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네.이 아멘.이 귀한 예배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합니다. 저는 이 사귐의교회 공동찬에서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온 권우경 형제입니다. 저희 가정은 지난 2년 6개월 동안 이곳 사귐의교회에서 예배하며 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큰 사랑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공동체가 분해 주신 그 따뜻한 격려와 기도가 저희 가정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틴목이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처소로 이사를 앞두고음 그동안
받은 사랑에 조금이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용기를내어이 자리에 섰습니다.이 이 떠나는 아쉬움은 정말로 크지만음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가장을 대표해서 인사를 드립니다. 사실 저는 어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이 자리에 서서 어 말씀을 전하는 것이 참 부끄럽고 예 떨리지만 1부 지나서 2부는 안 떨릴 줄 알았는데 더 떨리네요.네 네. 오직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주신 이 작은 감동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비록 서툴더라도 제 입술을
통해 흘러가는이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께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무엇일까요? 네. 바로 변화입니다. 하지만 이 변화는 단순히 성격이 좋아지거나 습관이 바뀌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성경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이 새로운 삶이 사시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설계하신 가장 아름다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회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죄가 들어오면서이 아름다운 질서가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마음 중심에 나 자신이 자리잡기 시작한 겁니다. 나 중심의 죄는 우리를 남이 되게 하여 싸우게 만듭니다. 우리가 뉴스를 보거나 어 주변을 돌아보면 늘 이제 갈등과 다툼, 시기와 분열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죠. 왜냐면 죄인들이 모여 만드는 역사의 당연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서 불이 없으면 어둠이 당연하듯이 나만 생각하는 죄의 본성에 지배하는 세상에서이 분열은 피할 수 없는 특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제 죄의 열매가 아닌 사랑의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그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됨입니다. 깨졌던 관계가 붙고 나뉘었던 마음이 모이는 것. 즉 하나님이 처음 지으셨던 그 아름다운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과
장찰 세워질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던 장면 기억하십니까? 그 기도의 핵심 또한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셔서 세상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이 기도는 정말 놀라운 선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믿는 자들이 하나되는 모습.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4장의 앞 1장에서 3장은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변화되었는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4장부터는 우리가 그 신분에 맞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이 뭐냐하면 바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참음으로 서로를 용납하며 하나됨을 지키라는이 명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숙제인데요. 바울은이를 위해서 아주 쉬운 비유를 듭니다. 그것은 바로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옷을 입으라라는
것입니다.이 오늘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벗고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이 다섯 가지 예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예시들을 자세히 보면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관계를 깨뜨리고이 분열시키던이 예습관의 옷을 과감히 던져 버리고 상대를 살리고 하나되게 만드는이 사랑의 옷으로 가라이라는 권면입니다. 이것은 이 개인의 동목이기도 하지만 이 교회가 공동체로서 함께 지켜내야 할 아름다운 동목으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완성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발고 있는 곳은 여전히 죄의 특징이 가득한 옛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냥 우리끼리만 마음이 샀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평안하게 살면 될까요? 안 되죠. 주님은 우리를 거친 세상 속으로 파송하셨습니다. 비록 이 세상과 우리의 가치관이 하나될 순 없지만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분열를 만드는 자가 아니라 화평을 심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죄의 특징인 이기심과 다툼이 지배하는이 옛세상 한복판에서 사랑이라는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거 참 어려운 일이죠. 왜냐하면 남들처럼 똑같이 목소리를 높이고 똑같이이기 이기적으로 사는게 훨씬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쉽고 어려움을 따지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마땅한 길이라는 겁니다. 이제 오늘 주신 이 구체적인 명령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려고 합니다.이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이 내 삶의 자리에서 죄의 특징인 분열을 나타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특징인 사랑과 하나됨을 나타내고 있는가? 어,이 질문을 품고 우리가 함께 입어야 할 새 사람의 옷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어, 먼저 25절의 말씀인데요.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아멘. 옛
세상에서이 세 사람이 보여야 할이 첫 번째 특징은 어 참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 이것은 스가랴 8장 16절의 인용이고 10개명의 9계명인 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라는 같은 명령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하며 이것이 관계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된 것도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고 말씀하며 마찬가지로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정직한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지체인 교회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요. 세상 속에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당근에서 저희가 이제 이사를 하면서 당근 거래를 많이 했는데 이 중고 거래를 하는데 있어서 내가 이 물건의 결함을 뻔히 알고 있어요. 그런데 아 새것 같습니다.라고이 거짓말 하는 사람과 흠집은 좀 있고요. 사용감도 좀 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 중에 누가 쉽게 더 거래를 할 것 같습니까? 아, 네. 당연히 거짓말하는 사람이죠.
