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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 사귐의교회 주일 예배 설교 / 베드로후서 1-3장 / 사도의 당부 (베드로후서의 메시지) / 강정규 목사

2020-12-27 · 베드로후서 1-3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https://youtu.be/5EwOrsadMhA https://youtu.be/IT-UxE-VYBc https://youtu.be/_KQaue9Rf6w 성경 베드로후서를 시작하겠습니다. 4세기 말에 신약의 정경화 작업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정경이라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고 따를 성경으로 인정하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성경을 인간의 단순한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자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저자의 집필 과정뿐만 아니라 정경 채택의

과정을 성령이 보호하시고 이끄셨다는 고백입니다. 당시에 성경과 비슷한 거짓된 문서들이나 이단 문서들도 많았기에, 교회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정경화 작업을 합니다. 여러 문서들 중에 저자가 확실한 것들을 분류하고, 이것이 초대교회에서 계속 읽혀온 것인지 철저한 검증을 거치게 됩니다. 그 중에는 비교적 빨리 이 검증을 통과해서 일찍 정경으로 인정을 받은 책들이 있습니다. 이런 책을 ‘호모레고메나’라고 부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책이라는 것이죠. 반면 ‘안티레고메나’에

해당하는 책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몇 가지 부분에서 반론이 제기되므로 보다 철저한 검증을 거친 책들입니다. 신약 7권 정도가 이에 해당하는데, 그 중에 한권이 베드로후서입니다. 베드로후서와 관련해서 제기된 문제는 이 책이 정말 예수님의 사도 베드로의 저작이 맞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여전히 이것이 베드로의 글이다, 아니면 후대에 베드로의 유언을 정리해서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의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이야기들의 출처가 베드로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즉, 이 논란은 최종편집자의 논쟁인 것이죠. 그러므로 설령 다른 의견과 견해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 이야기가 베드로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인 60년대 중반, 오늘날 터기 북부 지역인 소아시아 반도의 로마령 5개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쓰게 된 편지입니다. 교회들에게 보냈다는 점과 그들의 상황이 여러 가지 핍박을 받고 있다는 점은 베드로전서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들도 있는데,

외부의 핍박만이 아니라 내부의 적에 대한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점이고, 베드로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벧후 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대로, 내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가 멀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연사 한 것이 아니라, 로마에 의해서 순교를 당합니다. 죽음의 위협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는 것인데, 그는 이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에게는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가 자신과 같은 길을 가지 못할까 그것입니다. 당시 교회의 상황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세 부류입니다. 1) 믿음이 좋은 사람들(성숙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하는 자들입니다. (벧후 1:4)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은 계속 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5절 에 보면 “너희가 더욱 힘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 힘써 그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주실 약속은 이것입니다. (벧후 1:11) 또한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출 것입니다. 2) 믿음이 없는

사람들(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에서 창조로 끝납니다. ‘세상’을 창조한 것에서 시작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으로 마감하는 것이죠. 시작과 끝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분의 일하심 속에 우리는 머물고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죠. 이것은 우리의 인간적 이성의 한계에 봉착합니다. 뭔가는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과학적 접근으로 이분에 다다를 수 없으니, 그

존재에 대한 불신과 반발도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여기고, 보이지 않는 그분의 세계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표현하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없는 듯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므로 재림과 심판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무시되고, 오직 이 땅에서의 평안과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벧후 2:13)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불의의 값으로 해를 당합니다. 그들은 대낮에 흥청대면서 먹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티와 흠 투성이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여러분과 연회를 즐길 때에도, 자기들의 속임수를 꾀하고 있습니다. (벧후 2:14) 그들의 눈에는 간음할 상대자들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들뜬 영혼들을 유혹하며, 그들의 마음은 탐욕을 채우는 데에 익숙합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자식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성을 더 신뢰했고, 성경의 증언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습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삶도 합리화

하고, 주변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교회 밖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이들이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들도 한때는 주를 믿고 인정하던 자들이었으나, 적어도 현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에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머뭅니다. 그들의 관심은 말씀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여전히 돈이고 쾌락입니다. 이들이 바로 베드로후서에서 ‘거짓 선생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사상을 자꾸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로 베드로가 염려하는 교회 내부의 문제들인 것입니다. 3)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초신자)입니다.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았고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성숙한 신앙인의 길을 갈 수도 있겠으나, 반대로 거짓 선생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이들이 이 편지를 받고 깨달아서 신앙이 성숙한 자를 따라가고, 거짓 선생들을 분별하여 멀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들이 뒤섞인 교회를 바라보며

