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번에 살펴볼 말씀은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는 두 편의 설교로 다룰 예정입니다. 역대하부터 해서,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가 모두 같은 시기를 공유하고 있어서, 올해 하반기는 ‘귀환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해서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매일성경 묵상이 그렇게 편성된 것도 그래야 연계하여 풍성하게 말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이제는 유다의 멸망, 포로, 그리고 귀환까지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으니 아실 것입니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1차 귀환민들이 돌아오죠. 이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들 뒤에 에스라가 돌아오죠. 에스라는 돌아와서 백성들이 말씀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 회개하며 개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2차 귀환이었습니다. 그 후 이어지는 것이 ‘느헤미야’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느헤미야의 이야기도 페르시아에서 시작합니다. 당대 최고의 강대국. 세상을 주름잡는 나라가 된 페르시아. 그 거대한 제국의 심장부에 있는 수산 궁전을 떠올려
봅시다. 금과 은으로 장식된 궁궐 한복판에 페르시아의 왕이 앉아 있는데, 그 옆에 늘 왕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오늘 만날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의 직책은 술 관원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 것은, 고대의 술 관원은 오늘날로 바꿔서 표현하자면 왕의 ‘비서실장 + 경호실장’ 쯤 되는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왕이 마시는 술, 먹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나 먼저 확인을 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리이죠. 왕의 식탁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왕의 표정을 읽고, 때론 왕의 귀에 속삭이며 조언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왕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느헤미야는 이 정도면 소위 출세한 겁니까? 안 한 겁니까?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의 후손으로 그는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하나의 일이 발생합니다. 그와 각별한 사이였던
‘하나니’라는 사람이 어느날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에 관한 소식을 전했던 것이죠. 아마도 하나니는 1차 혹은 2차 귀환민의 일원으로 예루살렘에 정착해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귀환 공동체는 포로로 사로잡혀 가지 않고 그 땅에 살던 사람들과 귀환한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었죠. 이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준비된 ‘남은 자들’입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The Remnant)’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엘리야가 “나만 혼자 남아서 외로이
싸우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개척 초기에 그런 외로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 교회를 세우고 싶지만, 현실을 보면 ‘내가 혼자 꿈꾸는 건가?’ 싶었던 시간이 길었습니다. 주변에도 나는 이러이러한 교회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면, 하나 같이 “그런 교회가 가능해?”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제가 만약 단순히 목회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면, 후임으로
어딘가를 가려면 갈 수야 있었죠.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저는 제가 오랜 시간 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특별히 성경신학을 전공하면서 만난 ‘그 교회’가 비전이 되었습니다. 비전이 이거 하다가 죽어도 되겠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저는 그 부르심을 받은 것이죠. 그 비전을 위해서 그 교회를 향한 여정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도해보려면, 아무리 힘들어도 개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 교회 소개 글이 있습니다. 예전에 블로그에 썼던 “보지 못한 교회,
가지 않은 길”이라는 글을 요약한 것인데요. 그중 일부만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누가 저에게 “왜 개척하셨나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정말 이루고 싶은 교회가 있어서요. 성경이 말하는 본래의 교회, 가장 오래된 그 교회를 오늘 이 시대에 다시 회복하고 싶어서요.” 그래서 사귐의교회는 ‘큰 교회’보다 ‘깊은 교회, 진짜 교회’를 꿈꿉니다. 성경의 진리에 뿌리내리고, 서로의 삶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함께 경험해 보고 싶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 교회를 진심으로 꿈꾸며 시작했고, 그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저는 몇 번 나눴듯이, 우리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저희는 처음에는 교단 가입도 어려운 너무나 작은 공동체였고, 그냥 우직하게 우리만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별종의 모임과 같이 스스로를 여겼습니다. 몇 명이든 함께 꿈꿀 수 있는 사람과 끝까지 목회를 하자는 것이 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가 3년 차부터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담임목사는 평일 내내 일하느라 정신이 없고, 우리는 가진 것이 없는 데도 함께하는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점차 성도가 50명, 70명 넘어가니, 이제 영적인 시스템이 공동체 안에 필요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전을 품었다고 모든 설계도를 다 배운 것은 아니었죠. 저는 그 이후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고, 주변에는 개척해서 그렇게 성장하는 새로운 교회의 모델도 없는 편이라, 여러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전부터 소개받았지만,
똥고집을 부리며 미뤄왔던, 하나복 사역에 참여해 보게 되었고, 제가 그때 들었던 마음은 “여기에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몰랐을 뿐이지…. 저는 하나님이 정말 필요한 시기에 우리의 여정에 딱 맞게 인도해 주셨다고 느낍니다. 물론 여기만 정답이다, 이런 것은 아닙니다. 함께 같은 비전을 고민하고 나누는 동지들을 만난 것이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교회는 이제 누군가에게 먼저 길을 보여주고 이끌어가는 교회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제법 많은 교회가 우리 교회를 공부하고 모델 삼아서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심화강좌에서 제가 담당한 그룹의 목회자분들이 하나 같이 하시는 말이, “나와 같은 생각,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을 못 만나서 외로웠었는데, 여기에 이렇게 많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런 얘기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보고 있는 하나님의 렘넌트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동시에 아직 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포로기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당시 유대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남은 자들을 붙들고 계셨고, 포로기에서 돌아올 귀환 백성들의 여정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될 사람들을 하나님이 불러 모으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귐의교회에 함께 하시는 여러분. 전도지도 뿌리지 않고, 전도 행사 한번 하지 않는 이 교회를 여러분이 찾아오셔서 가족이 된 것도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기에
