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의교회의 첫 예배가 2017년 1월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제 6년이 되어갑니다. 그럼 주일만 310번이 지난 것이죠. 그 이야기는 제가 주일설교만 그 정도 사귐의교회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외부 설교자가 오지 않은 모든 주일과 금요기도회, 그리고 가끔 새벽예배까지 아마 다 더하면 못해도 400~500번 사귐의교회에서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느끼는 자긍심이 있다면, 500번의 설교 중 단 한 번도 준비 없이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원고를 쓰지
않은 채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즉, 400~500번의 설교에 대한 원고가 다 저장이 되어 있습니다. 블로그에도 다 올라가 있습니다.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베껴서 썼으면 못 올리겠죠. 그저 주님이 제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해보고자 했던 애씀이 어느덧 6년이 되어갑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그 안에서 변화되어 가고 있는 여러 모습들이 참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공동체 모임에 들어가서도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몇 년 전 설교 때마다 거의 ‘소귀에 경 읽기’처럼 느껴질 만큼 멍하고 있던 청년들이 지금 그 말씀을 되뇌기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놀랍고,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사역자 미팅을 쭉 했습니다. 스스로 체크해오는 질문 리스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지난 1년 동안 성도님의 영적 성장은 어떠했나요?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리더들이 성장했다고 고백했고, 그중에 7명은 많은 성장을 했다고 스스로 평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많이 성장했다고 느낍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한번 같은 질문을 드려보면 어떨까요? 지난 1년 동안 성도님의 영적성장은 어떠했나요? 누군가는 성장했다고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그대로라고 느낄 수도 있고, 어떤 분들은 퇴보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장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지 못하다고 느낀 분들에게는 이제 반등하여 함께 자라가는 것을 꿈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2022년을 마무리하고 2023년을 준비해가며, 신앙적으로 좋았던 한해였든, 아쉬웠던 한해였든 이제는 거기에
매여있지 말고, 앞으로 우리의 걸음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함께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5세로 첫 개척의 발을 들여놓았던 저도 이제 40대가 되었고, 그 사이 우리의 환경, 우리의 모습, 우리 공동체의 모습까지 참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제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귐의교회를 개척한 순간부터 사귐의교회를 통해 만나게 된 여러분들을 위해 내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겠다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마음이 없었다면 저희가 개척하고 나서부터 지금껏 걸어왔던 방식으로 살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이 순간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여러분이 저에게 참 사랑스러운 분들이기에 여기까지 왔고, 여러분이 또 저를 사랑해주었기에 여기까지 왔으며, 우리가 함께 사랑하기에 오늘 나누고 싶은 진솔한 이야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2017년부터 첫 2년은 자유로운 주제로 설교를 했지만, 2019년부터 항상 <매일성경>의 본문을 따라서 설교를 해왔습니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고, 여전히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1년에 한 번 정도 제가 매일성경을 벗어나 자유롭게 설교할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러한 날입니다. 제가 작년까지는 <사역 설교>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왜 사역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마음을 나누는 설교를 해야겠다고 느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올해 제가 명칭을 살짝 바꿨음을 느끼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와 사역에 대한 설교> 사실 사역설교라고 이미 언급한
부분으로 인해 저렇게 이름을 포괄적으로 붙여놓은 것일 뿐, 사실 이 시간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에 관한 설교입니다. 저는 20대에 신학을 하면서 늘 <선교>를 꿈꾸며 살았습니다. <선교>라는 단어, <열방>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유는 한국에 교회가 너무 많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가진 꿈은 미전도 종족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늘 제가 말했던 오지 선교, 순교에 대한 저의 비전이 다 그런 것들이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선교지를 20대에 기회가 되면 나가보기도 하고, 실제로 선교사님 댁에서 같이 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6개월 동안 선교에 대한 훈련을 받는 DTS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DTS를 다녀오고 난 이후에야, 다시 학교로 돌아가 열심히 신학 공부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말 그대로 헛바람만 잔뜩 든 사역에 미쳐있는 신학생이었고,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해보지 않았던 삶이었죠. 그래도 제 나름대로 삶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공부를 했던 때가,
다시 복학했던 그 시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고3보다 대학교와 대학원 때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또 지금 보면 개척하고 더 열심히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20대 중후반이 될 때까지는 공부와 전혀 무관한 행동대장 같았던 제 삶에 ‘성경’이 주는 묘미를 깨달아 가며 공부하는 삶이 시작된 것이죠. 복학 후 첫 학기는 공부의 습관이 안 되어 있어서 조금 헤맸는데, 그래도 열심히 했기에 휴학 전보다 성적이 많이 올랐습니다. 신학대학교 4학년에
