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욥기 강해로 돌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욥기 설교를 제가 3번 했고, 2주 전에는 방길주 목사님 통해서 욥기 29장을 네 번째 설교로 들었습니다. 지난주에는 교회론 설교를 했기에, 다시 욥기 강해를 이어가기 위해서 생각을 조금 정리해보겠습니다. 욥기는 마치 ‘썰전’과 같다고 했습니다. 총 3라운드로 진행되는데, 욥과 친구들이 서로 대비되는 의견을 주고받는 형식이죠. 쉽게 말하면 3:1의 논쟁입니다. 욥의 친구들의 입장은 ‘잠언’이 주로 말하는 ‘인과응보 신학’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규범적 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패턴을 잘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것은 ‘반성적 지혜’입니다. 삶에 규범적 지혜의 패턴이 적용되지만, 종종 그 패턴에 어긋나는 예외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욥처럼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도 불행과 고난이 닥치는 경우도 존재하므로, 하나님의 운행하심과 창조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인과응보의 원리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욥기의 반성적
지혜입니다.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가 욥기 안에서 논쟁의 두 핵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규범적 지혜가 맞거나, 무조건 반성적 지혜가 맞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려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지혜가 필요한 것은 내 삶의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제가 하는 일마다 잘 안되는 것을 보니, 제가 하나님 안에서 잘못한 부분 때문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런 것은 아니야’가 해답이 아닙니다. 그렇게만 이야기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규범적 지혜의 틀에서도 생각해보고, 반성적 지혜의 틀에서도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내가 잘못했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점검하고 회개하는 일이 규범적 지혜로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문제는 이제 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려움이 그것 때문인지 아닌지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우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내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은 욥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욥기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해결하신다는 것이 욥기의 신학입니다. 이제 욥기의 내용으로
들어가봅시다. 우리가 살펴왔듯,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3라운드까지 이어집니다. 계속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양보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각 라운드의 변화가 있다면, 조금 더 과격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3라운드의 시작은 늘 그렇듯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계속 이야기해도 평행선을 긋게 되자, 이들의 감정이 점점 더 거칠어집니다. 이제는 자신들의 생각 안에 갇혀서, 욥은 ‘반드시 죄가 있어야 하는 수준’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죄를 지었다는 전제하에서 욥의 죄를 추론하여 말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말로 쉽게 하면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이들의 처음 방문 목적은 분명히 슬픔을 당한 친구 욥을 ‘위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이제는 위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논쟁만 남았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모였지만 종종 그 목적은 잃어버리고 다른 것만 남는 경우도 종종 있죠.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행동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정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있는 죄를 찾아내어 지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데, 이들은 없는 죄를 만들어서 정죄를 하고 있는데도, 본인들이 옳다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더 우리의 본성의 악함을 멀리하고 주님의 선함을 닮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알아차리고 경계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도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좋아하고 정죄하곤 합니다. 뒷담화는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행위인데, 그 안에도 은근한 판단과 정죄가 깔리기 쉽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립과 논쟁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욥기에는 은근히 우리에게 유명해진 말씀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말씀도 이런 논쟁의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이 말씀의 문맥적 의미는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항변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시험에