우리를 이곳에서 함께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다 볼 수 없고, 우리는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도 하나님이 어떻게 이끄실지 모릅니다. 느헤미야도 자기 삶이 이후에 어떻게 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니를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겪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의 소식을 듣는 순간, 느헤미야의 마음이 거기에 꽂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귀환했지만, 그곳은 어려움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일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 소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부담’이었겠지만,
느헤미야에게는 ‘부르심’으로 들린 것입니다. (느 1:4) 이 말을 듣고서, 나는 주저앉아서 울었다. 나는 슬픔에 잠긴 채로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뢰었다. 에스라가 공동체의 잘못과 그로 인한 징계의 상황에 대하여 그들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로 회개하며 엎드렸던 것처럼, 저 멀리 페르시아에 있던 느헤미야는 귀환 공동체의 현실을 들으면서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죄라고 자복하며 회개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까? “하나님, 저 사람들 때문에 이 꼴이 났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잘못입니다. 지도자들이 문제입니다. 시스템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늘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예루살렘이 왜 무너졌습니까? 이스라엘이 계속 우상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 악을 오히려 힘써 도모하다가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것을 자신의 아픔, 자신의 책임으로 끌어안습니다. 우리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도 많이 고민합니다.
교회 밖의 사역에 대해서도 늘 고민합니다. 우리는 꽤 잘 성장하고 있지만, 지금 한국교회가 참 아픕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떠납니다. 교회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무의미함을 느끼며 떠나갑니다. 미소속 신자가 수백만입니다. 우리가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아파하지 않으면 우리의 다음세대는 다른세대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대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회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함께 아파하고, 긍휼함을 갖고,
회개하고, 도울 수 있는 것을 도와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 세습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한동 안 그런 목회자들과 거리를 둔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방향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위기 앞에서, 우리 교회만 옳다고 서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방향으로 함께 바뀌어 갈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제 생각이 조금씩 넓어졌습니다. 느헤미야 기도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감정’이 아니라 약속을 붙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는 기도합니다. (느 1:8) 주님의 종 모세를 시키시어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여러 나라에 흩어 버리겠지만, (느 1:9)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와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면, 쫓겨난 우리가 하늘 끝에 가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거기에서 우리를 한데 모아서, 주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신 그 말씀을,
이제 기억하여 주십시오. (느 1:10) 이들은 주님께서 크신 힘과 강한 팔로 건져내신 주님의 종이며, 주님의 백성입니다. 여러분. 감정에 취해서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찬양을 한다면 가사를 기억하며 그것이 진짜 나의 고백이 되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내 감정을 쏟아내는 것에서 멈추지 마시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기도를
무려 네 달 동안 이어갑니다. 한번 감정에 북받쳐서 기도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눈물과 금식으로 네 달 동안 충분히 기도하고 그는 이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실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며 기다려야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냥 기다려도 안 되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하고 바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과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평소와 같이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가 옵니다. 어떻게
오는지 아십니까? 느헤미야가 뭘 먼저 한 것이 아닙니다. 평소와 똑같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성실히 하고 있는데, 왕이 보기에 느헤미야가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느 2: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느 2: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그런데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가 ‘크게 두려워하여’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고대 왕 앞에서 지금 개인의 걱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냥 ‘죄송합니다’라고 하고 끝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때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준비했던 그때라는 생각을 가지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왕이여, 소신의 조상이 묻힌 성읍이 폐허가 되고 성문들이 모두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듣고서,
