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욥기의 신학" / 강정규 목사

2023-11-12 · 욥기 1-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부터 우리가 5번 정도로 나눠서 살펴보고자 하는 책은 ‘욥기’입니다. 욥기는 구약에 있는 책이고, 장수로만 따지면 42장으로 매우 긴 편에 속합니다. 출애굽기가 40장이니, 그보다 장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가진 매우 독특한 특성은 우리가 욥기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정말 적다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을 겪었던 내용인 1~2장과 다시 회복하는 이야기를 다룬 마지막 42장을 제외하면 약 40장에 해당하는 성경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욥 외의 등장인물의 이름조차도 잘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저 욥의 친구들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다섯 편으로 나눠서 설교하기에 쉽지 않은 책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설교를 통해 욥기를 정리해가는 것이 여러분에게도 필요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욥기의 전체적인 틀을 소개하고 설명하며, 욥기 전체의 배경이 되는 1~2장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욥기에 대해서 그래도 설교를 들어보거나,

이야기 등으로 읽어본 적이 있다면, 우리에게 욥기를 이해하는 방식은 대부분 이렇습니다. 한 고통받는 개인이 마지막에 회개한 이후에 신의 도움으로 모든 것이 회복되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욥기가 우리에게 진짜 전달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권지성 교수는 ‘우리가 욥기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욥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향해서 가기 위해 인내하고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위의 작은 과정에서 언급되지만, 책의 전체 주제와는 무관하다.’ 아마 이 이야기가 아직 한 번에 이해되거나 소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욥기를 시리즈 설교로 다루어가며 풀어가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욥기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가??” 우선 욥기가 가진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욥기의 장르를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은 크게 3가지 장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역사서>입니다. 말 그대로

역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두 번째는 <예언서>입니다. 지난주 설교였던 오바댜 같은 책이 예언서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증거하신 메시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세 번째가 욥기가 속한 <시가서>입니다. 시가서를 아주 쉽게 설명해보자면, 문학작품입니다. 조선의 초기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가 있겠죠. 그러나 고려말과 조선 초기라는 ‘여말선초’의 이야기에는 정몽주와 이방원 사이에 주고받았다는 ‘하여가’나 ‘단심가’와 같은 문학작품도 있습니다.

또한 일제 치하에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같은 작품이 나오죠. 그 작품을 통해 그 시대 안에서 어떤 것을 고백하고 노래하는 그런 것입니다. 시가서에 해당하는 책은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인데, 이 중에 ‘시편, 아가서’는 <시가 문학>으로 구분하고 ‘욥기, 잠언, 전도서’는 <지혜 문학>으로 구분합니다. 즉, 시가서 안에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종류의 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오늘

살펴보는 욥기는 시가서 중에서 ‘지혜 문학’에 해당하는 성경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람은 굉장히 입체적인 성향을 갖습니다. 사람마다 비슷하게 경험하고 비슷하게 사고하는 보편적인 부분도 있지만, 각 사람마다 고유하고 독특한 부분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는 다양한 특징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단면적이지 않고 사람은 입체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입체적인 사람들이 몇 사람만 모여도 그 안에는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100명이

있으면 100가지 삶의 이야기가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장 행복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보편적인 부분도 있지만, 또 각자 다른 이해나 추구가 존재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과 가치, 삶의 환경, 서 있는 자리, 마주하는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문학에서 인간의 삶을 다룰 때도, 한가지 관점으로 이것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단순해집니다. 하다못해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다루는데,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문학에 해당하는 책이 3권인 이유도 그렇습니다. 욥기, 잠언, 전도서, 세 편의 이야기는 어떤 측면에서는 연결되지만, 동시에 굉장히 다각적인 시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책이 풀어내고 싶은 주제는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인지를 다룹니다. 쉽게 말해서 좋은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좋은 삶에 대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이 세 권의 책을 모두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이블 프로젝트>에서는 이 3권의 책을 인물에 비유하여 설명하는데, 잠언은 뛰어난 젊은 교사, 전도서는 예리한 중년의 비평가, 욥기는 경험이 풍부한 백발의 노인이라고 비유합니다. 잠언의 경우는 좋고 나쁜 두 행동을 대비하며 무엇이 더 좋은지를 말하는 격언 모음집 같습니다. 매우 현명하고 지혜롭게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해서 통찰력 있게 다룹니다. 비교적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나쁘다는 형식이니 이해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삶에 좋은 삶을 위한 답이 뚜렷하게 있다는 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답을 찾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삶의 부조리함과 무의미함에 대해서 말하는 독백 형식의 시입니다. 삶에 대해서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관점이죠. ‘헤벨’이라는 설교 제목으로도 나눴듯이, 우리의 삶이 꼭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에 집중하며, 그 삶이 가진 한계에 주목하는 편입니다. 삶은