보신다면(마치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시험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정결한 자라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구절과 관련된 찬양으로 하면서 생각하는 이미지, 마치 연단과 훈련을 통해 순금으로 제련된다는 것은 욥의 의도와는 다릅니다. 성경의 의미를 뛰어넘은 우리의 해석이 첨가된 것이죠. 새번역으로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욥 23:10)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그런데 욥기 안에는 우리가 더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 또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의미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구절은 1라운드 논쟁 중에 빌닷이 한 이야기입니다. 빌닷이 욥을 공격하며 하는 이야기이죠. 그는 인과응보의 논리에 갇혀서 욥에게 ‘너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라고 말한 후에 이 말을 덧붙입니다. 지금 고통을 받고 있지만, 네가 회개하여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면 다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상 정죄의 메시지입니다. 슬픔을 당한 욥을 위로하기보다는 어설픈 권면, 아니 아프고 나쁜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 말로 누군가를 축복하거나 위로하였다면, 다른 구절을 통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욥기의 논쟁부분에서 나오는 이야기 중에 하나 더 살펴볼 것은 ‘벌레’에 자신을 빗대는 ‘벌레 신앙’입니다. (욥 25: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욥 25: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욥 25: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빌닷이 한 말인데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적 차이에 대해서는 욥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빌닷은 자신의 논리를 부각하기 위해서 지나친 자기비하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당연히 우리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존재적
차이에 대해서 잘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피조물과 인간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저는 창조론을 믿습니다. 저는 창조의 방법에 관해서는 다양하게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 하나님의 특별한 작품이라는 것만큼은 공통적으로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피조물과 우리의 차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자기 비하는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벌레’ 같이 여기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을 비하하시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도 우리를 ‘벌레’와 같다고 고백하는 표현이 익숙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몇 가지 찬양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찬송가 143) 웬 말인가 날 위하여 / 주 돌아가셨나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 큰
해 받으셨나 우리에 비해서 너무나 크신 하나님, 또 그분의 독생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고통 받고 죽으셨다는 것은 너무나 크고 놀라운 사건이 분명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갈 때, 죄와 연합하여 살았던 우리의 삶이 너무 죄송하고 부끄럽고 헛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고백이 ‘벌레 같은 나’의 마음이죠. 제가 조심하자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한껏 낮추는 그 감사의 고백이 진심이라면, 그런 나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주신 주님께 대한 마음으로, 이제
새롭게 바꿔주신 내 삶을 주님의 뜻 안에서 아름답게 채워 나아가는 것에 더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주께서 내 연약함을 받으시고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아이를 입양했는데, 아이가 매번 ‘불쌍한 나를 입양해줘서 고마워요’라고 하고만 있으면, 그것 또한 입양을 한 부모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보다는 이제 함께 해나가는 삶이 더 중요할테니까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고백은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벌레 같은 나’에 대한 고백이 우리 신앙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늘 거기에 머물러서, 교회는 일주일 동안 주님을 떠나 살았던 모습을 회개하는 곳의 기능만 합니다. 그리고 또 자기 뜻대로 살고, 또 회개의 찬양을 부르며 죄를 씻어내고... 평생을 이것만 반복합니다. 죄인에서 의인되는 것. 신앙은 그저 예배를 드리며 매주 회개를 통해 죄인이 의인 되는 일만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인에서 의인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하나님의 꿈과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백성으로, 그분의 자녀로 부르셨고,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들려주시며 함께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이 ‘벌레 같은 나’가 아니라, 우리가 얻은 성도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몸값’으로 주어진 매우 고귀한 것이라는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함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욥과 친구들이 벌이는 3라운드의
썰전. 그 마지막 부분에 방길주 목사님이 설교했던 29장의 내용도 포함됩니다. 29~31장까지가 한 묶음으로서 욥의 독백인데, 그중 29장은 욥이 경험했던 하나님과 함께하는 때에 대한 표현들입니다. (욥 29:3)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욥 29:23) 그들은 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으며 봄비를 맞이하듯 입을 벌렸느니라 이렇게 29장에서 하나님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절을 회상하고 나서, 이어지는
30장의 도입 문구는 ‘그러나 이제는’입니다. 완전하게 대비되는 현재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욥이 그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고, 지금의 참혹한 현실을 말하는데, 그 두 상황에 대한 가장 핵심적 차이는 무엇일까요? 욥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당면한 현실의 상황들보다,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29장은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것이 핵심이고, 30장은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수단인가,
