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먼저 오늘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설교는 치명적인 7대 죄악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매혹적인 악덕들이라는 책을 참고했다는 것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어, 여러분 혹시 2017년에 개봉했던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혹시 보신 분 한번 손 들어 보실래요? 나이 영화를 봤다. 어, 제 예상대로 아주 많은 분들이 보셨네요. 네. 사후 세계 이야기를 다뤘던 어, 영화죠. 그래서 여러분 많이 보셨으니까 줄거리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한번 소개를 드리자면 우선 신과 함께 불교적 세계관에서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된 영화죠. 어,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일곱 개의 지옥을 지나며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 이 모든 재판을 다 무사하게 통과하면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니까 환생. 만약에 그중에서 하나라도 어 죄가 발견되면 그 사람은 그 지옥에서 벌을 받게 된다라는 이야기의 영화였습니다. 어 영화는 특별히 이 일곱 개의 지옥을 통해서 살인, 나태, 거짓, 불리, 배신, 폭력,
천륜이라는이 일곱 가지의 죄에 대해서 다루는데요. 여러분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그중에서 유난히 사람들에게 관심을 많이 끊었던 지옥이 있었어요. 혹시 예상하시나요? 바로 나태의 지옥이었습니다. 아마 이 영화를 보셨던 분들은 이 장면이 어떤 거였는지 생각이 나실 거예요. 나태 지옥은 말 그대로 사람의 나태함, 게으름을 어 심판하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전에 게으르게 살았거나 자신에게 주어졌던 어떤 책임을 다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바로 이 지옥에 떨어져서 강제적으로
쉬지 않고 계속 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아야 했죠. 어 그런데 이 지옥이 나태 지옥이 유난히 더 회자가 되었던 이유는 이 지옥을 바라본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었어요. 뭐 다른 지옥들도 여러 가지 반응이 있었지만 유난히 사람들이 어 이것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냐면 아 내가 참 부지런하게 살아야 되겠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되겠다라는 반응보다는 어떻게 하면 저기서도 내가 덜 힘들게 벌을 받을까를 고민했어요. 그 사람들이 저 뭐 기둥 위 올라가 있으면 된다. 뭐 안쪽은
거리가 짧으니까 안쪽으로 들어가야 된다. 뭐 요런 것들이 인터넷 상에서 아주 많이 뜨겁게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귀찮음이 많다는 거죠. 이렇게 어떤 교훈을 준 영화를 보면서도 내가 어떻게 하면 저기서 조금이라 더 빈둥돼 볼까?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어 그런데 이런 반응들을 보면서 저는 아 이렇게 귀찮은 많고 게으른 민족이 어떻게 이렇게 분주한 사회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거의 참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어 대한민국 어
세계를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한번 질문해 볼게요. 여러분이 살아가고 계시는이 사회는이 나라는 나태한 사회 같아 보이시나요? 아니면 좀 부지런한 사회 같아 보이시나요? 굉장히 바쁘고 부지런해 보이죠. 우리는 바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한국이 아 이렇게 야근이 작고 워커올리 많은 나라가 없대요. 심지어 새벽까지 부어라 마처럼 회식을 한 후에도 그다음 날 우린 다 정시에 출근을 합니다. 그 외국인들이 보기에 참 대단한 민족이라는 거죠.
