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교회" / 강정규 목사

2023-12-10 · 베드로후서 1장 4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제목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교회론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신의 존재를 믿습니까?” 저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가 됩니다. 일종의 ‘경험주의적 사고’가 사람의 기본적인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경험되지 않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경험주의적 사고가 옳은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역사에는 그런 흔적들이 많죠. 대표적으로 갈릴레오의 재판이 그런 것 아닙니까?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태양의 주변을 지구가 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는 틀립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이 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경험하는 것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경험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쫓으면 경험은 따라옵니다. 우리는 이제 과학의 발달과 위성의 존재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눈으로 확인되기 이전에도 그것은 진리였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확인하지 못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신의 존재가 바로 그런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이 진짜 진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신에 대해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고 증명하지 못하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의 주관적 경험을 믿지 않죠. 저라도 다른 사람의 주관적 경험을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했다고 진리가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 경험으로 진리를 판단하기에는 우리의 경험은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성만큼만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우리는 영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것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합니다. 우주를 공부해보면 겸손해지는 이유입니다. 우주의 전체 크기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관측 결과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는 약 138억 년입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 안에는

수천억 개의 은하가 존재합니다. 하나의 은하 안에는 최소 2천억 개 이상의 별이 있다고 봅니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은하’에서도 태양계는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 태양계 안에 지구가 있고, 그 안에 한국이 있고, 그 안에 양주가 있고, 옥정동에 우리가 있으니. 우주와 우리의 크기만 비교해보더라도 우리의 존재성은 정말 먼지보다 작다고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도 다 알지 못합니다. 아니, 우리가 감히 우주를 지금 정도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도 신비입니다.

바다 안에 있는 생물은 바다 밖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하는데, 우리는 지구에 살면서 우주를 지금 정도로 이해하는 것도 인간의 비범함입니다. 그런데 우주를 창조한 존재가 ‘신’이라면, 우리가 그 신의 존재를 경험해서 안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경험할 수 있어야만 ‘신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결론이며, 좁디좁은 생각일 것입니다. 요 앞의 호수공원에 사는 개미가, ‘내 눈으로 보지 못하면 바다에 고래가 산다는

것을 믿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성과 자신의 계획과 생각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전혀 알 수 없는 신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거나 안 믿거나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첫 장을 펴면 바로 결론이 납니다. 성경의 제일 앞 장을 믿으면 다 믿는 것이고, 그것을 못 믿으면 아직은 못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우리의 세상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신의 뜻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사실 이것을 진짜 믿으면, 성경의 그다음 내용을 믿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신이 우리와 우리의 세계를 창조했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여기에 사실 가장 큰 믿음의 결단이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 믿는다고 했을 때, 별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만약 신이 나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우연’에 의해서 내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무신론자들이 의지하는 상식은 우리의 존재가 ‘우연한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경우, 사실 우리와 다른 짐승의 차이는 종의 차이일 뿐 본질상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규정하는 삶에는 2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첫째, 자신과 짐승을 같은 등급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진짜 짐승처럼 본능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모두가 본능대로 살아서 진짜 이 세계가 동물의 왕국이 되어버리면 정작 우리 모두는 더 불행해질 뿐입니다. 그러니 최소한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기도 합니다. 둘째, 그래서인지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절망을 극복할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존재가 ‘우연’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존재하는 인생에 기댈 수 있는 존재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문제를 의지할 대상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는 얘기가 종종 있잖아요. 그들이 해결 못 하는 문제에 있을 때, ‘아빠만 믿어. 아빠가 해결해 줄게.’ 실제로 우리는 아이들은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합니다. 존재가 그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에게는 그 해결책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믿을 수 있나요? 하나님은 우리가 무조건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세상에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개입하십니다. 믿는 자들에게 세상이 누릴 수 없었던 경험을

주십니다. 경험해야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면 경험합니다. 그 경험이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것, 이 세상이 잃어버린 가장 근원적인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을 누리고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을 진짜 경험하면, 내가 지금껏 갖고 있었던 내 세계관과 가치관이 전복되기도 합니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꿈이 바뀌기도 하고,