목적인가? 이것이 많은 경우 우리 신앙의 중요한 차이점이기 때문입니다. <사귐의 기도> 앞부분에 나오는 예화를 저는 좋아합니다. 「몇 년 전 외국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귀국 준비를 하면서 가족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아이들 선물을 쉽게 고를 수 있었는데, 아내에게 줄 선물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사 가야 좋아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선물을 찾지 못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짐을 풀면서 선물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하게 돌아온 당신이 선물이지, 다른 선물이 뭐 필요해요.” 나는 이 말에 감동했다. 아직 철이 없는 아이들은 아빠보다 선물을 더 좋아했지만, 성숙한 아내는 남편이 건강하게 돌아온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헨리 나우엔이라는 영성가도 말합니다. “아이들은 성탄절에 산타클로스를 기다린다. 하지만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그가 주는 선물이다. 선물만 받으면 아이들은 산타클로스를
이내 잊어버린다.” 하나님이 수단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내가 필요한 것을 주시기 때문에 소중한 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수단으로서 필요하지만, 하나님이 궁극적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경우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배우자가 여러분이 없는 것보다, 여러분이 가진 재산이 사라지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참 슬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나의 수단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욥 30:20)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어도, 주님께서는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해도, 주님께서는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 삶에 ‘있고 없고’의 문제보다, 내가 원하는 행복의 요소가 있고 없고의 문제에 집중합니다. 풍삶초에서 우리가 다루는 4P의 이야기도 그런 것들이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내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시편의 고백은 그런 의미입니다. (시 23: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의 상황의 어떠함이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나의 태도와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황은 안 바뀔 수도 있어요. 여전히 고통과 고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품고 살아갈 내게로부터 오지 않는 힘을 주셔서 우리가 다른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욥기 안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 것은 욥기에서는 ‘욥’도 변호하지 않습니다. 욥의 잘못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친구들과의 논쟁이 격해지면서, 욥은 자신을 변호하고 방어하려는 지나친 강박 때문에 자신의 무죄함에 대한 주장을 과도하게 펼칩니다. 총
11가지 분야에 대해서입니다. 음욕, 속임, 간음, 종과의 관계, 가난한 자들, 재물, 천체 숭배, 원수, 나그네와 난민, 죄를 숨기는 것, 땅에 대하여….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욥의 태도는 자신의 의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어느새 그도 친구들의 논리처럼 ‘인과응보’ 속에 스스로 갇혀 버리기도 합니다. 나는 잘못을 안 했으니 심판은 무고하다는 논리는, 잘못해야 심판이 오는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원리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욥도
지쳤습니다. 그는 이제 전능자께서 오셔서 자신의 무고함에 대해 답을 달라고 말합니다. (욥 31:35)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하나님이 욥의 이 요청에 반응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엘리후’입니다. 원래 설교의 제목을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고 했었는데, 말 그대로 하나님이 나와서 답해달라고 했는데,
엘리후가 갑자기 등장한 것입니다. (욥 32:1) 욥이 끝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므로, 이 세 사람은 욥을 설득하려고 하던 노력을 그만두었다. (욥 32:2) 욥이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옆에 서서 듣기만 하던 엘리후라는 사람은, 듣다 못하여 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엘리후는 람 족속에 속하는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다. (욥 32:3) 엘리후는 또 욥의 세 친구에게도 화를 냈다. 그 세 친구는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욥이 하는 말에 변변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에 비해서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3라운드까지는 끼어들지 못하고 옆에 서서 듣기만 하다가, 이제 그도 이 논쟁에 참여하여 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욥과 세 친구 모두에게 화를 냅니다. 먼저 엘리후는 욥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욥이 자꾸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욥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그들이
욥의 말에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욥 32:11) 세 분이 말씀하시는 동안에, 나는 참으며 듣기만 하였습니다. 세 분이 지혜로운 말씀을 찾으시는 동안에, 나는 줄곧 기다렸습니다. (욥 32:12) 나는 세 분이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 분께서는 어느 한 분도, 욥 어른의 말을 반증하거나 어른의 말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셨습니다. (욥 32:13) 그러고서도 어떻게 지혜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실 수 있으십니까? 세 분께서 이
일에 실패하셨으니, 내가 이제 욥 어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대답을 들으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세 친구와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매우 자신만만하게 이 논쟁에 참여한 젊은 논쟁가, MZ 세대이죠. 쉽게 말하면 엘리후의 속마음은 이렇습니다. ‘아, 저 양반들은 완전히 깨져서 더 이상 욥에게 대항할 능력이 없구나. 저들은 말을 잃어버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내가 아무리 계속 기다려도 저들은 더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저들은 그냥 가만히 서 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제 내가 말을 해야겠다. 내가 아는 것을 알려줘야겠다.’ 엘리후는 욥도 틀리고, 친구들도 틀렸다고 주장하며 이 논쟁에 끼어들었습니다. 이런 것을 ‘양비론’이라고 하죠. 요즘 표현으로는 ‘모두까기’입니다. 양비론은 서로 충돌하는 두 의견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그는 세 친구가 말해온 규범적 지혜나, 욥의 반성적 지혜와는 다른 제3의 지혜를 말해줄 것만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치