여러분 또 대한민국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죠? 빨리빨리의 민족이잖아요. 어 저도 한국인이지만 어떨 때는 어어 이제 이 나라가 어느 정도 어떤 수준의 좀 경제 이른 거 같다라는 어 느낌이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 중학생 초등학생 이때까지만 해도 택배가 2, 3일 만에 배송이 되는 것만으로도 세계가 참 놀라워했었어요. 그런데 이젠 어떻죠? 하루 만에 그것도 새벽에 문 앞까지 배송을 해 주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귀찮음의 본성과
달리 낮에도 모두가 잠든 밤에도 쉬없이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나태 지역을 보며 이렇게 반응을 보이기도 했어요. 작가가 한 가지를 놓친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이냐면 대한민국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은 절대 나태옥에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바쁜 사회를 사는데 어떻게 게으르게 살 수 있냐는 거죠.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여러분도 비슷한 생각이 좀 드시나요? 우리 사회와 우리의 일상은 정말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나태함, 게으음, 어떤
귀찮음 이런 것과 좀 거리가 먼 것일까요? 어, 저는 우리의 삶도 여러분이 또 지난 한 주간 살아오셨을 그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 저는 적어도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이라면 가정에서 또 누군가 학교와 직장에서 아주 분주하게 성실히 살아내실 거라 내셨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아, 모두가 아, 이제 드디어 끝났다. 주말이다. 이제 쉬자라고 외치며 퇴근하는이 금요일 밤조차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 나오신 분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다른 죄에 비해서 나태한 것, 게으른 것에 대해선 크게 인식하지 않고 다른 죄에 비해서 비교적 경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앞에서 불교회이 영화에서 일곱 개의 죄를 다뤘다고 했는데요. 기독교에도 7대 죄악이 있습니다. 나태암은 그중에서 가장 악한 죄로 분류되고 있어요.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나태함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오늘이 질문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나태함에 대해서 한번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정말 나태하지 않은가? 어, 먼저 앞에서 신과 함께 이야기를 했으니까이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과연 나태함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잠깐 살펴보고 싶습니다. 어, 불교에서는이 나태함과 게으음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맡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요. 그래서 마치 자기 삶에 대해서는 직무 유기와 같은 죄를 짓는 것이고 더 넓게는 자신이 게을러서 밀었던 그 일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죄라고 생각을 하죠. 또 이러한 마음의 무기력함 때문에
선행을 베풀지 않는 것도 사회에 대한 죄악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러한 현상들을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불과하고 사실 진짜 원인은 그 마음에 있다라고 생각한대요. 이들은 나태함이 단순히 게으른 것, 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깨달음을 향한 정진을 멈춘 마음의 병이라고 생각합니다.이 이 마음의 병이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깨달음이 없으니까 삶도 게으르고 타인을 향한 선행에도 무관심한 것이다라고 보는 거죠. 결국 나태하고 게으른 행동과 그런
삶의 태도는 깨달음을 멈춘 어떤 진리를 향한 그런 탐구하는 마음을 멈춘 그 무기력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는게 바로 불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쩌면 이 불교의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일치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핑계 또는 저런 핑계를 대면서 뭔가 무기력하게 더 나아가려 하지 않고 그곳에 멈춰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하거든요. 마음이 문제지. 뭐든지 마음게 달렸어.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겠어라고
말하곤 하죠. 이처럼 우리는 나태함과 게으음이 무기력하고 무언가 자꾸 뒤로 미루려고 하는 귀찮음이 원인. 우리의 마음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이 기독교는 나태함에 대해서 어떤 시간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을까요? 성경은 이 게으림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기독교가 말하는 나태함에도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요. 하나는 겉으로 보여지는 삶의 태도에 대한 부분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 어떤 불성실한 태도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말해요. 여러분, 많은 분들이 아실 텐데 잠언에 보면 개미에게 가서 부지런함을 배우라고 말하죠. 또 데살로니가 전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도 그 교회를 향해서 너희가 노동 없이 그냥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그런 태도를 버려야 한다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곳 저곳에서 성실이 땀을린 노동의 대가를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노동하지 않는
것, 뭔가 우리가 나태함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해서 매우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떨까요? 어, 아마 풍삼기를 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노동이 단순히 돈을 버는 것만 의지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학생이 수업에 성실하게 참여하지 않는 것, 교사가 아, 이거 나 어제도 했던 거야. 이런 마음으로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 이것 또한 모두 게으음의 죄입니다. 주부가 가정을 돌보지 않거나 집안일을 위로워서 집안에 어떤
것들을 돌보지 않는 것 그것 또한 나태함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장인이 근무 시간에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성실히 행하지 않고 뭐 지인이나 카톡을 하거나 인터넷 기사를 보거나 쇼핑을 하는 것 여러분 이것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바생이 사장님의 눈을 피해서 아, 최대한 일게하고나 오늘 좀 꿀빨아 가야지. 이런 마음으로 빈둥거리는 거. 이것도 성경에서는 죄라고 보는 거죠. 혹 계신 분들 누군가는 이런 말을들을 때 어쩌면 우리 마음에서는 아, 뭐 그런 것까지
