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믿고 따지기" / 강정규 목사

2023-11-19 · 욥기 3-7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는 지난주 설교를 통해, 욥기라는 책이 가진 장르와 특성 등을 살펴봤습니다. 특별히 욥기는 구약의 시가서 중 지혜 문학에 속하는 책입니다. 하나님과 인생에 대해 가장 고귀한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우리가 다 이해하지는 못하는 일들이 세상에는 참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탄의 존재, 그리고 그 영적 세계의 질서, 악의 존재 이유, 창조의 특성으로 인격적 관계와 자유의지 등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이제 판은

다 깔았으니,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욥기의 중심부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만나보는 욥은 고난을 겪은 이후입니다. 다른 사람이 욥에게서 부러워할 만한 외적 요소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재산도 잃고, 가족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유일하게 잃지 않은 것이 아내였는데, 그 아내는 옆에서 응원하고 힘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욥의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정말 마음이 맞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인생이 힘이 날 수 있을 텐데요.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욥의 아내 또한 깨어진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진 세상의 삶이 버거운 것은 모두가 충만함이 깨어졌고 그 고갈됨 속에 허덕이기에, 기본적으로 이타적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기적이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거든요.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른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욥의 옆에는 욥보다 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깨어진 아내가 있었으므로, 그 또한 욥에게 힘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에게 아직 잃지 않은

것이 하나 또 있었습니다. 바로 친구들입니다. (욥 2: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이 이 모든 재앙을 만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달래고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서 욥에게로 왔다. 욥의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들이 온 것은 ‘위로’의 목적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 히브리어 ‘누드’는 ‘함께 있다’, ‘동정심을 보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각기 다른 지역에

살아가는 친구들이 멀리서 모두 왔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평소에는 누구를 찾아가는 것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가끔 날 잡고 지방을 며칠에 걸쳐서 돌면서 지인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양주로 와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편인데, 어떤 이는 ‘너무 멀다’고 하고, 어떤 이는 ‘생각보다 가깝네’라고 말합니다. 거기서 벌써 마음이 한번 드러나는 것이죠. 우리 양주 사람들은 일단 지인이 양주까지 심방을 오면 그 자체로 감사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감사를 느끼며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환대를 하려고 노력하곤 합니다. 먼 길을 온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위로이기도 하죠. 오늘도 이 예배에는 전라도 광주에서 온 사람이 2팀이나 됩니다. 매주 예배하러 오는 예진 간사가 있어요. 처음 저희교회로 목회 인턴십 간사 면접을 보러 왔을 때, 덕계역으로 제가 픽업을 갔는데, “생각보다 올만 한데요?”라고 하더군요. 몇 시에 출발했냐고 하니까 5시간 전에 출발해서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친구라면 정말 함께 할 수도 있겠는데?’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절기마다 한 번씩은 올라오는 애란 자매님 가족이 있습니다. 저도 역으로 광주에 심방하러 두 번 내려가 봤는데... 5시간 정도는 걸리더라고요. 그래도 저도 기쁘게 가는 것은 함께함의 그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죠. 이분들도 양주를 벌써 10번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멀리서 욥에게 왔습니다. 와서 뭘 했을까요? (욥 2:12)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욥 2:13)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멀리서 욥을 봤는데, 욥의 몰골이 너무 상하여서 한눈에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욥을 알아보고서는 크게 슬퍼하며 웁니다. 여러분, 지금 이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죠. 무려 7일 동안이나 욥과 함께 땅에 앉아서 그저 그 고통 가운데 함께 해줍니다. 사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옆에 있는 그 모습 자체가 위로인 것이죠. 때로는 우리는 그 어떤 많은 말보다 고요한 침묵으로 함께 곁을 지켜주는 것이 더 큰 도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엄청나게 큰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뭔가 새로운 스타일의 목회를 하기 위해서 개척을 하고 싶은데, 막상 개척하려니까 겁도

나고, 막막한 것입니다. 마침 그때가 제가 미국에 있는 누님을 만나러 처음 미국에 가게 된 때였습니다. 누님이 미국에 오면 뭘 제일 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가 평소에 책으로만 뵙던 한 선배 목사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분이 워싱턴에서 목회를 하고 계셨거든요. 누님의 집은 시카고이니, 워싱턴까지 차로는 10시간이 넘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그 선배 목사님을 뵈러 갔습니다. <사귐의 기도>라는 책을 쓰셨던 김영봉 목사님이었고,