‘헤벨’, 연기와 같다는 것이죠.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답이라고 말합니다. 그분만이 연기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인간의 삶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책이 <욥기>입니다. 욥기는 경험이 풍부한 백발의 노인은 ‘좋은 삶’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할까요? 어쩌면 욥기는 젊은 지혜자의 시절과 중년의 비평가 시절을 모두 지나온 좀 더 경험이 많은 노인의 이야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단순하지 않고, 깊이가

있습니다. 잠언이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 또한 비교적 명확합니다. 하나님에 세상을 공평한 곳이 되도록 다스린다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보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것은 옳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계시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계시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우리의 삶 밖에서 우리에게 열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위로부터의 계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계시’도 존재합니다. 지혜문학에는 이런 특성이 있습니다. 아래로부터의 계시는 세계, 역사, 인간사회, 삶을 관찰하고 묵상하면서 얻은 통찰력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잠언의 보편적 진리 외에 인간의 삶에서 느껴지는 다른 측면도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세상이 언제나 공정한 것은 아니며, 항상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을 말합니다. 그래서 삶에는 예외가 존재하며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하죠. 적어도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이 말 또한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에게 정말 참된 지혜가 있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은 공의로운가? 바로, 이 질문에 관해 다가서는 책이 ‘욥기’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인과응보 사상은 가장 보편적인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이 말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가 욥입니다. 잠언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전도서는 그렇게

살아도 답이 없어 보이는 세상의 여러 상황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욥기는 의인임에도 당하게 되는 고난에 대하여 조명합니다. 그래서 잠언의 가르침이 가장 기본이 되지만, 욥기와 전도서를 통해서 삶에 대해서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을 피합니다. 삶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죠. 욥기의 배경은 족장 시대에 해당합니다만, 이 책이 정확하게 언제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욥기의 저작 연대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 책이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문제는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의 공통 문제입니다. 다만 창세기의 족장 시대가 이야기의 배경이라는 사실은 여러 부분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출애굽기에서 ‘야웨/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욥기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엘, 엘로하, 엘로힘, 샤다이’ 등 그 이전에 사용되던 하나님의 호칭으로 기록합니다. 또한 율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율법에 근거하여 무엇을 판단하거나 기록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의 기준을

‘짐승과 종들의 숫자’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창세기의 족장 시대에 재산을 평가하는 기준과 같습니다. 또한 제사를 가장이 드리는 것이나, 장수를 표현하는 방식 등이 창세기 족장 시대와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고대의 배경인 것은 확실하나, 가장 보편적인 문제인 ‘고난’과 ‘정의’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맞닿아 있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삶이란 어떤 것이며,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이도 이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고난이라는 주제를 해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가장 지혜로운 자일 테지요. 욥기는 바로 이 점이 주제입니다. 욥기는 고난을 소재로 지혜의 본질을 파헤치는 일종의 지혜 배틀과 같은 성격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욥기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욥 1:1)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욥 1:2)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고, (욥 1:3)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쌍,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있고, 종도 아주 많이 있었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 욥이라는 아주 의로운 사람이 동방 땅 우스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10명의 자녀가 있고, 재산이 아주 많은 부자였습니다. 그는 행복하게 살고 있었고, 하나님을 늘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이 땅의 이야기에서

