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사람이 미래다, 학개

2025-11-16 · 학개 1~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우리가 볼 말씀은 <학개>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60세가 넘으신 목사님의 어떤 강의를 듣는데, 정말 아재 개그의 향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 누구냐?” 누구겠습니까? 학개입니다. “제가 학개요.” 저도 여러분과 비슷한 반응으로, 어이없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개서를 이번에 연구하다 보니까, 학개의 주제가 뭔지 아십니까? ‘순종’입니다. 이 순간 바로 아재 개그가 빛이 나는 것이죠. 학개서의 주제는 이제 여러분이 다시는 안

까먹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여러분도 따라 하시면 됩니다. “제가 학개요(제가 할게요).” “내가 학개(내가 할게).” 학개서는 두 장짜리 짧은 성경입니다. 오늘 이 한 번의 설교로 우리는 학개서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아마도 “저는 학개서를 잘 압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학개서는 인기도 없고, 짧지만 내용도 잘 모르는 대표적인 소예언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설교를 듣고 나면, 아마도 여러분 모두가 학개서만큼은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제가 우선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고대 중동의 한복판. 이스라엘의 역사에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이 왕도 넌센스 퀴즈 하면 늘 나오는 왕이죠? “성경에서 가장 어린 왕이 누구냐?” 이제 갓 네 살 된 ‘느부갓네살’ 왕. 이거를 또 믿으시면 곤란합니다. 아무튼 바벨론에서 가장 강력했던 그 왕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와서 완전히 초토화합니다. 성전? 불타버렸습니다. 왕궁? 무너졌습니다. 백성들은 괜찮은 사람들은 모조리

포로로 끌려가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죠. 하나님의 임재, 신전, 나라의 심장, 믿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기서 다 괜찮은데, 하필 우리 건물 십자가만 벼락을 맞아서 타버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누군가는 “사귐의교회를 하나님이 버리셨나?” 제가 진짜 오랜만에 올해 길에서 새똥을 맞았습니다. 그것도 사경회 때 오실 목사님께 인사드리러 갔는데 그 교회 앞에서 새똥을 맞았습니다. 거기에 뭐 의미를 부여하면 한도 끝도

없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우린 끝났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이런 생각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무너졌다고 하나님이 무너지신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성전은 하나님의 존재성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인데, 이미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았던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은 떠나셨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 문에 서서 예배하러 오는 유다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예레미야 7:4)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절망 가운데 무너진 성전을 뒤로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세계의 질서를 엎어버리십니다. 페르시아 제국이 강성해지더니, 영원할 것 같은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립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아주 깜짝 놀랄만한 명령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 그리고 성전을 다시 지어라.” 그렇게 해서 스룹바벨을 지도자로, 약 5만 명의 백성들이 귀환합니다. 성전은 폐허가 되어 있고, 성벽도 다 무너져 있고, 땅은 농사할 수 없을 지경이고, 경제도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도시 재건, 성전 재건, 공동체 재건의 꿈을 안고 일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가장 먼저 성전 기초를 놓습니다. 지난 에스라 설교의 내용을 기억하시죠? 이 과정에서 이웃 민족들과 마찰이 생깁니다. 공무원들도 협조를 안 합니다. 귀환해서

살아가는 생계도 버거운데, 성전 재건은 막히게 되고, 귀환 공동체는 힘이 빠지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결국 성전 재건은 멈추고, 백성들은 각자 자기 집 짓고 살아가는 생계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예루살렘 귀환민들은 이제 자기 집은 다 짓고 살고, 농사도 하고, 사업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전은 멈춰있고, 방치된 흉물의 상태였습니다. 성전 기초를 놓은 지 15~16년 동안 그렇게 시간이 흘러갑니다. 사람들은 모두 현실에 곧 적응합니다. 교회에서 인테리어를 하나

해도, 할 때는 요만한 것 하나도 거슬리거든요. 그런데 “그냥 나중에 하자”고 뒤로 미뤄두기만 하면, 나중에는 할 마음도 없습니다. 더 이상 관심이 없으니 거슬리지도 않습니다. 성전 재건이 처음 멈췄을 때는, 기초 공사만 된 성전을 보면서 마음도 아프고 했겠죠. 그런데 각자의 삶에 치중하던 귀환 공동체에게 성전은 이제 그냥 관심에서 사라진 이슈가 된 것입니다. 오히려 누가 뭘 하자고 하면, “에헤~ 왜 또 일을 만들어~ 그냥 좀 있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어느새

성전은 그들에게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관심도 없고, 이제는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그들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그가 외칩니다. “여러분은 자기 집은 잘 꾸며 놓았는데, 하나님의 집은 왜 그대로입니까?” 제가 얼마 전 에스라서 설교의 내용이 있으니까 이 대목이 궁금해지더라고요. 귀환 공동체는 성전을 재건하고 싶은데, 외부의 방해 세력 때문에 못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학개

