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설교할 본문은 <오바댜>입니다. 오바댜는 예언서 중에서 가장 짧습니다. 292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기록되었고, 21절로 이뤄진 한 장짜리 예언서입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립니다. 이렇게 짧은 책이기에, 책에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예언서가 역사서와 달리 어떤 사건에 대한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예언의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왜 주어졌는지는 책 밖에서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봅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에 동역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민족을 세워가시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생명을 허락해주시고, 그의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으로 테스트하기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믿음의 아들인 이삭을 통해 이어지고,
그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의 세대로 넘어갑니다. 알다시피 이 형제의 운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장자권’입니다. 이스라엘은 장자를 통해 영적 권위가 계승되는 부족사회였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태어난 순서를 따릅니다. 그러나 종종 장자의 권한이 뒤바뀌는 일도 있습니다. 아담의 가족도 마찬가지죠. 본래 가인이 장자였으나, 죄로 인하여 ‘셋’에게 장자 계승이 이뤄집니다. 야곱의 12 아들 중에서는 르우벤이 장자였으나, 후에 그 권한은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에게 넘어갑니다. 장자의 권한은 다른 형제보다 2배의 분깃을 받는 것이었고,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이 삼촌들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살펴본 엘리야의 이야기 속에도 후계자로 지명된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데, 그것은 엘리야의 계승자가 엘리사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도 에서가 장자입니다. 그런데 이 형제의 경우, 한 명은 장자의 권한을 너무 하찮게 여겼고, 한 명은 장자의 권한을 너무 갖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결국 운명이 바뀝니다. 에서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께 받은 ‘장자의 명분’을 너무 하찮게 여긴 것에 있습니다. 창세기 25장을 보면,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간절히 원했지만, 자기가 누릴 수 없는 것이기에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에서가 야곱이 만든 팥죽을 달라고 하자, 대뜸 장자의 명분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고 맹세까지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기록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 그리고 27장에서 실제로 그 맹세대로 장자의 축복이 야곱에게 주어집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야곱은 본인이 에서인 것처럼 아버지를 속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명백한 잘못이죠. 그러나 이 일이 없었더라도 이미 25장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잃게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성경은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집착한 야곱을, 그것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고 하찮게 여긴 에서보다 좋게 평가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열심’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열심’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열심’이 없는 것보다는 ‘잘못된 열심’이라도 있는 사람이 낫습니다. 달리는 차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멈춰있는 차를 움직이게 하는 것보다는 쉽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뭐라도 해보려고 하는 사람이, 종종 ‘열심’이 지나쳐 실수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을 고쳐서 쓰시거든요. 우리 하나님께서도 열심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영적 권위가 이삭에게서 야곱으로 이어집니다. 이 야곱을 나중에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시죠. (창 35:10)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이름이 야곱이었지만,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셨다. (창 35:11)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의 자손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 (창
35: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너에게 주고, 그 땅을 내가 너의 자손에게도 주겠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이삭을 거쳐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 즉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후에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그의 아들 12명을 통해 부족과 지파가 만들어지기에 그들을 일컬어 ‘야곱의 가족’을 의미하는 ‘이스라엘 족속’으로, 후에는 ‘이스라엘 나라’로 부르게 된 것이죠. 아브라함부터 이어져 온 약속이 야곱 때에 펼쳐진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권한과 별개로 그 경쟁자였던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늘 베푸십니다. 심지어 가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보호하셨고, 이삭과 경쟁했던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창 17: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창 17: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에서의
별명이 ‘에돔’이었는데, 에서의 자손도 나라를 이룹니다. 그들이 에돔 족속이 된 것이죠. (창 36:6) 에서는 아내들과 아들들과 딸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집짐승과 또 다른 모든 짐승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산을 이끌고, 아우 야곱과는 좀 떨어진 다른 곳으로 갔다. (창 36:7) 두 사람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함께 살 수 없었다. 그들은 특히 집짐승이 많아서, 거기에서 그대로 살 수 없었다. (창 36:8) 그래서 에서 곧 에돔은 세일 산에 자리를