올라간 다음 학기에는 더 열심히 했더니, 모든 과목 A+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체 수석이었죠. 그 뒤로 대학원을 가게 되었고, 대학원에서도 6학기 중 3학기가 수석이었습니다. 네. 저는 지금 제가 열심히 했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후로도 저는 성경을 더 잘 가르치고 싶어서 결혼 후, 아내와 아이를 두고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학교에 들어가서 2년을 더 공부했죠. 제가 낯부끄럽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한편의 설교가 나오기까지
그것을 위한 수많은 시간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는 하나하나가 고민하며 새기는 작품이지, 대량생산 하는 보급품이 아닙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 여러분의 상태와 모습을 기억하면서 필요한 설교를 맞춤으로 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유튜브에 설교가 너무 난무하다 보니 설교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잊을 때가 있습니다. 틀면 나오니까요. 보급품을 대하듯 가볍게 설교를 여기기 쉽습니다. 또한 지금 제대로 안 들어도 놓친 것은 다시 들어도 된다고 여겨도
될지도 모르죠. 그렇게 이 시간을 무장하지 않고 마음을 놓아버리면 여러분의 예배는 실패합니다. 성경 시대로부터 은혜는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고, 여러분이 설교자의 노력과 가치를 잘 이해하며 들어야, 여러분에게 설교가 귀해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당연히 저뿐만 아니라, 남의 것을 그냥 가져다 쓰는 설교자가 아니라면, 주일설교를 위해서 저는 피나는 일주일을 다 보내리라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보내는 시간이니, 여러분도 사랑으로 이 시간을 대해 주십시오. 둘째,
제가 그렇게 공부를 진지하게 해보면서, 그전까지 제가 갖고 있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교회가 많으니까 나는 복음이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여겨왔는데, 과연 한국의 교회 안에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잘 전해지고 있나? 이 의문이 저를 심하게 두드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선교지는 머나먼 타국이 아니라, 제가 머무는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데 더 시급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양주에서 개척하게 된 이유를 아시는 분들이 있겠죠.
저는 우연히 부교역자 사역을 위해 한 번도 듣지 못한 양주에 오게 되었어요. 2년여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사역을 마무리한 후, 저는 다시 저에게 익숙한 남쪽 마을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제게 진지하게 이런 이야기를 건네셨어요. “목사님, 주제넘지만 저는 목사님이 양주에 남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양주에 오래 살았지만, 목사님이 전해주는 설교들이 제가 지금껏 잘 배우지 못한 것들이 많고, 이 도시에 남아서 계속 그런 설교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목사님의 결정을 위해 함께 작정 새벽기도를 하겠습니다.” 사실 당시 저에게 양주가 그렇게 사랑스러운 곳도 아니었어요. 그냥 추운 동네였어요. 몸도 마음도 추운 동네. 그런데 저 이야기가 저의 마음에 큰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선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제가 받은 응답은 이곳이 저의 선교지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6개월 뒤에 사귐의교회를 양주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은 이 도시 또한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지역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교회 안에서 자랐지만, 교회 안에서 느꼈던 갈급함, 신학이 부재한 설교, 성경과 거리가 먼 공동체, 세상보다 못한 삶의 모습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도리어 교회를 걱정하는 모습들이 저에게는 큰 아픔이자, 구원해내야 하는 것이 세상 이전에 교회와 성도들이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진리 안에 바로 서야, 세상을 바꾸든 뭘 하든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저에게 컸습니다. 제가 6년간 했던
500편에 가까운 설교를 다시 들어가서 처음부터 들어보신다면 아마 느끼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6년 동안 저도 더 공부하고 성장했으니, 지금이 더 깊은 신학적 이해를 갖게 된 것은 분명한데... 6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가 가진 생각, 방향성, 그리고 꿈은 늘 똑같다는 것입니다. 저는 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고민. 바로 어떻게 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 수 있을까? 이 치열한 몸부림 말입니다. 아무리 무모해 보여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고 싶고... 자꾸 실패하더라도, 성경이 추구하는 사랑을 하고 싶고... 아무리 힘들어도, 성경이 보여주는 공동체, 성경적 교회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꿈이 저에게 있습니다. 세상에 여전히 좋은 교회들이 많이 있음을 압니다. 우리만 무슨 특별한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좋지 않은 모습을 가진 교회들도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적인가 아닌가를 고민하기보다 다른 것을 고민하는 교회가 너무 많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다른 교회가 이렇게 하니까 우리도 이래야죠”라고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저를 절대로 설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다른교회의 모습, 크고 잘나가고 부흥하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그 교회 닮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 사이즈 키우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부흥하니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교회를 떠날지라도 제가 그것에 마음 아파한다면, 그것에는 여러 다른 아픔과 고민이 있어서이지,