선지자는 그것을 나무라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에는 꼭 그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학개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학개 선지자가 활동할 때는 이미 왕이 바뀌어 성전 건축을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는 때였습니다. 상황이 바뀌었지만, 백성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학 1:2)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때가 되지 않았다. 주님의 성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야, 성전 건축, 못 해. 하자고

하지도 마.” 애를 써보고 방법을 찾고 이런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냥 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쓰는 말이지만, “순종하려면 방법을 찾고, 불순종하려면 핑계부터 찾습니다.” 외부의 방해가 마음 아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좋은 핑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에서도 이런 경계선에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거짓말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 남편, 아직 어린아이, 또 나의 어떤 환경. 맞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무엇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일

수도 있고,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강력한 신앙의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은 그것을 핑계 삼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신다. “학개야, 이 백성이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핑계하고 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 만나고 싶고, 가고 싶고 하는 것에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에는 핑계부터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저도 그래요. 제도 안에 속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다는 것은 정말 가야 할 모임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과 회의에 다 참석하려면 정말 목회의 많은 시간을 거기에 써야 합니다. 결국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우선순위가 정해지더라고요. 결국은 우리는 다 우선순위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내가 가장 우선순위인 사람은 게을러지기 쉽고요. 하나님이 가장 우선순위인 사람은 게으른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사찰 관리인이 없죠. 그런데 가끔 교회를 점검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가 오면 와서

한번 둘러보고, 눈이 오면 한번 둘러보고, 요즘에는 또 식물도 관리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또 그것 때문에 와서 둘러보고. 와서 누가 놓고 간 컵도 정리하고,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도 정리하고. 저는 정말 그분들 보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저는 부교역자 때, 월요일에 쉬는데 목사님이 교회에 부르면, “네”하고 가긴 갔지만 솔직히 그렇게 기쁘게 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말 진심으로 저보다 나은 성도님들의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우선순위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지금 학개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학 1:4)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학 1:5)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살아온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 (학 1:6)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학 1:7)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각자의 소행을 살펴 보아라. (학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어라. 그러면 내가 그 성전을 기껍게 여기고, 거기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겠다. 나 주가 말한다. 제가 주일에 일하는 직업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본인의

의사로 바꿀 수 있으면 무조건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말에 하루를 나가야 하면 토요일을 고정으로 나가면서 지켜내야 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손해를 감수하고 지켜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의 태도에 가혹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사는 법을 배워왔고, 그래서 주님이 저를 지켜주셨다고 정말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직업의 특수성에 따라서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주일에 예배를 못 드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가 주일에 예배 못 오는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면 오히려 위로해야죠. 격려해 줘야죠. 그런데 제가 걱정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사람이 주일 대신에 갖게 되는 휴일이 있다면, “그날은 그럼 하나님 앞에 좀 머물고 있나?” 주일에 예배를 못 하는 상황에 있다면, 그 대신 주일에 예배하는 마음으로 내 삶에서 온전하게 하나님을 찾는 날이 있어야, 예배의 그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거 못하면 직업 바꾸시는

것도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신앙이 정말 좋았던 사람들이 직장 문제로 공동체와 멀어지고, 결국 신앙에서 이탈하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상황에 갇히지 마시고, 더욱 노력하시고, 도움을 청하셔야 합니다. 시간의 십일조를 드려서 예배해야 합니다. 그거 진심으로 해내면 괜찮습니다. 그날이 당신의 주일이 되게 하십시오. 팸에서도 그렇게 애쓰는 사람들을 격려해 주십시오. 우리가 서로를 잘 지켜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심인 사람은 환경이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땅에 있습니다. 그가 그래서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루에 3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예배했습니다. 핑계와 방법은 마음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성전이 무너졌으니,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예배를 멈추었지만, 누군가는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했습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신 것입니다. 학개가 핑계에 갇힌 귀환 공동체의 마음을 찌르자, 스룹바벨, 여호수아 등 지도자와

백성들이 ‘반응’했습니다. 이건 이들이 잘한 것이죠. 회개하고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꾸 예전 솔로몬 성전 때와 비교하며 자신들이 하는 일을 의미 없게 여깁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는커녕, 힘을 빼는 이야기만 합니다. “이걸 이렇게 하면 이렇고, 저렇고...” “이게 뭘 성전이라고... 우리가 하는 일이 뭐 이리 초라하냐...” 일을 얼마나 화려하게 하느냐, 크게 하느냐,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외형에

치중하게 되면, 잠시 멈춰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실 저희 교회의 사역자들과는 우리의 예배당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 2년 전쯤부터 계속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면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고, 마음을 모아주실 것을 믿기에 급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때로는 주님의 때를 제 인간적인 두려움이 막을까, 때로는 제 인간적인 욕심이 앞서서 주님보다 더 서두를까, 그것을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건물보다 더 중요하게 우리가 세워가야 하는

