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는 지난 시간에 이어 에스라의 뒷부분입니다. 에스라 1~6장이 스룹바벨과 함께했던 1차 포로 귀환이라고 했습니다. 1차 포로 귀환이 일어나게 된 배경 자체가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바벨론 땅에서 고레스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갈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복을 위해 먼저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내어주신 것이죠. 그리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풍삶기를 하면, 듣게 되는 예화가 이것이죠. 급류 타기를 하다가 보트에서 떨어집니다. 곧 급하강 구역이 있고 주변에 바위도 많아서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나올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구조대원들이 로프가 달린 튜브를 던집니다. 그 튜브가 다행스럽게도 나를 향해 날아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붙잡습니다. 그렇게 구조가 됩니다. 튜브가 날아오지 않았다면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던 위기입니다. 그런데 튜브를 던져서 구조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끝까지 붙잡고 있었기에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튜브를 잘 붙잡아서 산 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위기에서 구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내시고,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붙들고 외면하지 않는 우리의 반응도 동반됩니다. 그러나 그
반응이 구원의 근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셨다는 사실이 우리 믿음의 안전지대입니다. 구원은 먼저 다가와 손 내미시고 함께하자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되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을 여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것에 반응하지는 않았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에 남았습니다. 돌아온 1차 귀환민들은 여러 어려움을 뚫고 성전 재건
목표를 달성합니다. 이 과정에서도 실수와 잘못된 선택도 있었습니다. 성전 재건을 자기중심적인 마음으로 진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자신의 욕심과 판단대로 이방인을 배제해 버립니다. 그것이 나비효과가 되어서, 성전 재건의 적대세력이 생기고, 공사가 16년 동안 중단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귀환민들에게 주시는 성찰을 위한 멈춤이었습니다. 지난 설교의 포인트가 이것이죠. 귀환민들은 자신들이 선이고
악에 의해 선한 일이 막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사건은 귀환민들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갔기에 하나님께서 ‘멈춘 의도적인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멈춤’은 벌이라기보다 배려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낙오시키려 멈추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시 걷게 하시려 멈추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이 일을 다시 진행시킨 것도 하나님입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 재건을 다시 독려하고, 귀환민들이 그에 반응하였을 때, 또 다른
국면으로 사건이 흐르게 됩니다. 결국 16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는, 책임 총독도 바뀌고, 페르시아의 왕도 바뀌어, 귀환민들의 숙원사업인 성전 재건을 더 수월하게 마무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비로소 16년의 멈춤이 여러 의도가 있는 시간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내 삶에 멈춰버린 시간에 대한 나의 해석은 과연 옳은가?” “하나님은 그 멈춤의 시간을 통해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시는가?” 에스라서의 전반부는 침묵의 메시지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아직 그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으므로, 성전 재건이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완료해야 할 것이 있는 사건으로 두신 하나님의 의도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에스라서 후반부는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세워가야 하는 시대적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6장에서 7장으로 한 장을 넘어가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라 7:1a) 이런 일들이 지나가고 난 다음이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이 다스리던 때에, 에스라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 이제 이야기는 수십 년을 훌쩍 건너뜁니다. 성전이 완공된 지 60년이 지났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그 제국의 한 변두리 도시에 불과했습니다. 귀환민들은 신앙의 열정도, 방향감각도 잃어버린 채 그냥 ‘살아가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하나님은 페르시아에서 한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가 바로 ‘에스라’입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사장 집안 출신의 학자였습니다.