우리가 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사실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식으로든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죄의 특징은 내가 중심에서 있는 거지요. 내가 내 마음의 중심, 모든 결정의 중심에서 있는 겁니다. 나의 욕구를 채우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이 죄의 특징이고 그것을 아주 쉽게 잘 이루는 방법이 뭐를 하는 겁니까?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했을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가운데 거짓이 가득한 것은 사실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옛세상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거짓말을 하는지 좀 한번 살펴보면요. 우리는 나를 더 잘 보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이 경험한 일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더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MSG가 계속해서 쳐집니다. 그러다 보면요. 더해지고 더해지고 더해져서 나중에는 말한 나조차 뭐가 진실린지 헷갈립니다. 또이 내
잘못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도 많이 합니다. 주로 어떤 식으로 우리가 말을 하냐면 아 나는 그럴 줄 몰랐어. 내가 알았으면 그렇게 안 했겠지.라고 표현을 하죠. 어 그리고 사실과 다른 것을 말하는 것만이 거짓말은 아닙니다. 오해할 수 있을 만한 애매한 말. 어 일부만 맞는 말을 하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이제 그 그런 거짓말을 할 때 어 보통 이런 생각을 하죠. 아이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자는 그런 세상에서 새 사람으로서 참든 것을 말해야 합니다. 내가 손해를 좀 볼지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거짓말을 잘하는지 자주 하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우리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참된 것을 싫어하는 세상이 그런 우리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우리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처세에
냉한 사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서이 거짓된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이 옛 세상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새 사람의 특징. 이제 두 번째는 분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26절과 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아멘. 아멘. 이것은 이 앞뒤에 주어진 이 명령의 형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뭐를 벗고 뭐를 입어라는 형식은 아닌데요. 의미상으로 보면
여기서도 여전히 벗어야 할 것과 입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명령은이 문자적으로 좀 번역을 해 보면요. 분을 내어라. 하지만 죄를 짓지 말라가 됩니다. 악한 분노를 버리고 선한 분노를 입으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명령에서의 강조점은 악한 분노에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선한 분노가 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이나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표현하셨던 분노는 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될 것에 대한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분노해야 합니다. 남의 죄에 대해서만 분노할게 아니라 나의 죄에 대해서도 분노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분노해야 합니다. 이러 분노는 허용될뿐 아니라 필요하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매우 강력하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감정에 사로잡히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이 우리의 분노는 대부분 죄악된 분노입니다. 그래서 그 시작에서부터 이기적인 악한 분노를 우리가 하기도 하고 혹은 선한 분노로 시작한 것이 잠시 시간이 지나면 악한 분노가 됩니다. 그런 분노는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사람마다이 거짓말하는 상황이 다른 것처럼 이 분노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개인마다이 분노를 일으키는 발짝 버튼이 있습니다. 스스로가 아 나 지금 좀 분노하고 싶은데 아 오늘은 왠지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탁 분노를 내가 좀 해야 될 것 같다 그러면서
막 일부러 분노하고 그러지는 않죠. 대부분 다른 사람에 의해서 버튼이 눌러져서 화를 내게 됩니다. 남에게 무시당하는 느낌. 혹은 어떤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서 분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이 분노의 결정적 원인은 내가 아닌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분노가 타당하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사실은 궁극적으로 내가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지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애초에 나의 어떤 이기적인 욕과 생각 때문에 분노하는 것은 그 분노가 어떠한 것이든지 다 죄악된
분노라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때로는 선한 분노가 악한 분노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의 죄에 대한 분노가 결국은 그 사람을 정제하고 비방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요. 그러면서 죄를 죄로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이 분노의 마음을 오래 품고 있을수록 마귀가 공격할 수 있는 틈이 생기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 그런데 사실이 해가 지도록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표현은 아닌데요. 우리가 해가 끼 여름에는 조금 더 오래 분노해도 괜찮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분노를 아 빨리 멈춰야 하는 걸까요? 아니죠. 최대한이 빨리 분노의 마음을 가아앉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길게 가지고 잠자리까지 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어 왜냐면요. 분을 품고 우리가 이 잠자리에 들면 우리는 그 분노를 계속 묵상합니다.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곱씻고 곱씻고 되새기면서 분노를 키우고이 분노의 대상을 절대 악으로
