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부족함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을 보면서 어떤 부분은 감탄하고 존경하게 되고 제가 배우고 따라가고 싶은 것도 많이 느낍니다. 제가 배울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닮아가고 성장하는 성도님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제가 우리 공동체와 성도님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특별히 다른 방식의 사랑이야 저보다 우리 목자님들, 우리 성도님들이 더 잘하실 수 있지만,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기에
잘하고 싶은 것은 목회이고 설교입니다. 제가 다 잘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잘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말씀과 여러분을, 하나님과 여러분을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이 오늘의 매일성경 본문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절기인 만큼 절기 설교로서 이 본문을 통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단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 아닌데요? 저 뉴스나 유튜브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을 봤는데요. 성경만 하더라도 나사로도 죽었다가 살아나고, 구약에서도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지 않았나요?” 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Resurrection)이 아닙니다. 그것을 뭐라고 부릅니까? ‘소생’(Resuscitation)이라고 부릅니다. 소생은 멈췄던 생물학적 생명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심폐‘소생’술. 그러나 이전과 똑같은 육체로 회복되는 것이기에 다시
병들고 늙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죽게 됩니다. 반면 부활은 새로운 차원의 상태로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썩지 않고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이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이 육체는 죽지 않습니다. 이 차이가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죽음 직전의 몸이 잠깐 회복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 전혀 새로운 질서를 시작하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전과 다른 모습을 갖게 되신 것을 보여줍니다. 대표적으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닫혀있는 문을 통과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홀연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는 기존 성육신하셨을 때와 다릅니다. 기존 예수님의 생애에서는 ‘기적’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 일어났지만, 이제 부활의 몸은 우리 차원에 갇힌 상태가 아니기에 그 존재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렇다고 흔히 영화에서 보듯이 ‘몸의 실체’가 없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영혼’만 둥둥 떠다니는 ‘혼령’의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놀라울 정도로 부활을 말함에서
‘실체’ 즉 ‘몸’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이 또한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데, 제자 중 도마가 예수님이 진짜 부활했다는 것을 그의 ‘몸’을 봐야 믿겠다고 하실 때, 그에게 나타나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하나 있는데... 부활한 몸에 이전의 몸에 있었던 특정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중에 부활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되면, 거기는 ‘고통’과 ‘상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지금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연결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통로가 부활한 예수님에게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의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나라의 권력에 대한 패배이며 수치의 상처라면 그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얻고자 행하셨던 사랑의 흔적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 그 흔적이 있습니다. 또한 부활한 예수님을 제자들이 알아볼 수 있다는 것도 우리의 현재적 삶과
부활 이후 삶의 연결성에 대한 힌트입니다. 부활에 대한 여러 가지 신학적 설명만 하더라도 몇 시간은 더 다뤄야 하므로, 이 정도의 힌트를 가지고 이제 본문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활의 교리’를 설명하려는 목적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더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은 그것을 3가지 포인트로 정리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오늘 설교의 핵심은 부활이 단지 죽음을 이긴 사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분의 사역은 “내가 살아났다”라는 적에 대한 승리의 선전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으나, 어떤 부분에서 무너지고 넘어지게 되었던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초점은 언제나 ‘사람’, 특별히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일, 그래서 그들 또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는 ‘새 창조 사건’이 부활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1. 울고 있는 사람에게 (요 20:1)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요 20:11a)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 마지막을 지켰던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고, 그 무덤에 가장 먼저 찾아간 것도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무덤에 갔던 이유는, 유대인들이 고인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예우가 시신에 향기로운 기름이나 향품을 발라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은 금요일 저녁에 돌아가셨는데, 안식일 규정으로 인해 장례 후 수습을 다급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안식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미처 다하지 못한 작별과 고인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 위해서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 새벽에 일찍 무덤에 갔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대개 동굴과 같은 형태였고, 그것을 큰 돌을 굴려 막아놓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면서도 과연 누가 돌무덤을 열어줄까, 지키는 자들이 허락할까, 반신반의하며 그래도 가보자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 것이죠. 그런데 도착해보니 무덤의 돌문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지키는 사람들이 안을 정비하려고 열었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안을 봤는데 ‘시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황급히 다른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보아도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말씀하셨지만, 그것을 들었음에도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앞서다
보니, 그 말씀을 참된 ‘부활’의 의미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확인한 뒤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마지막으로 뭐라도 해드리고 싶었는데, 시체가 도난당하여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황망하고 슬픈 마음에 잠겨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마리아가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은 기쁨이 아니라 큰 상실의 슬픔이었습니다. (요 20: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요 20: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요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무덤가에서 울던 마리아는 인기척을 느낍니다. 거기에 천사와 함께 예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신의 앞에 계시는 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사람은 너무 슬프면, 자기의 판단과 감정에 깊이 빠져 있으면,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도 못 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배제하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말을 거시지만, 그때까지도 마리아는
동산을 지키는 사람인 줄 알고 슬픔 가운데 응답할 뿐입니다. 그런데 전환점이 무엇입니까? “마리아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부활하신 것을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 비로소 알아봅니다. 저는 무엇을 이해함에 있어서 논리가 필요한 사람이어서, 사실을 확인하고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힘쓰는 편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공부하는 데는 큰 장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만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을 빼고 마리아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그녀는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지 않고, 자신이 아끼던 것을 상실했으며,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방법과 방향을 잃어버린 무력감 가운데 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또 이곳에 있는 많은 분들의 최근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갇혀 있으면 주님이 앞에 계셔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에 나와서 앉아 있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그저 내 슬픔에만 잠겨 있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다가와 말을 건네십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부활하신 우리의 주님은 살아계시며 다가와 말을 건네십니다. 슬픔을 넘어서 그 주님을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과 함께 그 슬픔을 회복해 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우리의 주님은, 울고 있는 사람을 찾아와 이름을 부르며 다시 살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 문을 닫고 있는
