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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의 신학

2025-11-02 · 에스라 1~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우리가 만나는 책은 <에스라>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통일왕국(사울-다윗-솔로몬), 분열왕국(북-남), 포로시대(바벨론), 그리고 오늘 다룰 귀환시대로 나뉩니다. 역대하가 포로가 되는 예고편으로 끝났다면, 에스라-느헤미야는 그 귀환 과정과 이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시대 역사서가 에스라-느헤미야라면, 예언서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입니다. 귀환은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으며, 각각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가 책임자입니다. 에스라 전반부에 해당하는 1~6장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 그리고 약 60년의 세월이 흐른 뒤 7~10장까지 이야기는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2차 귀환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스룹바벨과 함께 1차 귀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배경입니다. 이제 말씀을 한번 살펴봅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정복 민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레스는 정복당한 민족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냄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사고 지역별 충성도를 높이려 했습니다. 이는 페르시아 제국주의의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 외에도 다양한 민족이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신전과 종교를 재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나 이 사건 또한 하나님께서 하신 예언이 성취된 일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이런 장면이 많죠. 때로는 악인은 그냥 악을 행한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 계획의 일부가 되는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에스라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라 1:1)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왕위에 오른 첫 해이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서로 써서 돌렸다. (라 1:2)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늘의 주 하나님이 나에게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를 주셔서 다스리게 하셨다. 또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라 1:3) 이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곳에 계시는

하나님 곧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라. 그 백성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를 빈다. (라 1:4) 잡혀 온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누구든지 귀국할 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이웃에 사는 사람은 그를 도와주어라. 은과 금과 세간과 가축을 주고,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에 바칠 자원예물도 들려서 보내도록 하여라."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키시는가? 저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욕심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기도라서 주시고자 하세요. 그러면 하늘에서 쌀이 떨어집니까? 그런 일은 거의 없어요. 아마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시겠죠. 상상해 보자면, 장을 보면서 쌀을 사는데, 갑자기 기도한 그 사람이 떠올라서 하나 더 사서 괜히 그 사람에게 연락해서 가져다주는 것 말입니다. 제가 경험한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런 방식이 굉장히 많았어요. 때로는 누구를

통해서 저의 필요를 응답하기도 하시고, 반대로 제가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 것이죠. 그런데 꼭 이 방법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갑자기 정부에서 쌀을 살 돈을 풀 수도 있죠. 그것도 누군가 그런 아이디어를 내고, 또 누군가 그런 결정을 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하지만 아주 시기적절하게 필요를 구하는 기도 중에 있던 사람에게 그것이 응답으로 올 수도 있는 법이죠. 그렇게 보면 누군가에게는 모두가 우연이고, 누군가에게는 모두가 섭리인

것이 우리의 삶, 우리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은 누군가가 표현하듯 ‘기적이 상식이 되는 삶’이지만, 누군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펼친 관용 정책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혹시 선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든 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모르게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개입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다 백성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귀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의 예언이 그렇게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환이 꼭 좋은 소식이었을까요? 어쩌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성취에 관심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편한 명령이었습니다. 이미 바벨론 문화에 익숙해진 다음 세대에게 돌아가야 할 예루살렘은 폐허였습니다. 귀환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소명’의 여정이었습니다. 돌아가지 않는 삶이 더 편안했음에도, 42,360명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따라 광야와 같은 삶을 향한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대표였던 스룹바벨은 '바벨론에 심겨진 씨'라는 이름처럼 바벨론에서 태어난 다윗 혈통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페르시아가 임명한 총독이자 포로기 이후 다윗 왕조의 대표자로서 귀환을 주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스룹바벨은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며,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라 3: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동료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동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규정된 대로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다. (라 3:8)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 터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이태째가 되는 해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들의 나머지 동료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사로잡혀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모든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스무 살이 넘은 레위 사람을 주님의 성전 건축 감독으로 세웠다. 성전의 기초가 놓였을 때,

귀환 백성들 사이에는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한꺼번에 나왔습니다. 바벨론에서 태어난 젊은 세대는 기초로 놓아진 돌들을 보면서 ‘희망’을 보았고, 환호했습니다. 반면 이전 예루살렘 성전을 보았던 늙은 세대는 폐허 위에 초라한 돌 몇 개가 올라간 것을 보고 울었습니다. 아직 건물이 다 지어진 것이 아니기에 건물의 모습에 대한 비교보다는 그 돌 위에 다시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 수 있을지 하는 깊은 두려움과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젊은 세대는 ‘돌’을 보며 새로운 시작을