신학생 시절 제가 이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시작하기 전, 이분을 한번 꼭 뵙고 싶더라고요. 제가 개척 목회를 고민하고 있었기에 목사님께 이렇게 물었어요. “목사님, 목회가 무엇입니까?”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하잖아요. 함께 살아가는 것. 목회를 많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고, 더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훈련도 필요하고, 노력도 해야겠지만, 가장 본질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목회를 저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 말고도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사역 안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잖아요. 하나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함께 살아간다면 그것이 목회이지요.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 사역자들과 함께 목회한다고 생각해요. 그 만남에서 김영봉 목사님이 제게 하셨던 조언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신자는 죽을 때까지 나를 점검하고 고민하는 것’이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고민이 멈추는 순간 부패한다.’ 그래서인지 제가 늘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괴로운 고민이 아닙니다. 행복한 고민이에요. 어떻게 더 예수님을 따라갈까? 어떻게 더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나아갈까? 고민이 많은 것이 걱정이 아니라, 고민하지 않는 나를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민이 멈추면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변의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있으면, 내가 뭐라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목양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냥 그 마음 그대로 가십시오.

내 마음에 밟히는 사람, 눈에 걸리는 사람에게 그냥 가십시오. 그리고 그냥 그 옆에 사랑으로 머물러 있으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함께하는 것이 위로입니다. 오히려 어쭙잖은 충고와 조언이 그 사람을 더 괴롭힐 수 있습니다. 욥과 친구들이 고통 가운데 머문 7일의 침묵. 그 침묵을 깨는 것은 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들 안에 이제부터 펼쳐질 논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욥 3:1) 드디어 욥이 말문을 열고,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욥

3:2) 울부짖었다. 욥이 자신의 삶과 운명을 저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저주합니다. 자신의 삶에 평안이 깨졌음을 한탄합니다. (욥 3:23)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 (욥 3:24) 밥을 앞에 놓고서도, 나오느니 탄식이요, 신음 소리 그칠 날이 없다. (욥 3:25) 마침내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밀어닥치고,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일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욥 3:26) 내게는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온다! 이런 욥기서 3장은 해석이 크게 갈리는 부분입니다. 2가지 해석의 틀이 있습니다. 욥기 1~2장의 욥과 3장의 욥이 단절되는 것인가, 아니면 연속성이 있는 태도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견해의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단절된 것으로 보자면, 우리가 지난주 살펴봤듯이, 어떠한 어려움 속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던 욥이, 7일의

침묵 후 돌변하였다는 견해입니다. 쉽게 말해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욥이 반항적이고 도전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다른 견해는 1~2장의 욥과 3장의 욥이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3장의 고백은 저항이 아니라,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태를 호소하는 ‘탄식시’로 봐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여기에 동의합니다. 특히 욥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장면은 예레미야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약속의 땅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 망연자실하며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예레미야의 탄식을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도전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욥 또한 자신이 당한 고통 속에서 탄식하고 있는 것이죠. 물론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절대 욥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어딜 감히’ 하나님 앞에서 불경스럽게 자신의 생명을 저주하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분들은 이런 욥의 모습에 대해서 공감하실 것입니다. 어쨌든 제가 이 해석을 더 지지하는 이유는

이러한 욥의 탄식을 들은 세 친구의 반응 때문입니다. 세 친구의 이야기가 여러 부분에서 욥과 다른 부분이 있지만, 적어도 욥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말했던 탄식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욥기 안에서 하나님이나 욥의 친구들이 이러한 욥의 탄식을 하나님을 향한 도전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1~2장에서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욥이 고백하는 것을 보면 우리와 너무 거리가 먼 신앙으로

잔뜩 무장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3장을 읽다 보면 욥도 우리와 같은 한 인간임이 느껴집니다. 시편에도 ‘탄식시’가 있습니다. 탄식을 있는 그대로 듣고 있으면 ‘신앙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표현도 종종 등장합니다. (시 69:24) 주님의 분노를 그들에게 쏟으시고, 주님의 불붙는 진노를 그들에게 쏟아부어 주십시오. (시 69:25) 그들의 거처를 폐허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천막에는 아무도 살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시 69:26) 그들은, 주님께서