죄라고 해라고 하는 불편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성경은 분명히 나태하게 행하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지난 한 주는 어땠나요? 여러분의 학교, 가정과 직장에서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혹시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나태한 마음 또는 이러한 태도가 있지 않아 않으셨습니까? 어, 저도 최근에 어, 평일 오전에 잠깐씩 이제 알바를 어, 시작하게 됐는데요. 저는 출근할 때마다
이 늘 나태이라는 시험 대비 오르는 거 같아요. 오늘 사장님이 출근 안 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저에게 있습니다. 근데 너무 성실하세요. 그래서 매일 출근을 하십니다. 아, 사중님 안 계시면 대충 대충 빨리 끝내고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저도 어, 있습니다. 제가 1시에 퇴근을 하는데 어쩌다 1시가 넘어갈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냥 마감도 빨리 하고 나중 근무 시간 끝났는데 빨리빨리 하고 오팀이 알아서 하겠지. 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내가 편하고 싶고 이왕이면 쉬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요즘이라고 많은 돈을 벌고 싶은 그런 뭔가 어 마음들이 조금씩 다 있다는 거예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 제가 그 마음대로 진짜 대충대충하고 사장님 보일 때 열심히 한 척 하다가 안 계시면 내 마음대로 하고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일까요? 그 마음이 드는 대로 행동하면 그것은 분명히 죄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출근할 때 요즘에 어 저에 대한 이 나태한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요. 우리 한 목소리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아, 그냥 대충하고 빨리 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 때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고 곱씹으면 어 꼭 주님이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 같아요. 예진아,
그 사장님이 너의 상전인 것도 맞지만 너의 진짜 상전은 나잖아. 너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잖아. 너 그렇게 고백하며 살잖아. 네가 일하고 있는 그 일터 근무하는 그 시간도 다 내 거라고 고백하잖아. 그러니 내가 너의 상전인 것처럼 두렵고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해. 사람의 눈에 따라 달라지면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아요. 어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고백한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저는 매일 아침마다 주님께서 저에게 하신 이 음성이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주님이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학교와 직장의 주인도 정말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여러분 고백하십니까? 여러분이 공부하는 그 시간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를 돌보는 그 가정에서의 시간 직장에서 군하는 그 모든 시간이 주인이 정말 주님이라고 여러분 고백하십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의 눈가림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누가 있으나 없으나 그리스도인 답게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의 삶에 대해서 누가 있으나 없으나 그것에
대한 어떤 대가가 주어지든 주어지지 않든 우리에게 맡겨진 그 삶을 열심히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을 원하지 않으세요. 어느 순간에나 착하고 충성된 종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이 나태함의 태도는요. 단순히 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삶의 예배를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예배를 기다리고 계세요. 우리가 이렇게 같이 모여서 예배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 너희가 나에게 드리는 그 산
예배를 내가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삶의 예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주의 마음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죠.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에 나태함의 그런 마음이 찾아올 때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상전은 눈가림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나태암의 첫 번째 측면이었습니다. 두 번째 측면이 있는데요. 두 번째는 우리 내면에 있는 자기 중심성에 관한 것입니다. 어, 기독교도 어떤 부분에서는 뭐 불교처럼 다른 종교나 또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 나태함은 사실 그 내면에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아, 개미에게 가서라도 게으른 사람들아 제발 그 지혜를 배워라. 부지런을 배워라. 그렇게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지런함은 정말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무언가를 해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앞에서 다른 종교들이 말하는 것처럼 또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뭔가 일하지 않고 너의 할 일을 다하지 않은 그런 것만 기독교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앞서 살펴본 성실한 노동, 삶의 예배도이 부지런한 근면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시는 그 부지런함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완수하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해야 돼, 공부 열심히 해야 돼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짜 원하시는 것을 최선을
다해 이루어 가라고 말씀하는 것이죠.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나태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먼저 아,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진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먼저 알아봐야 합니다. 우리 마태복음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어 우리가 얼마 전에 어 특새 기간을 보냈는데요. 그때 10개명에 대해 살펴보았었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을 열 가지로 압축한 것이 10개명이었고 거기서 더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두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이야라고 가르쳐 주시죠. 그러니까 결국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우리 요한복음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새 시대를 여시면서 새 계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내용이 새로운게 아니에요. 이전부터 이어졌던 것처럼 여전히 주님은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시대나 또 지금 우리에게나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라는 것이죠.이 이 말은 곧 우리가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 성실이 완수해야 할 그 주님의 뜻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어, 여러분, 부지런히 일하고 또 애쓰는 것을 우리는 근면이라고 어, 부릅니다. 영어로는요. 어, 영단어 중에는 어, 라틴어가 어원인 경우가 꽤 많아요. 그런데 이 딜리전스도 라틴어 딜리겔레라고 하는 단어에서 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라틴어이 딜리게라는이 단어가 근면하다라는 뜻을