베드로가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매우 사랑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오래 전에 내려놓았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결코 완전할 수 없고, 그나마 경건하리라 믿었던 목사들은 이미 많은 실망을 시켜왔습니다.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당연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성숙한 신앙인으로 칭찬받게 되기를 힘쓸 것입니다. 그러나 자만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저도 이 문제 앞에 장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교회 안에도 항상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존재하며, 말씀의 씨앗이 받는 사람들 안에도 4가지 밭과 같이 각기 다른 반응을 하게 됨을 명시합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참된 신앙인은 아닐 수 있으며, 구원에 이르는 것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만인 구원 같은 잘못된 허상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나는 ‘옥토다’라고 말하고 싶고, 믿고 싶겠으나... 옥토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사탄의 방해는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자주 말하는데, 사탄 또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 미혹 된 사람들로 공동체를 흔들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 말씀 앞에 서 있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한 사탄의 앞잡이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 내 마음대로 살아가며

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이 구분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현재 내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한때는 하나님 앞에 살아갔지만, 지금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변질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을 때, 교회는 위기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목사 혹은 교인 중에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 그렇게 변질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상황이

되면, 그것은 공동체가 위기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 회개하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경건한 모습으로 변화될 가능성도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예정론에 빠져서 나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야 단정짓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어제까지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 말씀을 듣고 깨닫고 돌이켜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늦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죠. 이것이 교회가 꿈꾸는 것이고

교회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내 미래를 자만할 수 없으며, 자만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내 싸움은 이미 끝났다고 하는 순간이 가장 큰 위기이며, 나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가장 주님과 멀어지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 다수가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믿고 있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공동체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악인들이 교회를 흔들어 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은 공동체는 견디어 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향보다 하나님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후서의 이 상황은 그 시대에만 존재한 특별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이와 같은 일들을 계속 마주하며 앞으로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찌든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그 가치를 가져와서 열심히 전파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도전은 이 땅의 교회 안에 계속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고 공존해야 하며,

물들지 않기 위해, 바른 길을 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베드로후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승리하자’라고 말합니다. 뭐 하자는 것일까요? 그 승리는 누구에 대한 것일까요? 사실 그 대상은 ‘나’입니다. ‘나’와의 싸움. 나의 옛 사람. 하나님께 굴복하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고 주님이 이기시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승리입니다. 반대로 주님이 내 안에

지는 것. 내가 주님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말씀이 내 삶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 그런 ‘나’의 승리는 실상 패배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간단합니다. 내가 말씀보다 위에 서는 것입니다. 내 이성대로 판단하고 그것을 행한 결과입니다. 거짓 선생은 우리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멀리하고, 내가 옳다고 여기며 살아가면 곧 우리도 그렇게 됩니다. 오죽하면 바울도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나, 도리어

자신은 넘어짐으로 버림을 당할까 날마다 몸을 쳐서 주님 앞에 복종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머물렀던 인물이죠. 우리가 알다시피 그의 삶에도 많은 굴곡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굴곡들을 거쳐서 그가 성장한 것이죠. 그러므로 그의 실패는 언제나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드로를

참 좋아합니다. 바울을 존경한다면, 베드로는 사랑합니다. 베드로에 대해서 가장 멋있게 생각하는 부분은 그가 순수하고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의 제자 명단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베드로의 영향력은 대단했고, 모두가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기득권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고,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으며, 예수님 앞에 한결같이 순종했습니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그를 통해 연약한 사람들을 도전하고 세워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예수님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베드로후서는 그런 노(老) 사도의 당부입니다. 아니, 유언입니다.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주님이 넘어진 자신을 찾아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부탁하셨고, 그 이후로 베드로는 그 주님의 명령을 삶으로 끊임없이 실천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피땀으로 세워진 교회 내에 거짓 선생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연약한 자들을 미혹하고 있으니, 그들을 향해서 간곡한 권면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신앙의 도전 앞에 교회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편지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더욱 깊이 경험함으로,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저는 예배가 이것을 돕는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예배 안에서 찬양을 드리며, 말씀을