꿈꾸었고, 늙은 세대는 그 ‘돌’ 아래 깔린 과거의 영광과 상실을 떠올리며 눈물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과 환호, 그 엇갈린 마음 위에 새로운 회복의 기초를 놓고 계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남 왕국이 망하고 떠난 예루살렘 근처에는 그사이에 과거 유다의 대적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환 백성이 성전 짓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도 어떤 건물이 지어지는 것을 반대하고자 하면 어떤 방식을 주로

쓰죠? 민원을 넣거나 허가가 나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이죠.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도 똑같았습니다. 유대인의 대적자들은 페르시아 관리들에게 끊임없이 민원을 넣듯 상소문을 올리고, 조서를 조작하고, 여론을 흔드는 방식으로 공사를 방해했습니다. 관리에게 뇌물을 먹였다고도 나와 있습니다. (라 4:11) 다음은 이들이 보낸 상소문의 내용이다.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 있는 신하들이 아닥사스다 임금님께 아룁니다. (라 4:12) 임금님께서 다스리시는 여러 지방에 흩어져서

살던 유다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자리를 잡고, 범죄와 반역을 일삼던 악한 성읍 예루살렘을 지금 다시 세우고 있습니다. 기초를 다시 다지고, 성벽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라 4:13) 이 일을 임금님께 아룁니다. 성벽 쌓는 일이 끝나고 그 성읍이 재건되면, 그들은 세금과 조공과 관세를 바치지 아니할 것이며, 틀림없이, 국고에 손해를 끼칠 것입니다. (라 4:14) 나라에서 녹을 타먹는 우리로서, 임금님께 불명예스러운 일이 미칠 일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이렇게 상소문을 올리어서 임금님께 아룁니다. (라 4:15) 조상이 남기신 기록들을 살펴보시면, 임금님께서도 바로 이 성읍이 반역을 일삼던 곳이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이곳에서는 반란이 자주 일어나서, 임금님들을 괴롭히고, 다른 여러 지방에까지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성읍을 없애 버린 것은 바로 그러한 반역 때문입니다. (라 4:16) 이 성읍이 재건되고, 성벽 쌓는 일이 끝나면, 임금님께서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역을

잃게 되신다는 것을 아뢰는 바입니다." 유다의 대적자들은 “이 유대인들이 성전을 다시 세우면 분명히 반역할 것이다”라는 식의 정치적 모함을 꾸몄고 여론을 조작했으며, 치밀하게 자신들의 논리를 가지고 정부를 설득했습니다. 이 시기의 페르시아 통치자는 ‘아닥사스다’였습니다. 대적자들의 끈질긴 방해 공작은 먹혀들었고,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 재건을 강제로 중단시키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70년의 기다림 끝에 시작된 위대한 꿈이 허무하게 멈춰버린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좌절한 귀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메신저를 보내십니다. (라 5:1) 그 때에 학개 예언자와 잇도의 아들 스가랴 예언자가, 자기들이 받들어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학개와 스가랴 예언자가 이 성전 재건이 중단된 시기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스가랴서를 봤지만, 스가랴서는 다윗 언약이 무효화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성전 재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스가랴서의 초점은 건물 성전보다는 그것은 과정이고, 진짜는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기대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두 예언자가 성전 재건이 신학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백성들은 예언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공사를 조심스럽게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 총독인 스룹바벨보다 더 높은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을 관할하는 대총독인 ‘닷드내’가 성전 재건을 시작한 것에 대하여 행정조사를 시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에게 공사의 허가를 묻게 됩니다. 스룹바벨은

20년 전 ‘고레스 왕의 칙령’이 있었기에 시작된 일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성전 재건이 합법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전의 대총독들은 성전 재건에 대해 비협조적이었다면, 닷드내 총독은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스룹바벨을 비롯한 유다 귀환민들의 주장을 확인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닥사스다 왕 이후 세워진 다리오 왕에게 서신을 보냅니다. 왕은 제국의 모든 문서 보관소를 뒤져서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침내 먼지 쌓인 기록 보관소 한구석에서 모두가 잊고 있었던 20년