우선순위가 바뀌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내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얻고자 하는 ‘가장 귀한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헛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면서 느끼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을 만나서 삶이 뒤바뀝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는 인삼을 먹고, 누구는 무를 먹은 것일까요? 하나님이 누군가에게는 먹히고,

누군가에게는 안 먹히는 존재일까요? 급진적 변화만 진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우리의 삶에는 점진적인 변화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5년, 10년이 지나도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내 삶 안에도 전과 후의 변화가 없고, 지금 오랜 세월 믿고 있는 내 모습이나, 안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변화가 없다면, 저는 그때부터는 나는 바른 진리를 바르게 믿고 있나?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영적 건강함과

성장에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성장이라는 말 자체가 거부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성장주의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성장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즉, 제가 말하는 ‘영적 성장’이란, 성적을 올리자는 이야기나, 승진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대로 생명이 자라나고 키가 크는 것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갖고 태어났다면 누구나 성장하는 것처럼, 영적 생명력이 있는 존재는 성장하며 때에 맞게 변화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생명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명이 있나?’라는 고민을 갖고 영적 탄생을 의미하는 ‘회심’부터 점검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의 전제는 ‘회심’이고, 회심의 전제는 ‘복음’입니다. 복음을 자기 삶의 진리로 정말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그냥 하나의 이야기로만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그 복음과 일치시키지 않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네 가지 요소 가운데 첫 번째로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창세기 맨 앞장이 아니더라도, 성경은 모든 곳에서 이것을 증언합니다. (히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그런데 성경은 원래 우리는 결핍이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과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성경은 그것이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핍에 빠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인간이 자초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회복시키는 자, 예수님을 통해서 말입니다. (엡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하늘 위에 오르셨습니다. 그 이유를 에베소서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다.’ 여러분.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왜 충만케 해야 하는가? 우선 지금 만물이 충만하지 않다는 의미겠죠. 즉 충만해지는 일, 원래의 상태가 충만했기에 원래대로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로 깨어졌고 하나님을 잃어버려 공허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과 피조물이 모두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분을 믿는 자는 충만해집니다. 안 믿는 자는 깨어진 채 살아갑니다. 우리만이 아닙니다. 만물이 다 깨어지고 망가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는 고통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세계도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롬 8:19)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롬 8:20)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롬 8:21)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롬 8:22)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충만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충만케 되는 것을 고대합니다. 허무함이 가득하고, 탄식과 고통이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지만, 충만케 될 회복의 날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누리는 영광된 자유를 모든 피조물도 함께 누리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을 또 오해하죠. 죽음 이후에나 받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현재의 삶에서 충만함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생이 하나님을 다시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시작된 구원을 평생에 걸쳐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심한 사람들은 구원이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사면 설명서를 잘 보고, 계약을 하면 약관을 잘 읽어봐야죠. 성경은 우리의 현재적 삶에 구원이 시작된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죽음 이후로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서는 맛보지도

누리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이미 이뤄진 일’로 과거형으로 나오기도 하고, ‘이루어지고 있는 일’로 현재형으로 나오기도 하고, ‘앞으로 이뤄질 일’로 미래형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면, 현재의 삶에서는 그 미래에 들어갈 천국행 티켓을 얻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현재 하나님이 나에게 하고 계신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회심하여 하나님께 돌아와 살게 된 것이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깨어지고 망가진 삶을 살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른 신학이 바른 신앙을 만들고, 바른 신앙이 바른 삶을 만듭니다. 우리의 현재의 삶에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은 망가진 우리의 치유와 회복입니다. 대체로 점진적으로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왜일까요? 주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까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지만 동시에 악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갈등이 없기에 편합니다. 세상의 세계관으로만 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게 최선은 아닐지라도 갈등은 적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두 가지 가치관 안에서 충돌합니다. 여기에서 내가 어디 쪽으로 내 삶의 무게추를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회복되기도, 다시 깨어지기도 반복합니다. 누군가는 삶의 무게추를 확 결정합니다. 그러면 깨어진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벗어나 조금 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입으로만 회심했을 뿐, 사실상 세상에 그대로 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입으로만 결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여전히 자기 삶의 주인이 자신인 사람은 사실상 회심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마음의 결단이 삶으로 이어지고, 또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정말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 땅에서 주어진

