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네 갈 길을 가거라

2026-02-25 · 요한복음 8장 2-12절 · 박예진 전도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아멘. 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아마 오늘 여러분이 큐티로 묵상하셨을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인데요. 어, 요한복음 8장 익숙하죠? 지지난주 주일에 목사님이 주일날 설교를 하셨던 본문이더라고요. 네. 제가 미리 미안마 선교를 다녀와 해서 원고를 그 전전날 썼는데 이럴 수가. 주일에 같은 본문이 나와서 깜짝 놀랬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아졌어요. 아, 단임 목사님과 같은 본문이라 굉장히 두렵고 떨리겠죠. 그래서 본문을 바꿔야 하나, 어떻게 해야 되나 이렇게 하고 있는데

어, 그냥 고민하다가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두 번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겠지. 네. 누군가 또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겠지. 그리고 내가 오늘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담대하게 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여러분 혹시 이 그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지금 에코가 있는 거 같아요. 네.이 그림은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화가 램브란트라고 하는 어 작가의 작품입니다.이 램브란트에게는 별명이 하나 있었어요. 혹시 뭔지

아실까요? 전혀 모르시겠죠? 네. 저도 처음 알았는데요. 빛의 화가라는 어 별명이 있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이 렘브란트라고 하는 이 작가가 그렸던 작품들의 특징이이 빛과 어두움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색채와 명함의 대조를 사용해서이 빛의 효과를 탁월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의 아주 강력한 강점이었다고 해요. 제가 지금 보여 드리고 있는 이 작품에도 이러한 램브란트의 빛의 효과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작품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자꾸 모르는 것만 질문하죠. 네.이 이 작품의 제목은 간음한 여인입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이 명화를 가져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도이 렘브란트가 그림으로 그렸던 요한복음 8장에 가음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어,이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한 줄기의 빛이 쏟아졌던 그 이야기를 오늘 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눠 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 당시 이스라엘은 초막절이라고

하는 명절 기간이었어요. 어,이 출애굽기와 10년기에 보면요. 유대인들이 꼭 지켜야 하는 3대의 절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유월절이라고 알고 있는 이 무교절 그리고 오순절이라고 잘 알고 있는 77절 그리고 바로 오늘의 본문의 배경이자 장막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초막절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3대 절기는 순례 절기라고도 불렸어요. 왜냐하면 이 세계 절기는 반드시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 유대인들은요. 하나님께서 택하신이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3대 절기가 되면 모두 다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도요.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셨지만 중간중간이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곤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고 명절 기간 동안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명절의 마지막날 아침이 되었어요. 우리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세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이제 곧 사람들도 그리고 예수님도 다시 그들이 왔던 자리로 돌아갈 명절의이 마지막 날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어요. 그것도 자이로

아니고 타이로 끌려오게 된 상황이었죠. 여러분,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어쩌면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유대인에게 아주 중요한 명절 중 하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기도 했겠죠. 그런데 여러분이 바로 앞장에 있는 7장에 보면요. 사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지역에 오고 싶어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같이 유대로 갑시다라고 했을 때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거절하십니다.

너희는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거라. 나는 아직 내 때가 차지 않았으므로 이변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이 명절을 지키러 막 떠나가던 때에도 예수님은 그저 갈릴리에 계셨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굉장히 은밀하게 예루살렘으로 가기 시작하세요. 여러분 예수님의 행동을 잘 살펴보면요. 굳이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얼마 전에 살펴봤던 예수님의 모습도 그랬죠.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시겠다고. 예수님은 왜 갑자기 굳이 그때 사마리아를 가시겠다고 하셨을까요? 왜 그랬었죠, 여러분? 네, 맞습니다. 그곳에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 생명수를 꼭 마셔야 할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저는 어쩌면 요한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이 같진 않았을까라고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예루살렘으로 가신 이유는 그곳에서 꼭 만나야 할 또 다른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여인이 명절이 다 끝나가는 그 마지막 날 드디어 예수님 앞에 서서 그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모습이 썩 좋은 모습으로 주님을 만난 건 아니었어요. 사람들에게 현행범으로 잡혀서 끌려온 상황이었거든요. 그녀의 죄명은 유명하죠. 간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단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간음이라고 하는 건 어떤 죄인가요? 네, 맞아요. 간음은 주로 어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 그래서 사전 쪽으로는