전, 고레스 왕의 칙령 원본이 발견되었습니다. 모든 사실확인이 끝난 뒤, 다리오 왕은 공사를 다시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제가 예전에 저희의 첫 예배당을 구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사귐의교회의 공식적인 예배는 천경수 형제님 집 거실에서 드렸습니다. 그 예배는 이제 개척 예배를 드리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준비하며 드린 예배였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마음껏 찬양할 수가 없고, 당시 형제님의 집은 백석에 있었기 때문에, 예배에 필요한 공간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저희가 사용하게 된 곳이 섬유지원센터의 작은 회의실이었습니다. 16평. 주일마다 4시간씩 대여했고, 사용료는 월 11만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수입이 월 60~70만원은 된다고 판단하여, 월세 50만원에서 이제 고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얻기로 합니다. 그때도 옥정에 와서 상가를 봤지만, 옥정에는 그 가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었죠. 그러다가 무려 20평. 그것도 월세 30만원에 사용할 수 있을 만한 곳을 고읍 쪽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뻤죠. 부동산과도 다 협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걸리는 것이 지하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둑 공사를 하고 싶지는 않아서, 먼저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완강히 반대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희의 사정도 말씀드리고, 우리는 그럼 간판도 달지 않고 그저 예배할 공간으로만 쓰겠다고도 말씀드렸지만, 설득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야 뭐 청장년이 10명 되었으려나요? 모여서 상황을 놓고 이야기하고 아쉽지만, 그 공간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예배당을 얻는 문제로 마찰이 생기는 것은 선하지 않으니 포기합시다.” 이렇게 저도 얘기하고 의견을 모았지만, 참 마음이 속상했습니다. “하나님, 다른 것도 아니고 예배할 공간 하나를 찾는데, 이걸 안 도와주십니까?” 제 안에는 그 목사님을 향한 불만을 넘어서 하나님을 향한 서운함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우연히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한 상가를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월세 50만원으로 16평을 쓸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 또 애매했습니다. 앞쪽에

있는 점포를 쓰지 못하면 너무 애매한 것입니다. 두 곳을 같이 써서 32평을 쓰면 월세를 90만원으로 할인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그 월세를 감당할 수는 없는 작은 공동체였고 가난했죠. 그래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월세 60만원입니다.” 말씀을 드렸어요. 그리고 며칠 후 연락이 왔습니다. 월세를 90만원에서 60만원으로 깎아서 계약하게 된 것입니다. 그곳이 고읍에 있는 첫 번째 예배당이었고, 저희는 그곳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내며 교회의 초반 여정을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배운 것이 있습니다. 거절당했던 곳이 저는 최고의 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상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보낸 후 든 생각은 “거절도 은혜구나.” 였습니다. 나는 ‘거절’ 밖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기다리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지금 제가 사귐의교회를 목회하면서 겪는 많은 일들, 또 여러 결정들을 해나갈 때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도하는 것이 막히면, 기다립니다.

“이유가 있겠지.” 귀환 백성의 성전 재건은 억울하게 16년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성실한 총독 닷드내와 마찬가지로 성실한 왕 다리오에 의해서 억울함이 풀어집니다. 다리오 왕은 사실을 확인한 후,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조서를 내립니다. (라 6:3) "고레스 왕 일년에, 왕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관하여 칙령을 내리시다. 희생제사를 드리던 바로 그 곳에 성전을 다시 세워라.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성전의 높이와 너비는 각각 육십 자가 되게

하고, (라 6:4) 벽은 돌 세 겹에 나무 한 겹씩 쌓아라. 비용은 국고에서 대주어라. (라 6:5)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꺼내어서 바빌론으로 가지고 온 성전의 금그릇과 은그릇을 돌려보내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기게 하고, 성전 안 본래 있던 자리에 두도록 하여라." 또한 그가 내린 명령에는 ‘성전 공사를 절대 막지 말 것, 제국의 세금으로 공사비를 전부 대줄 것,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처형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성전 재건의 최대 방해

세력이 되었던 페르시아 제국이, 다시 한번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된 것입니다.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마침내 다리오 왕 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수십 년의 기다림과 좌절 끝에 이룬 이 결실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성대한 봉헌식을 열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에스라 1~6장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 본문을 보면, 좌절이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결국 이뤄낸 너무 멋진 이야기이죠. 맞습니다. 이렇게 은혜롭게 설교를

