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러분과 느헤미야 후반부를 한편의 설교로 나누려고 합니다. 2주 전에 다뤘던 설교와 연결되며, 느헤미야서는 오늘의 설교로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목사도 성장하고 자랍니다. 8년 전 교회를 개척하던 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많은 부분에서 변했습니다. 가끔 저희교회에 오신 분들 중에 기존 교회에서 목회자에 대한 상처가 있으셔서 저를 붙잡고 “목사님, 변하시면 안 돼요.”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너무나 잘 알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 제가 그때의 신앙인으로, 그때의 목회적 역량으로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의 공동체를 저는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저에게도 깊은 성장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말씀을 사모하는 공동체에서 깊은 수준의 설교를 준비해야 했던 시간들입니다. 우리교회는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분들이 정착하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일단 설교가 길잖아요. 또 나눔의 시간들도 많기에 말씀을 잘 들어야 나눌 수 있습니다. 게다가 66권의 책을 모두 설교하겠다는 프로젝트로 6년이 넘게 설교를
해왔습니다. 이 시간들이 저와 여러분 모두를 깊이 성장시켰다고 느낍니다. 예전 강해설교 본문을 다시 만날 때면 그것을 많이 느낍니다. 2019년에 느헤미야 강해설교를 했었는데, 다시 읽어보아도 꽤 잘 준비된 설교였으나, 그때는 보지 못했던 부분들도 많이 있었음을 이제는 깨닫기도 합니다. 그때는 세상을 볼 수 있는 역량의 한계가 있었고,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영혼을 붙들고 씨름했던 경험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을 때였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배우고 익힌 것을 토대로 신학적인 입장에서 최선의 설교를 했었던 때였습니다. 다시 다루는 만큼 의도적으로 조금더 확장된 관점에서 느헤미야서를 바라보며,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를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2주의 시간이 지났기에 느헤미야 전반부를 짧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안정된 자리에 있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가 느껴지는 그 상황을 그저 ‘부담’이 아니라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며, 눈물과
금식으로 오래 기도하며 준비합니다. 느헤미야의 최대 강점은 현실과 영성의 조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준비된 자를 하나님이 쓰신다고 느낄 만큼 그는 그의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며, 꿈꾸는 것들이 현실이 되어갑니다. 물론 예루살렘 도시를 재건하는 프로젝트는 내부에서의 설득도 필요했고, 외부의 방해도 뚫고 나아가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꽃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한 영은 더 날뛰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악한 영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서 사람들을 일으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죠. 예루살렘에 귀환한 공동체를 향한 핍박이 그렇게 생겨납니다. 공동체를 향한 공격, 그리고 느헤미야를 향한 공격이 지속적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여러분 곁에 있는 영적인 리더들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사역의 책임자들과 목양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탄이 우리에게도 불평할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한 마음이 생겨서 돕고 따를 마음이 생깁니다. 외부의 조롱과 위협, 내부의 갈등과 가난, 가짜 뉴스와 음모까지 맞서 싸우며,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준비하면서 기도하는’ 균형 잡힌 영성으로 성벽을 재건해 냈습니다. (느 6:16)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헤미야서가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최종적 목표로 삼았다면 13장까지 필요하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야기는 어쩌면 그보다 느헤미야서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에 관해서입니다. 성벽 재건이라는 큰 프로젝트가 끝났습니다. 교회 경력이 많은 분들은 경험하며 깨닫는 것이 있는데, 언제나 큰 프로젝트 앞뒤로는 영적인 공격이 거셉니다. 성벽을 재건하기 전에도 공격이 심했지만, 성벽을 재건한 이후에도 다른 종류의 영적인 공격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벽이 재건되었다는 저 기쁨의 이야기 뒤에부터 끝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6장의 후반부에는 성벽을 재건했지만, 여전히 느헤미야를 돕기보다 ‘도비야’라는 적대자의 편에 서서 느헤미야를 고립시키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하는 모든 말은 도비야에게 그대로 전달되었고, 도비야는 사람들을 움직여 느헤미야를 압박하고 흔들고 있었습니다. 즉, 공동체의 외형적 울타리인 성벽은 재건되었지만, 공동체의 영적인 시스템은 망가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벽 재건 후, 느헤미야는 공동체의 역할을 분배합니다. 백성들도 각자의
터전에 정착하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8장으로 이어지는데, 나팔절이라는 절기를 맞아 백성들이 모여들게 되는 것입니다. 무릇 예배는 시간과 공간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도 절기와 안식일이라는 시간의 질서를 따랐고, 그 시간이 되면 공간의 약속을 이행하며 모여서 예배했습니다. 안식일은 가까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지만,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함께 예배하는 영적인 리듬을 지켜왔습니다. 8장은 그렇게 모여든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시대의 정치적 리더는 느헤미야였다면,
영적인 리더는 에스라였습니다. 드디어 이 둘이 함께 동역하는 내용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든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달라고 요청합니다. 모세의 율법책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모세오경’이라고 불리는 책을 낭독하며 가르쳤다고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중 역사에 관한 내용보다도 레위기와 신명기처럼 구체적인 언약에 관한 내용들이 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우리 형제님들과 함께 MBS를 만들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과연 잘 될까?” 어쩌면