잡았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전하는 ‘스피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대상은 꼭 ‘이스라엘 민족’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명확하게 드러나는 일입니다. (창 12: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해주셔야 할 것이 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해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임으로 대를 이을 수 없던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풍성히 주셔서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 약속했고, 그에게 복을 주시며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며 그와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베풀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대신하여 심판하신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기로 약속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해드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믿고 정말 행하는 것입니다. 가라는 곳으로 약속을 믿고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이죠. 이것은 하나님이 정말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되심이죠. 아브라함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정말 하나님이 주되신 것을 잊지 않고, 그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지킬 때, 하나님의 이 약속은 그의 삶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런 상호 간의 약속에 충실할 때, 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전이 실행됩니다. 그것은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이 누리는
그 복을 함께 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복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해야 할 너무나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바댜서의 주제와 관련이 깊은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야곱과 에서 중에서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면 에서는 버림을 받았는가? 아니요. 장자의 명분을 못 받으면 다 망한 것인가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갔으나, 메시아는 유다 지파에서 나왔죠. 요셉의 후손인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핵심 세력이 되고, 남유다를 다스리는 다윗의 집안은 유다 자손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일하시지만,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바라보시는 것은 온 세상입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에돔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으세요.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 자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만 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부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와 나훔 선지자를 통해서 앗수르에게도 말씀하시고, 이사야서를 비롯한 예언서에는 이방 나라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바댜서는 ‘에돔을 향한 예언’이라는 측면에서 뚜렷한 특징을 가진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예언서를 기록한 오바댜는 누구일까요? (옵 1:1a) 이것은 오바댜가 받은 계시이다. 주 하나님이 에돔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사실상 본문에는 ‘오바댜’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이므로, 오바댜의 부모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집안이었을 것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하’자 돌림이나 ‘예’자 돌림의 아이들이 참 많죠. 특히 저처럼 신학을 한 사람 주변에는 가장 많은 돌림자입니다. 그처럼 ‘오바댜’는 당대에 너무 흔한 이름이어서, 구약에는 오바댜가 최소한 11명, 많게는 13명이 나옵니다. 간혹 열왕기상에 나오는 오바댜가 오바댜서의 저자가 아닐까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시대의 문제를 고려해보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오바댜서의 배경은 적어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당하는 사건 이후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오바댜를 통해 에돔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제 한번 읽어봅시다. 오바댜서는 한 장이고 21절로 짧기 때문에 제가 전체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용을 잘 파악할 수 있도록, <메시지 성경>을 통해서 이 말씀을 읽어볼테니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시다 1 오바댜가
전하는 메시지, 주 하나님께서 에돔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소식을 하나님께 직접 들었다. 사악한 민족들에게 보냄받은 한 특사를 통해 들었다. “일어나 전투태세를 갖춰라. 에돔과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여라!” 2-4 “에돔아, 귀 기울여 들어라. 내가 너를 보잘것없는 자로 만들려 한다. 사악한 민족들 중에 가장 멸시받는 보잘것없는 민족으로 만들려 한다. 너는 네가 대단한 자인 것처럼 굴었다. 산의 우두머리인 양 높은 바위 위에 앉아서, 마음속으로 ‘나를
건들 자 누구랴. 내게 손댈 자 누구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을 바꾸어라. 네가 독수리처럼 높디높은 절벽 위에 보금자리를 잡더라도, 아니, 별들 사이에 둥지를 틀더라도, 내가 너를 땅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이다. 5-9 “도둑이 들면 집이 몽땅 털리지 않느냐? 밤길에 강도를 만나면 가진 것을 다 털리지 않느냐? 에서는 그렇게 하나씩 빼앗겨, 지갑과 호주머니를 다 털릴 것이다. 너의 옛 파트너들이 너를 궁지로 몰고, 너의 옛 친구들이
너를 대놓고 속여 먹을 것이다. 너의 옛 술친구들이 네 등에 칼을 꽂을 것이다. 너의 세상이 무너지리라. 주먹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놀라지 마라.” 이는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이다! “내가 에돔에서 현인들을 다 쓸어버리고, 에서의 산에서 유명한 현자들을 모조리 없애 버릴 날이 올 것이다. 데만아, 너의 위대한 영웅들이 너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 에서의 산에 남아 있는 자 아무도 없으리라. 10-14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잔학한 일들이
낱낱이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 일로 너는 모두에게 멸시를 받을 것이다. 역사에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날, 너는 팔짱을 낀 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낯선 자들이 네 형제의 군대를 붙잡아 끌고 가는데도, 사악한 외적들이 예루살렘을 공습하여 약탈하는데도, 그저 수수방관했다. 너도 그들 못지않게 악질이다. 자기 형제가 얻어맞고 있는데 고소해하다니, 그래서는 안되었다. 유다의 아들들이 진창에 처박히는 것을 보고 깔깔 웃다니, 그래서는 안되었다. 고생하고 있는 그들에게