우리 교회의 숫자가 줄기 때문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게는 큰 교회, 유명한 목사가 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교회를 부정하겠다, 거부하겠다가 아닙니다. 크고 작음은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고 맡기시는 분량입니다. 제 결정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교단 안에서는 가장 빨리 성장한 교회인 것이 사실입니다. 교단 밖에서도 신기하게 여기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무언가 잘해서 우리 교회에 성도들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저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찾아가셔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우린 맡기신 분량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힘쓸 뿐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정말 올해도 최선을 다했고, 정말 정말 수고 많았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사랑으로 섬겨주시고, 힘써 도와주시고,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성도님들이 되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적어도 교회가 커지는 것이 저의 목회의 목표로서 저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은 확고한데, 반면 제가 너무나
쉽게 설득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성경적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제가 신학적으로 검토하고 목회적으로 판단해봤을 때, 이것이 성경적이라고 믿으면 확 설득됩니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이것이 성경적이다’라는 말을 잘 사용합니다. 그냥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다 성경적이라고 갖다 붙이기도 합니다. 자기네 이권에 따라 자기들 마음대로 다해놓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짜 성경적인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성경을
놓고 씨름해야 합니다. 저는 사실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는 “내가 뭘 그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했지?” 하는 생각이 가끔 들었어요. 어차피 내가 부교역자로서 하는 것은 차량운행, 주보 만들기, 전화 심방, 교회 청소 이런 것들인데... “차라리 신학교에서 ‘복사기 고치는 법’이나 알려주지”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개척하고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금 제가 ‘설교만’ 하며 살 수 있으면 진짜 편할 것 같아요. 목회는 ‘설교’가 반이고, ‘설교
외 요소’가 반이더라고요. 지금 제가 성경공부 기초부터 다시 해야 하는 수준이었다면, 저는 지금처럼 절대 목회 못 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초적인 신학공부를 다 해두었기에 지금 감당하고, 그 이상의 고민을 하고 있죠. 제 고민은 어떻게 우리가 끝까지 ‘성경적 교회’ 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과 고민이 저만의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우선적으로 ‘무엇이 성경적 교회인가?’에 대한 이해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성경적 교회인지를 이해해야, 어떻게 그 모습으로 끝까지 살아갈 수 있을지, 그 모습을 크기의 변화,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지속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교회. 우리는 이 단어를 대하며 정말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들의 생각들을 모아서 좋은교회의 모습과 방향성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표현하면 성경적 교회는 ‘민주적 교회’가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A4용지를 하나씩 나눠주고,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면 좋겠는지 쓰게 한 후, 모아서 그것을 실천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매우 민주적 과정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원하는 모습의 교회를 만들 뿐입니다. 우리의 의견을 들어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매우 인본적인 교회의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다수결에 의한 결정을 거부합니다. 그것이 민주적이지만,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은 인간의 모습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민주적 교회가 성경적
교회는 아닌 이유입니다. 저는 민주적 교회를 꿈꾸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만들고 싶은 교회의 모습이나, 제가 만들고 싶은 교회의 모습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배워야 하고, 그것으로 제가 먼저 설득되어야 하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성경으로 해석하며 함께 꿈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꿈은 성경적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저도 순종하고 여러분도 순종해야 우리가 그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동일하게 제가 여러분에게 제가 목사로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다 받아서 거기에 나온 대로 목회를 하고자 한다면 저는 아무것도 못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이 다를 테니까요. 그리고 목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목회를 해나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렇게 하면 실패한다는 이야기밖에 안 합니다. 사람들의 NEED에 맞추려고 했던 지도자는 100전 100패 했습니다. 보통 성경에서 하나님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하자고 하지요.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할까요? 사랑받고 싶지 않은 지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꿈꾸는 교회를 만들려고 하고, 나에게 맞는 교회가 되어주길 바라고, 나에게 맞는 목회자가 되어주길 바라면... 여러분의 그 모든 바람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라면, 저는 아마도 여러분에게 늘 실망을 안겨드릴 것이고, 여러분의 바람과 교회는 같은 방향으로