울적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탓입니다.” 왕이 다시 묻습니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이때 성경을 보면 매우 의미 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느 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되 ... 그 짧은 순간에도 느헤미야는 자신을 하나님과 연결하며 나아갑니다. 우리에게 깊은 기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는 무려 이때를 위해서 네 달 동안 기도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간순간에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잠시 기도하며 그분의 뜻을 구한 후, 말을 이어갑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준비해 둔 계획을 왕에게 소상하게 설명합니다. “저를 유다로 보내어 조상들의 성읍을 다시 건축하게 해주십시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정확하게 그가 준비했던 것을 요청하기 시작합니다. “가는 길에 통행 허가증(조서)을 주십시오.” “성문과 성벽을 지을 목재를 왕의 삼림 감독에게 명하여 주십시오.” “제가 머물 집을 지을 나무도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건 즉흥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이미 머릿속에서 수십 번, 수백 번 시뮬레이션했던 계획이에요. “언제 떠날 건지, 얼마나 걸릴지,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어디서 자재를 가져올지,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느헤미야는 기도만 한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철저하게 준비한 사람이었다는 거죠. 왕은 그의 모든 요청을 들어줍니다. 게다가 군대 장관과 기마병까지 붙여 줘요. 이제 느헤미야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페르시아가 인정한 공식 총독의 신분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3차 귀환이죠.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일을 보면서 어떤 것이 떠오릅니까? 우리의 몫이 있고, 하나님의 몫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몫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몫을 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배이고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할 부분을 내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몫도 안 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드디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는 도착하자마자 “자! 이제 건축합시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3일 동안 적응을 하고, 밤이 되자 소수의 사람을 데리고 직접 성벽을 답사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우리가 앞서가지 않으려면 조금 뜸을 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늘어져 버리면 안 되지만, 늘 상황이 열렸다고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막 달려가면 그것이 일을 망치기 쉽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있었고, 성벽을 세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위협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던 느헤미야는 먼저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 움직인 것입니다. 그가 총독이니까 주어진 권위가 있죠. 그러나 그것만으로 무작정 지시하고 몰아붙이기에는 저항과 반대에 심하게 부딪힐 것입니다. 그는 왜 예루살렘 성벽을 여러 위험 속에서도 재건해야 하는지, 그것을 설득하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리더는 끝없이 설득해야 하는 자리이죠. 느헤미야는 충분한 준비와 확신을 가진 뒤, 백성들을 모아 놓은 후 그들을 설득합니다. (느
2:17) 이렇게 돌아보고 난 다음에, 나는 비로소 관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탔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읍시다. 남에게 이런 수모를 받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느 2:18) 나는 또한 나의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로 나를 잘 보살펴 주신 일과, 왕이 나에게 한 말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공사를 시작하겠다고 나에게 다짐하였고,
힘을 내어, 기꺼이 그 보람있는 일을 시작하였다. 느헤미야가 이미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죠. 그는 자신의 그 경험과 하나님이 주신 마음, 또 그에 대한 왕의 협력 등을 공동체와 나누며, 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야 하는지 그 비전을 공유합니다. 단순한 꿈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히 바라본 느헤미야의 비전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렇게 성벽 재건에 착수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왕의 협력, 백성들의 동참으로 일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곧바로 방해
세력도 일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우리가 사탄의 위협이 되지 않으면, 사탄이 우리를 방해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 사탄이 두려워하는 일이 있으면, 우리는 끊임없는 방해와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도 한 사람의 삶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내 삶의 시련을 달리 보게 됩니다. “나에게 왜 이렇게 어려움이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내가 하는 일이 어지간히 두려운가 보구나”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역을 하다보면 어려움과 방해를 만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고 결정하면 그때부터 여러분을 흔들고 괴롭히는 안팎의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가 그렇습니다. 내가 너무 평안하다? 어쩌면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환경이 평안해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더욱 선명히 느껴지시는 그분의 동행하심을 누리며 평안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종종 마음이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절 찾아오는 문제들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생겼기에 버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이 시작되자, 삼발랏, 도비야, 게셈이라는 주변 사람들이 연합하여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공격은 ‘조롱’입니다. 뭔가 하려고 했을 때, 옆에서 말로 푹 찌르는 것이죠. 그러면 리더가 마상을 입습니다. 말에 무너질 수 있죠. (느 4:2) 자기 동료들과 사마리아 군인들이 듣는 데에서 "힘도 없는 유다인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 이 성벽을 다시 쌓는다고?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겠다는 거냐? 하루 만에 일을 끝낸다는 거냐? 불타 버린 돌을 흙무더기 속에서 다시 꺼내서 쓸 수 있다는 거냐?" 하고 빈정거렸다. 다행히 느헤미야가 속은 상했지만, 기도하며 이겨냅니다. 두 번째 공격은 ‘위협’입니다. 말로 해도 꿈쩍 안 하니까, 액션을 취합니다. 실제적인 방해 위협이 있으니까 백성들이 동요합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외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여러분의 가족과 집을 위해 싸우십시오.”