큰소리를 해대다니, 그래서는 안되었다. 삶이 파탄 난 그들을 되레 이용하다니,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들의 고난,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웃고 떠들다니, 다른 민족들은 몰라도 너만큼은 그래서는 안되었다. 얻어맞아 바닥에 쓰러진 그들의 옷을 벗겨 가다니, 그래서는 안되었다. 길 끝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피난민의 길을 막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만 건진 무력한 생존자들에게 등을 돌리다니, 그래서는 안되었다.” 이스라엘의 승리 15-18 “모든 사악한
민족들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네가 행한 그대로 네게도 이루어질 것이다. 네가 행한 일이 부메랑이 되어 네 머리를 칠 것이다. 너희가 내 거룩한 산에서 파티를 벌인 것처럼, 모든 사악한 민족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마시게 될 것이다.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그렇게 마시다 꼬꾸라질 것이다. 그러나 시온 산은 다르다. 그곳에는 쉼이 있다! 그곳은 안전하고 거룩한 장소! 강탈자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야곱 가문이 제 것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날 야곱
가문은 불이 되고, 요셉 가문은 맹렬한 화염이 될 것이며, 에서 가문은 밀짚이 될 것이다. 에서는 화염에 휩싸여 연기로 사라질 것이다. 잿더미만 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19-21 남방에서 온 자들이 에서의 산을 차지할 것이다. 산기슭에서 올라온 자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괴멸시킬 것이다. 그들이 에브라임과 사마리아의 농장을 차지하고, 베냐민이 길르앗을 차지할 것이다. 그 전에, 이스라엘 포로들이 돌아오고, 사르밧 북쪽에 이르기까지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다. 저 먼 북서쪽 스바랏에서 예루살렘 포로들이 돌아와 남쪽 도성들을 차지할 것이다. 시온 산의 구원받은 남은 자들이 에서의 산에 들어가, 정의롭고 공정하게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높이는 통치를 펼칠 것이다. 오바댜서는 명확하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 책인데, 우선 전반부에 해당하는 1-14절은 에돔의 죄에 대한 고발입니다. 에돔의 첫 번째 죄는 ‘교만’입니다. 에돔은 누구도 자신을 끌어내릴 수 없다며 자만했습니다. 에돔은 사해 남쪽과
동쪽의 해발 고도 1,525미터까지 솟아오른 바위투성이의 높은 고원지대에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자부했습니다. 마치 인류가 최첨단의 기술력을 발휘하여 ‘타이타닉’이라는 당대 가장 큰 배를 만든 후, ‘신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자랑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타이타닉호는 빙하조차도 피하지 못하고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내게 있는 소유나, 나를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그 대상이 나 자신일 때도 있습니다. 타이타닉은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자랑이었고, 에돔의 자연환경은 그들의 자부심의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우리를 지켜주고,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가 지혜로운가?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질은 철저하게 도구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돈에 대해서 경계하는 구절들이 많은데, 많은 경우 물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로부터 받으셔야 할 찬양과 충성을 물질이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신데, 돈에도 ‘유사 전능성’이 있어서 돈이 전능해보이는 착각을 줍니다. 그것이 나를 지켜줄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이 내 존재의 가치를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도, 그 세계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전능함에 대한 찬양과 우리를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을 다른 것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에돔의 교만을 향해서 하나님은 “네가 별 사이에 깃들지라도 거기서
끌어내리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만은 늘 패망의 선봉입니다.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또한, 교만은 ‘판단과 정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고 쉽게 판단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옵 1:12b) 유다 자손이 몰락하던 그 날,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 누군가를 깨우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몽둥이를 드시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심판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우리는 무심코 판단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에돔은 유다의 몰락을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다가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유다를 보며 기뻐하고 웃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 어떤 상황과
사건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점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늘 필요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 칼날을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것은 또 하나의 교만입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자로 15년째 살아가며 느끼는 것은,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은 성장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늘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키려 하는 사람은 지식이 늘어날수록 정죄하는 기준만 높아집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점검하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더 사랑으로 품어주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긍휼함’이고, 그것은 ‘위로’와 ‘도움’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에돔의 두 번째 죄는 ‘불의’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정의에서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일에는 적극적인 죄와 소극적인 죄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옵 1:11) 네가 멀리 서서 구경만 하던 그 날, 이방인이 야곱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적들이 그의 문들로 들어와서