가진 딜리전스의 엄마 같은 단어인 거죠.이 단어로부터 그 단어가 나왔으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이 딜리겔레의 뜻이 뭔지 아시나요? 근면하다의 엄마였던이 딜리계의 뜻은 사랑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처음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그 근면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만들 때이 사랑하다라는 단어를 보고 만들었다는 거예요. 사랑하다라는 그 엄마 밑에서 근면하다, 부지런하다, 성실하다라는 자식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근면한 거 매우 비슷합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근면은 그냥 열심히 사는게 아니에요.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기독교 나태함은 그냥 게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 사랑할 수 있는데 사랑하지 않는 태도를 기독교에서 나태하다. 그것은 게으르다 악하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정말 성경이 말한 나태함이 우리가 앞서 잠깐 살펴봤던 그 노동의 영역을 넘어서 사랑의 영역까지 말하고 있는 거라면 여러분 우리는 정말 나태하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 앞에서 정말 착하고 충선된 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이 사랑하라는이 성경의 가르침을 정말 잘 따르고 싶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대한 게으음과 나태함을 아케디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아케를 신앙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죄악이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그 7대 죄악 중에 가장 악한 것으로 분류했었죠. 왜냐면 그만큼 이 야케디아,이 나태암이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치명적인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곧 무엇이죠? 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에요. 그런데 나는 사랑하고 싶지 않아.이 마음이 있다면 우린 당연하게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게다가 그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아케를 정말 치명적이라고 생각하고 더욱더 경계했던 이유는 얼마든지 이 마음을 감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이 아케디아는 우리 스스로조차 눈치 채지 못하게 우리 내명 깊은 곳에서 숨어 활동하곤 합니다. 여러분 아케디아에 빠진 사람들도요. 얼마든지 활발한
종교 생활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하는 마음 없이도 얼마든지 사역에 참여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아케디아에 빠진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돼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따를 수 없죠. 시간을내어 자원 봉사를 하거나 내 물질을내어 후원할 수도 있습니다. 기부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랑하기 위해서 기꺼이 나를 바꾸고자 하는 어떤 결단이나 변화는 일으키고 싶지 않아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사랑이 아닌 동기와 다른 마음으로도 종교 생활할 수 있고요.
선악에 보이는 일들과 사역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아케디아가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에게도 아케디아가 숨겨져 있을 수 있어요. 아케디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모든 사랑에 대해서 저항하고 거부합니다. 어 그런데 우리가 비교적 어 최근에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많이 나눴기 때문에 오늘은 그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집중적으로 나눠 보려고 합니다. 어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시죠? 그럼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십니까? 네도 할 수 있고 하나님 때때로 살아갈 수 있고 때로는 기도할 수 있죠. 어, 책의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아케디아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요. 나태한 사람은 사랑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위안을 좋아한다. 용시에 그들은 변화의 가능성, 즉 고통처럼 느껴지는 옛 죄 본성을 죽이는
일과 평생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헌신을 꺼린다. 위안은 좋아하지만 헌신은 꺼리는 사람들이 바로 이 아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어, 여러분, 가끔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들을 때 우리에겐 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냥 만약 나를 사랑한다 말해 줬으면 좋겠고 괜찮아라고 말해 주고 싶은 줬으면 좋겠는 마음들이 우리에게 있죠. 그리고 너 변화해야 해. 거기서 돌이켜야 해라고 하는 말씀을들을 때는 왠지 꺼려지고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케디아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이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기를 원하지만 그분의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렇게까진 하고 싶진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장기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거나 무언가를 희생하거나 책임을 지거나 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고서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기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케디아라는 그 죄악에 빠졌을 때 우리 안에 생기는 마음이라고 저자가 표현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에 있는 영적 이 나태함은 하나님께 사랑은 받고 싶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나를 기꺼이 바꾸는 것에는 게으른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아케디아는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마음과 태도를 읽컫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한다고 하셨어. 