것이 있음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우리가 진짜 목숨 걸고 세워가야 하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는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 미치지 못하는 성전을 보며, 실망하고 계속 공동체를 흔드는 움직임을 보며, 학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학 2:3) '너희 남은 사람들 가운데, 그 옛날 찬란하던 그 성전을 본 사람이 있느냐? 이제 이 성전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는 하찮게 보일 것이다. (학 2:4) 그러나 스룹바벨아,

이제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제사장아, 힘을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는 일을 계속하여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학 2:5)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바로 그 언약이 아직도 변함이 없고,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건물 있고, 주차장도 좀 넓고, 자매님들 화장실도 칸도 여러 개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것 주시면 감사히 받죠. 그러나 우리가 진짜 소망해야 하는 것은 그보다 더 고귀한 것입니다. 집이 아무리 좋아도 가정 안에 사랑이 없으면 냉기류가 흐를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마음에 욕심과 근심이 가득하면 그 사람은 매력이 없을 것입니다. 말을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난 말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겉보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 시대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주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은 “이곳을 여호와의 성전이라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하나님은 이 성전을 통해 일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전 성전보다 더 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돌로 지은 성전이 더 화려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 하나님을 담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날 영광이 더 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변의 누군가에 비해 초라해 보이십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내 주변에 솔로몬 성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비교하십시오. 무엇을 누리는가를 비교하지 마시고, 누가 더 하나님과 동행하는가? 학개서의 메시지가 그것이었습니다. 4절이 이것이죠. “하나님이 버린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는 너희들아. 너희가 초라해도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누가 이제 자기의 외적인 것들을 드러내면, 제가 조금 어린 목회자일 때는 ‘정죄’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그냥 “아직은 그것이 더 중요한 상태인가 보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외적인 멋이 내적인 멋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많이 느낍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마음껏 자랑해도 되고, 자랑하라고 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입니다.” 다른 것에 의해서 해석되고, 다른 것에 의해서 소개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복음에 의해서 새로워지고 있는 나를 내가 기뻐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건 마음껏 자랑해도 됩니다. 그것이 회심한 자들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보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나를 높이지 마시고요. 이렇게 부족한 나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는 그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사랑할 줄 모르는 간장 종지보다 작은 것이 내 마음인데, 그런 내가 누군가의 영혼을 품고 씨름하도록 내 마음의 지평을 넓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학개서는 구약의 정결과 부정의 개념을 가져와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부정한 것을 만진 자가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이 부정해지는 것이 맞는가?” 구약의 율법 규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학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을 짓는 너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다면, 지금 너희가 다시 짓는 이 성전도 너희의 불순종으로 인해 부정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성전을 두 번이 아니라, 열 번을 지어도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그냥 도구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장소도 필요하죠. 그러니까 힘써 지으라고 하시죠. 하나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 안에서도 더 본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회심한 이후에도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지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에서 성과를 냈어도, 설령 내가 좋은 예배당을 지어 바쳤다고 하더라도, 정작 내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는 몸과 마음이라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입니다. 저는 정말 좋은 교회를 이루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좋은 공동체를 우리가 이루고 함께 하나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제가 좋은 성도가 되지 못하면 저는 실패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잖아요. 사역 중요합니다. 예배 중요합니다. 세상에 빼앗긴 우선순위를 가져오셔야 해요. 시간의 우선순위, 물질의 우선순위, 내 마음과 정성의 우선순위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여러분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을 세우려고 하면서도 더욱 고집스러워지고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정작 나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내가 그리스도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 예배에서 주님이 받으시는 가장 중요한 제물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끝없는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언제나 방법을 찾는 마음과 핑계를 찾는 마음이 공존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 앞에는 핑계가 통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내 겉모습의 번지르르함으로,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중심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예배, 여러분의 헌신, 여러분의 사역 다 좋아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 동안, 그것이 분명 다른 곳으로 새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집 짓느라 하나님의 일은 우선순위에서 멀리 밀어낸 백성들을 깨우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 재건에 다시 힘씁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성전은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을 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담아내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멋지게 짓느냐가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공동체, 예배자, 한 사람이 세워지고 재건되느냐가 그들의 미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미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 핑계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대답하셔야 할까요? “학개요(할게요).”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무엇을 하시든지, 여러분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는 그런 모든 성도, 모든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건강 주시고, 우리에게 재능을 주시고,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시고, 우리에게 공동체도 주시고, 함께하는 사람들도 주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더 나아가 우리를 깨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주신, 세상의 헛된 것을 쫓던 삶에서 나를 구해주신, 그 하나님을 마음껏 높이며, 오늘은 내 삶 속에

일하신 그 주님께 진정한 감사로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