제비를 뽑아 예루살렘을 나누어 가질 때에, 너도 그들과 한 패였다. (옵 1:12) 네 형제의 날, 그가 재앙을 받던 날에, 너는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유다 자손이 몰락하던 그 날,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 (옵 1:13)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는 내 백성의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만은 그 재앙을 보며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는 그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어야 했다. (옵 1:14) 도망가는 이들을 죽이려고, 갈라지는 길목을 지키고 있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살아 남은 사람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 주지 않았어야 했다. 우선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에돔이 이스라엘의 불행을 이용하여 이익을 도모한 악행을 고발합니다. 야곱과 에서는 형제였고, 이스라엘과 에돔은 형제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형제의 곤경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이스라엘 도시를 약탈하고, 피난한 난민들을 학대했습니다. 유다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서 그들은 유대 땅을 차지하고 약탈하는 데 동참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에돔 같다’는 표현은 상대의 곤경을 이용해 약자를 짓밟는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또한 불의에는 소극적인 측면의 죄도 포함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데, 그 죄는 다름 아닌 ‘방관’입니다. 우리는 ‘방관’에 대해서는 불의라는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현대 사회에서 방관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타인을 직접 괴롭히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에서 외면하는 것도 하나님의 정의에서 어긋난 죄입니다. 제가 목사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종종 저에게 무턱대고 연락이 와서는 먹을 것이 없으니 식사비라도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알 수 없고, 신빙성도 없습니다. 그래도 속는 셈 치고 식사비 정도는 보냅니다. 혹시 정말 속인
것이라도, 목사가 누구를 속이는 것보다는 속임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진짜 도움을 청한 것이라면, 방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책임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 수업에서 한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는데, 누가 교통사고가 났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배를 가야 하는가, 그 사고를 도와야 하는가? 교수님의 대답은 ‘신고하고 교회에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적인 경우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모든 일을 나서서 처리하고 책임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재능, 기회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타인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내게 주신 관계, 내게 주신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은사가 사용되길 원하십니다.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내가 누군가의 어려움 앞에서 해줄 것이 없거든 손이라도 잡아주시고, 함께 울어라도 주시고, 기도라도 해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게 이 방관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시가 하나 있었는데요. 독일의
목사이며 반(反)나치 운동가였던 ‘마르틴 니묄러(1892~1984)’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가톨릭 신도들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 신도가 아니었기에 어느 날,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때 나를
위해 항의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니묄러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었음을’ 이제 오바댜의 결론으로 가봅시다. 오바댜서가 하나님의 정의를 이야기할 때 핵심은 ‘여호와의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옵 1:15) "내가 모든 민족을 심판할 주의 날이 다가온다. 네가 한 대로 당할 것이다. 네가 준 것을 네가 도로 받을 것이다. 약자에게 있어서 ‘정의’는 악한 자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길 원하지만, 정의가 무너진
사랑은 약자에게는 절망입니다. 사랑은 정의와 함께 일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정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는 드디어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오시는 날입니다. 잘했다고 말할 것이고 수고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너의 삶을 다 보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드디어 그 품에 안겨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날입니다. 반면 그날은 주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기 뜻대로 살았던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삶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날이 될 것입니다. 오바댜는 에돔의 잘못을 다루실 여호와의 날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불의한 것은 정으로 심판하시고, 정의로운 자의 피해는 복구하실 것입니다. (옵 1:17) 그러나 더러는 시온 산으로 피하고 시온 산은 거룩한 곳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야곱의 집은 다시 유산을 차지할 것이다. (옵 1:20) 잡혀 갔던 이스라엘 포로는
돌아와서 가나안 족속의 땅을 사르밧까지 차지하고, 예루살렘에서 스바랏으로 잡혀 갔던 사람들은 남쪽 유다의 성읍들을 차지할 것이다. (옵 1:21)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영토를 다스릴 것이다. 나라가 주의 것이 될 것이다. 저에게 있어서 주님을 마주할 날은 바로 이러한 날입니다. 신실하신 주님을 나 믿기에, 그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며 인내하며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끝이 아니기에. 우리의 수고와 애씀을 주님은 아시기에.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 하나를 읽으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살전 1:3)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믿음에는 행위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있습니다. 소망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행위 없는 믿음을 죽었다고 말하고, 수고 없는 사랑을 거짓이라고 말하며, 인내 없는 소망은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고자 애쓰는 나의 삶을 보고 계심을,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보시면서 ‘그래서는 안되었다’가 아니라, ‘내가 너의 수고를 안다’, ‘내가 너의 애씀을 안다’, ‘내가 너의 인내를 기억한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주님의 자녀답게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