일어나도 괜찮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라는 것은 아주 위험한 착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해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죠. 맞아요. 그러나 이 모습 그대로 계속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세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미 약하고 뭔가 흠 많고 부족한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지만 또한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모습에서 더 온전하게 변화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변화하고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이 나에게 원하는 모습으로 우리가 바뀌려고 노력하게 되죠. 여러분, 만약에 나는 연락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 여자 친구가 연락하는 걸 너무 좋아해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바뀌죠? 연락을 해 주려고 싫어라고 말하는 건 좋아하는게 아닌 거죠. 그동안 그렇게
안 해 봤으니까 서툴고 어색하고 때로는 좀 귀찮을 수 있어. 이런 것까지 내가 말해야 돼라고 할 수 있죠. 그래도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최대한 연락을 잘 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과 계속 사귐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기꺼이 나를 바꾸게 되죠. 여러분, 사랑의 관계는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가는 그 맞춤의 가정 속에서는 어떤 부분에서 나를 기꺼이 바꾸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진짜 사랑의 관계는 그냥 단순히 받는 것만을 원하지 않아요. 더 주고 싶어지고 그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나를 바꾸는 것도 결단하게 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는 그냥 사랑 받고만데요. 나는 그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사랑해 줘야 그게 진짜 사랑 아닌가요?라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 그 관계가 유지될까요? 결국 남으로 깨어지고 말 거예요. 우리 인간 관계에서 이것이 정말 맞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에서는 이런 태도를 취할 때가 많아요. 아니 주님 저를 사랑하신다면서요? 목숨까지내어 줄 정도로 사랑하신다면서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이 정도는 좀 봐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좀 더 기다려 주실 수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라고 하는 마음이 우리는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정말 사랑하게 되면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 더 하고 싶어집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그 사랑에 더 보답하고 싶어 그래서 뭐라도
더 주님이 원하신 것을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생겨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주님이 뭘 좋아하실까? 주님 뭘 원하실까?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 주님이 기뻐하신 모습으로 나를 바꿔야 되겠다. 주님 이거 원하지 않으시면 이거 안 해야 되겠다. 이거 원하시면 나 이거 싫지만 해 봐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결단이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되죠.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결단으로 우리를 바꾸는게 쉬운가요? 쉽지 않죠. 나를 바꾸는게
쉬었다면 모두가 아마 연애 다 성공했을 겁니다. 쉽지 않죠.이 인간 관계소조차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더 쉽지 않을 거예요. 평생 나밖에 모르고 살던 그 삶에서 주님을 위한 삶,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바꿔 산다는게 절대 내가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해서 쉽게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아, 마음 먹게 달린 거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건 그런 수준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움이가 필요한 거예요. 마치 연애
상담도 해주고 조언도 해주고 도와주는 그런 친구처럼요. 성경은 바로 그런 존재가 우리에게 성령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리아대석가 말하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 고백은 아 내 힘으로는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 수 없지만 내 안에 찾아오신
성령님을 의지하면 내가 그렇게 해 볼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가 새로운 사람들 답답게 바뀌어 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그 새로운 정체성 하나님과 새로워진이 관계성 그 삶을 더 풍성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우리 안에 힘을 불어넣어 주세요. 여러분 말씀을 읽을 때 깨닫게도 해 주시고요. 들었던 말씀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그 순간에 딱 떠오르게도 해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을 막
부어 주셔서 자꾸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죠. 이전에 나라면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그 선택지들이 자꾸만 떠오르게 하십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으시는 순간들이에요. 여러분, 바로 그럴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셔서 자꾸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 우리를 밀어 주실 때 여러분 우리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힘을 보태서 그 성령님과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그럴 때 그리스도인과
답답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그냥 유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성령님은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아케디아, 사랑에 대한 저항하는이 게으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떨까요? 성령님이 아무리 힘을 불어넣어 주셔도 협력하지 않습니다. 만약 끝까지 협력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다시 단절되게 될 거예요. 아케디안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그들을 가장 멀 멀리 끌고 가기 때문이죠. 어, 말씀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나태함, 게으름에 대해서 한번 나누었는데요. 여러분, 주님이 정말 여러분의 삶의 실제적인 주인이십니까? 그냥 단순히 피상적이고 관념적으로 고백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만약 그렇지 않고 정말 여러분의 주인으로 여겨지고 계신다면 우리의 삶의 예배, 일터의 예배를 우리는 게으르게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니 우리는 나태함을 버려야 해요. 육체의 상전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 중 하나지만 주님의 마음까지도