부적절한 성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두 명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성립하는 죄라는 거예요. 남자와 여자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율법에서도요. 간음을 다룰 때 한 성별만 다루지 않습니다. 꼭 동시에 남성과 여성을 둘 다루고 있어요. 만약 이 두 사람이 성읍에서 관계를 맺다가 걸렸다면 둘 다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들에서 관계를 맺다가 걸렸다면 남자만 죽이라고 하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지금 종교 지도자들은 누구만 잡아왔어요?

네. 여인만 잡아왔어요. 그들이 말한 것처럼 이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혀 왔습니다라고 하려면 분명히 그곳에는 그녀와 함께 있던 남자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여러분, 게다가 율법은요 두 가지 경우 모두는 남자를 둘 다 말하고 있지만 여자는 한 경우밖에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 확률적으로도 남성이 같이 끌려온 확률 또는 남성만이 끌려 확률이 높음에도이 율법 지도자들은 여자만 끌고 왔다는 거예요. 여러분, 율법을 말하고 있지만 율법을 말하고 있는 그들조차 율법에서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굉장히 모순적이었어요, 여러분.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게다가 예수님은 이 당시에 이 사건의 목격자였나요? 아닙니다. 목격자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증인으로서의 효력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당시에 예수님에게 공식적으로 여인을 심판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만약 정말 이들이 이 여인의 죄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했다면 그들은 재판관에게 그녀를 끌고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굳이 이 여인을 성전까지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사람들 가운데 세워 놓죠. 왜 그랬을까요? 굳이 이렇게 하는 데는 다 뭐가 있다고요? 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시를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지금 이들이여 율법을 운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해라고 말하면서 마치 정의를 위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요. 사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함도

아니었어요. 성경은 지금 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율법과 정의로 그들의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하여라고 번역된이 단어는 헬라어로 페이하라고 한 단어인데요. 이것을 영어 성경에서는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들은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문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빠져나오기 어려운 곤경에 빠뜨리려는 그 악기적인 마음을 갖고 즉 덫을 놓았다는 것이죠. 우리가 지난번에 죄의 재석이라는 주일 설교에서도이

내용이 잠깐 나왔었는데요. 여러분 만약 예수님이 율법대로이 여인을 돌로 치라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기억을 아무도 못 하시나요? 네. 당시 상황에서는 로마법을 어기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로마에서 권한을 준 총동만이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예수님께서 돌로 치면 안 돼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네. 유대인들의 율법을 어기는 거죠. 이처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실 그 덫을 가지고 온 거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이 여인이 이용된 거죠. 당시 강력한이 가부장적 사회 구조상 여성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쉬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이런 모습은 참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어 자주 발견되기도 합니다. 마치 여인을 사람들 가운데 세워 놓았던 것처럼 정의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치부를 사람들 가운데 세워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뉴스만 들어도 신문 신문만 펼쳐도 수없이 발견되죠. 우리가 히 알고 있듯이 여러분 세상의 권력자들은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그 자리를 어떻게든 더 오래 지켜내기 위해서 종종 자극적인 사건을 터트립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사람들 가운데 세워 놓습니다. 연예인들의 범죄 의혹, 스캔들 등등등을 터트려서 사람들과 포토존 앞에 자꾸 세워 놓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이용하죠. 이처럼 세상은 나를 향한 그 스포트라이트가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다른 누군가의 어둠, 약점, 치부를 이용해 먹기도 합니다. 왜냐면 그게 가장 쉽거든요. 그게 내 자리를 지키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여러분, 그렇다면 뉴스에서 벌어지는 그런 일들 말고 오늘 우리가 오늘 하루도 살아왔을 그 일상은 어떨까요? 제가 느끼기에 우리의 하루도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아요.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학교 또 그 회사 여러분 삶의 터전에 보면 서로 먹고 살기 위해서 내가 더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이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남의 치부와 약점과 실수를 덮어주고 감싸 주는 것보다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이 훨씬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러분 게다가 이 종교 지도자들처럼 약자에게는 엄격하고 강자에게는 관대한 잣대가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고 있죠. 회사 대표의 실수는 그럴 수 있어요. 실수인 걸 알아요. 저게 잘못됐다고 알지만 말할 수 없어요. 그것은 안묵적 침묵이죠. 그러나 부하 직원, 막내 직원의 실수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덮어 줄 수 없어요. 너 왜 이거 이렇게 했어? 내가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여러분, 어쩌면 이것이 오늘 하루 동안 여러분이 마주했을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깨어진 세상의 모습이죠. 여러분, 지금이 시점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어요.이 어그러지고 깨어진 모습이 성경은 바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을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이 가음한 여인을 끌고 와 사람들 가운데 세운 그 무리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사역한다는 사람들이었다는 거예요. 나 예수 믿는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다니는 그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진짜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면 교회에 다녀도 깨어진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것은 곧 그들 안에 참 빛이 계시지 않다는 것과 같습니다. 어, 제가 앞에서 세상은 자신을 향한 그 스포트라이트, 자신이 갖고 있는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하려고 애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면 세상의 빛은 모두 언젠가 꺼져버릴 빛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사람들도 이걸 알고 있어요. 내가 가진 돈이 영원하지 않다는 거. 내가