반신반의하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더 좋습니다. 특별히 우리 형제님들이 성경을 진짜 궁금해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다룬 것이 ‘민수기’ 말씀이었습니다. 출애굽 1세대의 실패와 2세대가 세워지는 장면을 다루는데, 내용이 느헤미야서와 매우 비슷합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공동체가 세워져 가는 일에는 외부와 내부의 공격이 있고, 특별히 영적 지도자를 향한 공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세대가 실패하고 2세대가 그 사명을 이어받게 되었을
때, 모세가 2세대를 모아 놓고, 그들과 매우 특별한 시간을 갖습니다. 그것이 민수기 뒤에 이어지는 ‘신명기’입니다. 왜 그것이 필요했느냐? 1세대는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직접 언약을 맺은 세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워진 것이 2세대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사명을 이어가는 ‘언약백성’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언약식을 경험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모세가 이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스라엘의 지난 과거의 실패를 가르치고, 이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신명기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귀환 공동체도 출애굽 1세대에 해당하는 옛날 이스라엘의 실패를 뒤로 하고, 다시 귀환하여 사명을 이어가는 세대가 아닙니까? 즉, 귀환 공동체는 마치 출애굽 2세대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도 다시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기 위한 교육과, 헌신, 그리고 언약을 갱신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이들에게 신명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비전과 뜻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언약가족을 세워가는 일에 올 한 해 굉장히 집중했습니다. 풍삶기까지 훈련을 받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신앙을 세워가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비전을 봤다면, 이제는 그 비전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들로 세워가는 일이 중요하거든요. 언약가족 예배가 그것을 해 나가기 위한 모임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사귐가족이 언약가족이 되도록 돕는 것이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단계에서 누구나 처음에는 자신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 번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비전 앞에 나를 드리는 신앙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 양육은 우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잘 세워가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면 하나님의 비전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가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우리가 지독히 우리를 괴롭히는 자기중심성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이날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은
우리 사귐의교회 성도님들보다 한 수 더 위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날 설교가 얼마 동안 지속되었느냐. 새벽부터 정오까지입니다. 적어도 6시간 동안 이어졌는데, 모든 백성이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먹어야 사람이 큽니다. 먹는다는 것은 우선 듣는 것이고, 듣는 것을 소화하여 새기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들어도 그 말씀을 새기지는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요새 목회자들을 만나면 다들 하는 이야기가 AI에 관한 것입니다.
저도 학교에서 강의를 하잖아요. 괄호 넣기 문제를 내주면 수업을 잘 듣고 그것을 푸는 것이 아니라 AI에 그걸 물어보고 그대로 답을 찾아 적기에 바쁩니다. 그런데 설교 때도 휴대폰을 들고 설교자가 하는 말이 과연 사실인가 아닌가, 그때마다 AI에 확인하며 듣는 청중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 듣는 것일 수는 있지만, 말씀을 어디에 새기려는 것인지는 고민해 봐야 합니다. 성경에 관한 질문이나 설교에 관한 질문은 유익할 수 있지만, 말씀이 머리에만 새겨지는 사람이
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나 머리에서 가슴으로 와야 하고, 가슴에서 손과 발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사람입니다. 특별히 종종 우리 교회 안에 어떤 분들은 설교의 내용 하나하나도 진짜로 새기고 그렇게 살아보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적으로 잘 자라갑니다. (느 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말씀 중에 ‘아멘’으로 반응하시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습관적으로 아무 의미 없이 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내가 말씀을 잘 받고 따르기 위한 고백으로 ‘아멘’은 유익합니다. 에스라와 함께 백성들은 ‘아멘 아멘’하며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느 8:7)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는, 백성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을 설명하여
주었다. (느 8:8)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에스라가 6시간 동안 말씀을 낭독하고 가르칠 때, 13명의 레위인들이 각자의 구역에서 그 내용을 풀어주고, 질문에 응답하며 백성들을 도왔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팸 모임을 하듯이, 말씀을 다시 정리해 주고, 그것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이 모습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들으며 울기도 하고,