신앙인의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안에서 점차 회복되어 가는 것이고, 충만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의 삶에서 경험되는 구원입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렇듯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모두 이 땅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누려야 합니다.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하는 자가 죽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구원과 영생을 누리는 삶이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골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서는 ‘그 안에서 충만해진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충만하게 될 것이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면 충만해질 것이니까 기다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너희는 충만해졌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성도들이고, 즉 교회입니다. 설교 초반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깨어진 세상과 인생의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부정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면, 하나님이 내 삶에 거하실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복잡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합니다. 우리의 죄 된 본성과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이

원래 주인이셨는데, 죄와 연합한 사람은 그 하나님을 각자의 삶에서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복음’으로 오셔서, 다시 한번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 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은혜입니다.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는데 주어졌기에 은혜입니다. 은혜의 반대는 ‘대가’입니다. 마땅한 결과이죠. 죄의 대가는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가운데 살아가던 우리였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며, 은혜로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은혜를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왜 복음입니까?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삶이 ‘이미 좋은 상태’라면, 하나님께 오라는 것이 ‘좋은 소식’은 아닐 것입니다. 어둠에 있는 우리에게 ‘복음’은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소망이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밖에서 이 세상의 깨어짐을 바라만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 이 세상의 자정작용으로는 살려낼 수 없는 그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가 거듭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 외에도 ‘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삶으로 다시 태어나봤자 다시 세상에

속한 삶을 살다가 죽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삶으로 태어나야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앞서 본 것처럼 영원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군가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땅에서 천국이 시작된 것이라면, 지옥도 마찬가지인가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 3: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 3: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 has been judged 현재완료 수동태 / 과거의 일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기 직전에 믿어서 천국 간다는 말이 가장 어리석은 말인 이유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살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는 하나님이 먼저 회복시킨 성도들의 무리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꿈꾸는 그 충만함을 먼저 경험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런데

누구나 우리는 교회에서 이 말에 배신을 당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정말 충만함일까? 우리가 바라보고 경험한 교회의 모습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기보다 종종 더 큰 상처를 주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보다도 못한 모습도, 더 옹졸하고, 더 치사하고, 더 간사한 모습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성도가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해왔던 오해가 뒤섞여서

범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고 풀어나가야 할지 모를 만큼 말입니다. 복음은 여러 가지 세상의 가치들과 뒤섞여 볶음이 되어버렸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는 종종 세상의 근심이 되곤 합니다. 이제 뉴스에 교회 이야기가 나오면, 덜컥 겁부터 납니다. 세상 사람들의 입에 교회와 목사 이야기가 들리면, 좋은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시대의 교회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 안에 세우신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우 혼탁한 시대에, ‘진짜 교회’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금 되새기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교회의 존재 이유와 교회 안에 나타나야 하는 아름다운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보고 있는 것과 그를 맞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임을 자각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교회에 속한 것’과 ‘하나님께 속한 것’이 다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 1: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요 1: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 1: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 저 사람이 예수다.” 그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그 삶이 변화되고 충만케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맞아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예수님 알아요.” 그 앎이 지적인 앎이라면 그저 알 뿐입니다. (호 6:3a)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구약의 선지자 호세아의 이 외침은 단순히 여호와를 알고 있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와의 친밀한 관계 안으로 들어가 그와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앎은 부부가 서로를 아는 그 앎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뉴스에 나오는 누군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교제를