사람에게 지도자를 잃어버린 제자들을 강하게 붙들고 있었던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혹시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은 ‘두려움’에 강하게 묶여 있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저도 한때 두려움에 깊이 묶여 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기도도 하지 못할 만큼 눌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살리신 것은 결국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이는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두려움에 너무 휩싸이면, 말씀을 보고 회복하는 가장 단순한 기초도 행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성령께서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말씀을 붙들면서, 두려움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제자들의 상태도 두려움에 빠져 있는 모습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미 마리아가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고, 유대인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한 공간에 스스로를 가둔 채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두려움의 무덤 속에
가두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것입니다. (요 20:19)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첫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하였다는 마음,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에서 오는 체념,
세상과 악에 대한 패배감 속에 있었습니다. 그 상황 가운데서도 그런 세상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자신들을 가두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향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두려움을 넘어서서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저의 이야기를 했었지만, 조금 이어서 고백해보자면... 저는 저에게 만나게 하신 몇 가지 말씀을 진짜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지금
나는 기도할 힘도 없지만, 나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이 나를 위해서 대신 기도하심을 믿으며, 기도할 수 없어도 예배의 자리에 앉아서 버티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두렵게 하던 모든 상황의 핵심은 영적 무력함과 그와 함께 찾아온 무가치함에 대한 것이었는데, 저는 말씀을 의지해서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약하지만, 내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니, 더 이상 나는 정죄를 받지 않으며, 나는 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그때부터 저를 꽉 누르고 있던 두려움에서
점차 제가 해방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사실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저의 회복의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통해 저는 비로소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이해하고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 저의 영적 회심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오셔서 “너희 실망이다. 너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이 배신자들.” 이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책망하려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데,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의 걱정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시며 오셔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지금껏 가르치셨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며, 믿음이 굳건해졌습니다. 이제 세상 앞에 담대한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강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손과 옆구리도 보여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은 고난의
흔적을 지워버린 승리가 아니라, 그 상처를 통과하여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그랬듯, 제자들에게도 이 사건은 그들의 삶을 붙잡아주는 중요한 기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래서 깊은 실패감과 두려움에 잡혀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며 깨닫고 배운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었던 것처럼, 기독교의 부활은 상처의 삭제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상처가 별이 된다는 말처럼,
내가 극복하고 넘어선 상처는 나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회복과 변화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주님은 그들의 회복시키신 후, “내가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전히 너희는 나의 뜻과 사명을 이어가는 제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치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에게 다시 가락지를 끼워주며
너는 여전히 내 아들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실패감 속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사명의 길로 이끄는 것.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모습입니다. 3. 의심하는 사람에게 (요 20: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은 이 제자들의 회복에 함께하지 못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의 이름은 도마입니다. 왜 하필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생겨난 이 도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메시지가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미 그의 성격을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요 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를 단순히 ‘의심 많은 제자’라고만 보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도마는 ‘이해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그러나 이해되는 순간 목숨을 거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제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러 베다니를 가려 하실 때, 당시의 상황을 빠르게 인지합니다. 위험한 상황이 맞습니다. 그는 어쩌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하지만, 주님이 가신다면 나도 가겠다는 강한
의리로 충성심을 보여줍니다. (요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는 예수님이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보통 누군가는 명확히 몰라도 ‘아멘~’ 하겠지만, 도마는 즉각 반문합니다. 그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 넘기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 영적 비유로 드신 ‘길’을 물리적인 길로 오해하는 그의 한계였지만, 그의 질문 덕분에
성경의 핵심 구절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마와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물론 도마의 일부분이 아니라 도마의 전부를 닮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도마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바꾸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심은 있지만, 주님 앞에서 변화할 수 있는 ‘거룩한 수용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도마에게 있는 이 거룩한 수용성, 도마의 의심이 진리
앞에 다뤄지면, 가장 담대한 믿음이 될 것을 아시는 주님은 도마를 찾아가십니다. 저는 이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요 20: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요 20:27)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주님은 제자들이 있는 곳에 다시 오십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번의 방문은 도마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왔다.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예수님은 사람을 획일적으로 다루시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이름을 불러주시고, 도마에게는 그의 요청에 친히 응답해 주십니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선언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과 사명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는 주님의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도마는 이 예수님을 만난 후 고백합니다.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의 이 고백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최고의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이후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심하는 자에서 복음의 확신으로 살아간 자로
바뀐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무너져 있습니다. 마리아는 슬픔에 갇혀 있었고,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문을 닫고 숨어 있었고, 도마는 의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각각 다르게 만나십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 사람들도 영적으로 ‘부활’시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죠. 소생과 부활의 차이. 주님이 주고 싶은 것은 영적 소생이 아니라, 영적
부활입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너진 사람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짜 만난 사람은 이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슬픔은 기쁨이 되었고, 제자들의 두려움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 주님을 전하는 용기 있는 외침으로 바뀌었으며, 도마의 의심은 주님을 위해 순교까지도 하는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난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이 책을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요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 또한 여러분 개개인에게 각기 다르게 찾아가십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말씀을 통해 두드리시고 위로하시고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는 동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히 과거의 예수님에게 있었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 진정한 회복과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현재적 능력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담대하게 구합시다. 주님, 저에게도 함께해주십시오. 특별히 연약함과 두려움과 의심에 빠져 있는 분들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더욱 담대히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과 반드시 함께하시며 여러분을 주님의 부활과 승리로 부르실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