또 함께 기뻐하기도 하며 사경회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말씀을 들은 후, 자신들이 놓치고 있었던 ‘초막절’을 지켜 행하기로 결심합니다. 말씀이 이들을 그렇게 회복하는 놀라운 축제를 이들이 누렸던 것입니다. (느 8:17)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렇게 축제를 즐긴 일이 없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즐거워하였다. (느 8:18) 에스라는 첫날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규례대로 성회를 열었다. 이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또다시 모여서 예배합니다. 영적인 상태가 좋으면 자꾸 예배합니다. 습관적이고 종교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심으로 예배합니다. 반대로 내 영적인 상태가 안 좋으면 예배가 싫어집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귀환 공동체는 예배하며 자신들의 잘못된 것들을 청산해 가기 시작합니다. 전도사님이 이번에 금요영상 특강에서 다뤘지만, ‘술’에 관한 문제를 저도 종종 이야기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술담배를 즐기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정말 잘 오셨습니다.”입니다. 담배 피우셔도 됩니다. 예배 후에 담배를 피실 분들은 옥상에 올라가시면 쾌적하게 피실 수 있습니다. 술담배 끊고 교회 오려고 하면 못 옵니다. 필요하면 술 마시고라도 오시고, 담배 얼른 피고 내려와서 예배하십시오. 다만 제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끼리 모여서 술 먹는 모임 만들면 안 됩니다. 교인들끼리는 예배하는 모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모임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우리의 기본입니다. 제가 매우 좋아하는 예화가 사구와 삼구 예화입니다. 저는 당구를 잘 모르지만, 사구를 치다가 삼구로 넘어가는 것이 레벨이 올라가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사구가 그렇게 재미있던 사람도 삼구에 맛을 들이면 사구가 그렇게 재미없다고 합니다. 우리도 게임을 할 때, 초보자 레벨로 하다가, 나중에 상급자 레벨에 적응하면 초보자 레벨로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커지면, 내가 다른 것에 쏟던 에너지와
마음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더 큰 기쁨을 알면 알아서 정리가 됩니다. 술담배는 예배하면 예배할수록,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친밀해질수록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해보시면 압니다. 아직 안 멀어지신 분은 그것과 멀어지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예배와 더 가까워지려고만 하시면 됩니다. 백성들이 말씀과 가까워지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자신들이 즐기던 것들 중,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끊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더욱 즐거워하기 시작합니다. (느 9:1) 그 달 이십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서 금식하면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썼다. (느 9:2)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이방 사람과 관계를 끊었다. 그들은 제자리에 선 채로 자신들의 허물과 조상의 죄를 자백하였다. (느 9:3) 모두들 제자리에서 일어나서, 낮의 사분의 일은 주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고, 또 낮의 사분의 일은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주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여기서 낮은 하루를
의미해요. 1/4이면 6시간입니다. 6시간을 성경공부하고, 6시간을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귀환 공동체에게 드디어 진정한 마음의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9장을 보면,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그것에 관하여 고백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며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 그 역사 속에서 신실하셨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역사 속에서 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들의 환경을
보고 하나님 탓을 했습니다. 왜 우리를 여전히 페르시아를 섬기는 종살이 하는 속국으로 두시냐?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바라보던 것이 이들의 옛 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배우며 시선이 바뀝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구나.” (느 9:29) 돌이켜 주님의 율법대로 바로 살라고, 주님께서 엄하게 타이르셨지만, 그들은 거만하여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키기만 하면 살게 되는 법을
주셨지만, 오히려 그 법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께 등을 돌리고, 목이 뻣뻣하여 고집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느 9:30)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러 해 동안 참으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주님의 영으로 타이르셨지만, 사람들은 귀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주님께서는 그들을 여러 나라 백성에게 넘기셨습니다. (느 9:31) 그러나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을 끔찍이도 불쌍히
여기셔서, 멸망시키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는 삶이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있기에 겪는 일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언약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렇게 살아가지 않았던 조상들의 모습에 대해 통회하며 이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까요?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가족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 명단이 10장에 쭉 기록되고 있는 것이죠. 우리교회도 언약가족이 될 때, 풍삶기에서 배운 삶을 어떻게 실천할지 각자 하나님께 언약의 내용을 고백하고, 함께 서약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풍삶기의 가르침은 아주 빠르게 증발합니다. 붙들고 씨름한다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는 함께해야 조금이라고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귐의교회에 등록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은 내 영적 성장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풍삶기를 했으나 그 삶이 나에게 실천되지 않는 분들은 다시 신청하십시오. 이것은 이 과정을 끝냈다는 자격증 얻는 시간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누군가는 잘 소화가 안 되면 2번, 3번, 4번 반복하셔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날 살리는 것입니다. 잘 가르치는 이끄미가 아니어도 됩니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동역자면 됩니다. 이들도 언약의 내용을 함께