누리고 함께 살아가는 대상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내 삶에 맞아들인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네 가지 밭의 비유가 무엇을 말합니까? 네 가지 밭에 모두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말씀의 씨가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열매를 맺는 밭은 ‘좋은 땅’ 뿐입니다. 맞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을 믿고, 그에 따른 열매가 있는 삶입니다. 즉 믿는 것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살고자 하는 진실한 애씀이 없다면, 그것은 ‘인정’에 불과할 뿐,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께 속한 삶을 결단할 때, 비로소 그분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합니다.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세상에만 속한 깨어진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삶으로 들어와 내 삶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한순간에 다 일어나지는 않지만, 점진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자라가는 것입니다. 회복되고 치유되고 충만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충만함의 방향을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삶의 방향과 다를 것입니다. 그때가 내가 무엇을 진짜 믿는지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평생 붙잡고 살았던 나의 삶의 가치관, 나를 둘러싼 세상의 세계관, 그 방향을 과감하게 떠나서, 지금껏 가보지 않은 길을 하나님만 믿고 선택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망가진 교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보다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행하고 있으면 그것이 교회가 깨어지게 되는 이유입니다. 순식간입니다. 교회는 생물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모두 세속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세속적 가치관이 더 강하고, 어떤 사람은 이제 막 51:49로 하나님의 가치관이 이기기 시작했고, 성숙한 사람은 조금 더 하나님의 가치관에 전념하겠으나, 우리

안에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교회란,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그들이 이 교회 공동체가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지 않게 지켜내고, 세속적 가치관에 빠져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치관을 따라 살도록 만들고 있을 때, 그것이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절대 안주하면 안 됩니다. 사탄은 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교회는 주께서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 작동합니다. 그곳은

충만해져 갑니다. 수적 부흥은 우리의 결정은 아닐지라도, 그 안에 영적인 생명력, 그 영적 부흥은 충만하게 임재합니다. 그런데 충만케 된 교회는 힘이 있습니다. 참된 교회, 참된 성도가 세상의 빛이고 소금인 이유는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 세상이 잃어버린 그것이 회복된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참된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음에는 구별입니다.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행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그 충만케 하는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그곳의 성도들도 변해가자, 그들을 보고 있는 주변으로부터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구별된 호칭을 받게 됩니다. 이전과 다르게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의 특정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열심히 하고 안 하고의 문제라면 그것은 주님에 의한 것이 아닌 사람의 능력에 달린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 내 삶을 내어드리고, 그분을 내 삶의 근원 삼아, 그분이 주인 된 삶, 그분으로부터 공급되는

지혜와 생명으로 살면, 누구에게나 주님의 뜻이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진리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가장 단순한 명령을 어긴 인간의 죄처럼, 우리는 이 가장 쉬운 것을 시시때때로 거부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심하고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회심한 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교회라는 울타리를 주시고, 그 안에서 서로를 지켜주며, 복음을 생각나게 하며, 주님 안에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설교가 아니라 복음을 생각나게 하는 증언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잖아,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그 말씀대로 살아보자.” 저는 여전히 설교의 가장

큰 역할은 ‘말씀을 전하는 것’과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를 충만하게 하셔서 원래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점점 세상에 속한 모습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모습, 주님의 형상, 주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후 1:4_새번역)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죠. 아기가 태어나면 그를 돌봐주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도 그를 돌봐주는 사람들처럼 점차 성장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를 돕겠죠. 생명의 탄생과 성장.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 돌보아주는 것. 그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의 이유입니다. 교회의 역할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회심(영적 탄생)시키고, 주님을 닮은 자로 자라가게 하는 데 있습니다. 특별히 거기에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 이 일은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많았습니다.