가진 권력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거.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언젠가는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계속 어떻게든 그것을 유지하려고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하기도 하고요. 때로는이 이야기처럼 남의 어둠을 가져와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기 성경에 나오는 이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죠. 여러분, 그동안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에는요.이 사람들이 누리고 있던게 참 많았어요. 부와 권력이 있었고요. 사람들로부터 아,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율법을 잘 알지? 어쩜

저렇게 철두 철미하지라고 하는 그 인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등장하니까 이게 흔들리기 시작해요.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이것들이 마치지지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그나마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던 그 빛이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이 빛이 우리가 오랜 시간 어떻게든 유지해 왔던이 빛이 내 손에 더러운 거 묻혀가며 유지해왔던이 빛이 저 예수라는 사람 한 명 때문에 꺼질까 봐이 사람들은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가음한 여인을 이용한

것이죠. 여러분, 저는 이 모습이 마치 어 참된 생수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사마리아 연인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꺼지지 않는 영원한 참빛이 내 눈앞에 바로 있는데도 이들은 알아보지 못해요. 그리고 여전히 잘못된 방법으로 곧 꺼져 버릴 그 빛을 지키고자 전정근긍 애쓰고 있죠. 여러분, 예수님은 가음한 여인에게 빛이 되어 주시기 이전에 이들에게도 먼저 진짜 빛이 되어 주고 싶으셨을 거예요. 저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가음한 여인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전 가장 가까이에 율법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정작 참 빛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바로 이들에게도 주님은 빛이 되어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어,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 여러분 안에는 정말 참 빛이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말과 행동에는 참 빛이 비치고 있습니까? 여러분,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는이 종교 지도자들처럼 대체 너희가 세상과 뭐가 다른데라는 질문이 아니라 너희가 다르긴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라는 고백들이 들려야 해요. 이것이 진짜 주님을 따르는 참 빛을 따르는 신앙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어 저는 신앙이 성숙해 간다는 것은 마치 틀린 그림 찾기와 비슷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틀린 그림 한 번씩 다 해 보셨죠? 이게 똑 비슷한 두 사진을 놓고 한쪽의 사진을 보면서 다른 한쪽에 다른 부분을 체크해 가는 거잖아요. 저는 우리의 삶이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처럼 보여요. 얼핏 보면 뭐가 다른데?