들으며, 기도를 하며 우리는 그분을 경험합니다. “예수를 깊이 경험하라.” 베드로는 편지의 인사말에서 이러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바로 내게 임한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벧후 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베드로는 우리가 경험한 죄 사함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다음 구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초청하고 선택하신 것이 옳았음을 입증해 보이십시오.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그렇게 하십시오.” 신앙은 가만히 표류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찾고 주님을 경험하며 그가 베푸신 은혜를 묵상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표류하면 흘러 떠내려가기 쉽습니다. 많은 예배가 답은 아닐 것입니다. 횟수가 정답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더 많이 달리고 더 많이 운동하는 평범한 진리가 최우선이듯이, 하나님 앞에 예배에 더욱 힘쓰고,

찬양을 부르고 듣기에 힘쓰며,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이 우리의 영적 건강함을 위해 유익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제 만남을 갖는데 한 가정에서 2021년의 목표가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한번 더 예배하기’로 정했다고 해요. 주일만 예배했으면 금요일도 예배하고, 2번을 한 사람은 3번을 예배하고요. 참 감사한 일이죠. 제가 예전에 예배는 ‘영적 근육을 키우는 일이다’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근육은 한 번에 생기지 않죠. 그래서 저는 매주 예배하는

사람과 한 달에 한번 예배하는 사람의 삶이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근육을 키워야 사탄의 공격을 이겨낼 맷집이 생기는 것이죠. 지난주까지 살펴봤던 역대기에서는 언제나 다윗의 삶의 기준으로 돌아오라고 말하지요. 우리의 신앙에서 돌아갈 기준은 언제나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그 주님의 말씀을 평생 동안 전하였습니다. 순회선교사로서 이곳저곳 다니며 말씀으로 교회를 세웠고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로 양육해 왔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보내는 이 마지막 편지 써서 보내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벧후 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벧후 1: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벧후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는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평생을 해 온 일이지만, 한 번 더 그들을 일깨워서 방심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그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는 자신의 이 이야기들을 문서화해서 자신이 죽은 뒤에도 이 글을 읽으며 항상 가르침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자로 살면서 모든 원고를 제가 직접 작성하기 때문에 내용들을 대부분 다 기억을 합니다. 그래서 설교 중에 어떤 부분에 대해서 작년 혹은 재작년에 가르쳤던 것을 상기시켜 드릴 때가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러면 몇몇

분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몇 년 전 설교를 다시 찾아서 들으시는 것을 저는 압니다. 감사한 일이죠. 제가 블로그에 방문자가 많은 편입니다. 그로 인해, 때로는 사귐의교회 뿐 아니라 다른 분들의 신앙상담도 해드리고 성경질문에 답도 해드리고 그렇죠. 그런데 제가 블로그를 처음 하게 된 것이 5년 전인데, 설교를 들으신 분들 가운데.. 다시 듣고 싶은데 방법이 없냐고 하시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설교가 끝나면 원고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듣기를 원하시는 분이

조금 더 생겨서 블로그에 원고를 올리고 후에는 동영상을 찍어서 올리기 시작했어요. 베드로는 죽으면 이 편지를 제발 잘 간직해서 다시 읽고 기억하라고 말하는데, 요즘에 정말 시대가 얼마나 좋습니까? 언제든 원하면 저의 설교 뿐 아니라 수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죠. 어제 또 만남을 하는데, 한 분이 설교 내용을 5번씩 들었다고 합니다. 이해가 될 때까지. 저는 우리 사귐의교회 교인들이 설교를 대부분 참 열심히 듣고 있음을 알고 있고, 그것이 참 감사합니다.

저도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최선을 다해 말씀의 양식을 먹이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힘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베드로나 바울의 설교, 더 나아가 예수님의 설교를 지금 다시보기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이 성경입니다. 베드로의 소원대로 이 편지가 베드로후서로 기록되어 우리가 읽고 묵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많은 설교를 듣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죠. 어떤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있어서 그것을 설교를 통해서 나눴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도 똑같은 설교를 그대로 다시 전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로님이 항의를 하러왔답니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설교를 새롭게 준비도 안 하시고 그대로 다시 하실 수가 있습니까? 직무유기입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장로님을 바라보면서 “장로님은 어떻게 그 설교를 듣고도 한 주간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오실 수 있습니까? 직무유기입니다. 그래서 다시 전한 것입니다.” 이랬다고 합니다.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저도 부교역자 때 들었던 예화입니다. 베드로가