재능과 능력이 많았지만, 사랑이 없는 그 교회는 서로 자신의 은사와 자랑을 내세우다가 가장 나쁜 교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자신을 내어주고, 우리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사랑받은 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사랑할 때, 그것이 바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일 3: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마음을 멀리하고,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놀라운 공동체가 됩니다. 그것이 가장 높으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가장 낮은 자로 죽으신 ‘신의 성품’이며, 교회의 충만함은 바로 우리도 그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행 2: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행 2: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 교회가 경험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러셨듯. 주님의 마음을 알아서, 주님이 시키지 않으시면 하지 않았을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한 사람이 변화되면, 그 변화는 반드시 주변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주변에 더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하고, 변하게 하고, 성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먼저 회복된 사람들이, 먼저 충만케 된 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회복을 돕고 더불어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은 회복된 교회, 회복된

성도들을 통해, 그들의 존재 자체를 복음으로 삼으셔서, 세상에 궁금증을 일으키고, 그 교회를 통해 더 많은 자들이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충만함을 회복하는 것이 곧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교회가 충만해지는 것, 생명을 낳는 교회가 되는 것, 생명을 자라게 하는 교회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이 너무나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사귐의교회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셔서 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생존 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교회는 헌신하지 않는 순간 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누군가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지 않을 일을 기꺼이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물질을 헌금으로 드려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합니다. 세상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섬기고 내어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물질의 자발적 내어줌을 통해 우리 교회는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작동하고 있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누군가 ‘헌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연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나의 시간을 드리고, 내 몸을 드려서 공동체를 섬기고 다른 누군가를 돕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이고, 그 순종이 오늘 우리 교회를 이끌고 있는 동력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먼저 회복된 자가 먼저 자신을 내어주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이 나를 살리셨기에, 나도 주님의 뜻 안에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주님의 도구로 내어드리는 것. 이것이 아름다운 선순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러한 것처럼 ‘더 섬기는 자’로 낮아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으로 누군가를 돕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더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주님의 사랑을

더욱 충만하게 받을수록 더욱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보이신 모범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라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이 감당해야

할 괴로움과 고난을 기쁘게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교회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사역한다는 것은 때론 괴로움입니다. 사역한다는 것은 때론 고난입니다. 주님이 부탁하신 사명인 동시에,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남은 고난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쓸 에너지를, 물질을, 시간을 여러분을 위해 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미련한 일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이 허송세월일 수도 있고,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하시는 일이며, 그 미련함 속에 교회는 회복되고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사역을 앞두고 고민하는 이 시기에 드릴 수 있는 답은 ‘교회’가 세워지는 원리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너무 고귀한 뜻이며 비전인데, 그것은 그냥 저절로 세워지지는 않습니다. 복음으로 회복된 사람, 그들이

충만해지며 주님을 따라서 살아감을 통해, 교회는 세워집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에서 너무나 소중한 통로이자 도구가 교회인데, 하나의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는 그 가치를 아는 이들의 자발적 헌신이 밑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과 달리 자발적인 순종과 헌신으로 이뤄집니다. 어느 누구도 헌신하지 않는다고 탓할 수도 없고, 억지로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이 하나님께 있기에, 주님이 그 마음을 여러분들에게 나눠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교회를 위해 하신 것처럼, 바울이 교회의 몸인 성도들을 위해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의 성품에 기꺼이 참여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삶의 방식은 훨씬 편합니다. 나만 돌보면 됩니다. 나를 위해 살면 됩니다. 기껏해야 내 가족을 위한 삶을 살면 됩니다. 그것이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모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편함을 잘 압니다. 움켜쥐면 조금 더 모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챙기지 않으면 힘듦도 덜합니다. 그러나 그 삶에 결단코 하나님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왜 나는 예수를 믿는데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하는가?’ 만약 그 고민이 있다면, 저는 지금까지와 다른 선택들을 해보시길 권해봅니다. 지금 내 삶의 방식이 혹시 세상에서 말하는 그 길에 서 있다면, 이제 성경이 말하는 삶의 방식으로 용기를 내 지금까지와 다른 삶의 걸음을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

변화된 발걸음을 ‘회심의 시작’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한걸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에 어울리는 모든 것을 기적적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초청해 주신 분을 우리가 직접 친밀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초청은, 이제껏 우리가 받은 초청 가운데 최고의 초청입니다! 또한 우리는 여러분에게 전해 줄 멋진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여러분이 욕망으로 얼룩진 세상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입장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