너 사는거나 나 사는거나 뭐가 다른데라고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들여다 보면 들여다볼수록 어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 그런 모습들이 발견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틀린 그림 찾기에 동그라미가 많아지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에게도 세상과 다른 부분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참 빛을 따르는 신앙의 성숙함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시나요? 그렇다면 우리 옆 사람에게 한번 다시

이야기해 볼까요? 당신에게 동그라미가 빼곡해지길 바랍니다. 복지니다. 빼곡해지. 네. 끝까지 집중하시고 집중하시고 아직 이야기가 절반밖에 안 왔으니까요. 이어진 이야기를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트랩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주 멋지게 딱 한 마디를 던지시죠.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다 그쳐 물으리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나이가 많은 사람들부터 한 명씩 손해지고 했던 돌을 내려놓고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니까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요. 그 자리 예수님과 그 여인 딱 두 명만 남게 되었어요. 여러분, 이곳에이 가음한 여인을 끌고 왔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 여자를 끌고 왔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 여인과 달라. 그녀는 부정하지만 나는 부정하지 않아. 그녀는 천박하지만 나는

천박하지 않아. 그녀는 어둠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여러분, 여기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이 여인을 군중 한 가운데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감히 예수님께 트랩에 몰아놓고 그를 다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은 자신들이이 여인과 당연히 다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래 그러면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 예수님의 이 한마디 말씀에 그들이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나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어찌어찌 빛나보에게 포장하고 있지만 그럴 듯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직 들키지만 않았을뿐 나도 이 여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 앞에 서니까 그들의 어두움이 단 한 마디 말씀 앞에서도 드러나는 순간이죠.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자 이번엔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말씀을 건내십니다.이어서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님이 그녀를 용서하셨죠,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는 그냥 짧게 나도 너를 정제하지 않아라고 했지만 사실이 한 마디 안에는 어마어마한 것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말 한마디로 그녀를 용서하신게 아니었어요.이 말씀 안에는 주님의 어마어마한 사랑의 대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죄를 대신치고 십자가에 지실 것을 염두하고이 말씀을 하신 거였거든요. 여러분, 죄는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가 치뤄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하셨던 나도 너를 정제하지 않는다라는이 말씀은 이렇게도 바꿀 수 있어요. 내가 너를 대신하여 나를 정지한다. 주님은 지금 그녀를 대신하여 이제 앞으로 정죄당할 그 각오를 하시고이 말씀을 하고 계신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이 전에는요. 아직 내가

되지 않아서 난 예루살렘 가지 않을 거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걸음을 옮기세요. 그리고 이 여인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내 때에 십자가에 내가 달려야 할 그 때에 나를 통해서 용서받아야 할 그 여인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린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좀 더 쉽게 말하면 오늘 우리를 정제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정죄를 당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죄인이 되셨기 때문에 내가 이제는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받은 용서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가 가볍고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죠. 나 대신 다른이가 죽어야만 끝나는이 게임에서 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았는데 어떻게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십자가에 달려야죠라고 우리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그분의 목숨값으로 그분의 피값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원래대로라면이 여인도 그리고 여기 모여 있는 저와 여러분도 어쩌면 돌을 맞았을지도 모를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죄라는 건 이런 것입니다. 죽어야만 끝나는 것이 바로 죄의 무서움이자 무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삭은 사망이라고 성경이 말하죠. 여러분,

그런데 오늘 우리는 돌에 맞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살아서 오늘도 주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나 대신 그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요. 간음에도 괜찮다라고 옹호하는 이야기도 아니고요. 단순히 위로를 전하기 위한 이야기도 아닙니다.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과연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도 너를 정제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그 말 뒤에 감춰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요한복음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까 처음 보여 드렸던이 그림 기억하시나요? 가음한 여인 저 가운데 흰옷을 입고 꾸어앉아 있는 여인이 가음한 여인인데요. 저 여인 위로 한죽이 빛이 쏟아지고 있죠.이 이 여인은 여러모로 어두움에 둘러싸인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약자였고 누구도 참아 부인할 수 없는 현장에서 붙잡힌 죄인이었습니다. 그녀를 보호해 줄 사람도 없었고 사람들과 법은 너는 보호를 받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었습니다.이 여인은 자신의 삶이 곧 끝날 것이라는 그 두려움 속에

아마 무릎 꿇고 앉아 있었겠죠.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은 그런 그녀 위로 한 줄기 빛이 비추었고 그것은 그녀가 다시 살아갈 소망이 피어나는 일이었다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대답을요.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너를 정지하지 않겠다. 내 갈길을 가거라. 이제부터는 죄를 짓지 마라. 나도 너를 정제하지 않는다. 내 갈길을 가거라. 이제부턴 다시 죄 죄를 짓지 마라. 나도 너를 정제하지 않는다. 내 갈길을 가거라. 이제부터는 죄를