자신이야말로 참된 지혜를 알고 있다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욥 33:1)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욥 33:31)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욥 33:32)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의롭다 하리니 그대는 말하라 (욥 33:33)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그대를 가르치리라 엘리후가 하는 이야기를 보면, 지금껏 3라운드에서
했던 이야기와 다르게 한 걸음 나아간 이야기는 딱 하나뿐입니다. 고난은 교육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더 큰 죄를 피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계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초점에 미래적 요소가 추가 되었을 뿐, 엘리후의 주장은 사실상 새롭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는 양비론으로 모두를 반대하더니, 결국 그의 이야기는 양쪽 모두의 입장을 섞어 놓은 결론입니다.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가
모두 틀렸다고 화를 내놓고,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은 제3의 지혜가 아니라 규범적 지혜 + 반성적 지혜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엘리후의 이야기도 다 그럴싸합니다. 앞선 세 친구와 그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은 모두 신학적으로 타당하고 모두 훌륭한 지식입니다. 특히 그들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대한 고백은 탁월합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이야기는 욥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이 사실을 몰라서 탄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욥의 억울한 고통에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애를 글로 배운 것과 같습니다. 엘리후는 마치 자신이 새로운 해답을 제시할 것처럼 등장하고, 패기 있게 말을 이어가지만, 사실상 그의 논리는 이미 욥과 친구들이 지금껏 주장해왔던 것의 재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로써 욥기가 엘리후를 등장시켜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의 지혜가 이 정도뿐’이라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들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너도나도 답을 알고 있는 듯 떠들고 있지만, 욥기의 시작과 이 고통의 진실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그들의 모습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난 체 하고 있는 어리석은 헛똑똑이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엘리후의 발언을 통해서 우리는 전도서의 이 말씀만 떠오를 뿐입니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엘리후는 마치 자신에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
것처럼 쉴새 없이 떠들어댑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엘리후 역시 다른 친구들처럼 욥이 진즉 회개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는 정죄와 책망입니다. 엘리후는 앞서 세 친구가 질리도록 언급한 ‘인과응보’의 논리를 반복합니다. 욥이 모르는 이야기도 아닌데 그저 또 반복합니다. 엘리후는 이미 답을 정해놓고, 자신의 논리에 맞는 답을 요구하는 태도로 욥을 몰아세웁니다. (욥 36:3) 나는 내가 가진 지혜를 모두 다 짜내서라도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욥
36:4) 내가 하는 이 말에는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건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지금 욥 어른과 더불어 말하고 있습니다. (욥 36:16) 하나님은 욥 어른을 보호하셔서, 고통을 받지 않게 하셨습니다. 평안을 누리면서 살게 하시고, 식탁에는 언제나 기름진 것으로 가득 차려 주셨습니다. (욥 36:17) 그러나 이제 욥 어른은 마땅히 받으셔야 할 형벌을 받고 계십니다. 심판과 벌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욥 36:18) 욥 어른은 뇌물을 바쳐서 용서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속전을 많이 바친다고 하여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욥 36:21) 악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어른께서는 지금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마는, 이 고통이 어른을 악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줄 것입니다. (욥 36:24) 하나님의 업적은 늘 찬양받아 왔습니다. 욥 어른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셔야 합니다. 엘리후. 그의 이름의 뜻이 무엇일까요?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멋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는 정말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을 뿐,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욥을 바라보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욥기가 묘사하는 엘리후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 때로는 얼마나 잔인한 무기가 되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해왔던 여러 말들도 때로는 내 생각과 달리 누군가를 ‘죽이는 칼’이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 또한 진리의 수호자이자 신앙의 투사처럼 말하고 행동했던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저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으신 분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물론 강직한 신앙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강직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그 강직함이란, 때로는 누군가를 정죄하는 칼로 나타나기가 쉽습니다. 모름지기 신앙은 자기에게는 더욱 철저하고 다른 이에게는 관대해야 하는데… 우리의 악함은 반대로 나타나죠. 자기에게는 관대함과 포용력이 있지만, 다른 이에게는 철저하고 냉혹한 잣대를 대고 평가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반대로 나도 편하기 위해서 신앙의 기준선을 무너뜨리고 그저 자유롭게 살기도 합니다.