그는 왕궁 궁정에 머물렀지만, 세상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료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사랑했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라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아는 것과 사는 것.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두 축이죠. 앎과 삶이 같이 있는 사람이 참 힘이 있습니다. 앎은 ‘넓이’이고 삶은 ‘깊이’에 해당하거든요.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며
앎을 더해갔고, 준행하며 삶을 더해갔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만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람들을 세워가기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립니다. 말씀을 보면 마지막에 “결심하였더라”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사용하시는데, 말씀 앞에 결심한 사람으로부터 역사를 새로 쓰십니다. 우리교회에 계신 분들이 가끔 우리는 왜 이렇게 결단하는 것이 많냐고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
후에도 결단의 찬양, 결단의 기도. 팸에서도 말씀을 듣고 결단을 나누죠. 뭔가를 서약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할까요? 사람은 그렇게라도 해야 변화의 힘을 얻거든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에서도 진리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결심은 ‘완벽하겠다’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겠다’는 고백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결심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에스라는 자신의 편안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쫓기로 결단합니다. 그래서
그가 했던 일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귀환 백성들의 소식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과 함께 먼저 귀환했던 1차 귀환민. 힘들게 성전을 재건하며 내심 기대가 컸습니다. 성전 재건을 하면, 다시 다윗과 솔로몬 때와 같은 영광이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했거든요. 그런데 성전 재건을 완료했는데도, 그들이 기대한 극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하나님과 사람의 주파수 차이가 생기는 것이죠. 성경을 잘 보면, 하나님은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줘서’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뭐라도 해드리고 싶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던 그들의 마음을 기뻐 받으셔서 ‘성전’에 거하시기로 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받으신 것은 자신의 왕궁보다 더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하나님께 말씀드렸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다윗아, 내가 집이 없어서 불편했던 게 아니야.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다녔고, 네가 있는
그곳이 내 집이다.” 하나님께는 건물 성전이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원하셨던 것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었지요. 그러니까 사실 성전이 하나님을 위한 선물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지은 성전에 하나님께서 임재해주시는 것이 사람을 사랑한 하나님의 엄청난 겸손입니다. 온 우주를 말씀 한마디로 지으신 분이, 작은 건물 안에 오시어 “내가 거기 있겠다”, “내가 거기서 너희를 만나겠다”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아름답고 위대한 건축물이었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개집’만도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매료시켰기에 하나님이 거기서 만나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전이 가진 의미를 상실하고, 성전에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헌신한 이유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태도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모르실까요? 아셨죠. 그래서 슬프셨죠. 제가
지난주에도 ‘성전 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주일 성수’와 유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성전을 짓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행동이고 예배를 위해 필요한 통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것도 하나님을 위한 행동이고 예배를 위해 필요한 통로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는 것이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에 함께해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배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나의 헌신’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예배에 하나님이 오셔서 귀 기울이시고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헌신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언가 해드리는’ 일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예배하지 않으면 예배가 부족해서 막 아쉬우실까요? 우리가 예배를 안 하면 하나님이 삐치시니까, 예배로 하나님 마음을 좀 달래드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예배는 우리의 행위 자체보다,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사실이 더 큽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잃어버리고, 성령과 멀어지고, 악한 영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마음이 예배를 피하는
것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시간 예배에 나와서 전심으로 찬양하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회심 자체가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하나님의 주인 됨 아래 나아가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페르시아에 있는 에스라가 말씀을 읽으며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점점 커지는데, 정작 그 땅에 먼저 귀환했던 귀환 백성의 소식은 성전 재건 이후, 영적인 낙담과 좌절, 냉기류가 가득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반응하기로 결심한 것이죠. 그래서 그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에게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통합니다. 왕은 에스라를 책임자로 2차 귀환민을 돌려보내면서, 성전 제사에 쓸 기물들까지 지원합니다. 그렇게 2차 귀환 행렬에 남자만 1,500명, 전체 약 5,000명의 사람이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길을 가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믿음의 길을 걸으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초청에 임할 때, 하나님이 예비하고 지키시는 길임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이죠.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이동하는 기간만
4개월, 약 1,500km를 걸어서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귀환은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도적의 위협도 가득합니다. 그런데 2차 귀환에는 페르시아의 호위 병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에스라가 왕에게 뱉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 8:21) 그 곳 아하와 강 가에서 나는 모두에게 금식하라고 선언하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와 우리 자식들 모두가 재산을 가지고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보살펴 주시기를 엎드려서 빌었다. (라 8:22)
왕에게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이 잘 되도록 보살펴 주시지만,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는 하나님의 큰 노여움을 피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가 있어서,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원수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보병과 기병을 내어 달라는 말은 부끄러워서 차마 할 수 없었다. (라 8:23) 그래서 우리는 금식하면서,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렇게 에스라와 2차 귀환민들은