정하여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기로 맹세합니다. 84명의 사람이 백성들을 대표하여 언약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2) 안식일에 내 유익을 위한 일을 멈추겠습니다. (거래 등) 3) 안식년 규정을 지키겠습니다. (땅의 안식, 서로의 빚 탕감) 4) 성전의 운영을 위한 예물을 드리겠습니다. (각종 헌금 및 규정들) 5) 첫 열매와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셨으나, 조상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자 하나씩 내팽개쳤던 것들이었음을 이들이 말씀을 통해 다시 발견하고 붙들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특별히 이제 성전이 재건되었으니, 그곳에서 봉사해야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필요한데,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성전에서 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 이 모든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영성과 현실의 조화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도 매우 현실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도시가
재건되었지만, 아직 그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들의 터전이 다 있으니, 굳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살아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꽤 오랜 시간을 교회 건물 안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결혼할 때까지 20년을 넘게 교회 건물 안에서 살았죠. 좋은 점도 있죠. 그런데 생각보다 어린 저에게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일단 그냥 무조건 불편했습니다. 교회 모임 장소를 위해서 제 방도 내어줘야 했고, 교회 관리의
책임도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특별히 그것이 저의 자발적 기쁨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어요. 눈을 치우는 것도 어떤 때는 제가 기쁨으로 하지만, 어떤 때는 정말 마지못해서 툴툴대며 나갈 때도 있었죠.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주하는 것도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여기도 중요한 것은 자발적인 헌신이었습니다. 약 1/10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하는데, 우선 자진하여 나서는 사람들에게 백성들이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이 표현만 보더라도 예루살렘 안으로 가는 것이 원하는 일들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죠. 그래서 나머지는 제비를 뽑아서 이주하게 됩니다. 이렇게 언약을 갱신하고, 예루살렘 거주민들도 구별하게 되자, 이제 성벽을 봉헌하는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큰 찬양대를 두 무리로 만들어서 한쪽은 에스라가, 한쪽은 느헤미야가 이끌고 성벽 위를 행진하며,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 하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느 12:43) 그 날, 사람들은 많은 제물로 제사를 드리면서 기뻐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기쁘게 하셨으므로, 여자들과 아이들까지도 함께 기뻐하니, 예루살렘에서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듯한 내용이죠. 귀환 공동체가 회복되고 충만해지는 절정의 모습을 느헤미야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완벽하다, 진짜 부흥이다” 싶은 순간입니다. 성경 읽기 + 회개 + 삶의 서약까지 다 나온 장면이니까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느헤미야서는 이렇게 끝내지 않고 13장을 우리에게 남겨 놓습니다. 13장 앞부분까지는 이들이 말씀이 요구하는 삶을 살려고 애썼던 희망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서 페르시아에 가 있던 순간, 문제들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시작은 작은 것이었습니다. 일전에 느헤미야를 방해하던 ‘도비야’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그와 연결된 귀환 공동체의 리더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니까 결국 그것이 발전되어 문제가
터집니다. 한 제사장이 성전 안의 공간을 도비야에게 내줘서, 그가 마치 성전의 일부를 자신의 공간처럼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마음이 선을 넘게 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십일조에 관한 언약을 지키지 않게 되었고, 그 연쇄작용으로 레위인들이 월급을 받지 못하니 각자의 일터로 떠나버리게 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귀환 공동체의 영적인 시스템이 붕괴하며 예배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겠다는 가장 기본적인
약속도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안식일에 일을 하고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쯤 되자 느헤미야도 화가 나가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다 지도자들을 꾸짖습니다. (느 13:17) 그래서 나는 유다의 귀족들을 꾸짖었다. "안식일을 이렇게 더럽히다니, 어쩌자고 이런 나쁜 일을 저지르는 거요? (느 13:18) 당신들의 조상도 똑같은 일을 하다가, 우리와 우리 도성이 모두 하나님의 재앙을 받지 않았소? 당신들이야말로
안식일을 더럽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위에 진노를 내리시도록 하는 장본인들이오." 그래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종들을 성문에 보초를 세워 안식일에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점점 그의 반응은 굉장히 거칠고 날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어느새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또한 매우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힘써보지만, 그의 조치는 공허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느헤미야도 하나님께 억울함의 기도를 드릴 뿐이었습니다. (느