매질하신 사람을 새삼스레 핍박하며, 주님께 맞은 그 아픈 상처를 덧쑤시고 다닙니다. (시 69:27) 그들이 저지른 죄악마다 빠짐 없이 벌하셔서, 그들이 주님의 사면을 받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시 69:28) 그들을 생명의 책에서 지워 버리시고, 의로운 사람의 명부에 올리지 말아 주십시오. (시 69:29) 나는 비천하고 아프니, 하나님, 주님의 구원의 은혜로 나를 지켜 주십시오. 한마디로 자기의 원수를 심판해달라고 부르짖는 것이죠.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

가운데 고민하게 됩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시퍼렇게 우리 앞에 주어져 있고, 악에 대하여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의 마음이 그렇지 못할 때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싶고, 저주하고 싶고, 내 고통이 사무쳐 감당할 수가 없는 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런 모든 감정도 다스리고, 정말 건강하게 이겨내고 괜찮은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내 마음에서 곪고 있다면, 내

안에 울분이 있고, 화가 있다면, 차라리 다른 데 가서 쏟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다 쏟아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 감정을 그대로 담아두고, 그러고 괜찮은 '척'하고 있으면 정말 괜찮은 것입니까? 치유는 상처를 마주해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참 특이합니다. 고통이 정말 고통의 상황 속에 있을 때 오히려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고통마저 느끼지 못하는 그런 시간들이 있는 것이죠.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면 그때부터

그 고통이 나를 너무나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마주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겨내려면, 때로는 정직하게 그 고통 앞에서 너무 힘든 나를 이해해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힘들어서는 안 돼’라는 마음으로 고통스러운데 회피하고만 있다면, 그것을 외면하여 덜 고통스러울 수는 있겠으나, 아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가 정직하게 직면하여 그 고통과 마주 서기 시작할 때부터 회복의 희망도 있는 법입니다.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거짓’입니다. 차라리 ‘진실함’이 훨씬 좋습니다. 특별히 한국의 교회 안에는 일종의 ‘체면 문화’가 너무 강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교회에서 연차가 올라가고 직분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자기를 포장하고 괜찮은 신앙인인 척할 때가 많습니다. 저와 같은 목사가 가장 대표적인 체면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아닙니까? 왜 우리 삶에 고통이 없고, 왜 신앙에 기복이 없겠습니까? 있죠. 제가 마음이 힘들 때면 종종 부르는 찬양이 있어요. 하나님 제겐 참 두려운 게

많습니다 잘 모르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부끄러운 일은 헤아릴 수도 없고 지치고 힘든 때에도 그때도 의연한 척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욥과 같이 솔직하게 탄식하는 것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굉장히 많이 나아졌음에도 여전히 센척하려고 할 때도 많고, 뭔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영적 허세가 있어서, 항상 모범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저를 의연한 척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솔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 믿어지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때는 그냥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하고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너무 미우면, 그 모습도 있는 그대로, 그 마음을 갖고 나아가서 하나님께 쏟아놓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죠. 그냥 털어놓기만 하고 ‘속 시원하다’ 하고 끝내는 것도 정답은 아닙니다. 우리의 그 마음을 주님이 만지시고 다루실 수 있도록 우리도 되든 안 되든 하나님께 나아가야죠. 욥의 탄식시로 가득 찬 3장의 고백은 시발점이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서 욥의 고백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장부터 욥과 친구들 사이에 일종의 논쟁이 시작됩니다. 무려 욥기 31장까지 이 논쟁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반론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욥 4: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였다. (욥 4:2) 누가 네게 말을 걸면 너는 짜증스럽겠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다. 세 친구 중에서 ‘엘리바스’가 가장 먼저 말을 하는 것뿐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가장 많은 분량의 말을 한다는 점에서 엘리바스가 세 친구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에서 잘 분석해야 할 것은 단순히 욥과 엘리바스가 논쟁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내용과 논리입니다. 3장의 욥의 발언 중 어떤 부분이 엘리바스로 하여금 참지 못하고 침묵을 깨고 문제를 제기하도록 만들었는지를 잘 평가해야 합니다. 즉, 엘리바스가 지키고 변호하고 싶은 ‘지혜’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엘리바스는 종교적 모범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종교적으로 보면 대부분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욥 4:7)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욥 4:8)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이것이 바로 잠언에서 주로 가르치는 지혜의 원리입니다. 가장 간단히 축약하면, ‘신상필벌’, ‘인과응보’와 같은 것이죠.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성경이 인과응보가 기본 원리이죠. 죄에는