금식하고 준비하며 이 여정을 출발합니다. 그리고 4개월간, 하나님의 보호 아래 그들은 무사히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됩니다. 에스라가 도착하여 예루살렘 귀환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을 통해서 듣게 되는 귀환공동체의 모습은 엉망이었습니다. 영적인 상태, 침체도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은 조상이 저질렀던 죄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그들이 멸망했던 가장 큰 원인은 ‘우상숭배’였습니다. 포로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것이죠. 에스라도 말씀을 읽으며 조상들의 죄가 컸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멸망했던 그 자리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를 바르게 세워가고 싶은 마음으로 귀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와보니, 귀환공동체가 조상들의 문제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에스라가 놀란 가장 큰 문제는 주변 민족과의 혼인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국제 결혼’이 문제가 아닙니다. 민족·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열방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누구를 주로 삼고 어떤 삶의 방식을 따르느냐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방인과의 결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룻도 이방이었죠.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갖춰서 언약백성의 일원이 되면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에스라 시대의 귀환민들은 이방인과 혼인한 후, 신앙적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삶의 방식이 오히려 이방인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살아갈
때 분리되어 살 수는 없습니다. 마치 그리스도인이 배라면 세상이라는 바다에 배가 떠 있는 것은 당연하죠. 그런데 무엇이 중요합니까? 배 안에 바닷물이 가득 차면 침몰하는 것입니다. 귀환민들은 성전을 재건하며 하나님의 은혜도 맛봤지만, 정작 삶의 거룩함, 자신들의 삶이 예배하는 처소가 되는 일은 실패하고 세상의 문화와 삶의 방식이 그들 안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스라 시대의 문제였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의 모범이 되어야 할 지도층이 오히려 죄를 주도했다는 점은 이 문제가 공동체 전체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줍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돌아온 에스라는 이 현실을 보게 되자, 옷을 찢고, 머리털을 뜯으며, 땅에 주저앉습니다. 조상들의 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두렵고 슬펐습니다. 이대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수 없음을 에스라는 너무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합니다. (라
9:6) "하나님, 너무나도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하나님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라 9:7a) 조상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도 큽니다...(중략) (라 9:9) 우리가 종살이를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종살이를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페르시아의 왕들에게 사랑을 받게 하여
주시고, 또 우리에게 용기를 주셔서,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짓고, 무너진 곳을 다시 쌓아 올리게 하시어,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이처럼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라 9:10) 우리의 하나님,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여 주시는데, 주님의 계명을 저버렸으니, 이제 우리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에스라가 한 기도의 특징이 혹시 보이시나요? 그는 ‘그들’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합니다. 사실 지금 회개하는 내용은 에스라가 오기
전 60년 동안 귀환 백성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결국 이것이 자기의 조상부터 이어져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모습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 소리가 성전 뜰을 울렸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곧 회개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제도적으로 선포된 집회도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 벗어난 공동체의 모습을 보며 아파했던 한 사람의 간절한 회개가, 공동체의 회개를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이 모습이 우리 역사 속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1907년, 우리가 모두 기억하는 한국교회의 부흥이 시작된 것은 장대현 교회의 예배에서였습니다. 그날 집회를 인도하던 한국의 지도자 길선주 장로(후에 목사)는 설교하다 말고 단 위에서 울기 시작합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교만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높였습니다. 선교사들을 마음으로 미워하고, 그들의 성공을 질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
고백은 예배당을 가득 메웠고, 함께 예배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통곡했고,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날의 예배는 설교가 아니라 회개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은 평양을 넘어 조선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것이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시작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회개가 공동체를 깨웠습니다. 에스라 시대에도 그러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울며 기도할 때, 그의
진심 어린 통회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남녀와 어린아이까지 수많은 무리가 그에게 모여와 함께 “크게 통곡했습니다”(스 10:1). 이 집단적인 슬픔 속에서 ‘스가냐’라는 인물이 일어나서 에스라에게 말합니다. (라 10:2) 그 때에 엘람의 자손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주변에 있는 이 땅의 백성에게서 이방 여자를 데려와서 아내로 삼음으로써,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아직도 이스라엘에 희망은 있습니다. (라 10:3)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하면서 받드는 분들의 권면과, 에스라 제사장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방 여자들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을 다 보낼 것을 하나님 앞에서 언약하겠습니다. 율법대로 하겠습니다. (라 10:4) 그러므로 이제 일어나십시오. 이 모든 일은 제사장님이 맡아서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제사장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용기 있게 밀고 나가십시오." 백성들은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고 돌이키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더 이상 죄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어진 그들의 결단은 무엇이었느냐? 이방 아내와의 결혼을 취소하고 그들과 결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공동체는 신앙 혼합을 차단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조치를 선택했습니다. 백성들이 먼저 자신들의 잘못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런 결단을 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지도자들과 이 일에 대해서 의논하고 결정합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이 일에 대해 준비합니다. 먼저 에스라는 모든 백성을 불러서 그들의 삶의 모습에 어떤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 죄를 깨우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진행 준비를 합니다. 온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속죄 제사와 함께, 이 일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111명의 유대 남성들이 이방인과의 혼인을 정리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름이 111명인데, 학자들은 실제로는 이보다 더 광범위하고 많았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에스라서 마지막 장은 그 조치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으로 끝이 납니다. (라 10:44)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 이것이 에스라서 마지막 절입니다. 어떻습니까? 아마도 여러분 안에도 다양한 생각들이 교차할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도 에스라의 이 마무리는 참으로 고민스러웠고 설교로 풀어내기도 어려웠습니다. 가끔 목사이자 설교자로서 이렇게 입체적인 본문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냥 말씀만 전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목양을 하는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윤리, 상황, 현대의 관점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적용을 고민하면 더 복잡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이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기록으로 전해주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설교자로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에스라와 백성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까지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그리고 말로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긍정적입니다. 