천상의 이야기로 장면이 전환됩니다. (욥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주님 앞에 섰는데, 사탄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욥 1:7) 주님께서 사탄에게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 하고 물으셨다. 사탄은 주님께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천상의 존재들의 모임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대체로 천사들이라고 번역되는 영적 존재들이 하나님께 와서 보고하는데, 거기에 대적자, 혹은 고발자를 의미하는 사탄이 옵니다. 그도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죠.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욥’의 신앙을 칭찬합니다. 그러자 사탄이 이렇게 맞받아칩니다. “어찌 까닭 없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욥을 부유하게 하셨으니까 그가 하나님을 잘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욥 1:10)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욥 1:11)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사탄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그가 복을 받고 있기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죠. 바꿔 말하면 복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복의 결과이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풀어보자면, 복이라고 생각하는 근원들이 사라질 때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이 진짜 조건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아직 그것을 증명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있는 욥도, 상황이 안 좋아지면 별수 없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욥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제기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욥을 신뢰합니다. 그 결과 욥의 믿음에 대한 테스트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욥이 지금껏 누려왔던 모든 것을 잃는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우리의 삶에도 고난은 상존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누구나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왜 이토록 많은

고난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신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대 에피쿠로스 철학자들도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없애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거나, 악을 없앨 능력은 있지만 그럴 마음과 의지가 없거나, 악을 없앨 능력도 의지도 없거나 셋 중 하나이다,’ 우리는 욥기를 읽으면서 당혹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욥기의 서론을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욥의 고난은 욥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논쟁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무고한 사람의 고난에 동의하실 수 있는가? 왜 사탄의 참소에 대하여 사탄을 꾸짖고 벌하는 대신 그의 요구에 응해주셨을까? 이런 문제에 우리는 서게 됩니다. 우리 오늘 설교의 제목이 <욥기의 신학>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욥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지를 생각해봅시다. 우선 욥기의 서론에 등장하는 ‘천상 회의’는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세계 외에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가

존재하며, 영적세계의 존재들은 물질세계를 자유롭게 오가거나 통제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욥은 매우 이상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부지중이라도 범죄하였을까 하여 늘 조심하는 자였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인과응보 사상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욥에게는 2가지 차원의 공격이 있습니다. 먼저는 그의 주변에 대한 공격입니다. 그는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 상황에서 욥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욥

1:21) 이렇게 말하였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욥 1:22)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즉,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2장에서 다시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가 나오는데,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찬양하는

욥의 모습을 칭찬하십니다. 그러자 사단은 사람에게는 육체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건강이 나빠지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욥에게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몸에 악성 종기가 난 것입니다. 욥의 신체적 고난입니다. 거기다가 세상에 남은 유일한 자기편인 욥의 아내는 그 상황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자 힘쓰는 욥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욥 2:9) 그러자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성경이니까 지금 아주 순화해서 이야기한 것이죠. 아마도 이렇게 말했겠지요. “이렇게 당했는데도 신앙을 지키냐?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욥 2:10) 그러나 욥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이렇게 하여,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욥은 다시 한번

순전함을 지킵니다. 여기까지가 욥기서 1~2장 중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다니신 분들이라면 여기까지 이야기를 기억하시고, 잠시 기억이 생략되었다가 마지막 42장에서 기억이 재생됩니다. 바로 욥이 2배의 재산을 받고 다시 자식 10명을 받았다는 회복의 내용입니다. 즉, 우리는 42장이나 되는 욥기 중에서 1~2장, 그리고 마지막 장의 내용만 알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어도 앞에 두 장 마지막 결론 한 장을 읽고 그 책을 내가 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드라마를 볼 때, 1~2회를 보고 마지막회를 본 후 그 드라마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짜임새가 좋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엉성하지가 않죠. 우선 이 책의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2장을 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욥기는 대범하게도 우리의 고난을 적나라하게 다룹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책임이 욥에게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럼, 동시에 욥기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욥기의 서론이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급이 다릅니다. 사탄보다 하나님은 훨씬 더 높으신 분으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고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시험의 범위와 한계를 정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사실 사탄은 독자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기 저자는 욥기 서론에서 사탄에게 정관사를 붙여서(the satan), 사탄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격하시킵니다. 사탄은 ‘그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욥의 고난을 허용하셨을 뿐, 그 고난이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비뚤어진 시기심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오히려 욥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욥을 향한 사탄의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하나님이 고난의 직접적인 근원자가 된다는 철학자들의 생각을 성경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탄을 막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악이 존재하며 활동하도록 허용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악과