만들고 나를 선한이 피해자로 만듭니다. 그런 순간에 마귀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극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면서 그 분노가 큼새 우리를 다른 죄로 이끌어 갑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분노한 이유를 생각해 보고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빨리 내가 결정하면서 분노의 감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분노에 휘둘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이 이 세상은 내 것을 얻기 위해 혹은 지키기 위해서 분노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분열을 가지고 오죠.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이제 새 사람이 되었다면 그러한 분노를 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특징이 돼야 합니다.이어서이 세 번째 특징은 도둑질하는 세상에서 자기 손으로 수고하는 겁니다. 28절을 보시면요.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이 세 번째 특징은 일과 재물이 관련된 그런 특징입니다. 도둑질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선한 일,
즉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 가진 것을 나누는 것 그것이 새 사람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이라고 하면요. 보통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도둑질은 꼭 그런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가능한 적게 힘써서 더 많이 얻고 싶어 하는 그런 성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 법이 허용하는이 범위 안에서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태도가 우리
삶 전체에 습관처럼 자리잡을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법적으로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도 아유, 들키지 않으면 괜찮아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들켜도 아우 내가 운이 없어서 들켰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도둑질인 겁니다. 그럼 도둑질이이 세상에 가득하죠.이 이 제가 이 한동안 목사라는 직분을 내려놓고 회사에서 최근까지 일을 했습니다. 일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이 맡겨진 일을 다 묵묵히 감당하고 퇴근 후에는
가정을 잘 돌보고 또 주이면 교회에 나와서 맡겨진 책임을 당하는 분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마음 깊이 어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요. 사역자로 있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아, 그냥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막상이 현장에서 체험을 해 보니까 그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이 하루를 버텨내는 것 자체가 이미 헌신이었어요. 지친 몸으로 다시 가정을
책임지고 또 교회까지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수고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어요. 저는 항상 입만 살아서요. 말로만 헌신을 얘기했어요. 정작 성도들의 삶의 무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어, 큰 좀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또 다른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제 근로 시간이 지나면이 초과 근무 수장이라고 봤죠. 그런데 실제로는 할 일이 많지 않은 않은데도 퇴근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일을 더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뭐 대충 있다가 늦게 퇴근하는 거죠.이 이 겉으로 보면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합법적인이 수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당한 노동 없이 시간을 부풀려 보상에 받는이 모습을 볼 때 어 제 마음은 좀 무거웠습니다. 어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이것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도둑질의 모습은 아니에요.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이 도둑질이 아니라 정직하지 않은 시간, 성실하지 않은 태도, 맡겨진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지 않는 삶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가볍자는 문제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울은 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 도둑놈 신포를 버리라고 합니다. 남의 것을 어떻게든 얻으려고 하기보다 자기 손으로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단지 먹고 사는 정도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을만큼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태도는 죄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다르죠.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해를 끼치며 살지 않고 오히려 돕는 삶을 선택합니다. 물론 이 빼앗아쓰려는 세상 속에서 나누며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누는 사람은 당연히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왜 나만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억울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손해 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죠.이 이 세상에서는 세상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이 더 빨리 더 많이 얻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을 압니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지금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은 결코 어리석은 선택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고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이 땅에서의 손해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코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이어서 우리 29절과이 30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아멘. 세 사람의 특징.이네 번째는 이 말에 대한 부분입니다.이 첫 번째 특징에서이 거짓말과 참된 말을 하는 것에 대해 대한 명령이 이미 있었죠. 그런데 여기서는 조금 더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이 버려야 할 것은 더러운 말입니다. 여기 더러운에 해당한 헬라의 사프로스는이 썩은 과일이나