항상 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100명이 있다면 100명 모두가 각각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적 교회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적 교회를 향한 꿈을 함께 꾸려면, 모두가 각자가 생각하는 자기 기준을 내려놓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 필요할 때는 바른 신학 위에, 그리고 성령님 안에 민감하며 겸손하게 반응해야만 우리는 한 목표를 갖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은 손이 손대로 발이 발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머리 되신 예수님의 지휘를 따라서 그분의 뜻과 생각과 비전을 향해 우리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아직 괜찮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신뢰해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분위기가 안 좋은 공동체로 깨어졌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곧이들리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미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사랑받고 싶고, 여러분에게 인기 있고 싶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제가 성경적 목회와 성경적 교회를 꿈꾸며, 저는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때로는 미움받을 수 있음을 각오했고, 싫은 소리도 할 수 있기를 각오했습니다. 여러분도 결단하십시오. 내가 원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 나를 바꾸고 나를 맞출 것인가? 저는 얼마든지
여러분을 기다려줄 마음은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짜 교회가 되고자 하는 꿈을 향한 열정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여러분이 그리 편한 신앙생활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러했던 것처럼, 저는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기를 쉬지 않을 것입니다. 설교로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고,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와 재정을 써야 한다고 말할 것이며,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여러분이 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 줘야 한다고, 돈벌어서 베풀어야 한다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내어줘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유가 있다면 딱 하나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전하지 못할 바에야 여기에 없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제 청춘과 제가 가진 모든 물질과 안정성도 다 내려놓고 달려든 것은, 정말 그런 공동체를 세워보고 싶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6년 전, 지금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예배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몇 명일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몇 명이든 이 꿈에 헌신한 공동체를 누려보자,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예배를 하자. 오직 그 마음 하나로 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신약시대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시고, 그 결과 이 땅에 사역의 결과로 딱 하나 남겨놓고 떠나셨어요. 예수님의 사역 결과물은 딱 하나입니다. 뭔지 아십니까? 그것이 ‘교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뿌려놓은 씨앗이 ‘교회’로 열매 맺습니다. 왜일까요? 저는 이 말씀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성경이 말하기를 교회가 그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아멘. 그런데 그 교회를 설명하기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설명하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죠. 지금도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세상 모든 만물을 충만하게 하고 계시는데, 교회가 바로 그 충만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볼게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이라는 표현은 ‘현재형’입니다. 즉, 지금도 충만하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충만하게 하셔야 합니까? 원래 충만하게 주셨는데, 그 충만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충만하게 하고 계시는 중이라는 것이죠. 성경으로 이 내용을 풀어서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 설교를 통해서 배웠듯, 하나님이 가지신 원래 계획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온 세상과 사람이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풍성한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가장 행복한 삶, 가장 하나님 안에 행복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서 세상도 깨어지고 우리도 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빈자리가 생겨서 공허해지고, 세상은 빛을 잃고 어둠 가운데 사탄의 거짓 진리가 가득합니다. 세상도 우리도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나를 날마다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시는 존재를 잃은 것입니다. 사랑은 참 소중한 것이거든요. 세상 사람들이 언뜻 보기에는 보기 좋은 것, 다른 무엇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랑으로 채워지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죽기 바로 직전에 딱 한 통의 전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봐요. 여러분, 그 전화를 여러분 재산 지키는 무엇에 쓰시겠어요? 모든 사람이 그 시간 가장 보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을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시는 분이었는데, 그분을 잃어버린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외롭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사람을 통해서라도 채움 받고 싶어 해요. 그런데 문제가 뭐예요? 내 옆에 있는 이 사람도 같은 상태입니다. 깨어져 있어요. 이 사람도 자기 살기에 바쁘고, 나를 사랑해줄 여유가 없어요.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으로 서로를 채우기보다 깨어진 상처로 서로를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삶이 끊임없이 소모적입니다. 채워지지 않고 소모만 되어서 고갈이 되었는데, 그래도 계속 퍼내야 해서 마른 우물의 바닥을 긁는 것처럼 긁어가며 아파합니다. 