다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조치와 결과에 대해서 성경이 어떤 피드백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치 스룹바벨 때, 성전을 재건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에스라서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침묵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이 엇갈립니다. 이들의 결정이 옳았다고 확신하기에도 어렵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느냐고 묻는다면, 귀환 백성들의 타협은 쉽게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회개의 기도와 동반된 단호한 결정. 과연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가끔 ‘사랑’과 ‘정의’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과 현장은 그래서 늘 어렵고, 그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고민, 그리고 무엇보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배우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몇 가지 깨달음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본문은 거룩함과 구별이라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단호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의 죄를 ‘눈감아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죄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귀환공동체의 결혼문제는 그들을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어쩌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귀환공동체가 하나둘 그러더니, 나중에는 점점 그 타협이 확산되며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과 다른 기준을 갖고 있던 에스라가 그들에게 나타나기 전까지는요. 이들의 회개는 후회나 눈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죄와의 완전한 단절을 보여주는 결단으로 이어졌다는 측면에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자신들의 모습들은 단호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 정도의 결단이 없다면 그들은 계속 타협된 삶을 살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때로는 죄에 대해서 단호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자르라”는 과격한 상징언어로 죄와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 문제인지 가르치셨습니다. 단호함이 없으면 자꾸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돕는 힘은 주님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결단은 내 믿음의
고백이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둘째, 이 본문은 우리의 결정이 정말 하나님 앞에 옳은가 되묻고 있습니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해결 방식이었을까? 회개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습니다. 바로 잡아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맞았습니다. 그러므로 에스라 시대의 회개가 방향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방법입니다. 방향이 맞으면 모든 것이 다 옳을까? 성경은 이 대목에서 분명히 고민하게 만듭니다. 우선 이혼 명령을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방법은 스가냐와 지도자들에게서 나왔고, 에스라가 이를 받아 집행한 것이죠. 또한 에스라서 안에서 이방인과의 혼인을 정리했을 때에도, 그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었다거나, 그들의 내면이 새로워졌다는 선언은 없습니다. “정말 이것이 최선이었을까?”라는 의도적 허전함을 본문은 남기고 있습니다. 이 율법적 조치로 그들의 마음도 돌아서고 잘 세워지게 되었는가? 이 또한 침묵 속에 묻혀 있는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서의
이러한 기록의 끝맺음은 우리에게도 생각할 멈춤을 줍니다. 이것이 이 본문이 의도하는 ‘긴장’입니다. 혼합주의의 유혹을 끊어버리고 구별되어야 한다는 ‘거룩에 대한 열망’은, 열방을 품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뜻’ 사이에서 긴장을 일으킵니다. 앞서 성전을 재건할 때도, 이방인을 배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재건은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그때도 방법은 틀렸습니다.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옳습니다. 단절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혼하고 다 내보내는 것이 맞는가? 당시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침묵하고 있는 성경의 결론에서 우리는 뜻을 묻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질문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에스라서의 이 의도된 침묵에 주목합니다. 성경의 침묵은 판단 유보가 아니라 분별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과 정의가 사랑과 긍휼을 압도하지 않도록 남겨진 여백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이 질문 앞에 자주 서게 됩니다. 죄가 있는 자리, 관계를 다 자르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우리는 불편하지만, 죄와 마주하고, 죄로 가득 찬 현실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의 내면을 죄에게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이 복잡한 삶의 자리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입니다. 타협할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동시에 겸손한 지혜가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에스라서는 “답이 이거야”라는 느낌표(!)를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물음표(?)를
던지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정답이 있으나 정답이 없다. 반대로 정답이 없으나 정답이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에스라서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똑똑하지만 미련하고, 아는 것 같지만 무지하며, 최선을 다하지만 완벽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아는 자, 주님의 인도하심을 날마다 구하는 자, 그 삶이 우리가 추구하는 최선의 길임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제 오늘의 설교, 더불어 에스라서 전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에스라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함,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두 차례 귀환의 배경에는 모두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설교는 그 안에서 ‘회개’의 단호함에 대한 부분이 필요함을 깨닫게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단호한 결심’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었는지는 조심스럽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죄와 타협하게 만드는 관계, 습관,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을 잠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불순종’이
있다면, 아프고 고통스럽더라도 끊어내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 흘리는 회개에 머물지 않고, 죄를 멀리하는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결단이 ‘완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속단하지 않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에스라와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려는 열망으로 나아갔지만, 성경은 그 결과에 침묵하며 우리에게 “정말 이것이 최선이었을까?”라는 물음표를 던집니다. 방향이 옳다고 방법까지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되, 죄인 된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성령의 지혜와 분별력을 구해야 합니다. 결국 에스라서의 결론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르게 세우는 것’이 건물 성전 재건보다 더 중요했다는 교훈으로 귀결됩니다. 우리의 삶에 멈춰버린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낙담하고 좌절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우리를 다루어가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늘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겸손함을 잃지 마십시오. 작게 순종해도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순종을 크게 자라게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