부패한 생선 상해 버린 음식처럼 이미 이 썩어 쓸모 없어진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이 거친 표현을 넘어서 그 자체로 부패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비소거나 욕설, 음담폐설, 저속한 말은 물론이고 상대를 조롱하거나 빈정되는 말처럼 의도적으로 상처는 말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겉으로는이 농담처럼 보일지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말이라면 이미 썩은 말이고 뒤에서 언급되는 덕을 세우는 말이 아닌 사람을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썩은 말은 순간적으로 말다툼면서 이기게 해 줄 수는 있습니다. 또한 상대를 눌러서 내가 더 똑똑해 보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다툼과 분열만 남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새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더러운 말을 버려야 하고 반대로 덕을 세어는 선한 말을 소용되는 대로 즉 때에 맞게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혀를 길들이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며 말을 다스린 것을 가장 어려운 일로서 지목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포기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지요. 그게 어렵지만 가장 쉽게 변화가 보여지는 분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음 사실 말이 바뀌는 것은 결국 이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음. 억지로 표현을 고친다고 해서 진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이 하나님의 말씀이 차오를 때 상처되신 위로가 판단되신 이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기보다 하나님이라면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실지 한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살리는 말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말은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말이 아니라 지친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게 됩니다. 바울은 이 명령을 단순한 도덕적 권면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새 사람이 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더욱
깊이 강조합니다. 우리가 덕을 세우는 선한말 대신 사람을 무너뜨리는 말을 할 때 우리의 구원의 구원을 보증하는 인을 치신 성령님께서 근심하신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과 태도가 은혜의 흐름을 막을 때 그분은 슬퍼하시고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는 단지 인간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성령님과의 관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입술을 통해 누군가를 세울 때 그 자리에서 성령님의 기쁨과
은혜도 함께 흘러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말을 그저 흘러가는 말은 그저 흘러가는 소리가 아닙니다. 한마디가이 사람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말은 무조건 우리가 피해야 합니다. 그런 말이 순간적으로 떠오를 수는 있지만 그 생각을 그대로 입밖으로 내서는 안 냅니다. 설령 그 한마디로 내가 그 사람을 이길 것 같아도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세워 주고 하나되게 하는 말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이 더러운 말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 냄새조차 묻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이 정말 덕이 되고 은혜를 끼치는 말인지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죠. 그럴 때는요. 우리가 혼자 고민하기보다 평소 말과 삶에서 본이 되는 형제 자매님들과 자주 교재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그들의 말을 가까이서 듣고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도 사람을 세우는 언어가 베어들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선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가
힘쓰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차 있는지가 결국 말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바뀌면 그 열매인 언어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이처럼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자신을 다듬어 가는 삶 그것이 바로 새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이 세상에서 세 사람이 보여야 할 특징이 다섯째는요. 용서와 관련되어 있는데요. 31절과 32절의 말씀을 함께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아기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멘. 아멘. 옛사람의 특징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 남을 이해하고 용납하면서 내가 손해 볼 것을 내가 손해 볼 것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버려야 할 예세상의 모습을 여러 단어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 비방, 아기. 이것들을 하나로 묶어 보면
결국 이 마음의 태도가 잔뜩 날이서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품어주기보다 조금만 건드려도 그대로 넘기지 않겠다는 그런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그러움이 전혀 없고요. 다른 사람을 품어 줄 여유도 없습니다. 나는 실수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내 잘못은 상황 탓으로 넘기면서 남의 잘못에는 나쁜 의도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언제나 내가 옳고 내가 기준이라고 여기며 상대는 늘 부족하고 문제라고 판단합니다.