고난을 제압할 능력이 없으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과 씨름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너무나 강조하는 ‘자유 의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격적 존재가 가지는 가장 큰 특성이 ‘자유’입니다. 그리고 ‘자유’라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 권한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곧 진정한 자유는 ‘선과 악’에 대한 선택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에는 악의 존재가 허용되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 배우자가 다른 여러 사람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중에 나를 선택한 그것이 사랑인 것이지, 나밖에는 대안이 없어서 선택했다면 그것이 사랑일까요? 우리가 늘 고백하듯 인류가 60억이라면 적어도 그 절반인 30억 중의 1로 만나고 선택했기에 ‘감동’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놀라운 결정입니다. 그 결정권을 주신 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그분의 가장 특별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연애의 비유가 있습니다. ‘나비의 날개를 꺾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꽃이고 상대방이 나비라면, 우리는 나비가 내게 왔을 때, 나비가 떠나가는 것이 두려워 날개를 꺾어서 다른 곳에 못 가게 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결론만 보면 그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비가 정말 마음이 있어서 내게 머물러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날개가 꺾여서 다른 곳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옆에 있어도 더 불안한

것이죠. 그래서 나비의 날개를 꺾기보다는 꽃이 스스로의 향기를 더 좋게 해야 합니다. 설령 나비가 날아올라 다른 꽃을 찾다가도, 내 향기가 너무 좋으면 다시 날아와 머물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선택권을 제한하기보다는 내 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방식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날개를 꺾기보다는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이로써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 자신이 기쁨을 얻으실 수도 있고, 상처를 받으실

수도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도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고난과 악에 대항하여 씨름하고 투쟁하는 주체로 한 인간을 내세우셨습니다. 욥은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위탁하시고 의존하시는 모험을 하십니다. 만약 욥이 시험에서 승리한다면 하나님의 결정이 옳음이 입증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이

사탄에게 패배한 것 혹은 하나님의 결정이 실패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욥의 시험을 둘러싼 싸움은 하나님께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인과응보로 인한 자연스러운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이야기는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나 모든 고난이 그렇게 해석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내 앞에 올 수도 있고, 내 신앙을

흔들고자 거세게 도전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끊어버리려는 악의 도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악의 그 도전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투쟁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악과 싸우는 것입니까? 실체 없는 악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악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아내에게

구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고백하는 욥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제가 목사로서 사귐의교회 7년을 목회하면서, 몇 년 전의 모습에 비해 지금 완전하게 달라진 성도님들을 볼 때도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있곤 합니다. ‘내가 이 맛에 목회를 하지’ 이런 생각을 진심으로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하나님 앞에 그런 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고, 악에게 지지 않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옳음을 지켜내는 한 사람. 세상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고난을 다 설명할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의 이유를 찾기보다 고난에 지지 않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신앙을 지켜내는 한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이유가 없는 고난일 수 있고, 또 그 고난이 나의 잘못 때문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고난’ 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하나가 ‘요셉’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까닭 없는 고난의 세월 앞에서 그는 무척이나 힘겨웠을 것입니다. 형들에게 버려지고, 애굽으로 팔려 가고, 모함을 당해서 감옥에 갇히고, 구출 약속은 희미해져 가고. 요셉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따져보면, 그 잘못을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았는가 생각해보면 아닙니다. 죽음의 위기에서도 건지셨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그를 지키셨고, 또 그의 옆에는 그를 돕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으로 부르십니다. 결국 그의 삶에 있었던 수많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갈 한 사람이 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욥기의 고백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고백일 수도 있는데, 이 고백입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우리가 오늘 드릴 수 있는 고백은 이것뿐인 것 같습니다. 명검이 탄생하기 위해서 수많은

불의 단련이 있어야 하듯, 내게 있는 삶의 고난을 이겨내고 주님 앞에 설수록 우리는 더 정결하고 더 아름답고 더 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이해하기보다 고난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함으로 오늘도 나아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