이때부터 귀환민들은 한 손에는 연장, 한 손에는 무기, 건축자들은 허리에 칼을 찬 채 일을 했습니다. 기도해야죠. 그러나 대비도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현실에 뿌리박힌 영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가끔 여기서 균형을 잃죠. 너무 세상적인 방식으로 뭔가 방법만 찾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고 기도만 합니다. 기도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기도하면서 해 나가야 합니다. 세 번째 공격은
더 아픕니다. 왜냐면 외부의 공격은 내부의 사람을 단결시킵니다. 그런데 이제 외부의 공격이 잦아들자, 내부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진짜 위기이죠. 귀환 공동체의 문제는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모습이었습니다. 형제들끼리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고, 자녀를 종으로 사고파는 상황에 있던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정의가 무너져 있으니, 이 공동체가 하나님의 꿈을 담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느헤미야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먼저 자신의 총독
녹봉을 전부 포기하면서까지 이 일에 헌신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본이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먼저 희생하며 살고 있으니, 희생하며 살자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 설득하는 것 같지만, 사실 삶이 따라주지 않는 말은 한없이 가볍습니다. 내가 헌신하지 않고, 내 옆 사람을 헌신으로 초대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할 일을 소홀히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성실하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서 왜 사랑하지 않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관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가장 가까운 내 육신의 가족들, 가장 가까운 나의 영적 가족인 팸, 내 사역의 팀 안에서 먼저 그렇게 살아가면, 그것이 영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설득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저와 붙어 있지 않죠. 제가 여기서 아무리 멋있게 설교를 해도, 네 가족이 보기에.... 우리 전도사님과 간사님이 저를 보기에... 제가 위선이 가득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제 사역은 공허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내 신앙에 관해서 온전히 이해는 못 해주더라도, “당신이 더 좋은 모습으로 변해가기 위해 애쓰는 것은 내가 알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것이 진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렇듯 느헤미야와 함께하는 귀환 공동체는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분열 앞에서 느헤미야는 이 모든 위기를 막아내고 자신과 공동체를 지켜냅니다. 그러자 이제 공격의 대상을 바꿉니다. 이제는 느헤미야를 아예 넘어뜨리려는 시도였습니다. 1차로 우선 암살을 위한 덫을 놓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그것에 속지 않습니다. 그러자 2차로 가짜 뉴스를 퍼뜨려 느헤미야를 지도자의 자리에서 박탈시키려고 합니다. 어떤 뉴스를 퍼뜨렸을 것 같습니까?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반역한다더라.” (느 6:8) 나는 그에게 회답을 보냈다. "당신이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오. 당신이 마음대로 생각하여 꾸며낸 것일 뿐이오." (느 6:9) 그들은 우리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겁을 먹고 공사를 중단하여, 끝내 완성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하나님,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느헤미야가 가짜 뉴스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붙들고, 기도로 버티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갑니다. 그러자 그들은 3차로 종교 지도자 스마야를 섭외하여 느헤미야를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그는 느헤미야를 돕는 척, 곧 그를 죽일 자객들이 오니 성전 안에 들어가 숨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데, 느헤미야가 성전에 들어가면 율법을 무시하고 어겼다며 그의 리더십을 흔들 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번에도 그것을 분별해 내며, 모든 공격 앞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성벽이 모두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느 6:16)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으신 것일까요? 저는 개인과 공동체를 지켜내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우리의 약함과 악함이 충돌하고 때로는 시너지를 내어서, 죄를 만들어 내곤 합니다. 교회 안에도 가짜 뉴스가 있는 경우도 있고, 말이 옮겨 다니며 덧붙여지고 비틀리기도 합니다. 사탄이 공동체를 흔드는 것을 보면 때로는 너무 교묘하고 너무 무섭습니다. 부디 내가 그런 사탄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힘써 주십시오. 우리가 교회로 살아가는 한 늘 공격이 있음을 알고 깨어 있으셔야 합니다. 억울한 일 있죠. 기도하셔야 합니다. 무너질 때 있죠. 예배로 피하셔야
합니다.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을 위해 주님의 마음을 구하며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으면 실천해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서로를 믿어주십시오. 공동체를 깨는 행위를 분별하십시오. 저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이곳에 있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었고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느헤미야에게 찾아왔던 부르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우리가 교회로서 감당해야 할 삶의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느헤미야에게
있던 귀환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부르심처럼 말입니다. 성벽의 건축 기간 52일. 당시의 기술, 자재, 환경... 또 적들의 끊임없는 방해와 공격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셨다’고 그는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도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의 여정,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장애물과 위험 요소를 다 이겨내고 믿음을 지켰다면... 그 여정을 돌아봤을 때 남는 것은 “내가
이렇게 잘했다.”가 아니라, “주님이 절 지켜주셨군요.”일 것입니다. 오늘 배운 느헤미야의 태도, 그의 기도, 그의 신앙을 잘 기억하며, 우리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길 다짐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