정죄하지 않겠다는 좋은 말 속에서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태도로 죄에 대한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양극단의 잘못된 모습입니다. 소신이 없는 것도 안 되고, 소신을 남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이야기는 맞는 이야기지만, 상갓집에 가서도,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도, 그만 울고 그만 슬퍼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못된 신앙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타협’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신학적 판단을 포기하고 어떤 것도 비판하지 말자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혜롭게 행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대상에게 무엇을 권면하고,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꾸짖고, 무엇으로 품어줘야 할지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답’을 필요에 맞게 적용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바로 이 부분에 우리의 부족함이 있고, 또 성령님의 세밀한 음성이 필요합니다.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다 아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우리의 태도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묵상과 설교>에 나오는 엘리후에 대한 글이 이렇습니다. 「엘리후의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시다.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도 없고, 인간은 도무지 쓸모도 없고, 그래서 단 한마디도 그분에게는 해서도 안 되고, 그저 놀라고, 경외하고, 찬미해야 하고,
무조건 수긍만 해야 하는 존재밖에 되지 못한다. 그런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슨 쓸모가 있으며,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왜 창조하셨겠는가? 그저 힘들고 괴로워도 입 다물고 있기를 바라시는 무정한 하나님이 엘리후의 하나님이다. 욥처럼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된 사람에 대한 긍휼과 연민과 성찰을 보여주지 않은 채, 하나님의 위대하심만을 찬미하는 신학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주의’ 혹은 ‘하나님의 절대주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학의 잔인함이다.」 엘리후의
이름, ‘그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좋지만, 그 이름을 그분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있는가? 저는 욥기에서 엘리후는 그렇지 못한 행동으로 이름 값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교회에서 ‘신앙이 좋다’라고 하는 분들의 태도는 가끔은 마치 엘리후 같기도 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 무엇이든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로 모든 것을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고 규정해 버립니다. 아픔을 당한 사람에게도, 이해하지 못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저
‘하나님의 뜻’만을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질문하고, 삐쳤으면 삐쳤다고 하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모르지만 우리는 적어도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것이 선한 일임을 알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계시며, 우리의 삶에서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계심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무지에 대한 인정’, ‘무능력에 대한 인정’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스스로가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리더’의 역할을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고, 그래서 나는 약해서도 부족해서도 몰라서도 안 된다는 마음으로 내 힘으로 뭔가를 해내려고 하여, 버겁고 무겁고 힘겨웠던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저에게 깨닫게 하신 것이 있었다면, 제 힘이 빠지는 만큼,
하나님의 일하실 공간이 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은 주를 의지하는 것에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함이 되어주시는 비밀은 내 약함 속에서 주를 더욱 의지할 수 있고, 그때 주님은 내 연약함을 덮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진리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늘 틀릴 수도 있음을, 그래서 주님의 인도를 날마다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대가 좋아져서 자율 주행하는 차도 등장하지만,
우리의 인생만큼은 주님의 운전이 늘 필요한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기의 지혜서가 보여주는 지혜는, 우리는 지혜가 없음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이 참된 지혜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깨달음이 첫 번째라면, 우리의 그 지혜 없음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의지할지를 정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내 인생의 한계와 무지함 속에서, 주님을 향한 욥과 같은 근원적인 신뢰를 갖고 그분을 찾고 구한다면…. 저는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찬양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