그 메마른 바닥처럼,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의 참 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 고갈됨, 그 메마름, 그 차가운 현실, 쓸쓸함이 하나님이 원래 세상에 주셨던 충만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세상의 깨어짐, 세상의 공허함이라고 말하고, 충만함을 잃어버린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깨어진 세상을 다시 회복하고자 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어진 자들이 회복되어 돌아오고, 세상의 거짓말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성령 안에서 충만함을 되찾아 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속해 있던 삶이 하나둘씩 회복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함께 그분을 예배하는 공동체,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바로 그 교회가 하나님께서 회복하신 첫 번째 대상이자, 이제 더 나아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그럼 죽을 때까지 뭐 하나요?” 뭐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회복하고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충만함이 되어, 그 안에서 나도 날마다 하나님으로 인해 채워지고, 내 주변의 깨어진 사람들을 회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성경적 교회란 무엇인가? 하나님으로 인해 충만함을 누리고, 만물을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함께해나가는 것이 성경적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그 징표로 성령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그 성령은 우리 안에서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그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삶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겠다고 회심하고 결단해놓고, 정작 그로 인하여
그 결단의 마음을 받으시고 이제 내 마음을 성전 삼아 거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우리가 회심한 것이 맞는가? 저는 적어도 여러분이 그러지 못한 내 삶의 모습을 보면 아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그 모습을 인정하면 안 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이렇게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허약한 이유는 우리가 성령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인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그분께 전권을 내어드리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경험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성령님이 제 안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시는지를 경험한 적이 있어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교회의 성가대원이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는 어린이부 교사를 했습니다. 당연히 자라면서
성가대도 하고, 중고등부 임원도 하고, 청년이 되어서는 신학생이니 더 많은 사역들을 했죠. 저는 방학이면 교회의 모든 사역에 다 참여를 해서 섬겼고, 학교 동아리 활동, 캠프 스탭 등 정신없이 사역했어요. 그런데 그 모든 일을 ‘제힘으로’ 했습니다. 제가 좋아서, 부모님 좋으라고, 거기 사람들이 좋아서, 열심히 하면 칭찬받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바뀌었을 뿐,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해서 그 모든 일을 끌어안고 하며 살았던 것이죠. 내 힘으로 붙들고 행했던 모든
일들이기에 관계적 문제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해야 할 이유를 그 관계 안에서 찾지 못하니, 어느 날 번아웃이 왔습니다. 10년 정도 해왔던 성가대도 안 하겠다, 교회의 사역들도 최대한 안하고, 대충하고... 전도사님들 잘 따라주지 않고,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기에 굉장히 아픈 방법으로 다루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당시에도 참 오랜 신앙생활을 해왔고, 많은 일들을 해왔지만, 진짜 ‘성령님을 의지하는 법’을
모른 채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애썼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성령님을 진짜 의지해보기로 했습니다. 아주 간단했어요. “하나님, 저를 아시죠. 저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님과 함께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못 하지만, 성령님이 힘주시면 제가 당신을 의지하여 해보겠습니다.” 아주 간단한 것인데,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확신과, 그분이 힘주시리라는 믿음과 담대함으로 나아가니까, 정말
그 전에 없던 열정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변하거나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닌데, 내려놓았던 모든 사역을 다시 감당하고, 더 감당해도 이전과 달리 지치지 않았고 기쁨이 넘쳤어요.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저의 역량, 저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이미 ‘저는 이래서 못해요’라고 하고 있으면, 정말 못하거든요. 저는 이번에 사역지원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애쓰지 않겠습니다. 사람이 많다고 우리가 큰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못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냥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한 사람이 되기로 제 자리에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통해 사역에 대한 마음이 없던 여러분을 어떻게든 꼬드겨서 사역에 헌신하게끔 만들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역설교라고 이름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보다는 성경적 교회는 철저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삶을 추구하고 행하는 교회여야 하며, 그 핵심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과 일하심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을 따라가는 힘은 이미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해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갑니다. 성령님은 내 마음의 방 저기 구석에 기념품처럼 모셔놓고,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해 버릇해서, 내가 할 수 없으니, 나는 못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결단했다면, 이제 성령께서 내 삶에서 충만하게 일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께 나를 내어드리십시오. 