특징은, 공짜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앗시리아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앗시리아는 아하스를 주무르고 곤경에 빠뜨립니다. 아하스는 절망적인 상황에 몰렸지만, 회개는커녕 자신의 결정이 옳다는 반항심으로 다른 신에게 제사하고, 나중에는 성전 기구를 부수고 문을 닫아버리기까지 합니다. 죽어서도 왕실 묘지에 묻히지 못한 왕이 아하스였습니다. 한 줄 평가

: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앞세운 왕. ‘신앙의 부전자전은 없다’는 것이 슬프지만, 다행인 것은 이 아하스 밑에서 ‘S급’ 왕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서 나누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메시지를 마무리해 봅시다. 오늘 우리는 역대기의 관점에서 왕들에 대한 평가를 다뤘습니다. 그 관점으로 8명의 왕을 만났습니다. 여덟 명의 왕 중, 누구는 부끄러움으로 끝났고, 누구는 겉모습만 하나님을 섬겼고, 누구는 잠깐 잘하다 넘어졌고, 누구는 끝까지 홀로

신실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성경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이름도 하나님 앞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설교에서 평가를 하지 않은 이 시대의 S급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야다’입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요아스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욕심내지 않고 후에는 요아스의 조력자가 되어 유다가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 섬깁니다. 그리고 그는 왕 중에서도 들어가지 못한 다윗성 왕실 묘지에

장사 됩니다. 왕이 아닌데, 왕실 묘지에 묻힌 유일한 인물입니다. 여호야다는 왕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왕보다 더 크게 사용하셨고, 그의 삶은 왕들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백성들 사이에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 기자는 요아스 시대가 아니라 사실 여호야다 시대가 하나님이 기뻐하신 시대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보다 더 중요했던 인물. 우리의 가치는 직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으로 평가되는 법입니다. 이제 이 설교를 나의 삶에 잇대어야

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기록이 있다면, 우리의 기록입니다. 신앙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고, 처음과 끝이 다른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의 4가지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최우선 가치로 앞세우고 있는가? 신앙은 ‘유일성’의 자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늘 일하십니다. 무너짐의 자리마다 선지자를 보내셨고 돌아올 길을 여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돌이키지 않는 신앙인이 아니라 돌이키는 예배자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의 자랑’으로 주님께 올려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