시원케 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는 것이 우리의 더 본질적인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또이 나태함은 우리 내면에 아케디아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케디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였죠. 나는 그저 사랑받고만 싶어요라고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아케디아를 버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그분이 여러분에게 받고 싶어 하시는 그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우리 에베소서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거예요. 하나님을 더 닮아가는 거예요. 하나님과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 모습 이대도 사랑하시죠. 약하고 상처 많고 실수 많고 욕심많은 우리 모습 그대로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온전히 회복된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싶어 하세요. 그리고 온전히
회복된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케디아는 하나님을 본받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일에 게으른 태도를 말하고 있어요. 주님은 우리를 더 온전하게 세우시기 위해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을 통해 끊임없이 일하고 계세요.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시고 사람을 보내시고 상황을 보내시고 사건을 만나게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주님의 부지런한 사랑이죠. 우리는 주님의 그런
음성을 듣지 않을 때가 많지만 주님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으시고 언제나 성실하게 그분의 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령의 음성인 줄 알면서도 결단하고 돌이켜야 하는 순간임을 느끼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아 이거 누가 들어야 하는 말씀인데 이거 딱 그 사람을 향한 말씀인다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하라는 마음을 주시는데 아 기도해야 되는데 오늘은 좀 피곤하네.
지금은 바쁘니까 이따 하자. 내일 하자. 다음에 하자. 뒤로 미루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라는 마음. 네가 가서 먼저 화해하도록 해 봐. 용서를 구해 봐라고 마음을 주시는데 내가 왜 나도 상처받은 사람이야. 근데 내가 왜 먼저 그래야 해? 나도 억울해.라는 마음으로 여전히 그 회복의 문 앞에서 멈춰 계시진 않으십니까? 물론 어떤 것들은 결단하고 또 정말 마음을 먹고 용기를 내어서 실행에 옮기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어쩌면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숨어 있는 나의 그 아케디아를 찾아서 내다버리는 신속한 순종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성령님이 어떤 말씀을 가져 여러분의 마음을 끊임없이 계속 노크하고 계신다는 것이 느껴지신다면 여러분 그것은 이제 때가 되었다는 주님의 음성일 수 있어요. 이제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겠어.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갈 때가 된 거 같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마음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케디아는 순종과 변화 앞에서 멈춰 있는 마음입니다. 그 아키디아를
찾아서 내다버리십시오. 성령님의 음성에 신속하게 순종해서 하나님을 본받아 새롭게 변화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부지런하게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에베소서 말씀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사랑해야 하는 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가 먼저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세상은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부지런해야 해라고 말하고요. 종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어떤 경제에 이르기 위해서 부지런해야 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주님은 그것과 반대로 말씀하시죠. 너희는 이미 받았기 때문에 너희 이미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답게 사랑받는 자녀답게 우리 자신을 기꺼이 바꾸어 주님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보여 주셨어요.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자기 자신을 바꾸셨습니다. 온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가 피조물에 맞추어 기꺼이 사람이 되셨죠. 죄가 없으신 가장 순결하고 의로우신
그분이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기꺼이 불결한 죄인이 되겠다라고 마음 먹으셨습니다.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 기꺼이 우리 곁에 오시겠다고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여러분 주님도 주님의 그 성실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우리 곁에 머물고자 애쓰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메시지 성경은 에베소서 말씀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바른 행동을 배우고 익히듯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살펴서 그대로 행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대부분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사귐을 지속하고 사랑의 삶을 익히십시오. 여러분, 아케디아를 버려야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살펴서 그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이 아케디아를 버려야만 하나님과의 사귐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아케디아를 버려야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사랑의 삶을 익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 성령님께서 여러분 속에 생하시는 글들을 잘 살피시고 신속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행해 보십시오. 여러분 속에서 일하신 성령님을 여러분의 사랑을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기다림에 지치게 하는 바로 그것이 아케디아 가장 치명적인 죄악입니다. 사랑받은 자답게 사랑하는 것을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새롭게 변화된 사람답게 변화하는 것을 미루지 마십시오.이 이 시간 잠시 눈을 감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