다시 들어서 달달 외우기를 원했겠습니까? 이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죠. 그것만이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벧후 3: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여러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유명한 말씀이죠. 우리의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이고, 그것을 기억하여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명하신 것’은 ‘명령’(엔톨레-ἐντολή)이라는 단어입니다. 명령을 기억하는 것이 성숙한 신자인데, 거짓 선생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앞장에서 기록했습니다. (벧후 2: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그들의 특징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명령을 기억하고 그것을 붙들고 사는 자가 참된

신자이고, 명령을 저버리는 것이 거짓된 신자입니다. 듣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붙들지 않는 것입니다. 새기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히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신앙을 권면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에게 끝이 있고 그 끝에는 하나님의 판결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는 세 부류의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 계속 그 길을 가기를. 초신자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 성숙한 자들의

길을 따라 가기를. 교회 안에 있으나 하나님이 없는 듯 살아가는 자들 : 돌이켜서 회개하기를. 이것이 이 편지의 목적입니다. 그가 이러한 당부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세운 교회의 신자들 어느 누구도 심판 당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지만 죄의 임계점이 찾을 때, 아끼지 않으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벧후 2:5) 그는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는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인 노아와 그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주셨습니다. (벧후 2:6)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을 잿더미로 만들어, 후세에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는 반드시 심판하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악한 시련에서도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해야 합니다. 각자를 기준에 두면, 하나님은 언제든 날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세상은 악한 세상입니다. 만약 조두순 같은 범죄자가 악을 행했는데, 그를 사랑하기에 죄를 묻지 않으면, 곧 이 세상은 더욱 악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 자를 도우시고 악을 행한 자를 벌하시는 ‘신상필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악은 반드시 심판을 당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는 진리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공정한 심판으로 모든 이를 평가하실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때를 늦추시는데,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기 위함인 것이죠.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죠.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9절을 해석합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더디 이루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참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종말을 유보하고 계신 것은, 한 사람도 잃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삶을 고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베풀고 계십니다.” 종말, 재림, 부활, 마라나타. 결국 이러한 이야기들은 현재의 삶을 전부로 여기느냐, 아니면 그 이후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느냐. 이러한 신앙적 시각이 우리의 삶의 태도를 완전하게 다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종말 신앙과 가장

다른 것이 무엇입니다. 세상이 너무 당연하듯 여기는 ‘YOLO’ 아닙니까. 교회 안에 있는 욜로족. 그들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현재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주어진 시간을 통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누리려 합니다.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고 오늘만 있으며 인생의 끝에 누군가 기다린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반면, 성경의 말씀을 믿는 사람의 태도는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이 있으며 인생의 끝에 주님이 기다리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에 힘쓰는 삶을 삽니다.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이 있으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마주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내일이면 없어지고 말 것들입니다. 그러니 거룩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날을 기다리고, 그 날이 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십시오.”(벧후 3:11)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베드로가 갔던 길이 있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입니다. 그는 그 일에 부름을 받았고, 때로는 실패했으나 주님이 주신 힘으로 다시 일어나 그 길을 뚜벅뚜벅 갑니다. 그에게도 죽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셨고, 죽음을 넘어 부활의 승리를 맛보심을 진실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제자 삼아주신 것처럼,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의 성도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우리는 다른 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의로 뒤덮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할 것입니다.”(벧후 3:13)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신앙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우리가 에덴을 모르듯이 새 하늘과 새 땅도 지금의 세상과 다를 것이기에 아직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그가 우리를 지으신 모습대로 회복시켜서 처음의 상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그 상태로 회복시켜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의로 뒤덮인 새 하늘과 새 땅. ‘의’란 죄의 반대 개념이기도 하죠. 구원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의의 세상입니다. 주님이 다스려주시는 내 삶에도 형통과 평안이 있고,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따스한 주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이고, 우리는 완전한 것을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땅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지요. 우리는 ‘이미’ 그것을 누리고 있으나, ‘아직’ 완전한 하나님 나라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올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임한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여러분. 그 은혜를 매일 기억하십시오. 그 은혜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우리가 ‘이미’ 경험한 주님의 동행 안에서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올 그 나라를 굳게 소망하며... 주어진 오늘을 승리하며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