삯이 있고, 죄의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참으시기에, 즉시 모든 죄를 심판하시지는 않지만, 임계점(Critical Point)에 다다르면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죄와 싸우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를 말합니다. (잠 13: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잠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그러니까 엘리바스는 잠언의 관점과 유사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것입니다. 이들은 욥이 ‘왜’ 고난을 당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고난 당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왔고, 실제로 최선의 위로를 함께 합니다. 이들은 욥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잘못했을 것이고, 우선은 당면한 고난을 잘 위로하며, 자신들의 친구 욥이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엘리바스가 가진 ‘인과응보’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과응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A를 행했기에 B가 주어진다’라는 형식은 대체로 옳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친구들이 욥을 바라보는 시선은 ‘B가 주어진 것을 보니, A를 행했을 것이다’라는 논리입니다. 나쁜 것을 뿌리면 나쁜 결과를 얻는다는 말을 뒤집어서, 나쁜 결과를 맺은 것을 보니 나쁜 것을 심은 것이 분명하다는 논리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옳을까요? ‘악인에게 징벌이 찾아온다’라는 말과 ‘고난이 오는 사람은 모두 악인이다’라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또한, 지금 욥을 비롯하여 엘리바스와 친구들은 이 일의 원인을 모릅니다. 오히려 이 일의 원인을 알고 있는 것은 저와 여러분 같은 욥기의 독자들뿐입니다. 정작 욥과 친구들은 천상의 회의 같은 것은 모르는 상태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조언이 욥을 아끼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만큼은 엘리바스의 이야기가 사실에 비추어보면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엘리바스가 사실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고 있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또한 욥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주장한 적이 없지만, 엘리바스는 욥의 탄식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만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사실 엘리바스와 같은 태도를 갖기 가장 쉬운 사람은 목사들이고, 또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던 분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일종의 굳어버린 일종의 신앙적 상식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죠. 욥기에서

엘리바스는 그저 자신의 신앙적 가치관으로 남을 가르치기 좋아하는 인물이나, 모든 것을 자신의 렌즈로 평가하기 좋아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5장에 넘어가면 엘리바스는 더 직접적으로 독설을 쏟아냅니다. (욥 5:2)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질투 때문에 죽는 법이다. 그러면서 엘리바스가 조언하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욥 5:8) 나 같으면 하나님을 찾아서, 내 사정을 하나님께 털어놓겠다. 엘리바스의 조언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부분에서 솔직하게 ‘뜨끔’ 했습니다. 이 표현은 저와 같은 사람이 가장 잘 쓰는 표현인데,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이야기 또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 표현이 틀리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욥기는 우리가 이런 표현을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오히려 욥기는 엘리바스가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꼭 선한 결과가 나지는 않음을 보여주며, 엘리바스 자체를 인과응보로

설명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무조건 욥에게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회개는 ‘구원’ 자판기가 아닙니다. 회개는 성경의 진리를 정말 사실로 받아들인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않은 채 회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통 아이를 혼낼 때면, 아이가 “잘못했어요”라고 무조건 말하면, 뭐라고 말합니까? “뭘 잘못했는데. 네 입으로 말해봐.” 잘못했다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해서 정말 잘못했다고

이해하고 반성하고 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도 그렇습니다. 그냥 회개라는 행위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났다고 인정하게 되었으며, 어떤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 모든 것을 배제한 회개는 말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이런 태도는 종교적 이해가 아니라, 종교적 강요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6~7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말과 태도는 욥에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항변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응수합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욥 6:4)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 하나님이 나를 몰아치셔서 나를 두렵게 하신다.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진술은 욥의 불신앙이나 하나님에 대한 도전과 공격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는 고통과 재앙마저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욥은 여전히 고통스럽습니다. 친구들마저도 더 이상 그의 위로가 되어주지는 못합니다. 죽고 싶으나 그 소원마저 응답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맘에도 없는 죄를 찾아서 회개하기는 싫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욥의 태도를 지지합니다. 저는 신앙은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교회에서 어떤 것을 질문하면