짓지 마라. 그녀의 인생이 끝난 줄 알았는데 주님이 말씀하세요. 계속네 갈길을 가라. 주님은 그녀가 그 땅바닥에서 엎드려 있는 그녀가 일어나 어떤 길을 걸어가길 원하셨을까요? 우리 마지막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나도 너를 정제하지 않는다는 주님의 음성은 네가 받을 정죄를 내가 대신 다 받았으니 너는 더 이상 죄인으로 살지 않아도

돼라고 하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이제 그녀에게 가음한 여인이 아니라 또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문이 열렸다는 복음과도 같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여인이 이제 그 어둠에서 벗어나서요.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걷기 원하셨을 거예요. 이제 네가 가야 할 길을 가. 주님, 그게 어떤 길인가요?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참 빛인 나를 따라오는 그 길을 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망의 어둠이 아니라 생명의

빛 그 사이를 거니는 삶. 죄가 아니라 은혜를 더하는 삶. 그리고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마지막까지 당부하셨던 다시 죄를 짓지 않는 삶입니다. 어, 여러분, 그런데 이 그림에서 보이는 이 한줄기 빛이 비치기 전에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저 빛이 비치기 전에 저 한 현장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아마도 가음한 여인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어둠 속에 있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그렇다면 이 여인뿐만 아니라 사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빛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요. 우리 마지막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어, 여러분, 만약 이 자리를 떠나갔던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중 한 사람이라도 마약 주님 저도 이 여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이 끌려온 여인처럼 깨닫고 보니 저도 부정하고 저도 천박했고 저도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그 그 여인 옆에 함께 꿇어 엎드렸다면 과연 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이 여인에게 비쳤던 빛이 그에게도 비추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하셨던 말씀 나도 너를 정지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그 고백을 그도 듣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어둠이 드러날까 모두 떠나갔습니다. 진짜 빛을 보고도 알지 못했거든요. 여러분, 주님이 정제하시는 것은요. 빛이 될 수 있는데도 계속 어둠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죄를 지어서도 아니고 어떤 행위를 해서도 아니라 그 빛이 그 앞에 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세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너도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다. 그러니 내 갈 길을 가거라. 여러분 오늘 어떤 길로 가시겠습니까? 나는 빛이지. 난 당연히 빛 가운데 살고 있어. 그렇게 당당하게 왔지만 사실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 다시 도망갔던 그 무리의 뒷걸음을 따라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맞습니다. 저도 주님이 필요한 죄인이었습니다. 하고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진정한 참 빛이신 주님을 따르시겠습니까? 여러분,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가장 먼저 나의 어둠을 드러내야만 하는 길입니다. 내가 간음한 여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 내가 정죄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나의 약함과 수치를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것. 여러분, 이것이 빛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세상은 이것이 무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죠. 여러분, 결코 빛으로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프고 자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빛은 우리의 벌거벗은 수치를 까말리려는 빛이 아니에요. 오늘이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그 어둠을 밝혀서 이제는 다르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이 이 여인에게 하셨던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너희를 정지하지 않는다. 그러니 주님의 빛으로 나아오십시오. 그 빛을 계속 따라가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 줄 믿습니다. 네.이 네.이 시간 잠시 눈을 감으시고요. 우리 예배트 함께 올라오도록 하겠습니다. 어, 오늘 우리는 빛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우리도 빛을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어둠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죠.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빛이 무서워 어둠으로 다시 도망가 숨지도 마십시오. 주님의 빛이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수치스럽게 하려고 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살리기 위한 빛입니다. 오늘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지하지 않겠다. 내 갈길을 가거라. 여러분, 그 음성 앞에 빛을 피해 숨지 마시고 빛 앞으로 걸어나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이 시간 이런 마음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저도 모르게 숨겨져 있는 어둠움이 있습니까? 주님 알려 주십시오. 혹은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 맞습니다. 저에게도 이런 약함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이런 어둠, 이런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주님 앞에 다 가지고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저에게도 그 여인에게 하셨던 음성을 들려 주십시오. 이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머물며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