나는 많이 참았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변하지 않았다고 쉽게 결론을 내리죠. 결국 이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남을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하고 이겨야 할 상대로 여깁니다. 이것이 죄의 모습이고 아기가 가득한 세상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 이런 세상에 사는 새 사람은 다른 특징을 보이죠. 음. 무슨 특징이냐 하면은 바로 용서하는 특징입니다. 그 기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용서를 구했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 돌아서지 않았을 때 먼저 손내미시는 친절을 베푸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스스로 용서를 구할 힘조차 없을 때 긍휼로 우리를 품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조건부가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의 삶은 계산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는 은혜의 삶입니다. 죄는 나에게 도움이 없는 사람을 밀어냅니다. 나에게 유익이 없으면 굳이 품을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물며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고 비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관계를 갈라놓는 죄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도움이 되는지 따지지 않고 내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복되신 용서를 선택합니다.이 특별히 용서는이 우리의 구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말씀하신 이 1만 달란트 탄감받은 종의 비유처럼 우리는 이미 엄청난 빛을 탄감받은 사람들입니다. 크게 용서받은 자이기에 작은 용서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과 같이 용서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용서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절과 긍휼를 보게 됩니다. 새 사람은 상처를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흘려보내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이 죄의 특징이 가득한 옛 세상 속에서 새 사람이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거짓 대신 참된 것을 말하고 쉽게 분노하지 않으며 자기 손으로 정직하게 수고하고 사람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하고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새 사람의 모습입니다.이 길은 결코 편한 길은 아닙니다. 세상의 방식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로 짊어지는 짐 짐이 아니라 은혜를 구원받은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붙들면서도 세상 속에서 좋은 사람으로 남기 어려운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의 진심어린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의 방식대로 싸우면서 살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전히 새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순 없지만 등을 돌린 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되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갈라놓는 죄를 벗어버리고 하나되게 하는 사랑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분열이 아닌 화해로, 보복이 아닌 용서로, 냉소가 아닌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새 사람의 길입니다.이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는 거룩한 삶을 우리는 종종 이 개인의 문제라고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한 세 사람으로 부름받은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의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이 이 말씀은 개인에게도 주어진 말씀이지만 먼저 교회 공동체를 향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함께 자라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의 죄는 단지 나의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아픔이 됩니다. 나의 미숙함 역시 교회 미숙함으로 드러납니다. 반대로 나의 성숙은 공동체를 세우는 힘이 됩니다. 우리는 각자 따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며 함께 이 세상에서 주님을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함께 거짓을 버리고 참된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함께 의로운 분을 내어도 죄는 짓지 마셔야 합니다. 함께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해서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함께 더러운 말을 버리고
선한 말을 해야 합니다. 함께 모든 나귀를 버리고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 옛 세상에서 새 사람으로서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쉽지 않은 길입니다. 솔직히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르게 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이해해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의 반응으로 세상의 방식으로 반응하지 마십시다. 상처받은만큼 되는 삶이 아니라 받은 은혜만큼 흘려 보내는 삶을 선택합시다. 어이 시간 우리 마음을 다시 주님께 드리며 고백하십시다. 나는 주님께 속한 자되요.이 이 고백이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는 우리의 결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함께 어 찬양하겠습니다.이 이 땅에 내 삶이 비록 벅더라도 주님의 선하심이 되어가리.이 작은 자에 주가 이어가시니 감사로
사는 사람 나 살기 원하니. 내 삶의 시간 속에 주일하시네. 내 모든 여정 속에 함께하시네. 기도 크신 주의 영광을 나보리라. 위대하신은 속한 자 되어 주의 나라 위에 전심으로 살라 주의 마음에 합한 자 맡기신 소명 이루리 나는 주님께 나는 주님께 속한 자들여 주의 나라 위에 절심으로 살리라. 주의 마음에 합한 자여 맡기신 소명 이루리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좋은 사람으로 남기 참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진심이 거절당하고 사랑이 모시당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속했다. 내가 너를 안다. 여러분 상처받은만큼 대갚아주는 세상의 방식에서 이제는 자유해지길 소망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훨씬 더 큼을 기억하여 그 은혜의 힘으로 오늘 다시 한번 용서하고 다시 한번 선한 말을 선택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귐의교회가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방식으로 살아는 소망의 공동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독과 노을 버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보달라고 우리 다 같이 시간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하며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