‘신앙이 없는 것’처럼 보일까 생각이 들어서 주저했던 부분도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내용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증을 갖고 질문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질문하는 것이죠. 우리가 ‘풍삶초’에서 배우듯, 솔직한 질문이 솔직한 답을 가져옵니다. 욥은 자신이 닥친 고통의 상황 가운데서도 그 본질적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욥은 다른 곳에서 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진실한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욥의 기도를 한번 메시지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욥기 7:7-21 "하나님, 내 생명이 한낱 입김에 불과한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내 눈은 더 이상 좋은 일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눈이 더 이상 내게 미치지 않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살피셔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증발한 구름은 영원히 사라지고

무덤에 들어간 자는 되돌아오지 못합니다. 다시 와서 가족을 찾아갈 수 없고 차 한잔하러 친구를 방문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잠잠히 있지 않고 내 사정을 모조리 다 이야기하렵니다. 드높은 하늘에 쏟아내는 나의 항의는 거칠지만 정직합니다. 바다를 가라앉히고 폭풍을 잠재우시듯 내 입에 재갈을 물리시렵니까? '잠 좀 자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한결 기운이 날 거야'하고 말하면, 주께서 오셔서 악몽으로 겁을 주시고 환영을 보내어 기겁을 하게 만드십니다. 이런

생활을 계속해서 견디느니 차라리 이불보 덮어쓰고 숨 막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더 이상 살기 싫습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살고 싶겠습니까? 나를 좀 내버려 두십시오!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낱 연기에 불과합니다. 대체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에게 신경을 쓰시고 그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매일 아침 그를 들여다보고 그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피십니까? 나를 좀 내버려 두십시오, 네? 침이라도 마음 놓고 뱉게 해주실 수 없습니까? 내가 죄를 지었다 한들,

그것이 주께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주님은 모든 인간을 책임지는 분이십니다. 나를 괴롭히시는 것보다 더 나은 일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무엇이라고 일을 크게 만드십니까? 그냥 내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 시작할 기회를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대로 가면 나는 곧 죽을 것입니다. 주께서 샅샅이 찾으셔도, 나는 이미 없는 몸과 같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것이 매우 진실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리고 이 하나님을 향한 외침이 역설적으로 ‘참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애매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삶에 실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항의는 거칠지만 정직합니다. 무엇보다 진실합니다. 아마 하나님은 구약의 수많은 성대한 제사 속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빈 껍데기의 마음보다, 차라리 알 수 없는 삶의 문제 앞에서 그 질문을 하나님께 따져 묻는 욥의 마음이 더 진짜라고 받아들이시지 않았을까요? 저는 여러분이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때로는 엘리바스가 가졌던 종교적 허세보다 더 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은 절기로 보면 <추수감사절>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절기를 지키는 것은 ‘교육적 의미’입니다. 교육에는 늘 틀과 양식이 필요하고 그것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랑하라’고 말만 해놓고, 어떻게 사랑하는지 가르치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사랑하는 법을 훈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를 주셔서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구약의 초막절과 칠칠절에 있는데, 이는 땅에서 곡식을 거둔 후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후에, 영국에서 박해를 받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온갖 역경 속에서 첫 수확을 한 후 감사절을 지킨 전통으로 발전했고, 오늘날 추수감사절로 대부분의 교회가 지키고 있습니다. 틀이 있어야 내용을 채울 수 있기에 틀은 중요합니다만, 당연히 내용이 없다면 빈 통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서 우리가 드려야 할 진짜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감사인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내게 감사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이 풍성하게 생각나는 분이라면 감사를 잘 찾는 분이거나, 현재 그런 환경 가운데 있는 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그때만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욥에게 있어서 감사할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래도 욥이 기댈 수 있고, 따져 물을 수 있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 내 상황은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 위에 계시므로 하나님만이 내 모든 환경 속에서 구원의 희망이 되신다는 그분의 그 크심... 그 크신 하나님께서 나의 곁에서 계신다는 그분의 실재에 대한 믿음이 있지 않을까요?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 오늘 이 예배에 나온 모든 성도님들의 삶의 형편은 다르지만, 우리가 그 마음을 고백하며 함께 찬양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