13:29) "나의 하나님, 그들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은 제사장 직을 더럽히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언약을 저버린 자들입니다." 느헤미야서의 가장 마지막 장에는 이런 상황 속에서 애쓰는 어쩌면 나약하고, 어쩌면 가련한 느헤미야의 기도들입니다. (느 13:14) "하나님, 내가 한 일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성전을 보살핀 일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정성껏 한 이 일을 잊지 마십시오." (느 13:22) "나의 하나님, 내가 한 이 일도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지없이 크신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느 13:31)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31절이 느헤미야서 가장 마지막 장면입니다. 어쩌면 찬란하게 회복되는 듯했지만, 다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이 모습 속에서 느헤미야서는 끝나버립니다. 어떤 면에서는 참 허무한 결말입니다. “결국 또 무너졌구나….” 하는 허탈감이 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성경이 진짜 우리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앞서 에스라서에서도 분명히 방향은 맞지만, 뭔가 완성되지 않는 어떤 결론들을 보았습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그 시대적 상황 안에서 나름의 애를 썼습니다. 그들을 탓할 수 없는 그들이 잘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꿈을 담아낸 언약백성으로 세워졌다고 보이지 않도록, 성경은 ‘미완’의 결론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읽는 우리에게 해피 엔딩이 아니라, “뭐가
문제지? 뭐가 빠졌지?”라는 고민을 안깁니다. 기승전결이 아니라, 조금은 열린 결말과 찜찜함을 던지는 것이 에스라-느헤미야서가 보여주는 매우 독특한 결말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성경의 의도를 놓치게 됩니다. 성전과 성벽이 모두 재건되었어도, 정치와 종교, 예배와 헌신이 다 갖춰지고 작동되는 듯 보여도, 결국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힘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망해가는 유다의 마지막을 예언하며, 그리고 다시 새워질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며
외쳤던 것은 ‘새 언약이 마음에 새겨진 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우리교회의 양육 이야기를 몇 번 언급했습니다. 이런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성전도 필요하고 성벽도 필요하듯 말입니다. 절기도 필요하고 제사장도 필요하고 지도자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 모든 것은 도구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돌같이 굳은 우리의 마음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말씀이 나를 향하면 부담스러워합니다. 그 앞에 서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나를 향해 있어야 우리는 변합니다. 교회가 좋은 시스템을 만들 수 있고, 교회가 좋은 공간을 꾸밀 수도 있고, 좋은 프로그램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진짜로 경외하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으면, 다른 것은 다 겉껍데기가 될 뿐입니다. 결론은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에스라-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하나님도 늘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나름의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개혁과 갱신은,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끊임 없이 이어져 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래 우리의 일은 되는 듯할 때도 있고, 또 안 되는 듯할 때도 있습니다. 회심한 사람도 변화가 되는 듯하기도 하지만, 또 멈춰 선 것 같은 순간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교회도 그럴 것입니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방향이 맞다면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번의 결단,
한 번의 언약, 한 번의 예배로 모든 것이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느헤미야의 결론 앞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부족해서 망했다”가 아니라, “우리는 늘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라는 고백 속에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사귐의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지금까지 승승장구했습니다. 시대의 어려움이 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성장해 왔고, 성숙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시간을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설계하고, 잘 목회하고, 잘 섬기려 해도 쉽지 않다고 느끼는 시간을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화도 나고 답답한 순간들이 올 수도 있습니다. 회심했다고 고백하는 여러분이 스스로에 대해서도, 옆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끼는 시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도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씀 앞에 서고, 다시 함께 아파하고, 다시 회개하고, 다시 예배하고, 다시 우리의 자리를 지켜나가며 우리의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붙들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여정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예루살렘 성벽이 아니라, 참 성전이신 예수님, 돌판에 새겨진 말씀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판에 새기시는 새 언약으로 이끌어가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일어나 걷게 하는 힘도,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새 마음을 주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의지하며 나아가십시오. 신자의
삶에 완성이 있겠는가? 저는 목회를 시작하며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제게 해주신 말씀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자는 죽을 때까지 나를 점검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이 멈추는 순간, 부패한다.” 구원의 여정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지만, 날마다 드려지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부디 넘어졌다고 좌절하거나 돌아서지 마시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기에, 다시 일어나 걷고, 서로를 붙잡아주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