세상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서, 여러분이 성령 안에서 충만케 될 때,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교회를 충만케 하시길 원합니다. 교회는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숫자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 순종하며 자신을 내어드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충만하게 되는 것은 곧 세상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 충만함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를 사귐의교회로 부르신 하나님 안에서 함께 충만함을 누리고, 세상을 바꾸고 회복시키는 놀라운 일을 우리의 삶을 통해 보길 원합니다. 그 일에 우리의 삶이 사용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귐의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성경의 진리를 따라 이렇게 권면합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추구하십시오.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복음 앞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회심하셔서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길 추구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세상을 따라가시면 안 됩니다. 세상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 머무시는 것을 믿고 고백하십시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이끄시는 것을 귀 기울여 듣고 따라보십시오. 때로는 결단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선명해질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내 힘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힘으로 사는 삶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회복하는 일을 위해 가장 먼저 바꾸시는 것은 나입니다. 나만 위해 살았던 내 삶을 바꾸어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게 하십니다. (엡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사역하는 이유는 함께 충만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면 여러분을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지 안 할지는 여러분의 결정입니다. 응답한 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세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이 들 때마다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세상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꿈을 위해서입니다.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 그 원대하고 아름다운 꿈을 위해 하나님은 2000년 동안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사람, 성경의 진리를 따르는 교회를 사용하셨고, 이제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백인 우월주의 사회를 인정하고 편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가치를 따라 노예해방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성경적 가치보다 자기 삶의 유익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링컨의 노예해방으로부터 약 백 년이 지난 뒤, 여전히 바뀌지 않는 세상의 모습을 인정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꿈을 나누고 싶어서 한 목사가 링컨 대통령 기념관 계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같은 꿈을 꾸는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오늘 나의 여러 친구들에게 말하노니, 나는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이 나라 국민들이 분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자명한 진리로 삼는다’는 이 나라 국민 신조의 참뜻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이 꿈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유가 뉴햄프셔주의 거대한 언덕 위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뉴욕주의 강대한 산들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펜실베이니아주의 앨리게니 산맥으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콜로라도주의 눈 덮인 로키산맥으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캘리포니아주의 굽이진 능선으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가 조지아주의 스톤 마운틴에서도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미시시피주의 모든 언덕과 둔덕으로부터도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모든 산허리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우리가 자유가 울리게 할 때, 모든 크고 작은 마을에서, 모든 주와 모든 도시에서 자유가 울리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자손들인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방들, 신교도와 구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영가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마침내 해방되었도다!’를 노래 부를 수 있게 될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개척을 놓고 고민하고 씨름하던
중에 마지막으로 받은 사인과 같은 하나의 이야기는, 한 청년이 저에게 지나가듯 했던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교회에 대한 소망이 없어요.” 그 꿈을 잃어버린 것이 그의 책임이 아니라, 나와 같은 목회자의 책임인 것 같았고, 그래서 더욱 꿈꾸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 하나님이 주신 소망임을 보여주자. 그것이 저의 꿈이고, 사귐의교회의 비전이며, 이제 우리가 함께해나갈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는 이제 <교회>라는 단어를 보면 가슴이 뜁니다.
저는 성경적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그렇게 살면 교회는 끝까지 엄청난 곳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함께 꿈꾸며 걸어가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