끝내도 참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스럽게 고민해 봐야 할 지점도 함께 존재합니다.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잘 끝났고, 눈에 보이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장면을 '감동적인 엔딩'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에스라-느헤미야>까지의 전체적인 메시지의 톤을 보면, 이것을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게 됩니다. 이 기록들은 신앙의 성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실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그 장소가 완성되는 장면이 몇 개 존재합니다. 출애굽기의 완성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출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성막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수행되어 다 완성되었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그곳에 충만했다는 표현입니다. 반면 출애굽기는 진정한 완성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굉장히 큰 떡밥 하나를 던지며 마무리됩니다. (출 40: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성막은 받으셨으므로 성막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은 가득했으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모세조차 그 성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시공할 때까지는 자유롭게 드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막은 그냥 텐트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기에 부정하고 나약한 사람은 성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레위기가 이 뒤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이 성막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어떻게 부정하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죠. 그 결과 레위기의 가르침에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성막이 성전으로 변화됩니다. 솔로몬 때 성전을 봉헌합니다. (왕상 8:10)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주님의 성전에 구름이 가득 찼다. (왕상 8:11)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성전을 가득 채워서, 구름이 자욱하였으므로,

제사장들은 서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출애굽기와 비슷하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집으로 기능합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우리가 역대하를 통해 살펴봤듯이, 유다의 왕과 백성이 하나님께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성전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곳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시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솔로몬 성전이 이방 나라에 의해서 파괴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도

솔로몬 성전을 떠납니다. 오늘 에스라 6장에서 드디어 다시 그 땅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지 않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이는 에스라서가 던지는 강력한 신학적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이 물리적으로 재건되었다고, 정말 그것이 우리 신앙의 재건을 의미하겠는가?” 다시 말해, 형태는 회복되었지만, 성전이 가진 본질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장차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나아와 함께 예배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도 보았던 다양한 민족과 언어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모습입니다. 그런데 스룹바벨은 성전을 재건하고자 할 때, 그 땅에 살던 사람들, 대표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성전을 짓자는 제안을 했을 때 거절합니다. (라 4:1)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은,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라 4:2) 스룹바벨과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에게

와서 말하였다. "앗시리아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을 때부터 이제까지, 우리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들의 하나님을 섬기며, 줄곧 제사를 드려 왔으니, 우리도 당신들과 함께 성전을 짓도록 하여 주시오." (라 4: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그 밖에 이스라엘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오. 주 우리의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할 일이오." (라 4:4) 이 말을 들은 그 땅 백성은 성전 짓는 일을 방해하여, 유다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대적자로 나오는 이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하게 된 것의 원인은 스룹바벨과 귀환 백성들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 태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었다면, 그의 모습은 ‘단호한 믿음’이겠죠.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재건의 목적을 유다의 종교적 정체성 회복이라는

자신의 관점 안에 한정지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꿈꾸시는 비전, 만민이 함께 예배할 성전의 비전에 반하는 배타적인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16년의 멈춤은 스룹바벨과 유다 백성들의 잘못된 모습과 방향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은 아니었을까요? 결국 하나님이 다시 기회를 주셔서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영광이 임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진짜 받고 싶은 귀환 백성의 모습이 남아 있기에 기다리고 계신다는 침묵 속 묵직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물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하나님은 귀환민의 마음이 세워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에스라 1-6장은 ‘승리’의 이야기인 동시에, 의도적으로 ‘아직’을 남겨두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임하지 않은 영광의 빈자리는 우리에게 질문을 남깁니다. “혹시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이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지 못하는 스룹바벨 시대의 성전과 같지는 않을까?” 에스라서에서도 이제 이 이야기는 건물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세워가야

하는 귀환 백성의 시대적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설교로 나누겠습니다.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설교는 우리에게 두 가지 강력한 진리를 남깁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삽니다. 16년의 중단,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꼈던 순간, 하나님은 먼지 쌓인 문서 보관소에서 20년 전의 칙령을 찾아내셨습니다. 우리 삶의 어떤 고난과 실패도, 우리의 억울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멈춰진

프로젝트, 지체되는 응답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때,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그 역사를 역전시키실 것을 믿으십시오. 좌절 속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은 우리 안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둘째, 건물보다 마음의 재건이 목표입니다. 성전이 완공되었지만 영광이 임하지 않은 이 장면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성취’와 ‘내면의 본질’을 구분하도록 요구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사역과 봉사를 하는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내 방식과 나의 목적’이 우선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이 앞서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건물 성전은 필요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전 재건은 내 마음의 구별됨에서 시작합니다. 스룹바벨 성전에 영광이 없었던 것은, “건물을 세운 너희의 마음은 정녕 나를 위한 마음으로 준비되었느냐”고

묻고 계신 침묵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멈춤’에 담긴 이 침묵의 메시지를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삶은 침묵으로 끝나지 않도록 힘써 나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